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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티아 & 그라티아

꿈 속의 인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그라티아94
작품등록일 :
2012.11.23 04:09
최근연재일 :
2014.11.29 07:32
연재수 :
26 회
조회수 :
12,437
추천수 :
77
글자수 :
133,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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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2.20 16:38
조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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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Ch.2 황도 아란셰르타

DUMMY

끼이익 소리와 함께 열릴것만 같은 커다란 문은 의외로 소리 없이 열렸다.


하지만 대신 벌어진 문틈 사이로 오전의 밝은 빛이 터져나왔다. 순간적으로 찌푸린 눈 위로 손차양을 만들어 씌우곤 문을 등 뒤로 닫았다. 정면에 주르륵 늘어선 커다란 창문들을 통해 쏟아져들어오고 있는 빛무리 사이로 값비싼 나무책장들이 열을지어 배치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손으로 흘러넘치는 빛을 힘겹게 차단시키며 책장 사이사이를 눈으로 흝기 시작했다.


"여기 입니다, 영애."


아-


문에서 가장 먼 창가에 테이블 하나가 있었다. 그 옆에 단정하게 서있는 남자 하나의 실루엣이 빛에 아른거렸다.


예상보다 강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의 비명을 들으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의외로 두 눈을 찔러대던 빛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애. 영애의 지도를 책임 맡은 유리하 뷔스 셰드웰이라 합니다."


약식으로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드레스자락을 살짝 쥐어올리고서 무릎과 고개를 조금 숙여보였다. 검은 스트라이프 무늬의 천자락을 부드럽게 말아쥔 손이 조금씩 떨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셰드웰 경. 아이리엘라 율리안트 비첼렌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은 긴장되었지만 그의 은청색 두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고맙게도 이 사람이 자신에게 정령술을 가르쳐줄 것이다. 정말, 열심히 할 자신, 정말 있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우선 자리에 앉으시지요."


그가 빼준 의자에 앉은 뒤 맍은편에 자리잡은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부터 꺼낼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듯한 그는 꽤나 차갑게 보이는 얼굴과 달리 전체적으로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의 단정한 밤색 머리칼은 왠지 만져보면 따뜻하게 느껴질 것같았다.


"우선.. 시간이 많이 없으니 본론부터 들어가죠, 그럼. 이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아십니까, 영애?"


이 세계? 그거야 당연히...


"주신 프레하스께서 창조하신..."


하지만 당연한 것을 왜 굳이 물어보지? 배우지 못한 평민아이들도 다 알고있는 사실을..? 혹시 설마,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그렇습니다. 프레하스께서 창조하셨지요. 하지만 한번 상상해보신적 있으십니까? 창세가 어떠했을지.."


"저.. 그저, 빛에 휩싸이신 프레하스께서 안개사이로 이것저것 빚으시는 광경 밖에는.."


똑 부러지는 답을 내뱉지 못하는 머리와 입이 부끄러워 얼굴이 조금 뜨겁게 느껴졌다.


"뭐..틀리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창세의 인간이었다면...어땠을까요."


한번도 생각 해본적 없는 문제였다. 창세라니.. 글쎄, 지금보다 단순한 인생을 살고, 덜 발달되었으며, 조금 더 선하지 않았을까.


"...아마..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시선을 환한 빛이 들어오고 있는 창 밖으로 던졌다. 마치 오래되어 잔뜩 낡아버린 동화를 듣는 듯한 기분이 문득 들었다. 빛바랜 황금색의 햇살이 그들의 주위에 말 없이 내려앉았다.


"해마다 해변을 엉망으로 만드는 폭풍들도 없었을 것이고 대지를 잔인하게 말려죽이는 기근도 없었을 겁니다. 만물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갔겠지요..프레하스꼐서 한올 한올 자아내신 섭리의 법을 따라 모든 것이 흘러갔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는 일마다 그분을 기쁘게 만들어드렸겠지요, 아마.. 우리도, 자연과 발 맞추어 숨 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때가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한숨 같은 숨을 중간중간 쉬어가며 말하던 그는 이내 아예 시선을 창밖으로 고정하곤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부드럽게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후회...하는 걸까? 무엇을?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묘한 그리움이 묻어나왔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계라는 사실을 알아서일까.


순간 심장이 누군가 힘껏 짓누르기라도 한듯 욱씬거려왔다.


