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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귿 공방

버서사이-미소녀 천재 대마법사 전기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디귿(D)
작품등록일 :
2022.05.12 14:41
최근연재일 :
2023.04.19 19:10
연재수 :
104 회
조회수 :
3,373
추천수 :
176
글자수 :
761,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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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31 12:35
조회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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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23쪽

#35. 힘 없는 정의는 정의가 될 수 없다

DUMMY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부터 기운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하릴없이 뒹굴뒹굴하던 피아가 벌떡 일어서며 아현을 반겼다.


“늦었네? 어디 갔다 와?”


“응······.”


방으로 들어서는 아현의 넋이 반쯤 나가 있었다. 아니, 소멸 직전이었다.


털썩


좀비처럼 움직이던 몸을 내팽개치듯 침대 위로 던졌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응······.”


실망하고, 좌절하고, 우울한 모습도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완전 맛이 간 것 같았다.


“피아야······.”


“응. 언니.”


왠지 내버려 둬야 할 것 같은 직감에 슬그머니 이불 속으로 들어가던 몸이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왔다.


“죽이자.”


“응?”


“죽여야 돼.”


귀를 의심했다. 아현은 벌떡 몸을 일으켜 피아의 어깨를 잡으며 진지하고 강한 어조로 강조했다.


“언니랑 누구 하나만 죽이자.”


너무나도 선명한 진심에 두려워졌다.


“언니, 왜 그래? 나 좀 무서운데?”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그 자식만 없으면 되는 거야.”


“그러지 말자. 진짜 무서워.”


“이히히. 죽이자. 가자. 죽이러.”


광기어린 눈으로 히죽히죽 웃으며 문을 열고 나가려는 아현을 붙잡았다.


“으앙~ 언니. 그러지마. 무서워.”


피아의 울부짖음을 듣고 달려온 성천까지 합세해 겨우 아현을 붙잡을 수 있었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겨우 정신을 차린 아현은 루리아와 나눈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두 사람에게 털어놓았다.


예상대로 성천은 바닥에 두 번 쓰러졌다. 처음엔 배를 부여잡고 웃느라 쓰러지고, 두 번째는 피아의 사커킥에 영혼과 분리되어 쓰러졌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철딱서니 없는 도련님인줄은 몰랐네. 허우대만 멀쩡하지 완전 어린애라는 거잖아.”


“에휴~”


느는 건 근심이요,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이게 다 저 어리바리한 자식 때문이잖아. 저게 요령껏 잘 피해 다녔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말야.”


“아냐. 어차피 언제고 터질 일이었어. 성천은 나랑 친하다는 이유로 당한 거니까 오히려 피해자지.”


“그냥 참고 버티려고 했는데··· 난 내가 목적인 줄 알았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두 소녀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바닥에 널브러진 성천을 향했다.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집중적으로 괴롭히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원래 작정하고 괴롭히는데 반응이 없으면 재미없는 법이잖아? 그래서 일부러 당해준 거지. 지쳐서 떨어질 때까지.”


“너 알았어?”


“당연하지. 내가 바보냐? 아무도 없는데 갑자기 다리가 밀리거나 걸리고, 복도에서 몸이 밀릴 정도로 바람이 부는데 그걸 모르게? 너희들 도대체 날 얼마나 띄엄띄엄 본 거냐?”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너라면 왠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


아현의 진지한 얼굴에 헛웃음만 나왔다.


“야! 그럼 미리 말했어야지. 멍청하게 그걸 계속 당하고 있냐?”


“말하면? 네가 퍽이나 가만히 있었겠다. 어제는 운이 좋아서 살인미수로 그쳤지, 제대로 맞았으면 카델에서 쫓겨나는 걸로 끝나지 않았을 걸?”


피아는 천장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방관과 공범 혐의가 있는 아현도 할 말이 없었다.


