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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님의 서재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LEV1
작품등록일 :
2022.10.31 13:13
최근연재일 :
2022.12.28 22:25
연재수 :
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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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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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69,180

작성
22.11.09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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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호손시(市)의 사정(1)

DUMMY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는 엠마의 제안에 따라 성의 정원을 거닐기로 했다.


“우우, 배불러... 헤헷, 너무 욕심을 부렸나 봐요! ”


릴리가 윗배를 살살 만지며 부끄러운 듯 웃었다.

쭉 절망 모드였던 나와 달리 그녀는 꽤 신이 나있었다.


“맛있게 드셔주셔서 기쁩니다, 릴리 양. ”

“정말로요! 건더기가 어찌나 풍성하던지 하마터면 기도도 하기 전에 숟가락을 들 뻔했다니까요? ”


‘아, 그러셔? ’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는데 릴리가 반짝이는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학자님은 어떠셨어요? 이번에는 진짜 맛있었죠? 그죠? ”

“뭐, 겨우 입에 넣어줄 만은 했습니다. ”

“어어, 음... ”


릴리가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는 엠마와 나를 번갈아 보며 안절부절못하다가 말했다.


“이제 보니 학자님은 그냥 귀리를 싫어하시는 것 같아요. ”

“제가 봐도 그런 것 같네요. ”

“... ”

“... ”

“괜히 애썼어. ”

“노력해주신 건 고맙습니다. ”

“히잉... ”


울상이 된 릴리를 뒤로 하고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았다.


생긴 것도 맛도 미음 같던 릴리 버전과 달리, 겉모습이 질은 밥처럼 생긴 꾸덕꾸덕한 죽을 먹고 나니 내 세상의 따끈한 밥이 한층 그리워진 오후였다.


지금이라면 싫어하던 오곡밥도 주걱 째로 퍼먹겠다.


건강 챙기라며 밥 당번 때마다 잡곡밥을 지었던 여동생에게, 이제 우리도 형편이 폈으니 흰 쌀밥 좀 먹자고 투정부렸던 과거의 나를 통렬하게 반성했다.


그래도 뭐... 제대로 된 그릇과 숟가락이 있고, 죽에 젖은 그릇 빵을 뜯어먹는 대신 호밀과 밀을 섞어 만든 빵을 죽에다 찍어먹었다는 점에서는 훨씬 상식적인 식사였다.


무엇보다 영주도 똑같은 걸 먹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게일이 말했던 거랑은 좀 다르네. ’


아무리 호의적으로 해석해도 청어수프 따위를 먹으니까 비린내가 난다며 면박을 줄 정도의 진수성찬은 아니었다.


하긴 저녁 만찬도 아니고 점심식사니까. 자작의 형편도 생각보다 넉넉하지 않은 것 같고.


그러고 보니 게일은 어쩌고 있으려나.

마을 사람들한테 잡혔을까? 멀리 도망쳤을까? 아니면 어딘가에 숨어있으려나?


‘이상해. 너무 이상해. ’


나는 조금 앞서 걸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릴리를 갖다 바쳐 출세할 타이밍을 노리다 태양의 우물이 만들어지면 물 건너 갈 것 같으니 밀고를 했다?

덕분에 온 마을 사람들의 적이 되어 도망쳤다?


곱씹어볼수록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게일은 그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


마을에서 가장 하이테크 건물인 제분소를 운영해 온 것만 봐도 시대적인 한계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 기술자의 소양을 갖추고 있는 지식인이다.

합리적인 생각을 할 정도의 머리는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태양의 우물, 솔라스틸에 대해 설명했을 때 게일은 메커니즘이 유사한 디스틸(증류)에 빗대어 가장 먼저 그것을 이해했을 뿐더러 눈을 반짝이며 감탄하고 신나서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밀고를 생각하는 사람이 그런 반응을 했을까?

솔직히 우물을 만들 때는 걱정만 많은 촌장보다 훨씬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했었다.


나는 먼발치에서 따라오고 있던 여인에게 말했다.


“엠마? 잭슨 경을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

“오라버... 아니, 궁내관께서는 지금 바깥에 계실 겁니다. 돌아오시는 대로 찾아뵈시라고 전하겠습니다. ”

“고마워요. 그렇게 해 줘요. ”


이제 보니 가족기업이었구먼.