"하지만 역시 우리에게 신의 숨결을 따라 숨 쉬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우리는 점점 신을 잊고 스스로의 길을 닦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분꼐서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으시며 녹여넣으신 자연의 법칙을 우리는 하나씩 꺠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처음에는 좋았겠죠. 스스로의 세계를, 스스로의 정의를 만들어 간다는 생각에 주최하기 힘든 희열도 느꼈겠지요.하지만... 한조각씩 무너지기 시작한 이 세계의 균형은."


딱 끊어진 말 뒤로 그의 마냥 차가워 보이는 은청빛 눈동자가 복잡한 상처를 담고 우울하게 빛났다.


"...자연은, 우리를 등졌습니다. 아니, 우리가 자연을 먼저 져버렸지요. 그리고, 자연도, 이 세계도, 우리 자신들도...끔찍한 모습으로 비틀리고 꺠어져버린 법의 조각들에 이리저리 찔려 피를 흘리는가 봅니다..그리고...새로운 세상이 왔지요. 안 그렇습니까? 잔뜩 상처 입고 변질된 세상 말 입니다."


이유는 모르겠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뛰어대는 심장을 쥐어뜯고 싶었다. 마음이 너무도 아파왔다. 그 지독한 욱신거림에 서글퍼졌다. 두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힘껏 억눌렀다. 왜.. 무엇때문에 이런것이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것은 행복한 결말을 가진 어린이 동화 따위가 아니었다.


"신과의 교류는 끊어졌고, 자연재해가 매년마다 문턱을 방문합니다. 나라들은 불화가 도무지 끊이지를 않습니다. 그 뿐입니까. 사람들의 마음과 머릿속에서는 온갖 근심과 미움이 떠나가지를 않습니다. 짐승들은 저들도 살겠다고 서로와 인간의 아이를 잡아먹고 그에 아이를 잃은 어머니들은 밤이 깊으면 그때마다 베갯잎을 눈물로 적십니다. 물론 여전히 기쁜일도, 행복한 일도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들을 마냥 기껍게 받아들이기에 우리의 마음은 너무 어둡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저마다 하나씩 깨어진 마음을 안고서 하루하루 이 타락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아이레는 그러면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순간 자신의 어머니도 자신이 사나운 짐승에게 물려가면 그 눈을 지을까, 그런 망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변질된 세상에서도 우리는 우리만의 치선을 다 할 뿐 입니다. 그리고 신성마법은 그런 노력의 정점에 이른 힘이지요."


누런 황금색으로 변색 된 햇살이 흘러넘쳐 들어오는 창가로부터 그가 고개를 돌리고 그 시선을 다시 그녀에게 맞춰왔다. 그의 물기 어린 새파란 눈동자가 생소한 동정을 그녀의 마음 속에서 불러일으켰다.


기어코 속눈썹 끝에 힘겹게 매달려 있던 눈물 한 줄기가 그녀의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직도 신의 자취는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잘 보지 못 할 뿐이지요. 신성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 자취를 찾아내어 옛 세계를 지배하던 신의 법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거기서 힘을 끌어내어 조금이나마 현 세계를 돕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믿습니다. 어디서 영애가 그 섭리를 발견하실지는 오직 신만이 아시겠지요. 저는 그저 조금의 도움을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곧게 직시해오는 그의 은청빛 눈동자가 왠지 그녀를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정말 할 수 있을까. 아니, 할 수 있다.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 해 볼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잘 해볼 거다. 반드시.


"아, 잊고 말씀드리지 않을 뻔했군요. 아직 잘 모를 것이라 여겨집니다만, 황궁마법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정령마법을 신성마법의 일종으로 분류합니다. 현대에 와서는 더더욱 그렇지요. "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정령마법과 신성마법은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들이 아니던가? 어떻게 둘이 같이 분류 될 수가 있지..?


"정령계는 주신 프레하스께서 창조하셨으되 그 법도가 아직 거슬러지지 않은 유일한 세계 입니다. 정령마법이란 우리가 자연에서 접할 수 있는 그 법도의 자취에 의지해 정령계에 속한 영을 불러내 도움을 받는 것이지요. 조금 간접적이지만 신의 법칙을 찾고 깨달아야 한다는 점에서 같은 신성마법이라 볼 수 있겠지요."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을 어떻게 말할까, 생각을 고르는 것도 같았다.


