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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티아 & 그라티아

꿈 속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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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티아94
작품등록일 :
2012.11.23 04:09
최근연재일 :
2014.11.29 07:32
연재수 :
26 회
조회수 :
12,438
추천수 :
77
글자수 :
133,197

작성
12.11.23 11:00
조회
493
추천
4
글자
11쪽

Ch.1 세라흐의 바다

DUMMY

아침식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오자마자 베르타와 나는 월요일에 -그러니까 6일 후에- 떠날 여행을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실 열심히 -혹은 정신 없이- 이리저리 오가며 짐을 챙기는 베르타를 나도 좀 거들어주고 싶었지만, 내가 나선다면 되려 베르타가 싫어 할 것을 알기에 하는 수 없이 침대 위에 늘어져서 그녀의 움직임을 눈으로만 좇았다. 그러다 문득 조금 물어보고 싶은 것이 떠올랐지만 자세가 불편해 잠깐 보류하기로 했다.


우선 바르게 엎드려서, 팔꿈치 밑엔 푹신한 베개를. 그리고 윗몸은 조금 일으켜 양 손으로 얼굴을 괴어 지탱하고-


"베르타."


아- 이제야 좀 편하네.


"네?"


"아, 원한다면 계속 일하면서 들어.. 음, 베르타도 여행가게 되서 좋아? 갑자기 조금 궁금해져서."


"네? 아, 물론이죠! 세라흐의 바다는 모든 여자의 동경인걸요-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레 아가씨를 모시고 가게 되서 기뻐요."


뜬금 없는 질문에도 상냥히 대답해 주는 그녀의 미소엔 거짓 한 점 찾아 볼 수 없었다. 매우 어릴적 내게 붙여진 베르타는, 시중인이라기 보다는 소중한 친구였다.


"응- 나도 너와 같이 간다 생각하니 기뻐. 헤헤- 마차 안에서 그 동안 잘 하지 못했던 얘기도 나누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네, 그렇죠-"


계속 짐을 싸면서 대답하는 베르타의 얼굴에도, 빈둥거리며 묻는 내 얼굴에도, 소박한 기대가 떠올랐다. 가끔 타 보는 마차는 몸이 찌뿌등 해져서 그닥 좋아하진 않지만, 동행 할 친우덕에 마음이 설레었다.


"아니면 잔뜩 만들어 갈 간식거리를 먹으면서 게임을 하거나 수를 놓을 수도 있겠고, 하다 못해 같이 책이나 읽는다던가.... 사실 베르타랑은 뭘 해도 재밌을 것 같아."


제 웃는 얼굴을 두 손에 괴고 귀족영애 답지 못 하게 두 다리를 공중에 번갈아 가며 흔들어대면서 하는 아이레의 말에, 베르타의 가슴이 찡하고 울렸다.이리도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외롭게 두신 백작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가끔은 건방지지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자주 들었다. 어제 이안 도련님을 위해 몰래 부엌에 들어가셨을때도...


"아가씨!"


"으, 응?"


"새벽에 몇 시간 밖에 못 주무셨잖아요! 피곤하지 않으세요? 주무셔야 될 것 같은데-"


"괜찮아- 음, 아마도...?"


하지만 아이레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실 아까부터 눈이 조금 따가웠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하루도 빠짐 없이 10시에 침대에 들고 6시에 일어나는, 수면에 있어서는 꽤나 성실한 아이레였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늦은 새벽에 잠들고 고작 몇시간 밖에 못 잤으니, 지금까지 정신이 깨어 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였다.


"아니, 괜찮을리가 없잖아요! 그러게 제가 그렇게나 주무시라고 말씀드렸는데- 아무튼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좀 주무시도록 해보세요, 네?"


"아,알았어. 알았다구-"


순간 언젠가 마차를 타고 가던 날, 창밖의 시장터에서 자식에게 잔소리를 말 그대로 퍼붓고 있었던, 그래서 제 뇌리에 참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한 튼튼한 체격의 여인이 베르타의 위에 잠시 겹쳐보여서, 흠칫했다.


어느새 침대로 다가와 억지로 이불속으로 나를 집어넣는 베르타의 손길에 얌전히 따라 누우며 피곤한 몸의 긴장을 풀었다.


"너, 도 적당히 일해, 베르타.. 너도, 꽤, 피곤 할 테니..."


