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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별의 서재.

그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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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밝은스텔라
작품등록일 :
2015.04.25 23:34
최근연재일 :
2015.05.14 17:49
연재수 :
56 회
조회수 :
21,961
추천수 :
459
글자수 :
318,833

작성
15.05.01 23:01
조회
337
추천
8
글자
12쪽

치유될 시간이 필요해

DUMMY

경찰들은 어떻게 저 상처투성이 민간인을 설득시킬까. 더는 고민할 필요 없어진 덕에 편하게 웃었다. 그리곤 아리에게 대마시에서 준 썩 대단하지 않은 선물 중에 마음에 드는 것 있으면 아무거나 가져가라고 웃으면서 많은 친절과 편의를 보장했다.


체류비의 문제도 자동으로 해결되었다. 그래서 아리는 경찰서 전화로 부모님께 사정상 하루 더 있을 것 같다고 사정을 알렸다. 그런 후 무로이와 서로 웃는 얼굴로 하루를 시작할 참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 나갔는데 돌아서자마자 당장에 미소를 머금는 얼굴이란 건 상식적으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다테마에니 예의니를 떠나서 사실 안면근육이 그리 쉽게 웃음을 만들어주지는 못하니까.


그럼에도 아리와 무로이는 그 큰 노력을 하며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 미소라는 선물을 건넸다.


그간 서로가 얼마나 아팠는지 알기에.

서로가 아직도 얼마나 아플지 알고 있기에.

앞으로도 얼마나 더 아파야 할지 알기에.

또 그런 아픔 중에도 그 누구도 아닌 무로이와 손아리. 단둘 사이에 오가는 작은 미소가 얼마나 큰 힘이 될지 알기에······.


“손님은 오늘 하루는 ‘손님’이 아니라 저의 아이보 ―형사들 사이에 동료를 지칭하는 말― 입니다. 괜찮겠습니까?”

“네. 무로이 관리관!”

“좋아요. 그럼 갑시다.”


그날은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이 쾌청한 날씨였다.

이제 막 새싹들이 움트려고 푸른 기가 보이는 언덕들이며 집 담장에 윤기 나는 귤나무며 뭐며. 모든 것이 빛났다. 정작 관광을 한다고 설쳐대던 때는 섬을 잡아먹을 듯 하늘도 바다도 미쳐 날뛰다가 이 무슨 얄궂은 일인가.


적당히 쌀쌀한 3월의 바람이 기분 좋게 지나갔다.

아리는 꿈에서 막 깨어 다시 꿈으로 빠진 듯 아련해진 기분으로 무로이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주변을 쉴 새 없이 두리번거렸다. 깨끗한 공기.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조용한 마을. 평화로운 산새 소리. 이 모든 평온함에 감사했다.


하지만 아리는 어째서인지 그 아름다운 평화 앞에서 오히려 조바심이 나고 땀구멍이 따끔거릴 정도로 초조했다.


처음에는 무로이 관리관의 아이보로 탐문을 나간다는 사실에 그저 설레고 들떴는데, 어째서인지 갈수록 걸음은 주춤거려지고 아리따운 새소리만 들어도 저도 모르게 움찔움찔 놀랐다.


왜지? 뭐지? 어째서지? 이렇게 맑은 하늘과 이토록 예쁜 색깔로 감싸인 세상에서 왜 이렇게 또 새로운 무서움이 발목을 잡는 거지?


“······.”


어.


아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무의식적으로 걷고 있다가 턱. 하고 무언가에 부딪혀 멈춰 섰다.

정신이 들어 보니 남자 냄새나는 넥타이에 코를 박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로이의 가슴이었다. 하지만 넋 놓고 걷다가 그의 가슴에 코를 박은 아리 보다는 오히려 무로이가 놀랐다.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묻는 무로이 또한 콧등과 입술 위에 식은땀이 맺혀져 완전히 핏기가 가신 얼굴이었다.


