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vs 마녀(168)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아!
앨빈은 스카레이와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알지? 상대는 평범한 기사다. 될 수 있는 한 우리 실력을 노출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케이사르는 원래 내세우기 좋아하는 성격이다.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면 돼. 결투에서 진다고 뭐라고 할 사람이 없으니 적당히만 해. 단 어제저녁 물리친 야수 정도는 잡을 수 있다는 실력 정도는 보여 줘야 해."
"적당한 것이 어렵습니다. 적당히 할 수 있는 무공이 있습니까? 아예 무공을 쓰지 않겠습니다."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좋겠지. 만약 검법을 사용하게 된다면 내공 없이 채기법으로 해라. 검법을 사용하게 되면 우리가 마교 출신이란 걸 어렵지 않게 알 것이다. 하지만 요즘 용병 중에는 마교 출신이 많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제가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나이가 가장 많고, 생각 깊은 셋째 제딘이 나서자 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 중에서 성격이 가장 침착하고 사려가 깊다. 나이가 가장 많음에도 불구하고 첫째와 둘째에게 늘 깍듯이 대한다.
오히려 첫째와 둘째가 셋째 제딘에게 자문할 때가 더 많다. 앨빈이 은연중에 그런 제딘에게 더 많은 신경을 써 주고 있다.
"조심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겠지? 케이사르의 유흥에 어울리는 것이 시간을 버는 길이라면 기꺼이 해 줄 테니. 이 시각 모그룩과 아가므네는 세 권의 책을 찾기 위해 반사르성을 누비고 있을 거다. 여기서 시간을 벌어주는 만큼 그들은 쉽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케이사르가 이곳에 있는 만큼 그의 개인 서재나 침실을 마음 편히 조사할 수 있다.
연무장에는 이미 기사 한명이 준비하고 있었다.
검과 방패를 착용한 다소 평범해 보이는 기사였다.
제딘은 그의 모습을 보고 생각을 달리했다.
'이런 평범한 기사를 앞세워 대결을 보겠다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제딘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오자 시퍼런 예광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빛은 엘리시움 검에서 나오는 푸른 예광은 아니었다.
앨빈은 제자를 시켜 무기 상점에서 가장 좋은 검을 사 오도록 했다.
만약 케이사르가 엘리시움 무기를 알아본다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서 무기를 교체하였다.
제딘은 기사의 움직임을 세밀히 살폈다. 별다른 특징은 없어 보였다.
상석에서는 케이사르가 그 옆에는 필포드경이 아래 연무장에는 수비대장의 세브란 백작이 거대한 투핸드 소드를 거꾸로 땅에 박고 지켜 보고 있다.
그 외 경비는 없었다.
'이상하군. 무려 후작이 직접 연무장을 찾았는데 경비가 아예 없다고?'
제딘은 오랫동안 아칸에서 왕궁 근위대로 근무했었다.
그래서 귀족의 생활상이라거나 전후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연무장 안에는 자신과 대결을 벌일 기사 외에 네 명의 기사가 더 있었다. 그 외에는 전혀 사람이 없었다.
'사람이 없다는 것은 숨기고 싶은 것이 있다는 이야기다. 뭔가 일이 잘못 되어갈 수도 있겠는걸.'
"대련을 시작하라."
제딘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어느새 연단 위로 올라간 세브란 백작이 대련의 시작을 알렸다.
방패를 든 기사는 천천히 제딘을 향해 다가왔다.
원래 방패병은 방어 특화로 움직임을 그리 빠르지 않았다.
'방패병을 내세운 것은 우리가 가진 검법을 보여 달라는 소리군.'
태청과 매화는 용병들에게 잘 알려진 검법이다. 이 둘을 숙달하면 졸업할 수 있기 때문이며 솔라리스의 용병 중에서 마교 출신이 제법 많다.
태청은 간결하고 무거운 검법이라 남자의 검법이라 불렀고 매화는 변화가 심하고 날렵한 검법이라 여성의 검법이라 불렀다.
같은 검과 대결할 때는 변화가 심한 매화를 사용했고 방패나 투핸드 소드를 상대할 때는 무거운 검법인 태청을 사용했다.
제딘은 태청을 펼쳐 일부로 방패를 가격했다.
-탕, 탕, 탕
검이 방패를 두드리자 경쾌한 소리가 났다.
제딘은 내공은 올리지 않고 채기법으로 내공 대신 마나를 사용했다.
내공만큼 날카로운 맛은 없지만 검법을 펼쳐내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내공 없이 검법을 펼치는 것이 어색할 정도였다.
