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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님의 서재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LEV1
작품등록일 :
2022.10.31 13:13
최근연재일 :
2022.12.28 22:25
연재수 :
69 회
조회수 :
74,064
추천수 :
2,527
글자수 :
469,180

작성
22.11.01 22:30
조회
3,304
추천
88
글자
19쪽

불시착(2)

DUMMY

“으헉! ”


거친 숨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켰다.


“허억, 헉... ”


어두운 방.

눅눅하고 퀴퀴한 공기.


달동네 시절이 떠올랐지만 그때와도 달랐다.

최소한 거기는 창밖으로 하늘이 보였으니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거라곤 내려앉은 어둠뿐이었다.

얼굴을 적신 식은땀을 닦아낸 나는 주먹을 쥐었다 펴보았다.


‘일단 살아있는 거지? 사지 멀쩡하게? ’


적어도 천국이나 지옥에 떨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푹신하진 않지만 어쨌든 침대에 누워 있는 듯하고.


‘근데 이거 침대 맞아? 촉감이 좀 이상한데. ’


특히 바닥을 짚은 손바닥에서 낯선 질감이 느껴졌다.

헤진 모포를 뚫고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는 이것들은,


‘지푸라기? ’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제 보니 내가 누운 물건은 최소한 현대적인 의미에서는 침대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라텍스나 스프링으로 만든 매트리스가 아니라, 겹쳐 쌓은 짚단 위에 모포를 덮은 게 다였으니까.


‘뭔데? 민속촌이야? ’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마른 나뭇가지들이 탁탁 타고 있는 벽난로의 불빛에 기대 주위를 둘러보다 어렴풋한 푸른빛이 새어 들어오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밖으로 나온 순간 나는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세상에나. ’


중천에 뜬 보름달이 믿을 수 없이 밝았다.

게다가 밤하늘을 수놓은 저 수많은 별, 별들.


언젠가 찾았던 학교 근처의 플라네타리움(Planetarium)보다도 수려한 하늘에 숨을 삼킨 찰나였다.


“아! 일어나셨어요? ”


집 외벽에 기대 앉은 채 별을 보고 있던 검은 옷의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조금 더 누워 계시지. ”

“여긴 어딥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거죠? ”

“음, 이곳은 제가 운영하는 구호소(Hospice)예요. 아침에 저 바다에서 정신을 잃고 떠밀려 오신 것을 옮겨왔는데 다행히 신께서 굽어 살펴 주신 모양이네요. ”


돌아온 대답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말이 통하는 걸로 봐서는 외국의 오지 따위에 불시착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

“덕분에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하나님을 모시는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인걸요. ”


다소곳이 손을 모은 소녀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옷차림을 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 수녀님인가 보다.

목소리에 어린 티가 남아있는 걸로 봐선 견습이려나.


나는 오랜만에 신이란 존재에 감사함을 느끼며 물었다.


“수녀님. 죄송한데 잠시 휴대폰 좀 빌려도 될까요? 제 건 조난당하면서 잃어버린 모양이라. ”

“휴대폰이요? ”

“네. 전화 한 통만 하게요. ”

“‘휴대폰’이 뭐예요? ‘전화’는 또 뭐고요? ”


예상 못한 대답에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진짜 모르세요? ”

“네. 처음 듣네요. 어감이 왠지 제국어 같기는 한데. ”

“‘제국어’라고요? ”

“네. 지금도 하고 계시잖아요? ”

“제국이라니? 혹시 대한제국 말입니까? ”

“아뇨. 정식 국호는 ‘무수한 별의 여신이시자 영광과 자유의 여신이신 리카 님을 비롯한 열두 주신께서 수호하시는 신성제국’이지만, 너무 길어서 신성제국이나 제국이라고 불러요. ”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그러니까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고요? ”

“한국? 처음 듣는 이름이네요. 혹시 최근에 새로 세워진 나라인가요? ”

“건국된 지 그래도 70년은 넘었습니다만... ”

“모르겠네요. 말씀을 들어보니 정말로 바다 너머에서 오신 분이 맞나 봐요. ”


나는 어이가 없어서 반문했다.


“아니, 그렇지만 이렇게 대화가 통하잖아요? ”

“그러게요! 신기해라. 외국 분께서 어쩜 이렇게 제국어를 잘 하세요? ”


그대로 가출할 뻔한 정신머리를 나는 간신히 복귀시켰다.


