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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티아 & 그라티아

꿈 속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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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티아94
작품등록일 :
2012.11.23 04:09
최근연재일 :
2014.11.29 07:32
연재수 :
26 회
조회수 :
12,441
추천수 :
77
글자수 :
133,197

작성
12.11.23 11:24
조회
520
추천
3
글자
21쪽

Ch.2 황도 아란셰르타

DUMMY

오늘도 이 곳은 탐스러운 꽃들이 가득 피어있었다. 소녀의 양 옆으로 고개를 내민 커다랗고 붉은 꽃봉우리들이 어제보다 한층 더 아름답게 미소지어 온다.


어제 꼬마신사를 만났었던 정원을 가로지르며 그녀는 품 안에 가득 찬 서류철을 다시 고쳐 안았다. 파릇파릇한 생명으로 가득 찬 그 공간을 눈에 담으며 감탄의 한숨을 낮게 흘려보낸다.


아니, 사실 그 한숨에는 불순물도 조금 섞여들어 있었다.


....내가 정말 정령사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신성마법사라던가?


사실 어느쪽이든 그녀에겐 지독히 비현실적인 몽상처럼만 느껴졌다.


어릴때부터 이안 오라버니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손에서 예쁜 그림이 탄생하고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흠 잡을데 없는 손수건이 만들어질 때의 환희. 그 희열도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오라버니의 턱선을 타고 흐르던 땀방울에 한 조각씩 뭉게졌었던 기억들.


그녀도 쓸모 있는 아이가 되고 싶었었다. 두 손에 힘을 움켜쥐어 우리 영지에 큰 보탬이 되고 싶었었다. 하지만 어린 귀족영애로써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보였다. 자신이 그림 같은 걸로 나대는 것을 용납치 않으실 아버지를 잘 알아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이안 오라버니처럼 물리적인 힘이라도 기르자 싶었다.


그날밤 무작정 가장 가까운 정원에 몰래 내려가서 길다란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 초라한 막대를 생명줄인냥 붙잡고 꿈 속에서 가끔 보았던 소년의 검술을 어설프게나마 따라해보려 했다. 그 다음날의 밤도. 그 다음도. 그리고 그 다음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 아- 하고 깨달은 것은, 자신의 형편 없는 근력뿐. 그 날 조금 울었던 것 같다. 이안 오라버니처럼 되지 못해서.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검술만이 힘이 아니라는 사실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한 동안 잠자는 시간마저 아끼며 새로운 목표를 향해 노력을 말 그대로 쏟아부었다. 서재에서 책을 무더기로 꺼내와서 방 안에 틀어박혀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여자는 자고로 조신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지 않으실 것이 뻔하다면 독학으로라도 배우자, 하는 들뜬 생각에 발악을 했었다.


코피라도 터지는 날엔 더욱 더 열심이었다. 그 새빨갛고 금속 비린내 나는 액체가 자신이 영지와 가문을 위해 쏟아내는 노력의 훈장처럼 여겨졌었다.


손 대보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다. 날마다 침대 옆에 뒤죽박죽 뒤섞인 책더미로 탑을 쌓고 깜박 잠이 들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번번이 실패했다. 그녀는 마법사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무모하지만 흑마법이라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끝끝내 악명 높은 흑마법으로부터까지 거절받았던 그 날의 비참함.


물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귀족영애이기에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다. 오라버니처럼 되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행복할 것 같았다. 굶주렸던 애정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렴풋이 갈망하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아니. 너무 감정적이 되었다.


아무튼 결론은. 그 수 많던 책더미 중에 정령마법과 신성마법에 관한 것이 없었을리가 없다. 물론 에르나힐에서 거짓을 말할리는 없겠지만..


이젠 실망하는 일에 지쳤다. 그러니.. 기대도 말자, 아이레.