-휘이익
방패를 든 기사는 제딘의 태청을 방패로 막아내고 검을 휘둘러 공격해 왔다.
역시 평범한 수준의 솜씨. 6성 정도의 마나가 깃든 오라 블레이드다.
제딘은 태청을 펼쳐내며 적당히 기사의 검을 받아쳤다.
방패를 쥐고 있다고 해도 제딘의 눈에는 기사의 빈틈이 수도 없이 들어왔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급소에 검을 박아 넣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적당히 공방을 주고받다가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쫙
그때 뒤쪽에서 손뼉 소리가 들렸다.
손뼉을 친 사람은 세브란 백작이었다.
-피이잉
제딘은 한 호흡을 들이키며 재빨리 천마행공을 사용해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눈앞으로 방패가 쑥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방패는 멀어지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다가왔다.
천마행공을 사용한 것임에도 상대는 전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다 빠르게 다가왔다.
제딘은 몸을 틀어 우측으로 피하는 순간 태청을 펼쳐냈다.
-캉, 캉, 캉
조금 전과 전혀 다른 소리가 났다.
제딘의 눈썹이 꿈틀했다.
반발력이 달랐다. 조금 전 방패를 쳤을 때의 반발력과 지금의 반발력은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이놈 힘을 숨기고 있었나?'
제딘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상대의 검과 맞부딪치면서 모든 생각이 달아나 버렸다.
-깡!
"욱!"
손에 전해진 감각은 아까와는 천지 차이였다.
묵직하고 단단한 것을 때려 뒤로 튕겨날 정도의 강한 반발력이 손아귀에 그대로 전해졌다.
-휘이이익
자신의 검은 튕겨 나갔는데 상대의 검은 그대로 자신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상대 기사의 완력이 엄청난 수준에 이르러 있었고 검의 속도 또한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지쳐 들어왔다.
'본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내공을 쓰지 말라고 했지만, 별수 없게 됐군.'
채기법만으로는 막기 힘들 정도의 속도를 가진 검이었다.
허공에서 검이 움직이는 데 '붕붕'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앨빈은 갑자기 변한 상대의 공세에 눈을 가늘게 떴다.
'저놈 뭔가 이상하군.'
앨빈은 그의 움직임을 보고 그가 마족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당연할지도 모른다. 갑자기 변한 사내의 공세는 인간의 활동력을 월등히 뛰어넘는 신체 능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천마행공으로 움직이는 제딘을 더 빠르게 따라붙으며 눈으로 좇기도 힘든 속도로 검을 휘둘러 댔다.
'마족이다. 마족이 아니면 저런 움직임을 낼 수 없을 거다. 어떻게 하지?'
앨빈은 스카레이와 테세라에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여차하면 난입할 생각이었다.
케이사르는 매우 평안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고 필포드도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놈들 마족을 시켜 우리를 말살할 계획인가?'
앨빈은 허리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갔다.
-캉, 캉, 까깡
검과 검이 부딪치고 붉은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두 사람의 위력을 검이 견디지 못하고 수많은 불통을 만들어 냈다. 격검에 의해 검의 이빨이 보기 흉하게 드러났다.
오라 블레이드가 오른 검은 쉽게 망가지지 않는다. 그건 마나가 보호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가 빠지는 것은 검을 휘두르는 완력이 오라 블레이드의 단단함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제딘도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오직 마족뿐이라고.
'어쩐지 경호하는 사람이 없다더니 마족을 이용하려고 했나?'
승패에 상관없이 적당히 놀아 주다 손을 털려 했다. 하지만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 별다른 수가 없었다.
한 호흡 깊은숨을 삼킨 제딘은 내공을 끌어 올렸다.
손에 쥔 검으로 내공이 주입되자 초봄 언 강의 얼음이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쉬이이이익
검의 움직임이 매섭게 변해 방패를 든 기사를 몰아 붙였다.
앨빈은 초조해졌다. 놈이 마족인 만큼 케이사르의 본심은 하나였다. 살인멸구.
"준비해."
-파악
제딘은 단 일검에 방패병이 들고 있는 방패를 정확히 반으로 잘라 버렸다.
"호오?"
보고 있던 케이사르가 뒤로 눕혔던 상체를 세우며 감탄사를 내질렀다.
단단하기로 소문난 물풀레나무에 철갑을 두른 방패는 검으로 절대 자를 수 없는 방패다.
물푸레나무는 기타 나무와 달리 결대로 갈라지는 성질의 나무가 아니다.
도끼로 아무리 내려쳐도 찍히기는 할 뿐 쪼개지지는 않는다.
