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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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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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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6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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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6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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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하는 날 (1)

DUMMY

145화


테일강 서쪽 지역에 위치한 웨스털랜드주의 행정 중심지는 ‘페어먼트’다.

이곳에는 당연하게도,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거대한 요새가 지어져 있어 그 위용을 한껏 뽐내고 있는 중이다.


이 요새의 직전 소유주는 인간 백정으로 악명 높았던 로저 드레이시라는 작자인데, 한때는 왕국 제일의 세도가로 위세를 떨쳤던 인물이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라고, 결국 반년 전쯤 대역 죄인으로 지목돼 버렸고, 현재는 본인과 집안의 부동산을 모조리 다 압류당해 버린 상태이다.

가끔씩 그에 대한 소문이 들려오곤 하는데, 마차 한 대에 의지한 채, 집도 절도 없는 유랑 생활을 근근이 꾸려 나가는 중이라고 한다.


페어먼트 성의 현 관리인이자 웨스털랜드주의 장관인 워스터 백작 해멀린 브리워가, 흉벽에 등을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고개를 들어 성문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장녀인 이저벨이 코피를 줄줄 흘리며, 호위를 위해 붙여 둔, 여전사들의 부축을 받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백작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로저 드레이시가 이곳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백작 작위를 받았을 때,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았다.

감히 왕국 제일의 폭력배를 상대로 면전에서 주둥아리를 놀린 용자는 없었지만, 뒤에서는 온갖 불만들이 쏟아졌었던 것이다.


‘고작 칠십여 개의 새로 개간한 장원이 전부인, 조막만 한, 땅을 주로 승격시키는 게 사리에 맞는 일이냐?’라는 비판에서부터 ‘어차피 백작 작위를 물려받을 놈인데, 굳이 작위를 하나 더 만들어 줘서 놈의 위세를 고조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냐? 앨커스터주에 있는 왕실 직영지의 절반을 떼어 준 걸로도 부족하냐?’라는 시기, 질투가 잔뜩 섞인 우려까지 갖가지 말들이 난무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쌓여 왔던 질시의 에너지가 반년 전 콘체스터 성에서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콘체스터 성을 함락시키면서 점령군들은 ‘생각보다 별것 아니다.’, ‘허명만 가득한 집구석이다.’, ‘로저가 없으니 힘도 못 쓴다.’라는 혹평을 서슴지 않았다.


그 후 험프리와 그의 졸개들은, 어중간한 머릿수로 여기저기서 튀어 나오는, 잔당들을 각개 격파하면서 웨스털랜드주까지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들의 판단이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그곳에는, 장원을 족히 삼사백 개 정도는 신설하고도 남을, 거대한 개간지가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그럴듯한 시설물은 아직 지어지지 않은 채로 길만 닦여 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숲의 경계면과 맞닿은 곳에 자리 잡은, 무려 열두 채의 거대한 요새가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성의 없는 로저 놈이, 국왕과 중신들을 앞에 두고도, 상식을 초월한 축소 보고를 대충대충 올렸던 것이었다.


이 거대한 공간을 소머리를 상대로 한 가문의 병력만으로 감당해 내고 있었으니, 후방에서의 난데없는 기습에 제대로 대응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병력의 칠 할 이상이 팔십 킬로 밖에 분산 배치된 상황에서, 마법사가 이끄는, 이천이 넘는 대군을 상대한다는 게 애초부터 노답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열두 채의 요새에 심복들을 배치한 험프리가 웨스털랜드주의 장관으로 자신의 장남 로버트를 임명했다.

드레이시 가문의 땅 대부분을 왕령지로 편입시키려는 험프리의 야심이 실현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시월 중순쯤부터인가 숲 인근에서 괴상한 보고가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보고들은 시답잖은 헛소리 취급을 받으며, 진지하게 다뤄지질 못했다.

하필 그 당시는 왕실과 친왕파 세력의 대부분이 로저 드레이시 추적에 총력을 기울이던 시기였던 것이다.


친위대와 거버스가 로저의 손에 개아작이 날 때쯤, 웨스털랜드의 요새들에도 목봉을 손에 든 소머리 떼가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그동안의 보고엔 일체의 거짓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주정뱅이 허풍꾼 취급을 받아 오던 정찰병들은 억울함을 풀어 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휩쓸려 뒈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운은 최대 삼 일을 예상했었다.

열두 요새의 전사들 중 몇몇은 그 세 배가 넘는 무려 열흘이라는 시간을 견뎌 냈다.

개중에 가장 짧은 시간을 버텨 낸 자들도 다들 일주일은 넘겼다.

그러고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페어먼트 성으로 작전상 후퇴를 감행하였다.


하지운의 예상보다는 훨씬 유능하고 용맹한 전사들이었다.

물론 예상보다 그렇다는 것이지, 그들 모두 제 상전 놈을 빼다 박은 병신 새끼들이라는, 하지운의 인물평에는 딱히 틀린 점은 없었다.