"예, 알았어요, 아가씨. 그리고 안녕히 주무세요."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는 베르타가 조금맣게 웃은 것 같다.. 내가 대꾸를 했던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끝으로 눈이 감기고 정신이 팍- 하고 끊겼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오후의 강한 햇살이 반투명한 커텐을 내리쬐고 있었다. 방 전체가 따사롭고 나른한 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으음, 몇 시지-?"


나른한 팔을 뻗어 침대 옆 둥근 협탁위를 더듬어 눈 앞으로 가져와 확인한 시계에 따르면 지금은 3시가 되기 8분쯤 전이었다. 우와, 많이도 잤네..


탁-


시계를 원래 제 자리에 돌려놓고 아직도 누운채로 방을 대충 흝어보니 아마 대부분의 준비는 끝난 것 같았다. 빨리 준비를 마쳐서 나쁠 것은 없겠지.


하아아암-


한 손으론 입을 가리고 길게 하품을 하며 나머지 남은 팔은 쭈욱 뻗고 기지개를 펴니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자고 일어난 탓에 이불이랑 베개자국이 꽤나 선명하게 그려진 두 팔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혼자서 웃고 있을때, 문득 오른손에 시선이 갔다.


그리고 그 순간, 얼음장처럼 찬 물을 머리부터 발 끝까지 뒤집어 쓴 듯한 기분이 들며 마음이 잔뜩 불편해졌다.


뭐야- 뭐였지? 뭔가 분명히 있었어. 분명 어떤 꿈을 꾸었는데..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또 아인티스 대공의 꿈이었을 것이다. 분명 무슨 안 좋은 소식을 들었는데..? 설마, 오라버니에 대한 것이었나? 아니, 아니야, 그건. 다른 건 몰라도 분명 이안 오라버니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지?


아무리 기억해내려 애를 써 보아도- 순식간에 차가운 파도에 휩쓸려, 오로지 그 희미하디 희미한 흔적만 남기고서 사라진 모래사장위의 짓궃은 낙서처럼.... 그 불안하며 기묘한 기시감만이 간신히 손에 형체 없이 잡힐뿐, 그 꿈과 이 초조함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건져낼 수 없었다.


정말, 뭐였을까...


이런- 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아까의 황홀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착 가라앉았다. 깨어났을 때 분명 따스하고 아늑하게 느껴졌었던 방 안은, 지금은 그저 음울한 감옥처럼 느껴진다. 커텐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햇살은 여전한데도...


그나저나, 오라버니는 잘 가고 있을까... 이따금식 멈춰서서 내가 정성스럽게 만들어준 것들을 먹어 보겠지.. 아침에 간단하게 차려 입고 혼자서 떠난 오라버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새하얀 셔츠위에 검은 조끼였던가-? 그 밑에 또 검은 바지와 검은 가죽 부츠를 신었지.. 거기에다 흑마를 타고- 청회색 눈동자와, 마지막으로 바람결에 짧은 비단처럼 흩날리던 까만 흑청발을 기억한다. 언제나 부러웠던, 그 아름다운 흑청발...


한 손을 올려 기다란 내 머리카락을 조금 집어서 들어올렸다. 우유빛에 가까운 연분홍색 머리카락. 아버지와 이안 오라버니의 까만 흑청발과도, 어머니의 강렬한 적발과도, 지나치게 차이 나는, 희미하기만한 빛깔의 머리카락이다. 어머니쪽에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머리카락을 지니셨던 할머니가 한 분 계셨었다고 들었지만, 별로 크게 위로가 되진 않는다. 그저, 난 오라버니의 그 새까만 머리카락이, 너무도 부러웠을 뿐이다. 어릴적 하루에도 몇번이나 거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는지 모른다. 비첼렌가와 나는, 지독히도 안 어울렸다.


매일 아침 스스로 난 행복하다고, 난 행복하다고- 되뇌이지만, 가슴속 깊이 뿌리박힌 이 열등감은 잠시동안만 가려질 뿐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라버니가 아카데미와 후계자 수업, 그리고 검수련에 노력을 쏟아 부을때, 난 그런 오라버니가 자랑스럽고 잘 되길 바라는 한편, 질투심도 들었다. 결정적으로 이안 오라버니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자신을 들어내길 주저치 않았으나, 난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대도 봐주는 사람 하나 없을까봐, 나의 쓸모 없음이 세상에 적나라하게 들어날까 두려워-


물론 스스로의 비논리를 모르지는 않았으나, 그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죽는 것처럼 무서웠다. 이토록 한심한 겁쟁이기에.