그렇게 정원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엠마가 물었다.


“좀 더 여기 계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무시게 될 방을 보여드릴까요? ”

“음, 아직 해가 쨍쨍하니 그건 이른 것 같고. ”


나는 성벽 너머로 펼쳐진 풍광을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성의 외벽만 보였던 마을에서와 달리, 직접 성 안으로 들어와 보니 성채 아래로 크진 않지만 제법 모양새를 갖춘 소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하얀 회벽의 단층집들과 이층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왼쪽으로는 바다, 오른쪽으로는 강을 낀 중세풍의 도시.


바람도 쐴 겸 구경해보는 것도 좋겠지.

아무래도 여긴 듣는 귀가 많기도 하고.


“아름다운 도시로군요. ”

“후후, 그렇지요? 감사합니다. ”

“잠시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

“음, 실례지만 저녁 만찬에 초대받으신 걸로 아는데. ”

“물론 그 전에 돌아올 생각입니다. ”

“네, 수행원을 준비시키겠습니다. ”

“에이, 서로 불편하게 굳이. 가볍게 둘이서만 갔다 올게요. ”


그렇게 말하고는 릴리에게 눈짓을 했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방황하는 듯 보였지만 엠마와 시선이 마주치자 릴리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엠마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끼리는 조금... ”


이유는 알만했다.


“도망칠 생각은 없습니다. 뭣하면 그 뭐였더라? 진실의 손으로 확인해 봐도 좋아요? ”

“...학자님께서는 참으로 짓궂으신 분이로군요. ”


쓴웃음을 지은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저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

“네, 네. 알았습니다. 자, 여기. 이걸 받으세요. ”


나는 입고 있던 휴브리스 패딩을 벗어서 엠마에게 내밀었다.

햇볕이 따뜻하니 돌아올 때까지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건? ”

“제 가문의 휘장이 새겨진 예복입니다. 이걸 맡겨두고 가죠. 담보로는 충분하고도 남을 겁니다. ”

“...자작님께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자작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저녁 시간이 다가오면 모실 수행원을 보낼 테니 성벽을 벗어나지는 마시라고. ”


벗어나는 순간 수행원이 추격대가 될 거란 얘기겠지.

상관없었다. 나도 공짜숙식을 마다할 생각은 없으니까. 택시까지 알아서 보내준다는데 오히려 땡큐지.


“그리고 맡기신 예복과 휘장의 대신으로 신분증명서와 망토, 약간의 여비를 함께 보내셨습니다. ”


게다가 달착지근한 당근까지. 나쁘지 않았다.


“섬세한 배려에 감사드린다고 자작님께 전해주십시오. ”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

“그럼 가실까요, 릴리 양? ”

“아, 네! ”


언젠가 보았던 고전영화의 장면을 흉내 내어 손을 내밀자 릴리가 잠시 멈칫거리다가 손을 얹었다.

가볍게 끌어당겨 옆에 나란히 섰다.

정원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지켜보던 엠마가 입을 열었다.


“아...! ”

“이번엔 또 뭡니까? ”

“죄,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그 생각을 못하고... ”

“네? ”

“그, 부두 근처에 대구요리랑 맥주를 파는 집이 있는데 맛도 괜찮고 풍경도 참 예쁩니다. 피에르라는 요리사가 하는 집인데 함께 들러보시면 좋을 거예요! ”


이 아가씨가 갑자기 얼굴까지 빨개져서는 왜 저래?


“네. 참고할게요. ”


새로운 맛집은 언제나 환영이지. 특히 여기서는.

우리는 문지기에게 신분증명서를 내밀고 활짝 열린 성문 아래로 내려갔다.



* * *



“릴리 씨 생각은 어떻습니까? ”

“네? ”


영주의 성채에서 나와 본격적인 시가지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물었다.


“프란츠 자작 말입니다. ”

“아... ”


스스로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릴리가 내 말을 듣더니 급히 고개를 들었다.