“됐고요. 여기 주소가 어떻게 됩니까? ”

“‘주소’는 또 뭔데요. ”

“주소가 뭔지 모른다고요? ”

“죄송한데 아까부터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모르겠어요. ”


대체 이게 말이 되는 얘기인가 싶었다.

할 말이 없어진 내가 애꿎은 밤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을 때였다.


“우선 들어오세요. 식사랑 치료수를 준비해 드릴게요. ”


소녀가 벽난로 앞 탁자로 나를 안내하더니 거무튀튀한 죽 그릇과 나무잔을 내왔다.


“식사부터 먼저 하시고 치료수를 마시면 되세요. ”

“고맙습니다. ”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한 둘이 아니었지만 일단 그릇부터 받아들었다. 하루 종일 쓰러져 있었다면 영양보충은 필수니까.


“근데 숟가락은 없나요? ”

“숟가락이요? 아. 마을에서 빌려야 하는데... ”

“됐습니다, 그럼. 그냥 먹을게요. ”


딱 봐도 넉넉해 보이는 살림은 아니지만 숟가락도 없다니?


그러고 보니 죽이 담긴 그릇도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이거 그릇은 맞아? 쇠도 나무나 도자기도 아닌 게...


‘몰라. 그냥 주는 대로 먹지, 뭐. ’


물에 빠진 걸 구해준 사람한테 봇짐까지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멀건 죽이니 그냥 그릇 째로 들이켜도 될 것 같고.


‘으, 밍밍해. ’


솔직히 맛은 형편없었다.


“잘 먹었습니다. ”

“벌써 다 드셨어요? 빵은... ”

“괜찮습니다. 빈속에는 무리일 것 같아서요. ”


빵이 있었구나. 어쩐지 죽 양이 적다고 했다.


그래도 지금은 참아야지.

오래 굶었을 때는 절대 급하게나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 빵 같은 밀가루음식은 더더욱.

규칙적인 식사가 어렵던 달동네 시절 직접 몸으로 체득한 교훈이었다.


“그러신가요? 그럼... ”


그릇을 가져간 소녀가 쭈뼛거리면서 물어왔다.


“빵은 제가 먹어도 될까요? 버리긴 아까워서. ”

“당연하죠. 물어보실 필요도 없는데. ”

“그럼 염치 불구하고... ”


염치는 무슨. 지나치게 예의바른 것도 병이네.

피식 웃었지만 나는 곧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와삭!


“... ”

“왜 그허세요? 오히하 호 아후세요? ”

“아뇨. 조금 놀래서. ”


실은 조금이 아니라 컬쳐쇼크였다.


“그릇을... 먹네요? ”

“아. 이건 그릇이 아니라 말린 빵이에요. 그냥 먹긴 좀 힘들지만 죽 같은 걸 담아두면 연해져서 먹을 만해지거든요. ”

“빠네 파스타 같은 거구나. ”


물론 원리가 그렇다는 거지 질에선 하늘과 땅 차이였다.


“제가 아는 빵과는 달라서 몰랐네요. ”

“거기 빵은 어떻게 생겼는데요? ”

“그렇게 특별하진 않은데. 겉은 갈색이고 속은 흰색이죠, 뭐. 저거보단 훨씬 부드럽고. ”

“흰색에 부드럽다면 설마 밀빵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

“어... 네. 원래 빵은 밀가루로 만드는 거 아닌가? ”

“... ”


소녀가 굉장히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저기, 혹시... ”

“네? ”

“환자분께서는 어디의 귀족님이신가요? ”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정신이 멍해졌다.


“아뇨. 평범한 시민인데. ”

“시민이요? ”

“음, 그런 게 있습니다. 하긴 여기가 ‘제국’이라면 있는 것이 이상한 개념일지도 모르겠네요. ”

“아까 말씀하신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작위 같은 건가요? ”

“작위라는 표현은 좀 그렇죠? 날 때부터 주어지니. ”

“날 때부터라고요? 그럼 설마 왕족... ”


아무래도 이 화제를 더 이어가는 건 무리 같았다.


“그런 거 아닙니다. 설명해드려도 잘 모르실 거예요. 알아들게 가르쳐드릴 자신도 없고요. ”

“죄송해요. 귀찮게 해서. ”

“아뇨. 저야말로 죄송하죠. ”

“그럼 푹 쉬세요. ”


그녀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나는 방의 지푸라기 침대로 돌아가는 대신 그녀를 따라나섰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환자분도 별 보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 ”

“최근에는 기회가 없었지만 어릴 적엔 동생이랑 자주 보러 갔었죠. ”

“그러셨군요. ”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얻은 정보들을 정리했다.

