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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귿 공방

버서사이-미소녀 천재 대마법사 전기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디귿(D)
작품등록일 :
2022.05.12 14:41
최근연재일 :
2023.04.19 19:10
연재수 :
10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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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1,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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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9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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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16. 아한지와 검성 체프만

DUMMY

베론을 떠난 아현 일행의 마차는 아무런 문제없이 여유롭게 카델로 향했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쾌청했고, 불미스러운 사건이나 예상 밖의 위험도 없었다.


“언니, 괜찮아? 할만 해?”


피아는 마차 창밖으로 고개를 삐쭉 내밀고 마부석에 앉은 아현에게 물었다.


“응. 생각보다 할만 해. 재밌어.”


여유로운 여정은 아현의 호기심을 채우기 적합한 시간이었다. 피아에겐 산골마을에서부터 조금씩 익히던 문자를 배우고, 성천에겐 승마와 마차 모는 법을 배웠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세계의 상식에 대해 익히는 것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럼 학부 마치면? 전공을 나누는 거야?”


“맞아. 보통 학부가 2~4년 과정인데 빠르면 1년, 보통은 2~3년, 늦어도 4년 안엔 통과하는 게 일반적이야.”


“통과하지 못하면?”


카델의 시스템에 대해 궁금한 건 피아도 마찬가지였다.


“퇴교된다고 들었어. 근데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대부분 통과하지 않을까?”


“학부는 어떻게 결정되는 거야? 본인이 직접 선택할 수 있어?”


“입학 하려면 카델 출신의 추천서가 필요해. 당연히 추천서는 최소한의 실력이 바탕이 될 때 써주겠지. 그 최소한의 실력이라는 게 마법일지 무술일지 추천서에 넣는 건 당연하고. 그렇다고 전부 입학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최종적으로 학교장의 허락이 필요한데, 실력이 못 미치면 추천서가 있어도 입학할 수 없어.”


“뭐? 그럼 난? 피아는 엄청 강하니까 당연히 합격할 테지만, 난 어떻게 해? 마법도 무술도 전혀 할 줄 모르는데? 나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나는 거 아냐?”


“어? 어··· 그러네? 그걸 생각 못했네? 나도 어떡하지?”


“너? 넌 왜?”


길잡이 역할이 당황할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히 나도 카델에 들어가야지. 설마 너희만 살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왜 카델에 들어가냐고! 넌 그냥 길잡이잖아.”


피아는 성천의 모든 게 불만이었다. 아현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눈빛, 푸른 숲에서 몸통박치기, 어린 동생 취급하는 말투, 모든 걸 다 아는 듯한 잘난 척,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불량한 태도(그건 너잖아)까지 전부 마음에 안 들었다. 베론을 나온 뒤론 아현에게 마차 모는 법을 알려주겠다며 옆에 꼭 붙어있는 꼴까지 배알이 꼴렸다. 그런데 카델까지 따라온다니.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말이었다.


“그거야 나도 위험할 수 있으니까. 너흴 도와준 걸 검성이 알게 되면 날 가만히 둘 것 같아? 그래서 아르젠느한테 내 추천서도 부탁했지.”


“싫어. 안 돼. 너 가지마. 네가 뭔데 자꾸 우리 언니 따라 다니는 건데? 너 재수 없어.”


땡깡 수준이 서너 살 아이와 다를 게 없었다. 피아의 생떼에 성천은 말을 잃고 아현의 눈치만 살폈다. 발악에 가까운 떼를 쓰는 피아를 달랠 수 있는 건 아현밖에 없었다. 아현은 한숨 한 번 깊게 쉬고 피아를 달래기 시작했다.


“진정해. 피아야. 성천도 우릴 도와주면서 위험에 처한 거잖아. 당장 가장 안전하게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카델이니 같이 가는 게 맞지. 그러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말자. 응?”


싫다. 아무리 아현의 설득이라도 싫다. 이제 한 달 밖에 안 된 사이지만, 피아에게 아현은 이제 친언니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그런 아현을 음흉한 눈으로 보는 저 썩어문드러진 좀비 같은 놈과 함께 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언제나 동생 대하듯 내려다보는 저 거만한 태도는 가증스럽다 못해 경멸했다.


사실 이 두 가지가 성천에 대한 불만의 전부였다. 나머지 자잘한 불만은 여기에서 파생된 여파였다. 사람이 싫으면 눈 뜨고 있는 것도 싫다더니, 아무리 성천의 기지로 여러 위험을 극복했어도 피아에겐 그저 싫은 놈일 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천을 보고 있으면 하늘 아래 가장 싫은 얼굴이 떠올랐다.


“몰라. 저 음흉한 새끼 마음에 안 들어. 안 해.”