“보기보다 나쁜 분 같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

“역시 마을 사람들이 마음에 걸립니까? ”

“그분들도 힘든 처지니까요. ”


식사정치라는 말이 있듯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 아무 얘기가 오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프란츠 자작은 나와 릴리에게 당분간 손님으로 자기 성에 머물러달라는 제안을 했고, 가능한 만큼의 편의와 떠날 때의 노자를 대가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 대신 릴리에게 일주일당 50갤런 남짓의 생명수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릴리 말로는 조금 무리하면 이틀만에도 만들 수 있는 양이라니까. 부담은 절반으로 줄고 생활의 질은 수직상승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다만 조건이 한 가지 더 붙었다. 바로 약속한 50갤런 외에는 아무데서도 생명수를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왜 그러셨을까요. ”

“빤한 얘기 아닙니까? 부자병의 치료약으로 알려진 생명수를 독점할 생각이겠죠. ”

“다들 건강해지면 좋을 텐데... ”

“모두가 건강하면 약을 파는 사람은 돈을 못 버니까요. ”

“슬픈 진리네요. ”


귀족치고 부실했던 점심식사가 보여주듯이 프란츠 자작은 요즘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장 가세가 기울 정도는 아니라지만, 야금야금 영지의 수입이 줄어들고 있고, 늘어나기만 하는 지출을 곧 감당키 어려운 상황에 놓일지도 모르는 상황.


괜히 염해를 당한 마을의 세금을 깎아주지 않았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지출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군대가 필요해. 더 많고 강한 군대가. ]


젊다 못해 어린 자작은 빵을 자르면서 그런 소릴 했다.


[부족한 수입을 늘리려고 전쟁이라도 하시겠단 겁니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하책 중의 하책 같은데요. ]

[아니, 아냐. 남의 영지를 빼앗기 위한 군대가 아닐세. 내 영지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군대지. ]


소년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심각한 어투로 말했다.


[카탈리나 공작 전하께서 내 신종선서를 미루고 계셔. ]


‘신종선서? ’


나는 내 머릿속 검색엔진 오라클로 검색해보았다.


[신종선서 : 유럽의 봉건 사회에서, 가신이 군주의 봉신이 되기 위해 행하던 의식. 가신이 군주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내밀면 군주가 손을 감싸 잡아 받아들인다. ]


유사 중세랜드답게 이 일대의 정치체계는 봉건제도였다.


군주는 가신에게 토지(봉토)를 내리고 가신은 군주에게 대가로 충성을 맹세하는 쌍무적 계약관계.

대영주는 소영주의, 소영주는 휘하 기사의 군주가 되고 상대는 가신이 되어 꼬리를 무는 주종관계를 이룬다.


기한은 계약의 당사자들인 군주와 가신 중에 한쪽이 사망하기 전까지.

다만 가신이 죽었다고 해서 군주가 내렸던 땅을 실제로 회수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차피 영지를 관리할 새 봉신이 필요하니 같은 가문의 후계자와 재계약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거의 세습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란츠 역시 작고한 아버지 헤르만 폰 호손으로부터 일대의 영지를 상속받았다.


문제는 남방의 대영주이자 헤르만의 군주였던 카탈리나 공작이 프란츠의 신종선서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선대 영주 헤르만은 원래 호손시와 카탈리나 공국 사이에 있는 도시 토런스를 다스리는 백작의 시종장이었다고 한다.


기골이 장대하여 힘이 센 데다 전술에도 능하여 시종이자 기사로서 많은 공적을 세웠고, 백작의 총애를 받아 한때는 부백작이라고까지 불렸지만, 백작이 작고하면서 그 지나친 존재감을 두려워한 후계자한테 토사구팽 당할 위기에 몰렸다고.


하지만 그를 눈여겨보던 토런스 백작의 군주, 카탈리나 공작이 백작의 후계자와 다시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소도시 하나와 인근의 마을 몇 개를 은근슬쩍 떼어 헤르만을 호손 자작에 봉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헤르만 자작이 죽은 지금, 프란츠는 카탈리나 공작과의 주종계약을 갱신해야하는 상황.


토런스 백작가가 이 기회에 잃었던 옛 땅을 되찾아오려고 혈안이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토런스 백작도 카탈리나 공작의 가신인 이상, 프란츠가 재계약을 한다면 쳐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다.


문제는 프란츠가 사실상 영지를 세습 받은 지 오래임에도 아직 상속의 정통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계약의 상징인 신종선서를 하지 못했기에.

