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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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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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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6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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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1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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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여행 (5)

DUMMY

137화


야심한 시각에 한 중년 사내가 자신의 왼손 손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정초가 얼마 안 남은 시기인지라, 자신의 신년 운세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닳겠다. 손모가지 좀 그만 보고, 이젠 제발 대화를 좀 하자. 자러 안 갈 거야? 요즘 웬 용맹한 새끼들이 나에 대해서 괴이한 소문을 퍼뜨리고 있어. 그런 판국에 당신이랑 단둘이서 밤이라도 지새웠다가는, 내 명성이 시궁창에 처박힐 수가 있다고.”


북부 변경에서 먼틸리 가문과 함께, 삼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쌍벽을 이뤄 온 명문거족의 수장인 유스터스 로먼트 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소문?”

“못 들었어?”

“들었으면, 내가 지금 네놈에게 뭐 하러 물어 봐?”

“내가 앨커스터에서 마흔일곱 개의 집구석을 방문했거든. 꽤 많이 죽였지... 이천? 이천오백? 그쯤 되려나? 뭐 어쨌든, 그 난리를 치면서도, 단 한 명의 숙녀도 강제로 범하지 않았어. 명예로운 전사의 후손으로서 본분을 다한 것이지. 그런데!”

“그런데?”

“웬 간이 처부은 것들이 감히! 나더러 고자라느니! 남색가라느니! 하아... 이 찢어 죽일 것들이...”

“네놈에게 잘 보이려고 눈이 벌게져 있는 정보 길드의 쥐새끼들이 있지 않느냐?”

“아, 당연히 그놈들에게 지시했지, 그 용감무쌍한 것들을 당장 색출하라고. 그런데 이것들이! 그것만은 죽어도 못 하겠다고 버티네.”

“왜?”

“자칫 잘못하면 인구의 이삼 퍼센트 정도가 단숨에 소멸될 거 같다던데.”

“푸흡!”


내내 우거지상을 하고 있던 냉혹한 중년 신사도, 그 순간만은 도저히 견디질 못하고, 빵 터져 버렸다.


“귀족 시늉이라도 하는 놈은 전부 해당된다는 소리 아닌가?”

“맞아, 이번 기회에... 이 빌어먹을 왕국의 지배층을 싹 다 정리해 버릴까...”

“......”

“농담이야! 농담!”

“......”

“그런데 폰틸랜드에는 치료 마법을 익힌 놈이 아무도 없냐? 촌놈티 내는 것도 아니고, 뭔 손바닥을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어?”

“왜 없겠느냐? 여우 피를 주로 먹는 우리인데. 당장 재작년에 작고한 내 손위 누이부터가 치료 마법사였다.”

“그런데 왜 그래? 마법 쓰는 거 처음 보는 애새끼처럼.”


테이블 위에 양쪽 발을 다 올려놓은 채로 시건방지게 까딱거리고 있는 날건달 놈을 응시하며, 북부의 대제후가 기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몸에 난 상처를 마법으로 치료했던 것만 족히 스무 번쯤 된다. 그럼에도 그런 불량한 자세로 손도 대지 않고, 눈 한 번 깜빡거릴 시간에, 관통상을 말 그대로 원상회복시키는 이적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 칭찬 고마워.”

“......”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너무 위험해 보여? 착각하지 마. 난 너희가 힘을 합쳐, 죽도록 노력하면, 제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야. 정말로 인구의 삼 퍼센트 이상을 날려 먹고 싶지 않으면, 허튼 생각 따윈 하지 마라. 내가 방금 실컷 얘기한 거 똥구멍으로 들었어? 네놈의 이런 외골수 기질이 문제라는 거야. 하찮은 대갈통으로 성급하게 판단하고, 금세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고는, 그대로 밀어붙여 버리는 네 행태 말야. 그러니까 네 애새끼들이 줄초상을 당했지. 네가 병신 같은 결정을 할 때마다, 네 주위에 있는 놈들이 계속 죽어 나가는 거야. 그런 고질병을 가진 놈에게 어떤 병신이 왕좌를 내어 주겠냐?”

“으흐윽! 이, 이놈이!”

“넌 죽으면 안 돼, 그것도 꽤 오랫동안. 그래서 방금도 널 안 죽이고, 꾹 참은 거야. 그러니까 제발 병신같이 굴지 마. 내가 슬슬 대안을 찾으려고 하잖아. 네 대역을 찾기 전에, 그냥 네가 머리를 쓸 수 있는 인간 흉내를 내 봐. 그렇게 맹수처럼 굴지 말고.”

“하아... 그래, 나에게 무슨 역할을 시키려는 거냐? 뭣 때문에 날 죽이지 않은 거지?”

“이 바보가... 몰라서 물어? 네가 뒈져 버리면 누가 제일 기뻐하겠냐? 먼틸리 놈에게 왕 자리를 넘겨주는 마당에, 본거지 근처의 경쟁자까지 죽여 준다고? 내가? 내가 너 같은 바보냐? 놈이 북부와 왕성을 둘 다 장악하면, 내가 얼마나 피곤해지겠냐? 이 한 치 앞도 못 보고, 표정도 감출 줄 모르는 돼지머리 같은 인간아.”