뭘 안한다는 건지 아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후 피아는 성천을 상대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 * *


은빛 비둘기 한 마리가 울창한 푸른 숲 위를 빠르게 날았다. 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날갯짓 하더니 갑자기 숲속으로 방향을 틀었다. 제 비행실력을 뽐내기라도 하듯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를 미끄러지듯 스쳐 지났다. 아슬아슬하게 숲을 헤치던 비둘기는 넓은 공터가 나오자 날개를 활짝 펼쳐 속도를 줄였다. 확연히 속도가 준 비둘기는 우아한 날갯짓으로 공터 한가운데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 안으로 들어온 비둘기는 문이 열린 새집을 찾아 들어갔다. 찰즈는 서둘러 비둘기 다리에 묶여있던 종이를 풀어 체프만에게 건넸다.


푸른 숲으로 수색조를 파견한지 벌써 사흘이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전서구가 막사로 날아들었다. 대부분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에 대한 정보일 뿐 버서사이의 흔적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무턱대고 모든 마을을 뒤지기에 푸른 숲은 너무 넓었다. 확실한 정보를 얻기 전까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찰즈는 돌돌 말린 종이를 펼쳐 천천히 읽어 내리는 체프만의 눈빛이 밝게 빛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비치지 않은 반응이었다.


“찾았습니까?”


“야슬만이 읽은 흐름의 내용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마을을 발견했다는구나.”


“이곳은 제가 정리해서 후발대와 함께 좇아가겠습니다. 그러니 형님은 먼저 출발하세요.”


“고맙다. 그럼 먼저 출발하겠다.”


두 살 터울의 형과 어렸을 때부터 유독 친했다. 같은 스승 아래서 검술을 배우면서 형제간의 우애는 더욱 돈독해졌다. 함께 자란 우애 깊은 형제의 관심사와 목표는 자연스럽게 비슷해졌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현 왕국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을 시작으로 강력한 개혁에 대한 갈망, 나아가 혁명에 이르는 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


그 중심엔 형 체프만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찰즈 자신은 혁명을 위한 도구가 되기로 다짐했다. 그토록 원하던 버서사이가 눈앞에 있는 이 시점에 사사로운 일까지 신경 쓰게 할 필요는 없었다.


* * *


체프만의 행렬이 산골 마을에 닿은 것은 아현 일행이 마을을 떠난 일주일 뒤, 아르젠느와 헤어지고 베론을 떠난 지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아르젠느의 호위대와 기세가 완전히 다른 체프만 군대의 등장은 산골 마을 사람을 혼란케 만들었다. 위압감을 넘어 살기등등한 그들의 기세에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아한지는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높으신 분들 같은데 이런 깊은 산골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행렬에 다가가 머리를 조아리는 아한지의 모습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그 큰 덩치야 숨길 수 없지만, 짧게 자른 머리카락에 웃옷까지 입고 있었다. 아현이 머물 당시에 한 번도 웃옷을 입지 않던 아한지에게 엄청난 변화였다.


그의 변화는 정체를 숨기기 위한 나름 최선의 노력이었다. 자제르에게 쉽게 정체를 들킨 건 그의 등을 화려하게 수놓은 독특한 문신 때문이었다. 거기에 전장에서 얻은 수많은 상처와 허리까지 오는 장발은 그의 정체를 너무 뚜렷이 드러냈다.


지금부터 떠들 거짓말을 위해서 정체를 감춰야만 했다.


“묻겠다. 최근 낯선 이를 봤거나 외지인이 이곳을 찾아온 일이 있는가?”


“뭣 때문에 그런······.”


스릉!


검이 검집을 빠져나오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사의 검날이 아한지의 목전에 닿았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 다음엔 검을 멈추지 않겠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있습니다. 낯선 이가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겁에 질려 머리를 조아리는 아한지의 연기는 훌륭했다. 서슬푸른 검날을 보고 놀란 표정이나 떨리는 목소리까지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일개 병사의 발검(拔劍)이 이정도인가? 저 괴물은 도대체 어떤 군대를 만들려는가?’


일반 병사의 실력이라고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아한지에겐 미치지 못할 실력이지만, 장인 칭호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실력이었다.


그런 병사가 눈앞에만 열 명이었다. 그 뒤로 갑옷이 조금씩 다른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내가 넷, 그리고 체프만이 있었다. 왕자라는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풍기는 기색만으로도 검성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상히 말하라.”


“한··· 일주일쯤 전이었습니다. 키가 크고 건장한 노인이 소년과 함께 마을에 찾아왔습니다.”


“특별한 점은 없었나?”


“특별한 점이라고 하시면 어떤······.”


“평범하지 않다거나, 보통 사람과 다른 행동이나 모습 말이다.”