휴대폰은 물론 주소도, 주소의 개념조차도 없는 동네.

어째서 말이 통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늘’은 아마 이 사태의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참 예쁘죠? 과연 별의 여신님께서 축복하신 땅 다워요. ”

“수녀님께서도 별 보기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

“해가 지면 할 일이 없거든요. 이거 말고는 불을 켜야 하니까. ”

“그 불이 전깃불은 아니겠지요? ”

“또 제가 모르는 말씀을 하시네요. 보통은 촛불이나 등불을 써요. ”


예상대로의 대답에 나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추측을 반쯤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에게 물었다.


“혹시 별을 볼 줄 아십니까? ”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조금은 알죠. 매일 보다 보니. ”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여기에도 ‘북극성’이 있습니까? ”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가 탁 손바닥을 쳤다.


“아! 언제나 북쪽에 떠 있는 길잡이별을 말씀하시는 거죠? 저거예요! ”


그녀가 가는 손가락으로 하늘 한 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떠 있는 붉은 별요! 제 고향에서는 ‘밤의 태양’이라고도 불렀어요. ”

“그렇군요. ”


이로써 두 가지 사실이 명백해졌다.


하나는 이곳이 어느 행성의 ‘북반구’라는 점.

또 하나는 여기가 내가 살던 ‘지구’가 아니라는 점.


왜냐하면 내 세상의 북극성은 새하얗게 빛나는 세페이드 변광성이니까.


천문학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저 소녀와 비슷한 이유로 숱하게 밤하늘의 별을 봐왔던 나다.

저건 내가 알고 있는 지구의 하늘이 아니었다.

저렇게 별이 많은데 아는 별자리 하나 찾을 수가 없으니.


“길잡이별 바로 아래 있는 하얀 별무리가 그 유명하신 리카 여신님의 성좌예요! 별의 여신 리카님과 그 사도들이 승천하신 곳이라죠. 위쪽의 노란 별들은 태양신 판님의 성좌인데 한때 두 분이 하늘의 가운데자리를 두고 크게 싸웠대요. 그래서 두 분 사이에 낀 황혼과 신과 여명의 여신님이 매일 자리를 바꿔 가며 중재하고 계신다고... ”


소녀가 들뜬 목소리로 한참을 재잘거렸다.

나름 흥미로운 신화였지만 마냥 듣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적당한 타이밍에 말을 끊었다.


“조금치고는 많이 알고 계시네요? ”

“앗,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누구랑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오랜만이라. ”


옆머리를 긁은 그녀가 화제를 바꾸었다.


“그럼 이번에는 환자분 얘기를 해주세요. 뭐 하는 분이세요? 바다를 건너오실 정도면 대단한 분이실 것 같은데. 차림을 보니 용병이나 상인은 아니신 것 같고. ”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러 여행하던 중이었습니다. ”

“와! 학자님이셨어요? 신학? 철학? 법학? ”

“셋 다 아닌데. ”

“다 아니라면... 혹시 마법? ”


이 수녀님이 지금 마법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과학입니다. ”


내뱉고는 속으로 반추했다.

햇병아리 석사 나부랭이지만 나름 국가기관 소속 연구원이니 스스로를 과학자라고 소개해도 틀린 말은 아닐 거다.


“과학이라고요? ”


또 나왔네. 저 모르겠다는 얼굴.


“과학이 뭔데요? ”

“여기서 설명해도 이해 못하실 겁니다. 대충 철학 비슷한 거라고 알고 계시면 돼요. ”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과학(Science)’이 자연철학과 별개의 학문으로 독립하는 것은 내 세상 기준으로 18세기 이후니까.


“우, 학자님은 절 너무 무시하시네요! ”


눈을 흘긴 그녀가 항의했다.


“이래봬도 몇 년 넘게 여행도 다닌 몸이라고요! 웬만한 학생들보다 보고 들은 게 많을 걸요? ”

“네? 그쪽 혼자서요? ”

“험한 곳은 상단이나 용병단을 따라다니긴 했지만요. ”

“위험하지 않았어요? ”


그랬을 것이다.