"...물론 막막해 하실 것 잘 압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 밖에 없군요. 자연을 깨달으십시요. 자연을 느끼고, 그것이 무엇인지, 그 본질이 무엇인지, 풀어보십시요. 분명 영애에겐 재능이 있으니 해내실 수 있을겁니다."


네...? 이게 다인가? 더 구체적인 설명은..


"그럼 오늘 지도는 끝난 것 같군요. 같은 시각 내일, 이곳에서 또 뵙겠습니다, 영애."


"예...? 저, 그..럼 내일을 위해 준비 할 것이라던가, 없습니까..?"


그가 잠시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고민 해 오십시요. 그것이 다 입니다. 그럼."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무언가 바쁜 일이 있는 듯 성큼성큼 걸어 문을 열고 나가는 셰드웰 경이 뒷모습을 의미 없이 바라보며 조금 얼빠진 기분이 들었다. 도서관에서 만나자는 것이 이런거였나. 온갖 정령들을 보게 되는 것을 예상하고 왔는데... 하다못해 자연이라도 보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정령은 커녕...


솔직히 말해 아무것도 모르겠다. 창세에 대해 얘기해 주었지만 쉬이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긴 조금 어려운 이야기들이고.. 또 아무것도 보지도 못했고 구체적으로 들은 설명도 없는 상황에서 도대체 어찌 정령을 불러내라는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온통 다른 세계 이야기인 것같고, 가능성이 없는 일 같이 느껴졌다. 그래, 그의 말대로 막막하다.


"후우.."


정말 열심히 해보겠다고 다짐 했는데, 벌써부터 의욕이 쭉 떨어지기 시작한다. 내가 할 수나 있을까.


잠시 없는 체면도 버리고 테이블 위에 뉘였었던 상체를 일으켜올렸다.


어쨋든 갈 때까지 가 보겠다고 약속했으니..


오늘은 우선 밀린 피아노 연습이나 두세시간 한 다음 숙제를 해봐야겠다. 고민하는 숙제.


일어서니 다시 눈을 찔러대기 시작하는 밝은 햇살에 다시 한번 눈가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역시 이곳의 햇빛은 너무 강하다.



* * *



달칵-


얌전히 열쇠 그릇에 숙소 열쇠를 놓아두며 방 안에 들어섰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을 보아 베르타는 다른 곳에서 일하는 중인가보다.


사실 영지에서는 스스로 열쇠를 쓸 일이 없었는데, 황궁에 와서 이것저것 경험해보는 것 같다.


아...


현관을 지나치는데 은쟁반 위에 단정히 자리 잡은 하얀 종이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옆에 놓인 구리쟁반 위에 가득 쌓인 편지봉투들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저 읽으라고 놔둔 것이다.


슬쩍 봉투를 집어들어 보니 앞에 황실의 문장이 선명한 금색으로 찍혀 있었다.


"...."


협탁의 조그마한 서랍을 열어 손잡이에 장미 한송이가 양각되어 있는 작은 페이퍼나이프를 꺼냈다. 사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깔끔하게 입을 벌리는 하얀 봉투에 만족하며 페이퍼나이프를 제자리에 돌려두었다.


봉투에서 나온 것은 두 장의 초대장이었다.


"....시간 참 빠르게 간다."


어쩌면 아직도 오라버니와 함께 영지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어느새 벌써 이안 오라버니의 임명식이 한달 조금 뒤로 다가왔다.


8월 21일.


황금태가 세련되게 둘러졌고 황실의 문장이 화려하게 세겨진 초대장에는 '필리스메리아'가 은색 잉크로 조그맣게 적혀져 있었다. 고대어로 '가족.' 그리고 정말 새삼스럽지만 그 순간에야 마음에 제대로 와닿았다. 자신의 오라버니가 이 광활한 제국의 모든 기사가 입단하고 싶어 안달하는 기사단에 입단한다는 사실이.


두 장의 초대장을 도로 봉투 안에 잘 넣어두고 침실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 옆의 종이에는 베르타를 위해 메모를 남겨두었다. 피아노 좀 치고 오겠다고. 그릇에서 열쇠를 집어들고는 곧장 방을 나왔다. 문은 저절로 잠긴다.


.........물론, 그를 위해 진심으로 기뻤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자신은 정말 쓸모 없고, 아무것도 아니고, 초라했다. 그것이 다이다.



* * *



띵-


띵-


띵--


도, 레, 미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피아노를 안 친지 꽤 되었다. 정신이 든 날에 피아노와 방음 된 방을 확보해 두긴 했지만...