“샤이르도 샤이르지만, 루리아도 참 대단하다. 어수룩하다고 해야 하나? 좋아하는 애가 걱정되는 건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삼각관계 여자애를 찾아가서 어떻게 그 얘기를 다 하냐?”


“내 말이··· 그리고 너! 다시 한 번 더 삼각관계 어쩌고 하면 죽는다.”


살기를 느낀 성천을 입을 다물었다.


“그럼 성천은 지금처럼 계속 적당히 당해야 되는 거야?”


“오~ 피아,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아니거든요. 너 하나 희생해서 우리 언니가 편할 수 있는데 내가 왜 널 걱정해 주냐?”


“응? 듣고 보니 그러네? 지금이 해피엔딩이네. 샤이르는 계속 성천 괴롭히고, 루리아는 샤이르 좋아하고, 샤이르는 자기 감정 모르고. 됐네.”


“와! 잘 됐다! 달라진 것도 없으니 모른 척하면 되겠다.”


서로 손뼉을 치며 해맑게 자축하는 두 소녀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흥을 깨서 미안한데, 샤이르는 더 이상 나한테 아무 짓도 못해.”


“왜?”


“왜겠어? 장난 몇 번 쳤다고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데 너 같으면 또 그러겠냐?”


아······.


* * *


생명의 위협(?)을 느낀 탓인지, 루리아의 설득이 먹힌 덕인지, 성천을 향한 샤이르의 무모한 장난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그 화살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버텨! 피해! 피해!”


적당한 간격을 벌리고 서로 손을 뻗고 있는 샤이르와 자르쟈를 향해 주위를 둘러싼 학생들의 훈수가 쏟아졌다.


“이건 마법 능력보다 요령이 중요한 거야. 잘만 하면 네가 이길 수도 있는 놀이라고.”


손뼉을 부딪치거나 피해서 상대방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놀이와 규칙은 비슷했다. 다만, 직접적인 신체접촉이 아닌 바람마법을 이용한다는 차이가 있었다.


“자꾸 피하지만 말고 밀어봐. 그래야 날 넘어뜨리지.”


샤이르의 도발에 자르쟈는 힘껏 바람을 날렸다.


우당탕


호기로운 시도와 달리 샤이르의 마법에 밀려 뒤로 나자빠졌다.


“하하하. 쟤 넘어진 것 좀 봐.”


“대자로 쭉 뻗은 꼴이 개구리 같네.”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자빠진 자르쟈를 향해 둘러싼 학생들이 손가락질하며 빈정댔다.


“아하하. 그렇게 무턱대고 민다고 되겠냐? 요령껏 해야지. 요령껏.”


샤이르는 기다렸다는 듯 자르쟈를 내려다보며 한껏 비웃었다. 사실, 상대가 될 수 없는 게임이었다. 두 사람의 힘의 차이는 요령으로 극복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르쟈는 게임에 임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떤 식으로 괴롭힐지 알 수 없었다.


“말레. 말레 어딨어? 너도 한 번 해야지.”


말레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다 성천과 눈이 마주쳤다.


“왜? 머저리, 너도 하고 싶냐?”


성천은 대꾸 없이 시선을 피했다. 무시하는 투가 기분 나빴지만, 피아의 보복이 두려워 꾹 참았다.


“말레! 뭐해? 어서 와.”


눈치를 보고 있던 말레가 어쩔 수 없이 샤이르 앞에 섰다. 자르쟈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샤이르를 거역할 힘이 없었다.


샤이르의 사람 나누는 기준은 오로지 신분이었다. 대륙 최대 상단의 장자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귀족이 있었다. 루리아, 도무라다, 올루의 가문이 그랬다. 직접적인 분란을 일으킬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 아니었다. 타미의 가문은 지역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그뿐이었다. 모흐란 상단의 영향력 앞엔 초라한 정도였다. 그래도 귀족이라는 신분은 여전히 함부로 대하기 껄끄러웠다.


