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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별의 서재.

그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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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밝은스텔라
작품등록일 :
2015.04.25 23:34
최근연재일 :
2015.05.14 17:49
연재수 :
56 회
조회수 :
21,960
추천수 :
459
글자수 :
318,833

작성
15.04.28 22:45
조회
397
추천
9
글자
12쪽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스며들었다

DUMMY

9시 15분.


무로이는 먹먹한 기분으로 아리와 함께 비바람 몰아치는 이즈하라 시내를 그냥 걸었다.

관광객인 아리는 오늘이 마지막 일정이라고 했다. 그녀가 그렇게 바랐던 자유여행이라는데 이런 식의 자유일 줄이야.


무로이는 그 날 하루. 부산 경찰이 그녀를 찾기까지 아리를 보호해야 하는 임무를 받았다.

누군가를 지킨다는 임무는 처음인 무로이는 자신의 검은 우산 아래를 자꾸 침투하는 아리의 우산에 자꾸 신경이 거슬렸다.

키 차이 때문에 그녀의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무로이의 어깨를 적셨다. 그만치 그 둘은 가깝게 걷고 있었다.


둘은 그렇게 가깝게 서서 걸었다. 하지만 딱히 어디로 목표를 잡고 걷는 것은 아니었다.


낮은 우산에 가려진 아리의 걸음은 그저 목적 없는 방황이었을 뿐이었다. 무로이는 레몬색 우산에 가려진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섬에 건너오기 전, 그녀는 마지막 날은 어디를 돌아다니고 어떤 구경을 할 것인지. 몇 날 며칠 즐거운 상상 속에서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


그녀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우산에 가려져 그녀의 얼굴이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무로이는 아리가 작은 물길 건너편의 허름하고 초라한 유치원의 입학식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좌측은 쓰시마 시청이고 작은 물길을 건너면 작은 어린이 놀이터가 있는 시립 이즈하라 유치원이었다. 오래된 건물이라 낡은 티가 나는 건물이었다.

하지만 그곳의 커다란 창에는 구식 캠코더를 들고 교실 뒤에 미소를 머금고 서 있는 학부모들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들이 아이들의 노래를 듣고 있는 풍경이 동화의 한 장면처럼 따사로웠다.


지금 저 창밖에서는 외국인 손님들이 죽어 나갔고 유일하게 생존한 손님의 가슴은 이 날씨처럼 엉엉 울어대고 있다. 하지만 유치원의 녹슨 보잘것없는 창문은 저 귀여운 아가들을 든든하게 보호해 주고 있었다. 지금 저들은 그저 피어나는 봄의 경이로움에 기뻐하기도 바빠 보였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아리의 발길은 아무래도 그런 모습을 보며 넋을 놓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표정으로, 어떤 심경으로 저 예쁜 평화를 바라보고 있을까?

무로이는 궁금했지만 먼저 말을 꺼내보기도 뭐 한 분위기라 조용히 곁을 지켜주었다. 그나저나, 유치원의 단정한 원복을 입은 아가들이 정말이지 너무나 귀여웠다.

무로이는 문득 언젠가 자신도 가정을 이루고 지금 저곳에서 웃고 있는 젊은 아버지처럼 자신도 카메라를 들고 바보 미소를 머금을 것을 떠올렸다. 뜬금없는 망상이었지만 덕분에 조금이나마 침울했던 가슴이 콩닥콩닥 뛰며 따뜻해졌다.


무로이의 나이도 이제 스물여덟이니 ―일본 나이― 자연스러운 인연의 이끌림을 거부하지 않는 한, 자신에게도 얼마 후면 저런 미래가 오리라. 봄이 오리라.


“······!”


혼자서 그런 ‘인생의 봄’에 관한 상념으로 얼마나 따뜻했던가. 무로이는 갑자기 헛! 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벌써 저리로 멀어져 가는 손아리의 뒤를 서둘러 쫓아갔다.


‘아아, 정신 차려라 무로이! 이 마당에 인생의 봄 따위가 뭐냐! 지금은 이미 빙하기를 맞아버린 저 손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지!’


아리의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그녀는 이제 주변의 풍경을 천천히 가슴에 담아 넣고 있었다.

아직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는 3월의 중순의 거지 같은 날씨. 하지만 지금 그녀의 가슴 속은 남극이나 북극의 추위였고, 마음속 시야는 화이트 아웃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눈이 보는 대마도의 흠뻑 젖은 풍경은 축축하면서도 어쩐지 모르게 따뜻해 보였다. 조금 전에 보고 들은 아이들의 모습과 재잘거리는 노랫소리가 환영처럼 계속 시야 어딘가에 둥둥 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노인들이 사정없이 할퀴고 사라진 아리의 마음의 깊이 팬 상처 자국에 이국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스며들었다.


그렇게 혼자 멍하니 얼마나 걸었을까?