토런스 백작은 이 빈틈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2년 전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나는 당신께 기사 서임을 받았지. 그때 나는 불과 14살이었지만 이미 2년 전부터 잭슨을 따라다니며 경험을 쌓고 있었어. 기간이 조금 짧긴 해도 견습기사로서의 경험도 쌓았고, 아버님의 불꽃같은 따귀도 받아냈다고. 하지만 카탈리나 공작 전하께선 한 명의 기사로 인정하기에는 내가 너무 어리다며 2년을 기다리라고 하셨지. ]


프란츠는 입을 비죽이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때가 왔는데도 가을이 지나가도록 부르시질 않네? 사람을 보내 봐도 이런저런 핑계만 댈 뿐 확답이 없고. 그 와중에 토런스 백작께서는 새로 개발한 채취기로 인근의 사철을 박박 긁어모으시고 계시다는데, 말로는 근방의 맹수와 괴물들을 토벌하기 위해서라지만... 글쎄? 왜 난 그걸로 만든 창칼로 내 배때지를 쑤시러 올 것 같은 느낌이 들까? ]


프란츠는 확신하고 있었다. 카탈리나 공작이 호손 가와 토런스 가 사이에서 주판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호손의 후계자와 다시 주종계약을 맺어 그를 휘하에 두는 것이 이득일지, 토런스의 요구를 받아들여 호손 가를 버리고 반대급부를 노리는 게 이득일지.


따라서 지금 프란츠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 공작과 재계약을 맺거나, 토런스 백작의 야욕을 저지할 수 있는 힘을 자체적으로 갖추거나, 포기하고 옛날의 시종 신세로 돌아가거나.


물론 젊은 호손에게는 세 번째를 택할 생각이 없었다.


“어느 세상에서나 군대란 건 예산 먹는 하마지요. 가난한 농노들을 쥐어짜는 걸로는 한계가 명확하고 가뜩이나 진실의 손으로 민심도 흉흉한 상황에서, 못 견딘 그들이 난이라도 일으켜버리면 장원 경제에 타격이 클 겁니다. 예전에는 토런스 백작의 땅이었던 만큼 그쪽이 구민을 명분으로 쳐들어올 명분까지 내주게 될 거고요. ”

“그래서 도시의 부자들한테 생명수를... ”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제 목숨을 아까워하게 마련이니까요. 더군다나 부자병은 이름처럼 부자들만 걸리는 불치병으로 악명이 높은 데다, 언제 어떻게 걸리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으니 치료제가 있다면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재어놓으려 할 겁니다. 그 상황에서 영주가 독점하고 조금씩 풀면 값이 천정부지로 뛰겠죠. 이면에서 일어날 충성 경쟁의 콩고물도 짭짤하겠고요. ”


거기서 나온 돈으로 군대를 양성하겠다. 그것이 프란츠 자작이 세운 계획이었다.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가을 추수철을 넘어 슬슬 겨울을 향해가는 환절기.


토런스 백작이 무기를 만들고 신병을 모집하더라도 최소한의 훈련 및 준비기간은 필요할 테고, 그쯤이면 이미 겨울이 도래한 지 오래일 것이다.


지금은 몰라도 겨울에는 제법 쌀쌀할 것 같은 이곳에서 무리한 겨울전쟁을 감행할 가능성은 낮아보였다.

백작도 아직까진 공작의 눈치를 보고 있을 것이고.


하지만 봄이 와서 날씨가 풀리고 여름의 밀 추수철이 다가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그때까지도 프란츠가 신종선서를 하지 못한다면 카탈리나 공작은 토런스 백작의 생각에 동의하거나, 최소한 묵인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까.


토런스 백작은 안심하고 그동안 모아 둔 병력을 이끌고 호손으로 쳐들어오겠지.


황금빛으로 물든 호손의 밀밭을 짓밟고 떨어진 낱알들을 군량미로 삼아 진격하리라.


마침 근방의 다른 식량원인 청어나 대구도 그때에는 철이 지나 넉넉하지 못하겠고, 염장해서 보관한 것들도 슬슬 여름 더위를 이기지 못해 부패할 때니 성문을 닫고 버티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외지인인 내가 보아도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그것을 여기서 나고 자란 프란츠가 모를 리 없었다.