하지만 기대가 빠진 실험은 괜찮겠지.. 아이레는 애써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이 세상엔 정령이 존재할까? 정말 내 눈에.. 정령이 보일까?


몇 번이고 정원를 돌아보았지만 정령의 날개자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지도 모른다. 두 눈을 살며시 감고 마음을 차분히 먹었다. 그리고 자연을 느껴보자.


스르르 감긴 두 눈꺼풀 위에 그 너머 있을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쪽빛 하늘은 작은 새들과 새하얀 구름 조각들이 정성스레 수 놓고, 푸르른 잔디는 최고급 융단처럼 온 대지에 깔려 있으며, 굳건한 나무들은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들처럼 하늘 높이 치솟아 이 숲을 지키고 있다. 여기저기 조그마한 꽃들이 보석가루처럼 흩뿌려져 있고, 두개의 거대한 나무들 사이로는 시릴 정도로 투명한 시냇물이 하나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위를, 나무의 가느다란 손갈퀴 사이를 연약한 바람 한 점이 흝고 지나갈 때쯤.


천천히. 조심스레. 그 아름다운 풍경이 새겨진 엷은 장막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괜찮아. 괜찮다. 기대한 것도 없었으니 낙심할 것도 없다.


그렇게 그녀가 생각의 끈을 매듭짓고서 멈추었던 발걸음을 힘겹게 다시 떼었을 때, 순간 품 안의 서류철을 떨어뜨릴뻔 했다.


"레,레이디 아이레에!!!"


으아!! 놀래라..!


괴상한 비명이 입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다시 목구멍 안으로 억지로 쑤셔넣고는 그 커다란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몸을 틀었다. 이 낯 익은 목소리는..


역시나 상기된 얼굴과 별처럼 반짝이는 푸른 두 눈동자가 제법 익숙해진 꼬마신사 페르난이었다.


"아.. 오늘도 뵙는군요, 페르난."


"예,예!"


이미 발간 얼굴을 더 발갛게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인다. 쑥쓰러운 기색이 그 황금빛 정수리 위에 떠올라 있다.


귀엽다..


"..사, 사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혹 레이디를 다시 뵐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그런데, 여,역시 오늘도 레이디는 이 정원의 그 어느 꽃보다 백배, 천배, 아..니 만배! 는 더 아름답고, 더, 더.. 그러니까, 더 청초하고..!!"


어머나.


입가에 달콤한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어째서 이리도 귀여운걸까! 물론 저 말의 뒷 부분은 못 들은걸로 쳐주기로 하자.


"그렇습니까. 사실 저도 페르난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어제 너무 갑작스레 헤어지기도 했고..."


그 말을 듣자마자 활짝, 함박웃음을 짓는 그는 꽉 끌어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살인적으로 귀여웠다. 때마침 구름속에서 나온 태양이 쏟아낸 금색 빛에 흠뻑 적셔진 그의 고수머리가 아기천사의 금색링처럼 그의 동글동글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그 부들부들해 보이는 머리칼을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속으로 그의 진록빛 제복이 그에게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응? 제복?


빳빳한 재질의 고급스러운 진록빛 재킷에 하얀 바지, 그리고 까만 부츠를 신은 페르난은 무슨 꼬마기사처럼 보였다. 은실로 수 놓아진 저 문양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참. 제복이 굉장히 잘 어울리네요, 페르난."


"아..."


소년의 얼굴이 다시 발갛게 익기 시작한다.


"그, 그렇습니까? 사실, 오늘 이울렉셀 마법기사단에 견습기사 훈련이 있어서..."


"우와- 대단해요, 페르난! 마법사셨군요! 그 어린 나이에...."


진심으로 놀랐다.


"아, 아니..."


"-안니베르크 군!!!!!"


새빨간 얼굴의 페르난이 다시 입을 떼었을 때 정원 안을 가득 울리는,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리고.. 소년은 헉- 소리를 내며 고개를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돌렸다.