“괜찮으세요?”


아리도 무로이의 안부를 물었다.


결국, 둘은 서로가 아직 사건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시내 중심가 쇼핑몰 카페에 허물어지듯 무너져 내렸다.


탐문 수사를 할 거라고 나와서 아직 한 곳도 찾아보지 못했는데. 사실은 아리도 무로이의 정신도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는 신호이리다.


그녀도, 그도. 실은 정신적으로 너무 크게 다쳤고 지금까지 전혀 아물지도 않았다. 그게 현실이었다.

마치 교통사고 같았다. 첫날에는 아프지도 않고 잘 모른다. 병원에서 CT다 뭐다 찍어도 이상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손발톱 머리카락 빼고 다 아파진다. 그리고 그 아픔은 평생 가지.


그들도 어쩌면 그런 상황인 모양이었다.

어제까지는 몰랐다. 그저 병원에서 둘이 이런저런 알콩달콩한 잡담 나누고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내일이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것이고 그걸로 모든 생활이 정상화 될 것이라고 당연히 믿었다.


하지만 그 ‘내일’인 오늘. 아리와 무로이가 그간 받은 모든 정신적 충격이 한꺼번에 물 위로 떠 올랐다.


큰일을 당한 사람들은 몇 년이 지나도록 제자리를 잡지 못 하고 술에 기대거나 폐인이 되면서 방황한다던데. 그게 어떤 과정으로 그리되는 것인지 몰랐다.


아아, 이런 것이구나. 이거 혹시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 같은 것이려나?


“······.”


무로이도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앞이 어지럽고 속은 메슥거렸다. 또다시 지난날의 충격적인 광경들이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았다.


속이 너무 갑갑해진 무로이와 아리는 그 계절에 냉커피를 시켜놓고 카페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보이는 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무로이도 아리도 모두 눈앞에 있는 길쭉한 냉커피 유리잔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작 뇌가 보고 있는 것은 달랐다.

무로이의 경우는 자신에게 피를 뿜어대며 죽어가던 시마노상의 모습이었고, 아리의 경우는 천둥·번개 치던 쓰쓰자키 공원에서 무로이가 줄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쓰러지던 모습이었다.


“······.”


손님 없는 대낮의 카페에 아리와 무로이는 냉커피 두 잔을 앞에 놓고는 서로 아무 말도 없이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누가 보면 마치 이별 선고를 앞둔 커플처럼.


그때였다. 긴 침묵을 깨고 아리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 둘 다 좀 쉬어야 하나 봐요. 다 나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묻어놓고 어떻게든 지나가 보려고도 했는데. 이제 보니 우리 둘 다 틀렸어요. 상처 자리는 벌어진 그대로이고 계속 피가 콸콸 흐르는 것 같아요.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가 봐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이때만치 진리라고 느껴진 적이 없네요.”

“그렇네요. 나도 사실 억지로라도 잡담 나누고 웃고 그러면 어떻게든 묻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고 일에 치이다 보면 망각되고 넘어가 질 줄 알았는데. 운명이 뒤흔들릴 만큼의 큰 충격 앞에서 우린 너무 오만했던 것 같습니다.”

“네. 이대로는 무리예요. 쉬어야 해요. 우린 앓을 만큼 앓을 시간이 필요해요.”

“······.”


평소에는 오그라들어서 할 수 없는 진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의 아리와 무로이는 진지한 줄도 모르고 그냥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읊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둘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신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고 있었다. 처음엔 서로서로 지탱해 주고 치유해 줄 수 있겠지 싶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인정해야 했다. 지금은 각자 스스로라는 존재조차 지탱할 수 없었다.


— 딸그락.