깊은 산골 마을에 낯선 이의 출현, 분명 야슬만이 읽은 흐름과 같았다. 하지만 좀 더 확실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이런 깊은 산골에 이유 없이 들어오는 자체가 평범한 일은 아닙니다. 보통 사람과 다르다면··· 아, 그 소년은 유독 말이 없었습니다. 겁에 질린 듯 불안해 보였습니다. 우울해 보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행상도 자주 찾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나다 들렸다는 그 노인과 소년의 방문이 가장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지요.”


병사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그가 보고 하기도 전에 이미 체프만이 타고 있는 말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어디 있는가?”


체프만은 말위에 앉아 거만하면서도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아한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밟아 죽일 수 있는 개미를 보듯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눈빛이었다.


“다음 날 바로 떠났습니다. 소년이 입을 옷과 식량을 얻어 떠났습니다.”


“어디로?”


“카델로 간다고 했습니다.”


무표정했던 체프만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사실인가? 그 노인이 진정 카델로 간다고 했더냐?”


“그··· 그렇습니다.”


건조하고 차가운 체프만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했다. 아한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가 당장 손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이 작은 마을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수 있었다.


“아무 목적도 없이 왔다던 노인이 자신의 행적을 밝혔다고?”


‘됐다! 물었어.’


아르젠느에게 들은 체프만의 정보를 바탕으로 계획을 세웠다. 마을 사람도 지키고, 아현 일행의 행적을 숨기기 위한 최선은 ‘카델’이라는 이름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비록 목적지를 밝히는 꼴이지만, 체프만이 중앙대륙 최고의 무관학교인 카델을 상대할리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렇습······.”


아무 변화도 감지하지 못했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다만 따뜻한 물방울이 오른쪽 얼굴에 와서 부딪혔다. 붉은 물방울.


‘피?’


황급히 고개를 돌려 확인했지만 마을 사람은 멀쩡했다. 공포에 질린 그들의 표정만 핏방울 너머로 낯설게 보였다.


‘내 핀가?’


시선을 내렸다. 어깨까지 잘린 오른쪽 팔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팔이 붙어있던 자리에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크흑!”


인지하지 못했던 고통이 순식간에 찾아와 온몸을 휘감았다. 잘린 부위를 감싸 쥐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본능적으로 혈을 눌러 지혈을 했지만, 이미 바닥이 흥건할 정도로 피를 흘린 뒤였다. 정신을 집중하며 고개를 들어 체프만을 올려봤다.


“마치 준비한 듯 술술 뱉는구나. 그리고······.”


체프만의 시선이 아한지의 상처를 향했다.


“순식간에 혈을 짚어 지혈을 한다라. 썩 산골과 어울리지 않는군. 다른 팔이 잘리기 전에 똑바로 말하는 게 어떻겠나?”


“거짓한 적 없소. 노인이 시킨 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노인이 시켰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떠나면 누군가 찾아올 수도 있다며, 어떻게 대답할지 알려주고 갔습니다. 모든 사실을 숨김없이 이야기하고 카델로 향했다는 사실도 꼭 밝히라 했습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 속에서도 아한지의 눈빛은 푸르게 빛나며 체프만을 향했다.


“카델이라면 내가 어쩌지 못할 거란 건가? 마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이군.”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은 체프만의 차가운 눈빛이 아한지를 뚫을 듯 했다. 하지만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눈길을 피하는 순간 거짓말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나저나 볼수록 대단하군. 팔이 잘렸는데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피를 그만큼 흘렸음에도 말 한 번 더듬지 않다니 말야.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도 눈에 흔들림을 찾을 수 없고··· 네놈······.”


체프만의 검 끝이 아한지의 눈앞에 멈췄다.


“누구냐?”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검 끝이 당장이라도 눈을 찌를 것 같았다. 말 한 마디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한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용병이었습니다. 숱한 전장을 누비다 지쳐 고향으로 돌아온 이름 없는 용병일 뿐입니다. 말씀 드린 것 외에 저희는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산골에만 처박혀 사는 촌것들입니다. 부디 살려주십시오.”


아한지는 이마가 땅바닥에 닿도록 조아렸다. 이제 사정하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카델에 들어간 아현을 끌어낼 수는 없다. 행여 방법을 찾는다 해도 한참 어린 소년이라 했으니 아현을 특정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현과 피아의 안전은 확보됐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의 안전은 확신할 수 없었다. 모든 건 눈앞에 있는 괴물의 의지에 달렸다.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목소리는 여전히 당당하군. 그러니 더 믿기 힘들어. 너 만한 사내가 이런 산골에 있는 게 우연 같지도 않고 말이야.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마을 사람을 하나씩 죽이겠다.”


체프만의 검 끝이 아한지를 떠나 모여 있는 마을 사람에게 향했다.