여기까지가 경계였다. (도무라다를 제외한)서른세 명의 마법학부 학생 중 귀족은 열여섯 명이었다. 나머지 평민이거나 신분이 명확하지 않은 학생은 샤이르의 무시와 괄시를 받아야 했다. 때론 은근한 괴롭힘도 있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함부로 대들지 못했다. 모흐란 상단의 힘은 그만큼 막강했다.


“너도 3개월 동안 겪어서 알겠지만, 샤이르를 좋아하는 애들은 아무도 없어. 그럼에도 저 꼴을 계속 볼 수밖에 없어. 집안이 좋은 애들은 대놓고 무시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방관하거나 동조할 수밖에 없거든.”


“그런 것치곤 너무 신나 보이는데?”


아현의 눈엔 샤이르의 짓궂은 장난만큼이나 주변에서 환호하고 맞장구치는 학생들도 한심스럽게 보였다.


“한 칸이라도 위에 서 있다는 우월감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누군가를 짓밟고 서있는 기분이란 게 그렇게 좋은 걸까? 내 눈엔 저기 있는 애들도 다 똑같아 보이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한심한 작태를 당장 멈추고 싶었다. 화내고 소리쳐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용기가 없었다. 정의를 지향하는 미약한 목소리만으론 불의를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역시 너도 똑같이 말하는구나?”


타미는 씁쓸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친구가 없겠어? 별 볼일 없는 주제에 정의감만 믿고 나섰다가 왕따 당한 거야. 힘없는 정의는 정의가 될 수 없더라고.”


아현은 놀란 눈으로 타미를 바라봤다. 붙임성 있고, 시원한 성격의 그녀가 가깝게 어울리는 친구가 없다는 게 신기했다. 그러나 함부로 물을 수 없어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이런 사정이 있는 줄 몰랐다.


“샤이르가 아니라 도무라다였어. 가문만 믿고 함부로 행동하는 걸 지적했을 뿐인데··· 집안에 압박이 오더라.”


타미의 쓴웃음은 불편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 * *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문제가 불거져 1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퇴학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2년의 학창시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명이었다.


“미안한데 빵하고 음료수 좀 사다주면 안 될까?”


영준은 조용한 아이였다. 아니, 조용할 수밖에 없는 아이였다. 반에서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그런 영준에게 유일하게 먼저 말을 거는 건 정연뿐이었다. 그러나 그건 호의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오늘 조금 피곤해서 그러니까 부탁 좀 할게.”


다정한 말투만 부탁이었다. 그것이 거부할 수 없는 압박이라는 건 반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알았어.”


영준은 조용히 일어나 교실을 나갔다.


“그냥 시키면 되지. 왜 매번 저딴 놈한테 부탁을 하는 거야?”


지켜보던 정연의 패거리 중 하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친구한테 심부름을 시키냐? 그러다 학폭위라도 열리면 나 우리 아빠한테 죽어. 너도 알잖아. 우리 아빠 부장검산 거. 그 아저씨 졸라 무서워.”


“그렇게 아빠 무서워하면서 돈은 안 주냐?”


“말 했잖아. 부탁이라고. 내가 시킨 게 아니라 쟤가 내 부탁 들어주는 거야.”


“하여간 무서운 놈이라니까. 하하하.”


이런 식이었다. 부장검사 아버지 빽에,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큰 키와 덩치, 어렸을 때부터 유도를 한 덕에 힘도 월등히 셌다. 거기다 잔머리까지 좋아 애초에 문제가 생길 만한 상황은 만들지도 않았다.


정연은 교실의 왕이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무기를 십분 활용해 용의주도하게 교실을 지배했다. 그런 정연에게 대항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나 크림빵 안 먹는데··· 딸기우유도 좀······.”


영준이 사온 빵과 우유를 받아든 정연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깊은 한숨을 쉬며 무리 중 한 명에게 시선을 돌렸다.