끽해야 고등학생이나 될 법한 여자애가 홀로 여행을 하는 것은 곳곳에 CCTV가 있는 현대문명국가에서도 위험천만한 일이니까.


하물며 주소조차 없을 만큼 행정이 정비되어 있지 않은 이곳이라면 말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위험했죠! 중간에 습격을 받았던 적도 여러 번이었고요. 그래도 보시다시피 살아남아 왔다고요. ”

“운이 좋았네요. ”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힘 덕분이죠. ”


거 신심이 투철하신 수녀님일세.

혀를 찬 순간 소녀가 말했다.


“보여드려요? ”

“네? ”

“아쿠아 비타룸(Aqua Vitarum). ”


소녀가 팔을 앞으로 뻗으면서 외쳤다.


그녀가 허공에서 공기를 매만지듯 양손을 움직이자, 그 사이로 물방물이 맺히더니 주먹 크기로 불어났다.

소녀가 그것을 천천히 끌어당겨 입술에 가져다대었다.


-후룩!


“자, 학자님도... ”

“아. 제 이름은 이미르예요. 미르라고 부르시면 되고요. 학자님이라는 호칭은 아무래도 민망하네요. ”

“앗, 네. 릴리예요. 릴리 누. 릴리라고 불러주세요. ”


잠깐의 통성명을 마친 소녀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미르 씨도 한 모금 하실래요? 보시다시피 깨끗한 물이에요. ‘생명수’라는 이름은 좀 거창하긴 하지만요. ”


일렁이는 물방울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제 와서 거절하기도 뭐해서 얌전하게 받아마셨다.


-후룩!


“어떠세요? ”

“물맛이 좋네요. ”

“헤헤, 그렇죠? ”

“아까 저한테 주신 치료수란 게 이건가요? ”

“아! 그건 이름 그대로 치료수예요. 열과 염증을 가라앉히고 통증을 완화시켜주죠. 방금 건 생명수고요. 원기를 북돋고 장기적인 건강에 도움을 줘요. 각성수도 만들 수는 있지만 지금은 역효과만 날 거예요. ”

“세상에. ”

“고위 사제나 요정님들처럼 큰 상처를 단숨에 아물게 하지는 못하지만, 여행길엔 엄청 도움이 됐어요. 적어도 물 걱정은 안 해도 됐거든요. ”

“설마 이거 마법입니까? ”


명색이 과학도인 나지만 그밖에는 표현할 말이 없었다.

소녀가 살짝 토라진 듯이 눈을 흘겼다.


“이왕이면 기적이라고 해주세요. ”

“아참, 수녀님이셨죠. 제가 실례를 했네요. ”

“근데 아까부터 절 그렇게 부르시네요? 수녀라고요? ”

“네. 수녀님 아니세요? 하나님에, 새카만 옷에... ”


그 순간 그녀가 갑자기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 하나님에 관해 알고 계신가요? ”

“네? ”

“말씀하시는 걸 보니 본 적 있으신 거죠? 저 말고 다른 하나님을 모시는 분을! ”

“어, 그게... ”

“말씀해주세요! 부디! ”


갑작스런 태도변화에 당황한 나는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 보니 같은 기독교라 해도, 수녀님들이 있는 성당에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했던 것 같다.

사이다가 끌리면 교회로, 콜라가 끌리면 성당으로 갔던 초코파이교 신자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용어가 비슷할지언정 내가 알고 있는 그 종교일 리는 없을 것이다. 소녀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곳은 다신교 사회인 이세계니까.


“이름만 비슷한 다른 종교입니다. 애초에 거기는 유일신교라 별의 여신이나 태양신은 인정도 안 할 테고요. ”

“그, 그런가요. ”


시무룩해진 그녀가 못내 아쉬운 듯 내뱉었다.


“마침내 단서를 찾았나 했는데... ”

“여행 중에 동료 분들과 헤어지신 겁니까? ”

“그런 건 아니고요. 찾고 있거든요.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들을. 그러기 위해 떠났던 여행이었고요. ”

“하나님의 사도라고요? ”

“어린 저를 구해주시고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내려주신... 그러고는 홀연히 떠나가 버리신 천사님들이요. ”


허무맹랑한 소리를 진지하게 한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치만 이렇게 대륙 끝까지 왔는데도 찾을 수가 없네요. 하나 있던 길잡이마저 고장이 나버렸고... ”

“길잡이요? ”


그녀가 옷 안에 감춰져있던 목걸이를 꺼냈다.