“무슨 짓이오! 나는 알고 있는 것을 사실대로 다 말했소!”


“그래? 저들을 다 죽일 때까지 네 대답이 변하지 않으면 믿어주마.”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실소를 보이며 팔을 치켜들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느긋하게 하늘을 향한 검은 금방이라도 마을 사람을 향해 휘둘릴 참이었다.


“형님! 형님! 잠시만, 잠시만 멈추십시오.”


찰즈의 다급한 목소리에 체프만은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일찍 왔구나. 그런데 무슨 연유로 막는 것이냐?”


“조금 전에 도착해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잠깐 이야기 좀 나누시지요.”


체프만은 제법 심각한 표정을 짓는 동생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저 사내가 누군지 알고 계십니까?”


“저 자 말이냐? 모르는 자다. 너는 알고 있다는 말투구나.”


“형님도 이름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아한지입니다. 지안·싱 전쟁의 악귀라고 불렸던 그 아한지입니다.”


체프만은 고개를 돌려 무심히 아한지와 눈을 마주쳤다. 패색이 완연한 전황에도 아랑곳 않고 싱의 군대를 학살했다는 아한지의 무용담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 자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문제가 커질 수 있습니다. 떠난 지 일주일 되었다면 이미 카델에 도착했을 겁니다. 우리가 손 쓸 수 없는 상태죠.”


“알고 있다.”


“우리의 목적,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저들을 처리해야 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카델과 연관되어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아한지, 저 자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 자가 이곳에 있는 게 우연이 아니란 말이죠. 그렇다면··· 아닐 수도 있지만··· 이곳까지 카델의 입김이 닿는다면 저들에게 손을 대는 건 악수(惡手)가 됩니다.”


“네 말은, 저 자가 카델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다? 그리고 버서사이를 카델로 빼돌린 장본인이란 말이냐? 그렇다면 저자의 말 일부가 거짓이어야 하는데, 조금 전까지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를 두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진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요점은 스스로 카델을 언급했다는 겁니다. 신중해야 합니다.”


“흐음.”


체프만도 그 점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일부러 직접 검까지 휘두르며 아한지를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밝혀진 사실만 다시 돌아보십시오. 누군가 우리 보다 압도적으로 빨리 버서사이를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빼돌렸죠. 아슬만이 지속적으로 왕국 주변의 흐름을 읽지 않았다면, 버서사이의 출현을 더 늦게 알았거나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보다 빨랐다는 것은, 아르젠느 정도의 ‘흐름을 읽는 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존재의 개입이 있었다면, 우리의 방문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겠죠. 형님을··· 검성 체프만을 피해 몸을 숨길 수 있는 곳, 이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카델밖에 없습니다.”


찰즈의 설명을 듣는 동안 정체불명의 노인, 지안·싱 전쟁의 악귀 아한지, 뛰어난 능력을 가진 ‘흐름을 읽는 자’가 모두 동일인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찰즈의 말대로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버서사이로 의심되는 소년은 이곳에 없고, 카델이 언급되었다.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돌아가자.”


체프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몰았다. 그토록 갈망하던 버서사이가 손에 잡힐 듯 아른거리다 사라졌다. 누군가의 농간에 놀아난 분노만 생각하자면, 저 하찮은 것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감정에 휘둘려 카델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찰즈와 대화를 나누던 체프만이 숲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아한지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비록 팔은 잘렸지만 마을 사람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모두 목숨을 잃을 수 있었던 걸 생각하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는 그대를 알고 있소.”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던 찰즈의 건조한 목소리에 놀란 아한지의 가슴이 터질 듯 뛰었다.


“지안·싱 전쟁에 직접 참가하진 않았지만, 먼발치에서나마 그대의 전투를 목격한 적이 있소. 아름답다 생각했소. 노련한 무희의 춤사위 같은 그대의 검무를 다시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어 안타깝게 생각하오. 쉽지 않겠으나 오늘 일은 잊고 조용히 살아가길 바라겠소.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찰즈는 강한 어조로 경고했다.


“오늘 그대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이 진실이어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겪어온 어느 전장보다 끔찍한 악몽이 그대를 찾아갈 것이라 내 장담하리다.”


애초에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 말을 마친 찰즈도 말머리를 돌려 체프만 일행의 뒤를 따랐다. 그제야 한쪽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마을 사람이 아한지에게 뛰어왔다.


“약초! 붕대하고 약초를 가져와! 뜨거운 물도 준비해. 당장!”


촌장의 다급한 외침이 숲을 울렸다. 서둘러 치료를 준비하며 정신없이 소리치는 마을 사람의 목소리가 기억 속 악몽의 문을 두드렸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열리는 거대한 문 너머엔 잊고 싶었던 끔찍한 악몽이 똬리를 틀고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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