소년의 뒤로 똑같이 진록빛 제복을 갖춰입은 중년의 남자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체,체,체스터 경.."


"..훈련 도중에 기사단을 이탈하면 어쩌겠다는 거냐!!"


헐. 그런거였어? 하는 시선으로 그녀가 페르난을 쳐다보자 식은땀을 흘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린다. 사실은 그 모습마저도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저.. 그, 그것이.."


"이럴 시간 없다! 누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면 당장 돌아가지!! 레이디, 실례하겠습니다."


순식간에 정중한 말투로 바뀐 남자에게 그녀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아- 예. 그럼 다음에 또 봐요, 페르난."


"으으, 네- 제, 제가 반드시 레이디를 구해드리러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 이 녀석이!!! 허구한 날 읽으란 마법서는 안 읽고 삼류소설만 읽고 앉아 있더니!! 실례합니다, 레이디."


....뭐, 뭐지..


남자에게 끌려가다 싶이 멀어져가는 소년의 뒷모습에 문득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그렇게까지 내가 보고 싶었던 걸까. 동생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한바탕 소란스러워졌었던 정원을 다시 가로지르며 머리 위의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페르난도 마법사였구나... 하지만 덕분에 조금은 우울했던 기분이 가신 것 같다.


다시 걷고 걷고 걸으니 페르난의 버터형을 만났었던 중앙궁이 나왔다. 그 길목에서 왼쪽으로 꺽고 계속 걸어가면 카르티옌이 나올거다, 아마.


그리고 다행히 그녀의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파릇파릇한 나무들로 가득 찬 가로수길을 지나 모퉁이를 돌자 짙은 남색의 지붕으로 덮힌 커다란 건물들이 몇 채 보인다.


곱게 포장된 길을 따라 그 중 가장 큰 건물로 들어섰다. 절제되고 근엄한 분위기의 건물 덕에 한층 더 긴장되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홀의 중앙에는 길다랗고 새까만 책상이 있었고 그 뒤엔 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몇 명 앉아 있었다. 조용한 홀에 그녀의 희미하게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와 간간히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울려퍼진다.


"저.. 실례합니다."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다가가니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올린다. 넓은 홀 안에 자신의 목소리만이 커다랗게 울려퍼지니 기분이 상당히 묘했다. 다시 잽싸게 뒤를 돌아 이 곳을 뛰쳐나가고 싶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예, 무엇을.. 흐,흠-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레이디?"


왠지 조금 자신의 얼굴을 본 후 목소리의 톤이 미묘하게 바뀐 것 같았지만..


"...혹 기사 면회가 가능한가요..? 이아네스 비첼렌이라고..."


"아, 이번에 새로 들어온 비첼렌 경 말씀이시군요. 물론입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쉽잖아?


나머지 기사분들께 인사를 받고서 그를 따라나섰다.


둘은 건물에서 나와 벽을 따라 걸었다. 조용한 길은 금새 거대한 연무장으로 이어졌다. 검신이 서로 마찰하는 특유의 요란한 소음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연무장은 조용했다.


마침 휴식시간인지 기사들은 계단식 관중석에 모여 앉아 있었다.


둘이 다가가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봐. 비첼렌 경 어디있나?"


밤색의 머리칼이 따뜻해 보이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잠시 뭘 좀 가지러 간다던데... 면회인가?"


"그렇네. 음- 곧 돌아올 것 같이 보이는데 혹 기다리시겠습니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러겠습니다."


"전혀 되지 않습니다. 우선 여기 앉으시지요."


"아, 감사합니다, 경."


그가 정중하게 품 안에서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 깔아준 좌석에 조심스레 앉았다. 내심 긴장해서 멀뚱멀뚱 앉아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연무장이 굉장히 허전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비첼렌 경과는 무슨 관계이신지 물어도 됩니까?"


"예? 아- 여동생입니다.."