퍽!


정연의 눈치를 받은 학생이 영준의 배를 걷어찼다. 영준은 배를 움켜쥐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교실의 시선이 영준을 향했다.


“아, 미안. 발이 미끄러졌다. 괜찮아?”


“콜록··· 콜록······.”


영준은 대답도 못하고 고통에 찬 기침만 뱉었다.


“야, 넌 조심 좀 해라. 얘 다칠 뻔 했잖아. 영준아, 괜찮아? 살짝 부딪힌 거지? 보니까 아무렇지도 않네. 일어나. 일어나. 그리고 나 입맛이 없어서 그러니까 빵하고 우유는 너 먹어. 난 다음 쉬는 시간에 먹을게.”


영준은 아픈 배를 쥐고 자리로 돌아갔다. 교실의 시선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서지 못했다. 괜한 호기로움에 정연의 새로운 타깃이 되길 바라지 않았다.


누군가를 짓밟고 위에 섰다는 우월감은 다양한 형태로 변형됐다. 적당한 선을 지키며 위치를 지키는 정연이 있는 반면에 도취된 몇몇은 정도를 벗어나기 마련이었다.


“자, 던진다! 잘 받아!”


종이를 여러 겹으로 뭉쳐 만든 공은 영준을 향해 날아갔다. 그 앞엔 신문지를 말아 만든 짧은 봉을 쥐고 있는 남학생이 자세를 잡고 있었다. 날아오는 종이공은 시원하게 휘둘린 신문지 봉을 지나 영준의 얼굴에 맞았다.


“스트라이크!”


누군가 호쾌하게 외쳤다. 종이 공에 맞은 영준이 얼굴을 감싸고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씨발! 한 번 더 해.”


“그래봐야 넌 안 돼. 닥치고 돈이나 내놔.”


“닥쳐. 한 번 더 해. 이번엔 5000원 건다.”


타자는 바닥을 구르며 화를 내면서 다시 자세를 잡았다. 투수는 그런 타자를 비웃으며 영준을 불렀다.


“포수! 뭐해? 공 줘야지.”


하지만 영준은 아픈 얼굴을 부여잡고 움직이지 않았다.


“야! 빨리 공 던져. 점심시간 끝나가잖아. 야!”


타자는 영준을 걷어찼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눈··· 눈 맞았어.”


“어쩌라고 이 새끼야! 얼른 공이나 던져!”


영준은 하는 수 없이 한 손으로 아픈 눈을 어루만지며 다른 손으로 공을 던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공이 정연의 머리에 맞았다. 교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공놀이 하던 무리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하아··· 그러니까 이런 건 밖에 나가서 하라니까.”


“미안, 정연아 진짜 미안··· 윽!”


정연의 발에 걷어차인 투수가 바닥에 쓰러졌다. 정연은 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사정없이 발길질 했다.


“내가··· 밖에 나가서··· 하라고··· 했지! 이··· 개··· 새끼들아!”


감정이 폭발한 정연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가해자인 영준은 물론이고, 함께 공놀이를 하던 타자도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무지막지한 일방적 폭행의 결과는 처참했다. 투수의 얼굴 여기저기에 피가 났고, 잔뜩 웅크린 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영준아, 이리 와봐.”


움찔 놀란 영준은 사시나무 떨 듯 떨며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마냥 정연 앞에 섰다. 그러나 우려와 불안과 달리 정연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조심 좀 하지 그랬어. 나 아까 엄청 아팠잖아.”


또 다시 무지막지한 폭력이 시작될 거라 생각했던 영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넌 그냥 쟤들이 시킨 대로 한 거잖아. 그치?”


당황한 영준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럼 다 쟤들 잘못이네. 그러니까 네가 내 대신 복수 좀 해주라. 야, 너 이리 와봐.”


정연의 손짓에 타자가 우물쭈물 다가왔다.