냉커피에 가득 차 있던 얼음이 녹으면서 서로 위치를 바꾸는 소리가 두 남녀의 침묵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나저나 몇 시더라? 잠시 쉬었다가 좀 움직여 봐야겠네요. 앓긴 앓아도 이렇게 우두커니 앉으면 상처가 곪을 거예요. 그러니 우리 한 잔 마시고 나가 움직이면서 바람이라도 쏘입시다. 일은 쉬엄쉬엄하죠 뭐. 어차피 이 작은 섬. 저 하나 없어도 잘 돌아갑니다. 하하하. 산책하다가 우연히 월신교 신도 분 집 앞을 지나치게 되거든 초인종이나 눌러보고 그러는 정도로 하죠 뭐.”

“네. 걷다가 힘들면 또 쉬고······.”

“그래요. 우선은 자, 시원하게 한잔합시다.”


그래. 일단은 서로가 얼마나 ‘아픈지’를 확인했다.

이젠 억지로 웃으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고, 이젠 억지로 괜찮은 척하지 않을 것이다.


아플 땐 아프다고. 힘들 땐 힘들다고. 비록 하루 더 같이 있을 뿐이지만 서로에게 솔직히 말하기로 하고 둘은 키다리 냉커피 잔을 생맥주잔처럼 들고 건배를 했다.


그때였다.


― 딸랑딸랑~


카페의 유리문이 열리더니 갑자기 새로운 운명의 파도가 들이쳤다.


“야아! 뒷모습 보고 설마? 했는데 진짜 너였어!!”


카페 내에 웬 한국인 여자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 소동에 아리와 무로이는 서로 해쓱해진 얼굴로 입을 벌리고 굳어졌다.


갑자기 나타난 한국인 여자. 무로이와 거의 비슷한 키와 덩치에, 어찌 보면 무로이보다 더 남자다운 외모를 하고 배낭을 메고 나타난 여자.


둘의 반쯤 비운 냉커피를 보면서 한국말로 “나도 이거 시켜야지!” 하더니 씩씩하게 유창한 일본어로 “여기요! 전 레모네이드!” 를 외치며 다른 테이블에서 의자를 당겨 앉는 여자.


“너, 너?!”


그제야 침체되어 있던 아리가 펄쩍 뛰며 비명을 지르듯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이기에 무로이는 큰 혼란에 빠졌다.


어쩐지 둘이 아는 사이인 듯한데 어떤 관계인지는 형사의 감으로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원수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하고, 자매 같기도 하고. 무로이는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그는 한국어로 대화하는 둘의 이야기를 거의 대부분 알아들었다.


본래 외국어는 듣기부터 뚫리는 법이니까. 어느 정도의 기초 실력이 있었던 무로이가 그간 부산 경찰들이나 손아리를 통해 알게 모르게 많은 한국어 공부가 된 모양이었다.

물론 귀로 듣기만 해서는 모르겠지만, 둘의 상황이나 분위기. 억양이나 제스처와 표정 등을 통해 대충 어떤 내용의 이야기가 오가는지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야! 미쳤어? 타라는!”

“더 팔 물건이 없어. 어제 묘한 단체들이 메뚜기 떼처럼 쓸어갔거든. 재고창고 열쇠는 너도 없지만 나도 없잖아. 그래서 배 공포증임에도 오늘 내가 친히 이 땅에 강림해 주신 것이다. 자, 어떠냐! 눈물 나지? 그러니 돌아가는 뱃삯은 네가 내. 난 편도만 끊고 온 거니까.”

“아오! 미치고 환장하고 팔짝 뛰겠네! 가만있어도 피곤해 죽겠는데 왜 언니 너까지 와서 지랄이니! 연락도 없이 들이닥쳐서. 만약 나 못 만났으면 어쩌려고 편도 끊고 온 거야! 배표가 여기서 사면 얼마나 비싼 줄 알아?”


레모네이드를 기다리면서도 계속 아리의 냉커피를 훔쳐 마시며 헤실헤실 웃는 남자. 아니, 여자.