넓적한 마름모꼴로 생긴 크리스탈 목걸이.

그 중앙에 박힌 로켓의 뚜껑을 열자 좌우로 번갈아 회전하는 쇠바늘이 달빛에 반짝였다.


“이건... ”

“천사님께서 남기고 가신 유물이에요. 원래는 바늘의 한쪽이 늘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이곳에 온 이후로는 계속 빙빙 돌기만 하네요. 어쩌면 더 이상 쫓지 말라는 계시일지도요. ”


침울하게 말한 소녀가 고개를 떨어뜨린 순간 나는 외쳤다.


“이거 나침반이네요? ”

“네? ”

“나침반이라고요. 아직 움직이긴 하는 걸로 봐서 고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자성이 약해져서 그런 거면 다시 채워주면 되거든요. ”

“저, 정말인가요? ”


소녀의 눈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그럴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장담은 못해요. ”

“그, 그래도 한 번만 봐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근데 고치려면 자석이 있어야 하는데. ”

“자석이요? ”

“역시 모르시는구나. 쇠에 착 들러붙는 돌이나 금속 같은 거 본 적 없으세요? ”


솔직히 기대하진 않았다. 여태껏 자기 목에 걸고 있던 게 나침반인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죄송해요. ”

“저도 자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서... ”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릴리 씨! 제가 바닷가로 떠밀려왔었다고 했었죠? ”

“네. ”

“그때 이대로 왔었나요? 설마 ‘이 복장’으로? ”


생각해보니 말이 안 되었다.

애초에 바다로 떨어졌다면. 지금 같은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는 사해(死海)가 아닌 이상 가라앉아 익사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숨이 붙은 채로 해변까지 밀려왔다면 그만한 부력을 가진 무언가를 잡거나 입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구명조끼를 챙겨 입은 기억은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출국장부터 쭉 입고 있던 휴브리스사의 방수 패딩.


“혹시 이 위에 새카만 옷을 입고 있지 않았나요? 겉은 매끈매끈하고 안은 벌집처럼 생긴. ”

“맞아요! 옮길 때 너무 불편해서 벗겼지만요. ”

“갖고 있습니까? ”

“벽난로 근처에 놔뒀을 텐데... 잠시만요! ”


그녀가 집에 들어가서 패딩을 들고 나왔다.


“이거 맞죠? ”

“네. 줘 보세요. ”


-타닥, 탁!


나는 나침반 바늘의 붉은칠이 된 부분에 패딩의 똑딱이를 갖다 대었다.


순간적으로 빠르게 붙였다가 반대로 돌리기를 몇 번, 바늘이 잠깐 제대로 정렬하는 듯 보였지만 얼마 있지 않아 다시 제멋대로 흔들렸다.


“어떤가요? ”

“이상하네요. 이쯤이면 슬슬 자성이 돌아와야 하는데... ”


출력이 모자랐나?

아니면 주변에 나침반을 방해하는 지력지대라도 있나?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더 연구를 해봐야겠네요. ”

“역시 무리였나요. ”


울상이 된 릴리가 풀썩 탁자 위로 엎어졌다.


“면목이 없네요. ”

“아니에요. 제가 보챈 건데요. 고생하셨어요. ”


한숨을 쉰 그녀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해가 뜰 때까진 시간이 남았으니 마저 눈을 붙이세요. 저도 이만 자러 가야겠네요. ”


힘없이 웃은 그녀가 터덜터덜 맞은편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방으로 돌아가서 지푸라기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다시 찾아온 적막.


릴리는 그새 잠에 들었는지 쌔근쌔근 숨소리가 문을 넘어 들려왔지만, 오래 누워있던 탓인지 주변 환경의 생경함 때문인지 나는 좀처럼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마감이 덜된 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별빛과 달빛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기를 수십 분.


생각했다.

생각이 났다.


많지는 않지만 나를 소중히 대해준 사람들,

얼마 없지만 내가 소중히 생각했던 사람들.


미우나 고우나 어린 시절을 함께한 ‘집’의 아이들.

가난한 고아를 번듯한 연구원으로 키워주신 교수님.

언제나 나를 믿어주고 응원해주었던 여동생.


‘다들 별 일 없겠지? ’


엄습한 불안감을 고개를 흔들어서 털어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


헛웃음을 지으며 돌아누웠다.

곧 눈앞이 깜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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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시착(1) +11 22.11.01 3,762 19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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