“얘지? 얘가 다 잘못한 거잖아. 손 줘봐.”


영준의 손을 잡아당긴 정연은 그대로 타자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짝!


경쾌한 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짝! 짝! 짝!


정연에게 잡힌 영준의 손은 타자의 얼굴을 번갈아 때렸다. 강제로 휘둘린 손에 맞은 고통은 크지 않았지만, 타자의 자존심은 점점 찌그러졌다. 정연에게 맞는 것도 아니고, 하찮게 생각하던 영준의 손에 맞는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비참했다.


“팔에 힘 좀 빼봐. 휘두르기 힘들잖아. 아니다. 그냥 네가 직접 때리면 되겠다. 너랑 나를 괴롭힌 거잖아. 복수해 줘야지. 자, 자세 잡고.”


영준의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복싱 자세를 만들었다.


“오~ 자세 나오는데? 영준아, 복수의 시간이 왔다. 정의의 이름으로 악당을 처단하자. 싸워.”


영준과 타자는 정연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해 서로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서로 싸우라고. 지는 사람이 오늘부터 우리 반 개다. 알았지?”


소문은 유명했다. 정연이 개로 정한 학생은 짐승 이하의 취급을 받아야 했다. 급우로써 관계는 물론이고, 말조차 걸어서도 안 됐다. 철저히 무시하고, 말 그대로 개처럼 대해야 했다. 개처럼 부르고, 개처럼 대답해야 했다.


“레디··· 파이트!”


퍽!


이미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왜소한 체격과 소심한 영준이 타자를 이길 확률은 전혀 없었다. 조금 전 당한 치육에 개가 될 수 없다는 집념은 영준을 기절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이후 눈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 교실에 펼쳐졌다.


“영준, 영준! 이리 와. 어서!”


화장실에 다녀오던 영준은 순식간에 뛰어가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손.”


내민 손에 손을 얹었다.


“이쪽 손.”


다른 손을 얹었다.


“물어와!”


실내화를 던지면 개처럼 뛰어가 입으로 물어왔다.


“개는 때리는 거 아냐. 먹이 주고 예뻐해 주는 거야.”


정연의 말 한 마디에 폭력은 사라졌지만, 그보다 훨씬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현실에 시달려야 했다.


“앉아. 엎드려. 굴러.”


“짖어. 하울링!”


“영준, 교탁에 마운팅!”


가볍던 장난-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짓거리는 점점 정도가 심해졌다. 더 이상 장난으로 치부할 수 없는 수준까지 갔음에도 그만 둘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익숙해진 걸까? 처음엔 불쾌하게 보이던 그와 그들의 모습이 이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되는데,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된다고 했던가. 굳이 보려 하지 않으니 TV 속에 나오는 가상의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애써 모른 척 무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아현과 마찬가지로 방관자에 속했던 학생 중 영준을 개처럼 대하는 가해자가 점점 늘어났다.


처음엔 그들도 불쾌하게 봤다. 그러나 익숙함은 폭력을 장난으로 치부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정연 무리의 짓궂은 장난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 했던 것처럼, ‘손’ ‘짖어’ ‘물어와’ 같은 행동은 가벼운 장난이라 정당화 했다. 이젠 반에서 영준을 개로 대하지 않는 학생은 열 명도 되지 않았다.


“영준, 이리와. 아웅~ 귀여워~ 손.”


단짝 선미의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연 무리의 행동을 비난하던 선미도 어느새 이 역겨운 놀이에 동참하고 있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응? 왜? 영준이 귀엽잖아. 너도 해봐.”


말 잘 듣는 개를 쓰다듬듯 영준의 머리를 쓰다듬는 선미의 표정엔 조금의 악의도 없었다. 순간 모든 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현은 담임을 찾아가 그간의 일을 모두 알렸다. 학교는 발칵 뒤집혔고, 학폭위가 열리고 조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학창시절 대부분을 폭력에 시달리고, 어울리는 친구 하나 없던 영준에겐 차라리 지금이 만족스러웠다. 더 이상 때리는 사람도 없고, 그림자 취급을 받지 않아도 됐다. 비록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었지만, 먼저 이름을 불러주고 반겨줬다.