“아무래도 빨리 이곳을 떠야겠습니다. 자칫 발이 묶였다가는 밀빵 대신 전쟁 맛을 보겠어요. ”

“마을 분들은요? ”

“그 사람들이야 별일 있겠습니까? 누가 영주가 되건, 그들이야 자기 일이나 하며 세금이나 바치면 그만이죠. 하지만 손님으로 있는 우린 사정이 다릅니다. 아직은 여유로운 척 하지만 사태가 급해지면 분명 도움을 청하겠죠. 그때 우린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닐 테고요. ”

“... ”

“마을 사람들의 안위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에요. 저는 이 중세랜드에서 누가 어디의 영주가 되건 말건, 누가 누구 배때지에 칼을 꽂건 상관없지만, 그 쌈박질에 내가 휘말려드는 것만은 사양입니다. ”

“그렇군요. ”


릴리가 작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왜... 끊임없이 서로 싸우는 걸까요. ”


그녀가 꾹 쥔 주먹을 가슴에 얹고 맺힌 말을 토해냈다.


“서로 조금씩만 양보하면 될 텐데... ”

“이기적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인간이랍니다. ”


나는 제 입으로 말하고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내가 뭐라고 인간의 본성 따윌 논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생각을 고쳤다.

못할 건 또 뭐냐고.


짧다면 짧은 30년 남짓한 인생이었지만 세상의 단맛이랑 쓴 맛은 골고루 봤다고 생각한다.

내가 연구했던 분야도 그쪽과 꽤 관련이 있고.

당장 여기선 도무지 써먹을 곳이 안 보이지만.


“그런데 미르 씨는... 참 모르겠네요. ”


릴리가 갑자기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떨 때는 친절한 이웃집 아저씨 같다가도, 어떨 때는 높다란 성의 무서운 귀족님 같으시고, 어떨 때는 지혜롭고 따뜻한 현자님 같다가도, 어떨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갑고 모진 말을 던지시니, 어느 쪽이 진짜 모습인지... ”

“어느 쪽이고 할 것 없이 전부 접니다. ”

“... ”

“귀족인 척을 할 때에는 연기를 좀 하긴 하지만요. ”

“그렇군요. ”


릴리가 다시 한 번 스스로의 손을 쓰다듬으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릴리의 삶은 어땠을까?

현대의 대한민국에서 어릴 적에 고아가 되어, 보육원에서 유년기 대부분을 보낸 나보다 힘들었을까?


그랬을 거다.


어린 나와 동생에게 넉넉하진 않을지언정 최소한의 의식주를 제공해주었던 보육원도, 학업과 자립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던 국가장학금이나 기초생활수급제도도 이곳에는 없으니까.

치안도 비교조차 안 될 테고.


그럼에도 그녀는 그동안 내가 봐온 누구보다 착했다.

직접 그 시절을 겪은 자신보다 누가 더 잘 할 수 있겠냐며 기어코 보육자의 길을 선택한 내 여동생을 빼면.


타고난 성정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람이 때로 바뀌어버릴 수 있다는 걸 안다.

나만 해도 옛날엔 사람을 얼마나 잘 믿었는데.


생명수를 만드는 신비로운 힘을 가졌다지만 그렇기에 그녀를 이용하고 차지하려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가 믿는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나이 대의 소녀다운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그저 ‘타고나서’라고는 할 수 없으리라.


그녀는 노력해온 것이다.

지금까지.

그리고 이 순간에도 안간힘을 다해서.


신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고.

사람은 그렇게 추악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고.

번번이 넘어지고 상처받으면서도 믿으며, 꿋꿋하게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한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그런 그녀 앞에서 머릿속의 지식을 뽐내듯이 말해온 자신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런 표정을 보려고 녀석을 데리고 나온 건 아니었는데.


나는 목소리를 고쳤다.


“흠흠,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네? ”

“빨리라곤 해도 오늘 당장 튀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기도 어렵고요. 제 소중한 옷을 맡겨놓은 데다 추격대를 뿌리칠 자신도 없거든요. 귀족님께서 준비한 만찬 맛도 즐겨 봐야죠. 그러니 오늘은 고민 따위 내려놓고 속편하게 관광이나 즐기면 됩니다. ”


어느새 도착한 광장에서 나는 릴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럼 가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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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생명수의 소녀(1) +9 22.11.02 2,720 72 19쪽
3 불시착(2) +8 22.11.01 3,305 88 19쪽
2 불시착(1) +11 22.11.01 3,762 19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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