아리는 등 뒤에서 하고 무로이가 저 멀리에서 달리기로 자신을 따라잡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아리는 오늘은 호텔에서부터 계속 그와 함께였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아니, 눈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함께였다. 아니? 지난밤에도 거나하게 취해 그의 등에 업혀 호텔 방으로 돌아왔고 눈 감는 순간까지 그가 있었던가?


그리고 그의 서두르는 발소리. 아리는 그제야 새삼 ‘무로이’라는 존재를 인식하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은 ‘인연’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단계도 정황도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와의 우연한 조우는 전날 쓰쓰자키 공원 주차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혼마에게 건 무로이의 전화를 아리가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리는 무로이 신지라는 이름의 경찰관과 계속 함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런 것이 혹 인연이라면 서로에게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의미의 악연이겠지.


“······.”


아리는 잠깐 뒤돌아서 자신을 향해 뛰어오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려 멈춰선 무로이라는 경찰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지금은 노인들의 문제로 그야말로 패닉 상태인지라 눈이 본다고 해서 뇌가 인식하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에도 이상하게 무로이는 보는 대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무로이라는 사람을 정의하는 특징이 하나둘 눈에 띄었다.

우선 그는 일본인 남자. 그리고 그는 대마도. 여기서는 쓰시마라는 섬사람 중에 제법 키가 큰 축에 속하는 남자였다. 그리고 간밤에는 올백으로 넘어가 있던 머리가 지금은 푸석푸석하게 내려와 매력적으로 보이지 말란 법도 없는 짙은 눈썹을 가리고 있었다.


그는 어쩐지 우수 어린 눈동자가 그렁그렁한 남자였다. 평소 아리가 생각해온 ‘멋진 경찰’이나 ‘거친 경찰’의 풍모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덕분일까? 촌 동네 경찰답지 않은 준수함이 더 돋보였다.

그리고 저 허름한 점퍼에 가려졌음에도 단단해 보이는 몸. 그냥 보기에도 그래 보였지만, 아리는 무엇보다 지난밤 만취 상태로 업혔던 기억이 생생히 떠올라 부끄러웠다.


자신의 가슴이 닿았던 그의 몸은 돌처럼 단단했었다. 아리가 하나씩 떠올리는 특징들이 모인 덩어리가 무로이라는 남자였다. 경찰서 내에서 그의 지위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봤자 쓰시마 촌 동네 경찰이지.


지위가 낮든 높든 경찰 인생으로서는 별 의미도 없고 아리와도 전혀 상관이 없다. 앞으로는 더 상관이 없어지겠지.

그런데 어째서일까. 아리는 그가 계속 자신을 지켜보고 따라다닌다는 현실에 슬슬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그는 왜 자꾸 자신을 따라다니는 걸까. 아리는 다른 의미로도 그의 동행이 신경 쓰였다. 혹시 그녀가 무슨 나쁜 일이라도 했다고 의심하고 있는 것 아닐까?


노인들이 자살 여행을 왔고 그 뜻을 이루었다. 그런데 왜 자신을 따라다니는 거냐고. 아리는 눈썹을 찡그렸다. 설마 노인들을 자신이 해쳤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그녀도 따라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대체 뭘까? 감시? 보호? 너무 신경 쓰인다.


‘저 사람이 혹시나 나를 용의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면 이 동네 경찰 수준 참 불쌍하네.’


아리는 그런 생각으로 짧은 한숨을 푹 토하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목적지는 정하지 않았다. 그저 비안개가 꾸물꾸물 춤추는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아무렇게나 걸을 뿐이었다.


끔찍한 일이 있었다. 이것저것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현실도피의 걸음이다.


한국에서는 그저께도 마지막 자유여행은 어디 어디를 갈 것이다. 라고 정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관광이 다 무슨 소용이람. 이 이상 더 무슨 관광을 하라고.

그녀는 이미 인생의 쓰디쓴 잔을 삼켰다. 관광?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그래도 티브이도 없는 호텔 방에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죽이는 것으로 하루를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무작정 나와 걸었다. 지금은 그렇게라도 끔찍한 일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지금의 그녀는 그저 빨리 일산 집으로 돌아가서 노골노골한 온돌방에 자리 깔고 누워 잠이나 퍼 자고 싶었다.

그래. 이건 다 꿈이었다고, 가위눌린 것이었다고 질질 짜다가 잠에 빠지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이곳에서 일산은 너무나 멀다. 지금의 심리상으로는 거의 우주급의 거리감이었다.


그나저나 오후 언제쯤에 부산에서 온 경찰들이 그녀를 찾아온다고 했던가? 그때까진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야겠지. 걷자. 걷자.


경찰? 그나저나 부산 경찰들은 대체 뭐라고 할까? 아리는 갑자기 생각해 본 적 없는 두려움이 마음에서 싹트는 걸 느꼈다.