“로저 드레이시... 이 정신 나간 살인마야! 그 더러운 주둥아리 조심해서 놀려라! 검이 없다고 싸울 줄 모르는 내가 아니다!”

“알아, 너 싸움 잘하는 거. 여우 피 먹은 놈이 소 피 먹은 놈처럼... 덩치 크고... 힘세고... 머리도 나쁘고...”


염동력을 발동시킨 하지운이 한숨을 쉬며 건너편의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리를 박차고 테이블 위로 뛰어 오르려는 로먼트를 도로 앉혀 놓은 하지운이 진심으로 궁금한 걸 물었다.


“그렇게 매번 도발에 넘어가면서, 어떻게 지금까지 안 죽었어? 거버스가 지랄하는 건 어떻게 참았냐?”

“늙은이들이...”

“아, 늙은 가신들이 고생이 많았겠네. 성질이 지랄 맞은 우두머리를 달래느라고. 나이가 오십이 훌쩍 넘은 인간이 애도 아니고, 철 좀 들어라. 그래 가지고 귀족 놀음 하겠냐? 널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나오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너희 집안이 대를 이어서 북부 변경의 수호자(Lord Warden of the Northern March) 노릇을 좀 해 줘야겠다.”

“그 유명무실해진 관직을 부활시키겠다고? 정말 북부의 병권을 우리 가문에 넘기겠다는 거냐?”

“어, 먼틸리가 왕성으로 기어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네가 북부를 장악하고 놈을 견제해. 정보 길드 통해서 지원이 들어갈 거야. 최대한 빨리해, 개레스 놈이 왕성에 빌붙어 있는 놈들을 완전히 구워삶기 전에. 그리고 서부의 지휘권은, 내 새로운 매제가 될, 브리즌 가문의 꼬마에게 줄 거야. 우리 가문의 후계자로 낙점된 아이니까,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협력하도록 해. 아니, 이건 너한테 할 얘기가 아니네.”

“뭐?”

“제발! 공무는 그냥 늙은 가신들에게 맡기고, 넌 그저 밤일이나 열심히 해. 너희 집안의 대가 끊기면, 내가 진심으로 짜증 날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이건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협박이야. 명심해. 애새끼들 잔뜩 낳고, 전력도 원상태로 복구시켜.”

“흐음... 내가 네놈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냐?”

“그거야 네 마음대로 하고. 어차피 왕좌에 어울릴 만한 놈이 먼틸리 정도밖에 없듯이, 북부에서 먼틸리를 성가시게 할 놈도 너밖에 없어. 틸리얼도 사라질 마당에, 널 제외한 나머지 세 백작... 벨라스터에서 빌빌대고 있는 펀트니는 빼자. 나머지 둘 멀브리와... 누구더라?”

“길즐랜드 백작 월터 루메닐이다.”

“멀브리고 루메닐이고. 난 그 둘이, 개레스 먼틸리를 상대로 핏대를 세울 만큼의, 담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성질이 지랄 맞은 네가 최선이야. 제발 내가 차선책을 찾게 하지 마라. 내가 차선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너는 죽는 거고, 나는 죽도록 피곤해지는 거야. 우리 서로를 위해서 잘하자.”

“후우욱... 하아아.... 호의에 감사드리오, 콘체스터와 웨스털랜드의 백작이여.”

“별말씀을. 이제 그만 당신이 진짜 원하는 걸 털어놔. 도대체 언제 얘기할 거야?”

“부활한 내 질녀를... 잡아 죽여 줬으면 하오.”

“하아... 모든 추론 중에 제일 지저분한 게 정답이었네. 일단 루커스 에글링엄은 뭐 하는 종자야? 당신 휘하에 있던 놈 맞지? 이놈은 뭔데 목록에 떴다가 금세 사라진 거야?”

“사라져? 사, 사라졌다고!”

“어, 죽었다는 얘기야. 조카딸을 죽이려고, 당신이 따라붙였던 놈이네. 맞지?”

“그렇다...”

“조카딸이 부활했다는 건, 한 번 죽었다는 얘기잖아. 누가 죽였어? 당신이야? 당신 딸이야?”

“......”

“그걸 알아야 내가 위치를 잡지. 당신이 죽였으면, 내가 당신 옆에 붙어 있어야 할 거 아냐!”

“내 딸아이가 죽였다... 그리고 부활한 그... 후욱... 그 아이가 내 딸아이에게 앙갚음을 한 거 같다.”

“당신, 명심해. 하나 남은 그 어린애든 새로 낳을 자식이든 교육 똑바로 시켜. 당신 딸이 왜 당신 조카를 죽였는지 알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이래 가지고 당신네 집안이, 우리 가문이 원상 복구될 때까지, 버텨 내겠어?”

“왜? 내 딸이 도대체 왜? 그렇게 아끼던 사촌 동생을 죽였던 거냐? 그리고...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겠다는 것이냐?”

“어설프게 미친것들 머리 돌아가는 것 정도야, 그보다 한층 더 미친, 내 눈엔 다 보이는 법이지. 그런데 넌 진짜... 머리를 쓸 생각을 안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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