순간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해 휙- 몰려들어 당황스러웠다. 마치 음식냄새를 맡은 강아지들이 손에 들린 접시를 시선만으로 구멍을 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여동생말입니까?!"


"그때 그..!"


"-저,정말입니까?"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목소리들 때문에 어느것에 먼저 답해야 할지, 조금 난감하다. 식은땀이 조금 날 것도 같다. 이 사람들 왜 이러지..


"어, 저기.."


"자네들. 우선 좀 떨어지게! 레이디께서 당황하신 것 안 보이나."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그녀를 이 곳으로 안내해준 기사의 말에 군말 없이 다시 제자리들로 돌아가는 기사들이었다.


"그나저나 혹 전에 이안 경에게 이만한 간식바구니를 선물한 것이.. 레이디입니까..?"


친절한 기사의 두 팔이 둥그렇게 구부러지며 바구니의 대략적인 크기를 나타냈다.


"..거기에 남색 리본이 매달려 있었던 것이라면, 아마 제가 맞을거에요..."


갑자기 연무장이 확 밝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몇몇의 입에선 헛숨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오오..! 드디어 만나는군요..!"


"...네?"


"먹는 행위가 그렇게 행복하고,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이안 경이 너무 많다며 그 것을 나눠 먹으러 가져온 그날 말입니다..!"


"...제가 만든 음식이요..?"


왠지 지금 자신의 얼굴이 아까 페르난만큼 새빨갈것 같다. 아니, 어쩌면 더 심할지도... 햇빛 아래 몇 시간 동안 노출된 피부처럼 두 뺨이 화끈거렸다.


"예! 언젠가 만나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는군요.... 그렇지! 혹시 부탁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런 것 없어요.. 다만 이안 오라버니를 잘 부탁드려요.."


사실 자신이 정성 다해 만들었던 것을 그리도 맛있게 먹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그 점은 걱정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강직하고 열심인 그를 싫어하는 자는 이 곳에 없습니다."


다들 호의적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행이다. 오라버니는 황도에서 적응을 잘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오라버니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 마침 저기 이안 경이 오는군요!"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 그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며칠 전에 봤을 때는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카르티옌의 수련복을 편하게 차려입은 그는 몇 달 동안 더 멋있어진 것 같았다. 키도 조금 더 큰 것 같고... 참. 누구네 오라버니인지!


그리고 칭찬은 고래도 춤춘게 만든다고 했던가? 다시 고개를 기사님들 쪽으로 돌렸다. 고래는 아니지만 자신의 심장은 지금 춤추고 있는 것 같다.


"만약 원하신다면.. 언젠가 또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것."


"..정말이십니까? 안 그러셔도 되는데..... 라고 말하고 싶지만. 지나치게 맛있었으니 사양은... 차마 못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럼 그렇게 할게요."


"가, 감사합니다! 엇, 그러고보니 통성명도 아직 안 했군요!! 흐,흠- 저는 유스틴 켈라트 베렌위셔입니다, 레이디."


훗. 친절하고 기분 좋은 아저씨다.


"저는 아이리엘라 율리안트 비첼렌입니다, 베렌위셔 경."


그리고 그 뒤로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기사와 통성명을 마쳤을 때쯤 이안 오라버니가 넓은 연무장을 가로질러 이쪽에 도착했다.


"아이레. 몸은 좀 괜찮아졌나 보구나. 그런데 이 곳엔 왠일이냐."


오늘따라 이안 오라버니 특유의 무뚝뚝한 목소리조차 무척 반갑게 느껴졌다. 그래서 환하게 한 번 웃어주고 대답하려는 찰나-


퍽-!


순간 베렌위셔 경의 큼지막한 손바닥이 이안의 등을 장난스레 후려쳤다. 하지만 아이레는 입이 살짝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의 몸은 미동 하나 없었지만 만약 자신이 저 것에 맞았더라면 분명 어디 몇 군데는 부러졌을 것이다. 우지끈! 하고.