가족을 닮고 싶었다. 그들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이안 오라버니가 떠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이 모두가 이루어지지 못할 꿈....


아아, 또 다시 쓸데없이 우울해 졌다.

빰 위를 타고 흐르는 미지근한 물줄기를 무시하며, 몸을 느릿하게 일으켰다. 아까부터 걸리던 소리가, 빗소리였나- 유리창문을 시원하게 튕겨대는 그 조그만 소리에 끝내 비가 오고야 만듯 싶었다.


포근한 이불을 몸 위에서 치우고 바닥에 맨발을 살며시 내려놓자 비 오는 날 특유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환한 창가로 다가가 창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빛을 다 차단해내지 못한 커텐을 살짝 걷어내자, 수시로 생겨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빗방울자국 너머로 탄성이 절로 나오는 창밖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끝 없이 이어진 젖은 산책로와 눈이 아리도록 새파랗게 빛나는 식물들로 가득한 정원, 그리고 끊임없이 내리는, 오후의 햇빛을 반사해 옅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가느다란 빗줄기들. 셀 수 없이 많은 그 물방울들의 추락이 온 영지를 뒤덥고, 백지처럼 새하얀 구름으로 시리게 감싸인 하늘은 높디 높은 천장처럼 머리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그 금빛 풍경이 나의 이 울적한 마음을 달래주듯 어루만지는 것처럼 느껴져서, 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어찌되었든 신은 자신에게 수 많은 것들을 선물하셨고, 그러므로 나는 행복해 마땅하다. 얼마동안 계속 창 밖을 응시하다가 이내 뒤돌아섰다. 안 좋은 생각들은 잊어버리자-


창에선 눈을 이미 때어냈지만, 한참을 지켜본 황금빛 보슬비는 나의 마음속에도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좋아진 기분을 안고 다시 쳐다본 시계는 3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지나 있었다. 저녁식사까진 아직 꽤 시간이 남아있고, 베르타도 보이질 않으니, 아까부터 몸으로 직접 느껴보고 싶었던 창 밖 세상으로 나가보기로 결심했다.


침대가에 벗어둔 상아빛 단화를 찾아 신고 옷차림을 살펴보니 다행히 아까 오라버니를 배웅할때 입었던 하늘색 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잔뜩 구겨진 드레스와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매만지며 방에 딸린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양산들 옆에 놓아두는 우산들 사이에서 레몬빛 우산을 골라 집어들었다. 홀로 이 우산을 쓰고 방금전의 그 아름다운 세상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하자, 가슴이 벅차오르며 설레었다.


드레스룸에서 나와 다시 침대가로 돌아왔다. 잠시 생각하다가 협탁 위에 작은 메모를 대충 남겨 놓았다.


'잠깐 정원에 산책하다가 올게! -아이레'


이거면 되겠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방을 나섰다.


달칵-


등 뒤로 문을 닫고, 손에는 노란 우산을 쥔채 뛰듯 걷다가 이내 정말로 뛰기 시작했다. 복도 한쪽으로 늘어선 창문들을 통해 황금빛 햇살이 감미롭게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점점 더 빨라지는 나의 발이 대리석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복도를 부드럽게 울렸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괜찮겠지, 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서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마셔야 한다는 다급함에. 그리고..


하하하하-


역시 난, 행복한 사람이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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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Ch.1 세라흐의 바다 12.11.23 479 2 8쪽
11 Ch.1 세라흐의 바다 12.11.23 433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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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Ch.1 세라흐의 바다 +2 12.11.23 619 7 8쪽
» Ch.1 세라흐의 바다 12.11.23 494 4 11쪽
5 Ch.1 세라흐의 바다 12.11.23 394 3 5쪽
4 Ch.1 세라흐의 바다 +2 12.11.23 609 5 10쪽
3 Ch.1 세라흐의 바다 12.11.23 565 5 8쪽
2 Ch.1 세라흐의 바다 12.11.23 772 3 6쪽
1 Prologue. 꿈 12.11.23 805 5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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