그런 물푸레나무를 강철로 감싼 방패를 검으로 잘라 낼 수 있는 사람은 최소 소드 마스터의 칭호를 받아야 가능할 정도였다.
갑자기 제딘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방패를 자르니 당연히 방패를 잡고 지탱하던 왼 팔뚝이 같이 베어진 것이다.
상처에서는 시뻘건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제딘과 앨빈은 동시에 놀랐다.
기사가 흘리는 피는 마족의 검은피가 아닌 인간의 붉은 피였다.
'뭐라고? 인간이 어떻게 마족의 신체 능력을 갖추고 있는 거지?'
놀랍게도 제딘과 상대한 기사는 인간이었다. 베인 상처에서 쏟아지는 피는 붉디붉었다.
"잠시 중단하고 치료하도록 해라."
세브란 백작의 고함에 기사는 제딘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딘도 엉겁결에 마주 고개를 숙여 답했다.
"과연, 소문이 진실이었구나. 보통 용병이 아닐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어. 일루엠이 큰 의뢰를 부탁할 만한 솜씨다."
케이사르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앨빈과 제딘은 좀처럼 분위기를 읽지 못했다.
마족을 시켜 자신들을 죽이려 함이 아니었던가? 어찌 저리도 태연할까?
"어떠냐? 실력이 그것만이 아니지? 좀 더 보고 싶구나."
그 말에 세브란 백작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 다른 기사를 한 명 지목했다.
"그대들도 원하면 상대를 바꾸어도 좋소."
"괜찮습니다. 저 혼자 아직 충분합니다."
이번에 등장한 기사는 상당히 기괴한 검을 소지하고 있었다. 일반 기사가 쓰는 검은 아니고 자신의 무예에 맞춰 제작한 특별한 검인 모양이었다.
롱소드와 같은 한손검 크기지만 길이가 투핸드 소드에 맞먹었다.
앨빈의 신경은 바짝 곤두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마족이 아닌데 인간이 저런 신체 반응 속도를 보이다니 소드 마스터급도 아닌 일반 기사가? 케이사르는 무슨 목적으로?'
"시작하라."
-피이이잉
세브란 백작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대검의 기사는 전력으로 달려 들었다.
'확실히 속도는 준마족급니다.'
동탑의 조사관 레노번이 정리한 마족편람은 마교인에게 필독서가 될 정도였다.
파충류형의 몬스터는 속도는 느리지만 방어특화형이었다.
지금 눈앞에 기사의 신체 능력이 이 방어형 특화의 마족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인간이 그런 능력을 갖추려면 최소 마나 10성 이상이며 소드 마스터의 칭호를 받은 자만 가능하다.
주신 제국에 소드 마스터는 손에 꼽을 정도다.
당연히 칠무신 모두 소드 마스터의 칭호를 받고 있다.
아쉽게도 솔라리스에서 소드 마스터 칭호를 받은 사람은 윌리엄 대공뿐이었다.
과거 용기사 대부분이 소드 마스터 칭호를 받았다.
그 정도 관록을 가지려면 한두 해 수련해서 도달할 수 없다.
특별한 힘을 부여받거나 천재적 머리와 신체를 타고난 영웅이 아닌 다음에야.
그래서 지금 눈앞에 평범한 기사는 절대 소드 마스터급의 무위를 낼 수 없다.
'확인'
무공의 차이는 극명했다. 기술이 없는 움직임과 몸에 밴 기술적 움직임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제딘은 요령껏 피하면서 탈혼마검으로 펼쳤다.
당연히 공격해 오던 기사는 움찔했다. 어느 검이 진짜 인지 순간 판별력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딱 그 순간이 죽음의 고비가 된다.
탈혼마검의 무서운 점이 그 순간을 노려 급소를 베는 검법이기 때문이다.
제딘은 급소 대신 기사의 허벅지를 베었다.
갑옷 위로 점점이 물든 색상은 역시 붉은색이었다.
'이놈들 도대체 뭐지?'
내공은 당연히 아닐 것이고 마나도 가늠해 볼 때 겨우 6성 많이 쳐줘야 7성 정도다.
그런데 신체 능력은 거의 마족급에 가깝게 움직였다.
-쉬시쉭
제딘의 탈혼마검은 어지럽게 허공을 수놓았고 기사는 계속 움찔거리며 공격할 틈을 찾지 못했다. 그때마다 상처가 하나씩 늘어갔다.
제딘이 마음먹으면 즉시 죽일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분명했다.
-짝, 짝, 짝
박수소리가 조용한 연무장에 울려퍼졌다.
케이사르는 매우 기쁜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좋아, 아주 좋아. 검법이 마음에 드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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