"하하! 이안 자네, 하나뿐인 여동생한테 그리 무뚝뚝하게 굴면 어찌하나! 부러운 녀석! 아무튼 우리는 볼 일 볼테니 자네는 레이디와 느긋하게 이야기 나누고 오게. 그럼 저희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레이디 아이리엘라. 만나서 진심으로 반가웠습니다."


"저에게도 매우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까 안내 감사했습니다, 베렌위셔 경."


"아닙니다. 그럼 언젠가 또 뵙겠습니다."


기사들이 각자의 볼 일을 재개하러 어느새 흩어지고, 관중석에는 이안과 아이레만 남았다.


"그래. 무슨 일이냐, 아이레?"


그래도 이번에 자신이 다치고 나서는 좀 더 다정하게 대해줄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아, 이거. 오늘 샤르테다 경이.. 어쩌면 내가 정령사나 신성마법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에르나힐에서 키워주고 싶데... 그거 계약서인데 오라버니가 한 번 봐야 할 것 같아서.."


"그래?"


서류철을 넘겨받은 그가 그 것을 팔락팔락 넘기며 처음부터 끝까지 눈으로 주욱 흝어내리기 시작했다. 꽤나 두꺼운 것인데도 얼마 걸리지 않아 서류철은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원상태로 돌아갔다.


"괜찮을 것 같네. 네가 하겠다면 네 현재 보호자로써 서명은 내가 해주지."


그리고 나와 두 눈을 맞춰오는 오라버니가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의 망설임 후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고 싶어. 해 보고 싶어."


마지막 가능성까지 시도해 보고 싶었다.


"그래. 그럼 따라와라. 지금은 펜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다시 연무장을 나와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그의 숙소로 따라 들어갔다. 걱정, 고민 따위는 등 뒤로 던져놓고 오라버니의 발 뒤꿈치만을 따라 걷는 것. 굉장히 오랜만으로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걸어본 것이 언제였지? 세 달 전이었던가?


"..생각보다 넓고 좋네.."


이안이 책상서랍을 열어 적당한 만년필을 꺼내는 동안 그녀는 오라버니의 침대에 털썩 앉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사치품 따위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었지만 필요한 것은 다 있었고 또 모조리 값비싼 것들 뿐이었다.


"아무래도 카르티옌이니까.. 여기 있군."


고급 만년필을 손에 쥐고 책상 앞에 앉은 이안은 서류철을 특정 페이지들로 넘기고는 지극히 우아하고 단정한 자세로 몇 번인가 펜을 매끄럽게 놀렸다.


"..네 차례다, 아이레."


곧 자리에서 비킨 후 만년필을 자신의 쪽으로 내미는 오라버니의 손에서 까만 만년필을 건네받고는 의자에 앉았다.


아이리엘라 율리안트 비첼렌.


오라버니가 넘겨주는 페이지마다 오라버니의 서명 옆에 자신의 이름을 까만 잉크로 수 놓았다. 오라버니의 강인하고 남성적인 서명 옆에 자리 잡은 자신의 섬세한 이름이, 마치 그들이 어릴 적으로 돌아간 듯한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뭐, 기실 자신은 지금도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굴기는 한다. 이안 오라버니야 어른스럽지 않았던 적이 없고.


서명란이 모두 다 채워지자 하얀 서류철이 다시 탁- 하고 덮어진다.


"..고마워, 오라버니."


"아니다. 여기 있다. 난 이만 수련을 마저 하러 가야 하니 조만간 다시 보자."


"..응."


서류철을 건네받고 오라버니가 열어주는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닫혀있는 방문을 몇 개 지나쳐서 다시 건물 밖으로 나오고 오라버니는 연무장으로 가는 길, 그리고 자신은 중앙궁으로 가는 길로 가기 위해 갈림길에서 등을 돌렸다.


"....열심히 해 봐라, 아이레."