손가락과 손목이 조금 굳어 있었다. 한숨 나오지만 당연한 일이다.


기분도 별로 안 좋은데, 이 꼬인 실을 어찌 풀어야 할지 조금은 막막했다. 오랜만에 굳어보는 손이라..


음악실에 난 창문을 통해 비춰드는, 저 혼자만 명랑한 햇살이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졌다. 우습다는 것을 잘 알지만.


오른팔을 물결치듯이 허공에 한번 부드럽게 휘저어보았다. 우아한 춤의 한 동작처럼. 끊어지는 곳 없이 둥글게, 둥글게.


왼팔도 메아리 치듯 반복한다.


피아노 의자에 걸터 앉은 몸을 바로 하고. 발가락부터 무릎까지, 무릎에서 엉덩이까지, 엉덩이부터 배까지, 배에서부터 두 어깨까지, 어깨에서부터 목과 팔꿈치까지, 목에서부턴 턱끝까지. 그리고 물결을 끊지 않고 잇는다. 어깨에서부터 팔꿈치끝까지. 팔꿈치에서 둥글게 운동하는 손목까지. 그리고 손목에서부터 다섯 손가락의 모든 마디마디까지.


모든 근육에 불필요한 긴장을 빼고, 머릿속이 음표 하나 그려넣지 않은 오선지처럼 새하얗게 비워졌을 때. 완연한 곡선의 물결이 어깨로부터 모든 손가락 끝까지 막힘 없이 이르렀을 때.


다시 한번 두 손을 건반 위에 나뭇잎 두 장 두듯 올렸다.


띵-


띵- 띵-


도, 미, 솔


띵- 띵-


띵-


레, 파#, 도#


띵- 띵- 띵--------


미, 솔, 미


별 의미 없이 건반 몇개를 눌러보았다. 팔 전체에 힘을 빼고 손목의 둥글고 자유로운 운동을 이용하면서. 오직 손 끝, 그 열 군데에 온 몸의 에너지를 집중 시킨다. 강-약. 약-강.


마음대로 되지만은 않는다. 며칠새에 굳어버린 손가락에 괜히 짜증도 났지만 마음을 침착하게 다스렸다.


가장 기본적인 스케일부터 시작한다. 양손을 사용하여.


-도레미파솔라시도. 도시라솔파미레도. 레미파#솔라시도#레. 레도#시라솔파#미레.


점점 건반의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팔에 힘을 빼고. 손목은 느슨히. 오직 손 끝에만. 모든 음을 강하게. 포르테, 포르테. 마치 적군을 향해 행진하는 여장군처럼.


그리고 드디어 건반의 가장 오른쪽에 자리잡은 도, C8, 적진에 첫 발자국을 남긴다.


다시 내려온다. 이번엔 거꾸로 된 아르페지오로.


-도솔미도미솔도. 시파#레시레파#시.


약-강-약. 피아니시시모에서 메조포르테까지. 다시 피아노로 줄어든다.


점점 강해졌다가 그 정점에 이르러 다시 부드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반복. 거기에 전체적으로 크레센도를 가한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가장 낮은 음. 라, A0 까지. 포르티시시모로 그 절정을 딛고 올라서서 그 끔찍할 정도로 낮게 울려퍼지며 귓가를 맴도는 음파를 음미해보았다. 마지막으로 손가락 끝에 힘을 주고는 부드러운, 둥근 동작으로 동시에 양손을 들어올린다. 떨어지기 싫은 것을 마지못해 떼어내듯이,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을 살살 달래어 벗겨내듯이. 하지만 더 없이 깔끔하게.


한번 슥 하얀 건반을 쓸어내리며 거의 본능적으로 무슨 곡을 칠지 마음을 정했다.


고전시대의 급진적인 태양, 보르게우스 D. 체르시니의 <폭풍>


곡은 처음엔 여느 소나타처럼 시작된다. 어찌보면 다소 단조롭게도 느껴지는 음표들의 한 없는 조화로움. 평범한 소녀의 평범한 일상 같이.


뚝.


계속 이어져오던 슬러가 뚝, 벼랑 끝 길처럼 예고도 없이 끊긴다.


쉼표, 쉼표.


속삭이듯이. 한 옥타브 밑에서 미약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지? 짧은 모르덴트 하나.


이내 다시 단조로운 일상이 재개된다.