“폭력에 길들여진 거예요. 강요받은 선택에 억지 만족하는 게 정상은 아니잖아요.”


“그건 네 판단이지! 본인이 잘 지낸다는데 왜 네가 영준이 입장을 멋대로 해석해서 우기는데?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게 폭력이란 생각은 안 해봤어?”


피해자가 없으면 가해자도 없다. 정연 무리는 거짓으로 변호했고, 다른 가해자는 장난, 놀이라며 자기합리화로 변호 했다. 결과는 아현의 부정적이며, 편협된 주관적 해석이 만든 오해로 끝이 났다. 그리고 망부석 형이 내려졌다.


아현의 존재는 교실에서 지워졌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보여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였다.


‘모른 척 했던 벌이야. 나만 아니면 된다고 무시한 벌이야.’


15살, 중학교 2학년, 한창 사춘기였던 아현은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자책과 반성으로 힘겹게 버텨냈다.


‘1년만 견디면 돼. 내년에 새로 시작하면 돼.’


억지 희망을 품으며 견디려 했다. 적어도 직접적인 폭력이 없으니 시간이 흐르면 지나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아현을 그냥 두지 않았다.


“영준, 망부석에 마운팅!”


한 달 가까이 무시하던 정연 무리는 서서히 아현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지나며 가볍게 부딪히거나 지우개 조각, 휴지 등을 던지는 가벼운 괴롭힘은 예사였다. 다리를 걸거나 밀어 넘어뜨리기 시작하더니 직접적인 폭력도 점점 심해졌다. 영준을 이용한 성추행에 가까운 괴롭힘도 서슴없었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영준은 아현의 등에 찰싹 붙어 엉덩이를 흔들었다. 아무리 소리치고 떼어내려 해도 영준의 힘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눈물이 났다. 영준의 행동이 주는 불쾌함보다 그 모습을 보며 웃고 떠드는 비열한 눈빛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우당탕!


울고 소리치며 허우적거려도 떨어지지 않던 영준의 온기가 사라졌다. 대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와 주위를 두르고 있던 놀란 눈빛만 남았다. 고개를 돌렸다.


“어?”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학년이 시작되고 3개월 가까이 본 얼굴이었으니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이름이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야! 너 뭐 하는 거냐?”


정연의 무리 중 하나가 다가와 불쾌함을 뱉었다.


‘이름이 뭐였지?’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이였다. 딱히 어울리는 친구도 없고, 학교에 오면 책상에 얼굴을 묻고 잠만 잤다. 어째선지 교사들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소문에는 큰 사고를 쳤던 복학생이라고도 했고, 운동선수라고도 했다. 그러나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뭐냐고! 이 새끼야!”


퍽!


경쾌한 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주먹에 맞은 녀석은 바닥에 널브러져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뭐, 뭐야?”


정연 주변에 있던 무리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일 대 다수의 싸움은 압도적이었다. 어른과 아이의 싸움처럼 휘두르는 대로 맞고, 맞자마자 그대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여섯 명이 쓰러졌다. 남은 건 정연뿐이었다.


“미쳤냐? 내가 누군 줄 알고······.”


최종보스와의 멋들어진 결투를 기대하던 눈빛은 순식간에 실망으로 바뀌었다. 결과는 먼저 쓰러진 여섯과 다르지 않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일방적 폭력의 과정이었다.


한 방에 쓰러졌던 다른 무리와 달리 정연은 쓰러지지도 못했다. 초점을 잃은 눈과 풀린 다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하지만 그냥 쓰러지게 두지 않았다. 쓰러질 듯하면 붙잡아 일으켜 때렸고, 또 때렸다. 저러다 죽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한 마디 말도 없는 끔찍한 폭력의 결과는 퇴학이었다. 정연은 두 달이나 병원 신세를 질 정도로 다쳤다.