아이레는 순간 잘못 들었나,하고 생각했다.


"....응.. 그럴게. 고마워,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수련 열심히 하고.. 헤헤."


무심히 들리지만 빈 말을 할 오라버니는 아니기에 순식간에 기분이 들떴다. 정말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좀 더 조신히 굴고. 먼저 가라."


"알았어!"


뒤 돌아서 그에게 손을 한 번 크게 흔들어 주었다. 순간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려서 너무 요란하게 흔들어댔나 싶어 찔끔했지만 모른채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사실은 뛰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몽실몽실했지만 지금은 등 뒤를 지켜보고 있는 오라버니 때문에 자제해야만 했다.


이안 오라버니는 내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던 느낌이었고, 나는 한껏 마음이 부푼 채로 품 안의 서류철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내가 정말 정령마법사라던지, 신성마법사라던지.. 그런거였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자신의 작전이 잘 먹혀들어 마음이 뿌듯하다. 간식을 잔뜩 싸보내어 동료기사분들과 사이 좋게 나눠먹게 만들겠다는 그 계획. 아주 제대로 먹혀들었다! 흐흐- 역시 아무리 무뚝뚝한 오라버니라도 그 꾹꾹 눌러담은 커다란 바구니를 혼자서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덕분에 재미있는 기사아저씨와도 친해지고.


다음 번에 싸줄 바구니에는 어떤 과자, 사탕, 케잌 등등을 넣어볼까. 행복한 고민을 한창 하고 있을 때였다.


"실례합니다, 레이디."


"-아, 실례합니다."


상상의 바다에 풍덩 빠져 잠수를 하느라 맞은 편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는 소리도 못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좁은 길목에서 정중앙을 차지하고 느릿느릿하게 걸어가고 있어서 낯이 조금 뜨거워 졌다.


재빨리 길을 한 옆으로 비켜주고 자신이 왔던 길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남자의 얼굴을 무심코 쳐다보았다. 남색의 제복 차림에 아- 오라버니네 기사단 식구구나, 했지만 그 얼굴을 보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개를 조금 꺾어들고 나서야 그 얼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이. 그녀는 그 순간 그저 알 수 있었다. 무지막지한 거인의 주먹이 예고도 전조도 없이 뒷머리를 쿠웅- 하고 후려치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그 남자다.


작가의말

음, 이걸로 지금까지 써 놓은 것은 모두 다 올렸습니다! 앞으로 계속 써서 올리겠습니다! ㅎㅎ 근데 제가 요즘 좀 많이 바빠서 연재주기는 좀 느립니다. 하지만 연중 같은 것은 계획에 없으니 양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ㅎㅎ;; 그럼 이번편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ㅎㅎ 드디어 대공님이랑 스치듯이지만 만났네요... 앞으로의 일이 난관인..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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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Ch.1 세라흐의 바다 +4 12.11.23 437 2 13쪽
12 Ch.1 세라흐의 바다 12.11.23 479 2 8쪽
11 Ch.1 세라흐의 바다 12.11.23 433 2 14쪽
10 Ch.1 세라흐의 바다 +2 12.11.23 675 2 7쪽
9 Ch.1 세라흐의 바다 +2 12.11.23 578 3 13쪽
8 Ch.1 세라흐의 바다 12.11.23 591 4 7쪽
7 Ch.1 세라흐의 바다 +2 12.11.23 619 7 8쪽
6 Ch.1 세라흐의 바다 12.11.23 494 4 11쪽
5 Ch.1 세라흐의 바다 12.11.23 395 3 5쪽
4 Ch.1 세라흐의 바다 +2 12.11.23 609 5 10쪽
3 Ch.1 세라흐의 바다 12.11.23 565 5 8쪽
2 Ch.1 세라흐의 바다 12.11.23 772 3 6쪽
1 Prologue. 꿈 12.11.23 805 5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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