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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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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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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6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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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5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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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여행 (7)

DUMMY

139화


낮에는 휴식을 취하고 밤에는 격렬한 드잡이질을 하는 같잖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둘 다 마력이 미흡하기 짝이 없어, 한 삼십 분 정도만 격렬하게 능력을 사용해도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그러면 둘 다 미친 듯이 도망쳐서, 각자 숨을 곳을 찾는 웃기는 짓거리를 반복하곤 하였다.


흡혈 능력자는 백 레벨이 되기 전까지는, 햇살 아래서 맨살을 드러낼 수가 없다.

좀비가 불에 닿으면 정화되듯이, 같은 잡귀과로 분류되는, 흡혈귀도 햇빛에 닿으면 피부가 타들어 가면서 정화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벨 업 중인 흡혈 능력자는 낮 시간 동안에는 웬만하면 그늘 속에 처박혀 있어야 한다.


추격자들이 바보도 아니고, 나흘을 쫓아다니면서, 도주 중인 목표물이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코빼기도 내밀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로먼트 가문의 전사들은 닷새째 되는 날, 반나절을 눈에 불을 켜고, 숲을 이 잡듯 뒤져 댔다.

그리고 그들로서는 불행하게도 수색에 실패한 채로 밤을 맞이해 버렸다.

파김치가 되도록 체력만 다 날려 먹고, 도망자의 독기만 바짝 끌어올려 놓은 것이다.


잡히기 직전까지 몰려서 공포에 몸부림치고 있던 릴리 양은, 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엄폐물 밖으로 뛰쳐나와 미친년처럼 날뛰었다.

남자든 여자든 전장에서 포로가 되었을 때 무슨 일을 겪게 되는지, 그녀만큼 잘 아는 이도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기억을 제공한 매리언과 매리언의 전우들이 모조리 다 사망했기 때문이다.


릴리 양은 확신했다.

매리언과 그녀의 전우들만큼 험한 꼴을 겪고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는, 브리갠트 전체를 뒤져도, 몇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릴리 양이 이 생각을 했을 때는, 학대의 달인 하지운이 한창 습지에서 구르고 있었으니, 그녀의 생각에 딱히 틀린 부분이 있진 않았다.


나흘 동안, 야습을 통해서, 추격자들에게 죽지 않을 만큼의 상처만 입히고 달아나는 일을 반복했던 릴리 양이다.

루커스 호소인의 허접한 마법 실력으로, 피 안개 상태의, 릴리 양을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짓이다.


릴리 양은 로먼트 가문의 젊은이들이 제발 겁을 집어먹고 돌아가 주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들 대부분이 매리언과 안면이 있는 이들이고, 그녀의 기억을 이어받은, 자신이 그들을 죽여야 한다는 게 끔찍할 정도로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잡아 죽이기 위해, 죽자 사자 숲을 들쑤시는 전사들을 보고 나서도 그런 감상적인 생각이 지속될 수는 없었다.

매리언의 고문 트라우마를 물려받은 마당에, 하필이면 여우머리가 출몰하는 북부의 숲에서, 열 명이 넘는 전사들에게 쫓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스트레스가 폭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릴리 자신이 골라 온 권능도, 또래의 사내들 앞에서 사용하기엔, 지나치게 고약한 것이었다.

이것도 그녀의 짜증을 증폭시키는 데 막대한 영향을 끼쳐 버렸다.


능력을 딱 한 번 사용해 보고, 저승에서의 자신의 경솔한 선택에, 통한의 피눈물을 흘린 릴리 양이었다.

육체를 피 안개로 변형시키는데 의복이 멀쩡히 딸려 올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흡혈’이라는 단어만 보고, 심장이 벌렁거려, 세부 항목도 안 읽어 보고 능력을 고른 과거의 어느 미친 또라이 년을 저주했다.

그때의 자신을 찾아가서, 머리끄덩이를 잡고 바닥에 내팽개친 후, 뒈질 때까지 밟아 주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그런 배부른 투정을 부릴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육신이 피 안개가 된 상태에선 타인을 공격할 방법이 전혀 없다.

이건 철저히 회피만을 위한 부가 옵션일 뿐이다.

공격을 하려면 일단 본모습으로 돌아와서, 이빨이든 손톱이든 뭐라도 흉기로 써야 했다.


하지만 어차피 무기로 쓸 수 있는 건 이빨밖에 없었다.

이빨로 상대의 목을 물어야만 ‘흡혈’ 능력이 발동되면서, 상대의 기력과 능력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손톱은 그저, 사용이 용이하고 날이 더럽게 짧은, 조잡한 흉기의 다발에 지나지 않았다.


어두컴컴해진 울창한 숲속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매리언이 겪었던 끔찍한 일을, 자신까지 직접, 겪어 보고 싶진 않았던 릴리 양은 그날 여자이기를 포기해 버렸다.

어차피 다 죽이기로 마음먹었기에 거침이 없었던 것이다.


더더욱 다행스러운 건 그녀에게 피가 빨린 시체는 도저히 재활용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본 채로 죽었던, 사내들이 누군가에게 기억을 전수할 걱정 따윈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과 초보 ‘흙 마법사’까지 제거한 릴리 양에게 찾아온 건 안도감이 아닌, 근방에 거주 중인 호기심 많은 십여 마리의 여우들이었다.

그들은 다짜고짜 달려들기보다는, 신기한 구석이 많은, 릴리 양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유심히 관찰하기만 하였다.