현실을 이겨내지 못했지만, 악은 정의의 사도에 의해 처단되었다.


그렇게 평화는 찾아왔다. 는 결말이었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의 퇴학처럼 결코 정의롭지도, 아름답지도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미 부당한 현실을 자기 합리화했던 학생들에게 변화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영준은 반의 개였고, 학생들의 방관도 그대로였다. 아현의 따돌림도 달라지지 않았다.


힘이 없는 목소리는 작은 너울도 만들지 못했다. 파도에 너울이 삼켜지듯 큰 힘은 더 큰 힘 앞에 무너졌다. 힘이 없는 정의는 어떤 의미도 없었다. 어린 나이에 처참한 현실을 마주한 아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도망이었다.




감사합니다.


작가의말

월요일이네요ㅠㅠ

그래도 선거 덕에 하루 쉴 수 있다는 위안을 안고 이번 주를 시작합니다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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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서사이-미소녀 천재 대마법사 전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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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44. 샤이르와 루리아(2) 22.06.16 28 0 17쪽
44 #43. 샤이르와 루리아(1) 22.06.15 32 0 16쪽
43 #42. 중앙도서관탑 22.06.14 33 1 13쪽
42 #41. 모흐란의 사생아(5) 22.06.13 28 1 22쪽
41 #40. 모흐란의 사생아(4) 22.06.10 34 1 17쪽
40 #39. 모흐란의 사생아(3) 22.06.09 28 1 14쪽
39 #38. 모흐란의 사생아(2) 22.06.07 30 1 14쪽
38 #37. 모흐란의 사생아(1) 22.06.06 27 1 20쪽
37 #36. 얼빠 주인공이 이세계에 온 이유 22.06.03 26 2 18쪽
» #35. 힘 없는 정의는 정의가 될 수 없다 22.05.31 28 2 23쪽
35 #34.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피아식 계산법 22.05.30 28 2 17쪽
34 #33. 생각의 전환, 선택과 집중 =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 22.05.30 28 2 18쪽
33 #32. 기숙사 뱀 습격사건 - 2 22.05.27 31 2 21쪽
32 #31. 기숙사 뱀 습격사건 - 1 22.05.27 29 2 17쪽
31 #30. 원초적이고 순수한 감정을 표현한 대가 22.05.26 28 2 18쪽
30 #29. 체프만의 비밀 공방 22.05.26 29 2 14쪽
29 #28. 모질이의 의외의 성적 22.05.25 28 2 16쪽
28 #27.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의심 22.05.25 26 2 20쪽
27 #26. 개학 - 불편한 소문 22.05.24 34 2 17쪽
26 #25. 서열 1위 맏내 아르젠느 22.05.24 25 2 16쪽
25 #24. 머글의 착각 +2 22.05.23 35 3 16쪽
24 #23. 엑스펠리아르무스 22.05.23 26 3 17쪽
23 #22. 본격적인 마법수업, 마법 감응훈련 22.05.22 37 4 16쪽
22 #21. 너무나 현실적인 판타지 세계의 교육방식 22.05.22 30 4 17쪽
21 #20. 지극히 주관적인 편입 테스트 22.05.21 32 4 15쪽
20 #19. 문지기를 통하지 않으면 누구도 카델에 출입할 수 없다. 22.05.21 34 3 18쪽
19 #18. 미끼와 간식, 그 사이 어딘가 22.05.20 32 3 22쪽
18 #17. 지안/싱 전쟁의 악귀 아한지 +1 22.05.20 33 4 21쪽
17 #16. 아한지와 검성 체프만 22.05.19 32 3 20쪽
16 #15. 답답한 놈의 신중함 22.05.19 30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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