무로이는 핏기 가신 얼굴로 둘의 험악한(?) 분위기를 지켜보았다. 어쩐지 아리 혼자 일방적으로 펄펄 뛰고 있고, 난입한 여자는 느긋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그야말로 진정한 관광객의 얼굴로 앉아 난리가 난 아리를 북 치는 장난감 보듯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 호텔. 역시 ‘거기’더라? 어쩜 그 여행사는 그렇게 빤하냐? 암튼 좀 전에 프런트에는 네 방에 끼어 들어갈 참이라고 이야기해 뒀어. 어차피 2인실이니까 괜찮지? 프런트에선 너만 괜찮다면 그렇게 알고 있겠다고.”

“안 괜찮아!!”

“그럼 너 걱정에 목숨 걸고 배 타고 건너온 나더러 지금 노숙하라는 거냐?”

“다른 곳에 묵을 곳 많잖아!”

“지금 이즈하라엔 아무 데도 빈방 없어. 지금 민박집이고 템플 스테이고. 관광객들이랑 기자들이랑 전부 다 차지해서.”

“······.”


아. 그런가? 아. 그렇겠다.


허은정은 레모네이드가 도착하면서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 틈을 타 무로이는 급하게 아리에게 속삭여 ‘저 여자’에 대한 소개를 청했다.


“하아~ 네. 야. 인사드려. 이분은 무로이 신지. 여기 경찰서에서 좀 높으신 형사분이셔.”


그런데 사고회로가 엉망이 된 아리는 거꾸로 은정에게 무로이를 소개하는 실수를 했다.


“오오~ 이분이?!”

“뭐가 오오~ 이분이! 냐! 아는 척하지 마!”

“아냐. 나 이분 알아. 본 적 있어.”

“어이구! 또 꿈에서?”

“어. 꿈에서.”

“언니의 지랄병은 국경을 넘어도 낫지 않는구나. 하아~ 이건 또 무슨 은혜로운 절망이니.”

“에헤이~ 엄살은.”

“으오오~ 미치겠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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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그냥 저러다 말겠지 15.05.02 402 8 17쪽
» 치유될 시간이 필요해 15.05.01 338 8 12쪽
52 대마도에서의 5일째 15.05.01 354 12 14쪽
51 한국의 의사들 15.05.01 315 7 14쪽
50 그와 그녀의 시간 15.05.01 418 7 12쪽
49 그의 외로움. 그녀의 괴로움. 15.05.01 348 7 12쪽
48 갑자기 15.05.01 369 8 15쪽
47 섬사람들에게 섬의 신이란 15.04.30 344 8 12쪽
46 그리움 15.04.30 443 8 21쪽
45 허은정의 '그런 쪽'의 이야기 15.04.30 496 9 11쪽
44 사건의 전말 15.04.30 373 9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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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특별 수사본부 15.04.29 364 10 12쪽
40 낙뢰 15.04.29 395 9 12쪽
39 빛이 터졌다 15.04.29 347 10 13쪽
38 꿔다 놓은 보릿자루 15.04.29 338 8 12쪽
37 아무래도 형사 양반들이 나설 차례가 올 것 같다는 거지. 15.04.29 483 9 11쪽
36 무로이와 손아리 15.04.29 314 8 13쪽
35 그들의 목숨 건 활약이 시작 된다 15.04.29 553 9 14쪽
34 반쇼인에서 15.04.29 435 8 13쪽
33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스며들었다 15.04.28 398 9 12쪽
32 부탁입니다. 그냥 울어 주세요. 15.04.28 355 7 10쪽
31 그들이 왔다 15.04.28 404 8 12쪽
30 이젠 뭘 봐도 꿈같아 15.04.28 321 10 13쪽
29 한탄의 쓰쓰자키 절벽 15.04.28 700 10 15쪽
28 부산 경찰이 뜬다고?! 15.04.28 376 9 16쪽
27 잠 못 드는 밤 15.04.28 289 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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