이곳 경찰이 “네가 노인들을 죽인 것 아니냐?”라고 한다면 하! 하고 콧방귀를 끼어줄 참이었다. 하지만 부산 경찰이 그런 말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절대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까? 아리는 죄가 없는데도 무서웠다.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분명 정신이 없었고 그다음에는 풍경들이 예뻐서 홀린 듯 걸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눈을 뜨고도 사물이 보이지 않았다. 나무를 보아도 나무로 인식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신이 들어 보니 갑자기 옛날 나무 대문 같은 것이 버티고 서 있어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더 갈 곳 없이 앞이 막혔다. 그런데 등 뒤에서 무로이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실 거죠?”

“에? 네?”


아리가 멍청한 목소리로 어? 하고 있는 동안 무로이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곤 아리의 우산 아래로 무언가 종이들을 건넸다.


“??”


뭐지? 어쨌거나 주는 것이니 받았다.

그리고 봤더니 어? 뭔가의 입장권이었다. 반쇼인(만송원)의 입장권? 엇! 아리는 다시 고개를 치켜들곤 그제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랬더니 제가 서 있는 대문 양옆으로 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사천왕상 같은 목상이 작게 서 있었다.

아아, 그곳은 인터넷에서 찾아봤었던 대마도주의 가족묘. 일본의 삼대 묘지라는 반쇼인이라는 곳으로, 입장료 300엔을 내야 하는 곳이었다.


‘관광 따위 개나 줘.’라는 생각으로 묵묵히 걸었을 뿐인데 그런 곳까지 걸어 버리다니. 게다가 무로이가 어느새 제 사비로 입장권을 사서 아리에게 쥐여 주다니.


“앗. 죄송해요. 전 아무 생각 없었는데.”

“네. 그럼 계속 아무 생각 없이 저리로 입장하세요. 이 문은 본래 열지 않아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리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멍하니 제 손에 잡힌 두 장의 입장권과 간단한 소개 자료를 무로이와 번갈아 보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무로이는 아리의 혼란한 상황 따위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영혼의 진공상태에서 허우적거리던 아리를 자연스럽게 현실로 에스코트해 주었다.


일행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외국인 손님이다.

무로이 최대한 도움이 되고 싶었다. 지금의 아리는 그냥 하얗게 표백되어 반투명한 모습으로 혼백이 나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모습에 가까웠다. 어떻게든 다시 이 지상에 땅을 붙이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죽음’ 때문에 그렇게 된 그녀를 아예 옛사람들의 무덤에 이끌다니.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짓인가 싶었다.

뭐 죽음이라는 절대 휴식이 머물러 있는 그곳에 먼저 발걸음을 한 건 무로이가 아니라 바로 혼돈에 빠져 있던 손아리 본인이었지만.


“자, 들어가시지요. 숲에 깃든 좋은 공기를 쐬면 아무래도 마음이 조금 더 차분해질 겁니다.”

“아. 네. 죄송해요. 아니, 고마워요.”

“별말씀을.”

s402286.jpg


작가의말

사진은 대마 시청 맞은 편의 실제 대마 유치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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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그냥 저러다 말겠지 15.05.02 402 8 17쪽
53 치유될 시간이 필요해 15.05.01 337 8 12쪽
52 대마도에서의 5일째 15.05.01 354 12 14쪽
51 한국의 의사들 15.05.01 315 7 14쪽
50 그와 그녀의 시간 15.05.01 418 7 12쪽
49 그의 외로움. 그녀의 괴로움. 15.05.01 348 7 12쪽
48 갑자기 15.05.01 369 8 15쪽
47 섬사람들에게 섬의 신이란 15.04.30 344 8 12쪽
46 그리움 15.04.30 443 8 21쪽
45 허은정의 '그런 쪽'의 이야기 15.04.30 496 9 11쪽
44 사건의 전말 15.04.30 373 9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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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꿔다 놓은 보릿자루 15.04.29 338 8 12쪽
37 아무래도 형사 양반들이 나설 차례가 올 것 같다는 거지. 15.04.29 483 9 11쪽
36 무로이와 손아리 15.04.29 314 8 13쪽
35 그들의 목숨 건 활약이 시작 된다 15.04.29 553 9 14쪽
34 반쇼인에서 15.04.29 435 8 13쪽
»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스며들었다 15.04.28 398 9 12쪽
32 부탁입니다. 그냥 울어 주세요. 15.04.28 355 7 10쪽
31 그들이 왔다 15.04.28 404 8 12쪽
30 이젠 뭘 봐도 꿈같아 15.04.28 321 10 13쪽
29 한탄의 쓰쓰자키 절벽 15.04.28 700 10 15쪽
28 부산 경찰이 뜬다고?! 15.04.28 376 9 16쪽
27 잠 못 드는 밤 15.04.28 289 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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