하지만 다시 끊기고 이번에 더 낮은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려온다.


더 가까이에서.


도대체 무엇인가? 다시 한번 모르덴트. 모든 음을 선명하게. 정성을 들여. 투명한 얼음물처럼.


그리고 그 반복속에 거인은 점점 다가온다. 무지한 일상을 통해. 순식간에.


알지 못하던 사이에 첫 마디의 C Major는 어느새 정의조차 내리기 어려운 기묘한 불협화음으로 탈바꿈 해버렸다. 하지만 위화감이 어디 있나.


이것이 바로 폭풍인 것을.


주로 낮은 음역에서, 열 손가락을 한개치까지 한껏 벌려 위협적인 폭풍의 울음소리를 구현해낸다. 포르테에서 포르티시모, 포르티시시모까지.


팔에 힘은 빼고. 오직 손가락 끝을 사용해. 몸에 긴장은 풀린 상태로. 팔 전체의 무게를 이용하여.


가끔은 저 높은 음역에서 비명과도 같은 멜로디를 뽑아낸다. 손가락이 주저앉을 것만 같은, 광기 서린 트릴.


그렇게 힘 없는 대지는 통보 없이 찾아온 폭풍에게 한참동안 짓밟힌다.


이따금식 무거운 코드를 꽝꽝 눌러짚는다. 건반을 하나하나 깊숙히 누르며. 땅 속까지 파고들 것처럼. 절대로 때리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일까. 벌써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


불협화음은 조금씩 원래의 규칙적인 성향을 되찾는다. 꿈틀꿈틀, 머릿속에 흑과 백으로 선명히 세겨진 악보가 이동한다. 그 근원의 C Major로.


점점 부드러워 지는 폭풍에 어린 짐승 몇몇이 저 어미들 몰래 굴에서 뛰쳐나와 진흙 가득한 초록 대지를 뛰논다. 청회색 비를 맞으며, 꺄르르륵-


그리고 마을의 평범한 소녀 하나가 조심스레 비 내리는 들판에 발을 들였을 때는.


밝은 섬광의 태양이 기지개를 켜고 빼꼼 고개를 내민다. 잠자리 곁을 더듬어 황금관을 찾아 쓴 그가 잿빛 이불을 느릿느릿하게 돌돌 말아 한 옆으로 치운다.


이영차!!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두 다리를 쭈우욱 피는 태양왕 아래로 모두가 행복한 얼굴로 새로운 하루를 환영한다.


그리고,


딩--


페르마타.


그리고 Fine.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도(C)로 끝을 맺는 <폭풍>의 시간이 멈춘 장면은, 긴 여운 끝에 두 손이 피아노의 건반에서 아쉬운듯 떨어지자마자 파삭 구겨져 눈 앞에서 사라져 간다.


그게 못내 아쉬워 흰 건반을 두 손으로 만지작 거렸지만, 이내 관뒀다.


체르시니...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작곡가였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곡을 썼을까. 무슨 상상을 하며 그 음표들을 수 놓았을까.


어쩌면 그녀의 해석이 완전히 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좋아하는 이유에는 그의 천재성과 떠올릴 때마다 한숨 섞인 감탄을 자아내는 작품들도 그렇지만.... 그의 작품들은 사실 모두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어떻게 시작하든, 어떻게 그 모습을 바꿔가든. 전부, 빠짐 없이, 긍정적인 끝을 맞이한다. 기쁘게.


그것을 보며, 가끔 생각에 빠지곤 했었다.


자신은.. 어떠할까.


저도, 그 마을소녀처럼 될 수 있을까.


행복한 미소를 입에 한 가득 베어물고서.


딩- 딩---- 딩-


조용해진 방이 조금은 어색해 의미 없이 하얀 건반들을 소심하게, 정성 들여 눌러본다.


딩-----.




작가의말

또 늦었군요....; 송구합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하고, 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음, 이번편 피아노 부분, 좀 이해가 안 가실 수도 있지만... 양해해 주십시요... ㅎㅎ;; 좀 많이 지루 할 수도 있지만 이번편은 앞으로 소설의 방향, 등등을 위해 꽤 중요할 듯 싶습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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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h.1 세라흐의 바다 12.11.23 394 3 5쪽
4 Ch.1 세라흐의 바다 +2 12.11.23 609 5 10쪽
3 Ch.1 세라흐의 바다 12.11.23 565 5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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