그게 매리언 호소녀를 자지러지게 만드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남에게서 강제로 넘겨받은 트라우마가 폭발해 버린 릴리 양이, 엄폐를 위해 파 놓은 구덩이 속으로 뛰어 들어가, 자신의 조막만 한 머리통의 두 배가 넘는 크기의 혈변 무더기를 쌓아 올렸다.

스트레스가 임계치에 다다른 것이다.


그녀의, 실핏줄이 다 터진, 눈에 더 이상 뵈는 게 없었다.

무조건 이 저주받을 능력을 백 레벨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낮 시간 동안에 여우들에게 붙들렸다가는, 혀를 깨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릴리 양의 눈에 뵈는 게 없어졌다고, 뿌리 깊은 공포를 심어 주신, 여우님들에게 개길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붉은 터럭을 흩날리시던 족장님을 떠올릴 때면, 그 즉시 아랫배에 공습경보가 발령되었기 때문이다.


만만한 게 개돼지였다.

릴리 양이 쭉 죽치고 있는 이곳은, 가끔 보이는, 사람조차도 무섭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주가 서쪽엔 폰틸랜드, 남쪽에는 먼틸리 가문이 장악하고 있는 론체스터 그리고 거버스가 나고 자란 동쪽의 몰번이다.

괜히 폰틸랜드에서 왕 노릇 하는 매리언의 백부가 이 근방으로 직접 행차를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릴리 양도 그걸 알아서 이곳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백 레벨을 찍기까지 이백팔십팔 개체만 더 물어뜯으면 되는 것이었다.

‘흡혈’ 능력 자체가 워낙 제약이 살벌하다 보니, 반대급부로 일 레벨 올리는데 필요한 인원수는 간소하기 짝이 없었다.

고작 셋만 죽이면 되었던 것이다.

미친년 세실리와 십일 인의 추격자를, 피를 빨면서, 죽인 덕에 흡혈 능력의 레벨이 벌써 ‘사’가 되었다.


구십칠 레벨이 될 때까지 이백칠십구 개체를 개돼지로만 채웠다.

그녀의 권능은 수많은 다른 권능의 집합체 같은 능력이다.

‘능력 강탈’, ‘기력 흡수’, ‘공중 부양’, ‘손톱 강화’ 등등 여러 가지 잡다한 능력이 뒤섞여 있다.

이런 다양한 장점을 가진 능력을 하지운은, 세부 내용을 한 번만 읽어 보고, 바로 넘겨 버렸다.


흡혈과 동시에 ‘기력’을 흡수할 수 있는데, 백 레벨이 되어도 고작 흡수율이 오 퍼센트다.

그것도 적은 것이 아니다.

오십 레벨까지는 심지어 일 퍼센트밖에 안 된다.

기력을 흡수하면서 능력도 ‘강탈’할 수 있다.

그것도 무려 서른 개를 말이다.

그런데 골라서 흡수할 수가 없다.

흡수하는 대로 닥치고 써야 한다.

하지운이 보자마자 혀를 차면서 고개를 돌려 버렸던 가장 큰 이유다.


남은 세 레벨을, 주변에서 개빡치게 만들던, 아홉 마리의 여우머리로 채운 릴리 양이 진정한 흡혈 귀공녀가 되었다.

잡귀의 정점에 선 그녀는 네 개의 뚜렷한 능력과 열한 개의 희미한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 찬란한 열다섯 개의 능력은 ‘흙 마법’, ‘감각 증폭’, ‘번식력’, ‘후각 강화’, 여섯 개의 ‘방중술’ 관련 능력, 세 개의 ‘언변’ 관련 능력 그리고 ‘도끼술’과 ‘검술’이었다.

‘흙 마법’과 ‘감각 증폭’ 그리고 ‘검술’ 이외의 모든 능력을 빛의 속도로 똥통에 처박고 싶은 릴리 양이었다.


특히 ‘번식력’과 여섯 가지의 ‘방중술’ 관련 능력들은, 지지난달에 생일이 지나서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이 된, 릴리 양을 미친 세실리 년을 뛰어넘는 개미친년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의 생일이었던 11월 11일에 운명처럼 만났던 현 남친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브리갠트 역사에 길이 남을 광년이 될 뻔했다.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이 개 같은 능력들만 떠올리면 울화가 치미는 릴리 양이다.

이 뭣 같은 일곱 능력보다는 덜 짜증 나는 ‘후각 강화’ 능력이 갑자기 빛을 발했다.

그녀의 ‘개코’에 뭔가 더럽게 거슬리는 냄새가 끊임없이 스며들어 오는 것이다.


연인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온 릴리 양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망토를 주워 걸치고, 오두막의 문을 살며시 열었다.

잠시 멍하니 문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거칠게 문을 닫아걸고는,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남친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자기야, 큰일 났어! 당장 일어나! 지금 당장 옷 입고 칼 잡아!”


그녀의 뒤늦은 발버둥질이었다.

두 남녀의 사랑이 넘치는 오두막 주변은 이미 수십 마리의, 썩어 문드러진, 다람쥐들에게 둘러싸이고 만 상태였다.


작가의말


 어제 자기 전에 올리고 싶었는데...

 엿장수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네요.

 어쨌든 이틀에 한 편, 즉 두 주에 일곱 편씩 올리는 걸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내일 자기 전까지

 다음 편을 올려 보도록 지금부터 달리겠습니다.

 이번 주는 오늘 빼고 화 목 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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