사실 그들이 하지운의 예상보다 더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드레이시 가문의 뛰어난 축성술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페어먼트 성에 있는 오백여 명의 전사들도 두 달이 다 되도록 아직도 질긴 목숨을 이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사자가 없는 건 아니다.

한 달에 대략 백오십여 명씩 죽어 나갔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괴물 피를 먹지 않은 순정 상태의 인간이거나, 먹어 봤자 개돼지 피 먹은 놈들이어서 생존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질 않은 것뿐이다.


도망쳐 온 용사들을 뒤쫓아서, 창술에 조예가 깊은 소머리들이 금세 페어먼트 성에 들이닥쳤다.

그들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이 성의 성주인 태자가 지휘권을 부관에게 떠넘겨 버린 후 빤스런을 해 버렸다.

태자 로버트도 아비 못지않게 결단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악마의 화신 로저 드레이시가 콘체스터주를 향해 북상하고 있는 마당이다.

태자인 자신이 미련하게 괴물들을 직접 상대하고 있을 경우, 자칫 잘못하면 앞뒤로 고립이 되어 포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얼마 안 있으면 콘체스터주도 로저 놈에게 떨어질 판국이다.

그렇게 되면 앞에서는 창술에 능란한 괴물들이 지랄을 해 대고, 뒤에서는 복수에 눈이 뒤집힌 살인귀가 덮쳐 오는 끔찍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영민한 태자는, 인질이 되어 아비를 곤경에 빠트리는, 불효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태자의 부관이 피눈물을 흘리며 성주 대행 노릇을 한 지 일주일 만에, 워스터 백작이 구원군을 이끌고 후문에 당도했다.

백작이 하루만 늦게 도착했어도, 가련한 부관은 대들보에 쇠사슬을 걸었을 것이다.


성벽과 연결된 게이트하우스의 쪽문에서 이저벨 양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자신도 녹초가 되도록 지쳤음에도, 성벽 위에 널브러져 있는 아비를 위로하고픈 딸의 갸륵한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사랑스러운 큰딸의 효성스러운 마음씨에 감복한 백작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자애로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딸에게 다가가던 순간, 백작의 고막에 송곳처럼 쑤셔 박혀 오는 날카로운 소음이 포착되었다.

번개 같은 동작으로 검집과 검 손잡이를 움켜 쥔 채, 고개를 돌린 백작의 눈에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이미 지나가 버린 듯하였다.


불길한 예감에 딸을 피신시키려 정면을 바라본 워스터 백작은 순간적으로 넋이 나가 버렸다.

딸의 몸이 풍차처럼 허공을 한 바퀴 돌고 있는 중이었다.

부침개 뒤집듯 회전한 이저벨 양의 육신이 맹렬한 속도로 성벽 위에 내리꽂혔다.


입술을 덜덜 떨면서 납작하게 찌부러진 딸의 시신을 내려다본 백작은 이내 시신에 머리통이 달려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관찰력이 뛰어난 중년의 사내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라져 버린 딸의 머리통을 찾아 헤맸다.


굳이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었다.

그의 바로 십 보 앞 우측 흉벽에 기괴한 모양의 창 한 자루가 박혀 있던 것이다.

엄청나게 두꺼운 흉벽을 반쯤 부셔 놓은 창에는, 생전에 딸의 머리통을 구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뻘건 것이 들러붙은 채 덜렁거리고 있었다.

두꺼운 뼛조각에 살점과 머리카락으로 보이는 것들이 잔뜩 엉켜 있는 게 확실히 사람의 머리 부위가 맞는 듯했다.


전신을 덜덜 떨고 있는 워스터 백작의 어깨를 누군가가 포근하게 감싸 주었다.

어깨를 빌려준 그 친절한 놈이 백작의 귓구녕에 낮게 속삭였다.


“우리 집에서 뭐 하고 있니? 발정 난 해멀린 이 씨발놈아.”


지체 높은 워스터의 백작 해멀린 브리워가 친절한 놈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몸부림을 쳐 댔다.


“야, 본체가 장난 그만 치래. 병신들 결혼식 치러 주고 얼른 떠나야 한다고, 당장 앞마당으로 다 끌고 오래.”

“어차피 ‘최면’을 처먹었으니, 본체 새끼 진짜 용무는 다 끝난 거 아니야? 나머지는 그냥 우리한테 맡기고 바로 가라고 해.”

“야, 이 새끼야! 그래도 본체가 주례는 서 줘야 할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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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하는 날 (1) 24.01.26 29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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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겨울 여행 (11) 24.01.22 28 1 10쪽
143 겨울 여행 (10) 24.01.20 25 1 9쪽
142 겨울 여행 (9) 24.01.19 25 1 9쪽
141 겨울 여행 (8) 24.01.17 28 1 10쪽
140 겨울 여행 (7) 24.01.15 26 1 10쪽
139 겨울 여행 (6) 24.01.12 31 1 10쪽
138 겨울 여행 (5) 24.01.11 29 1 9쪽
137 겨울 여행 (4) 24.01.09 31 1 9쪽
136 겨울 여행 (3) 24.01.07 31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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