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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님의 서재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LEV1
작품등록일 :
2022.10.31 13:13
최근연재일 :
2022.12.28 22:25
연재수 :
69 회
조회수 :
74,084
추천수 :
2,527
글자수 :
469,180

작성
22.11.02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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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생명수의 소녀(1)

DUMMY

눈을 뜨니 하늘 위였다.


머리 위에는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 발밑에는 푸르른 바다와 녹황색의 대지.


내 기억 속 지구의 모습과도 비슷했지만 대륙과 해안선의 모양이 사뭇 달랐다.


그렇게 땅과 우주를 사이에 두고 무중력상태로 둥둥 떠 있기를 수십 초.


눈부신 빛이 쏟아지더니 주변 공간이 새하얗게 덧칠되어 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완성된 방.

말이 방이지 바닥도 천장도, 문이나 벽의 경계조차도 없다.


다만 돌아온 중력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을 뿐.

그렇게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문득 한 여인이 나타났다.


[아아, 드디어... ]


고막 대신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지는 목소리.

윤기가 흐르는 금색의 머리카락과 하늘하늘한 백색조의 드레스가 마치 한 몸처럼 어울리는 여자였다.


감탄을 넘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외모.

무심코 숨을 삼키게 하는 육감적인 몸매에도 정욕보다 경외심이 일게 하는 신비로운 분위기.


거기서 나는 깨달았다.

그녀가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여신의 이미지 그 자체라는 것을.


[드디어 만나는군요. ]


여인이 감격한 표정으로 가는 팔을 내밀었다.

손바닥으로 내 볼을 감싸고 좌우로 비비더니 쭉 끌어당겨서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


생이별한 어머니가 장성한 아들과 해후한 듯이.

독수공방하던 여인이 전쟁에서 돌아온 연인을 마주한 듯이.

아이가 오랜만에 만난 어버이의 품에 안기듯이.


황홀한 감각이 등허리를 타고 흘렀다.

이대로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있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억지로 정신을 추슬렀다.

가냘픈 어깨를 붙잡고서 있는 힘껏 밀어냈다.


“뭡니까? ”

[아. ]


한 걸음 물러선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요. 아직은 모르시는 게 당연하겠지요. 저는... ]


배 아래로 양손을 맞잡은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저는 하늘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성좌들 중의 하나. 그중에서도 땅의 인간들을 가장 사랑하는 자. ]

“너무 말을 빙빙 돌리시는데. ”

[그들은 저를 ‘여신’이라고 부른답니다. ]

“설마하니 진짜로 여신님이셨습니까. ”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코웃음을 쳤을 일이었다.

이런 건 꿈인 게 당연하니까. 그것도 개꿈.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어제부터 겪은 일이 너무 많았다.


“저를 이곳으로 데려온 게 당신인가요? ”


온화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입니까? ”

[당신께 한 가지 부탁을 드리기 위함이지요. ]


이해가 안 되었다.

부탁이라고? 여신이 나한테 부탁할 일이 뭐가 있지?


“뭔데요? ”

[부디 이 땅의 사람들을 멸망으로부터 구해주세요. ]

“네? ”


진짜 판타지 소설 같은 전개에 정신이 멍해졌다.


“뭐, 조만간 마왕이 부활이라도 한답니까? ”

[역시 짐작하고 계셨군요! ]

“아뇨. 전혀. ”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농담으로 한 말이 맞아 떨어진 것뿐입니다. 애초에 말이 안 되잖아요. 그걸 왜 저한테 부탁해요? 성좌라면서요? 신이라면서요? 직접 하시면 될 일을. ”

[저를 감시하는 다른 성좌들이 있으니까요. ]


즉답한 그녀가 망설임 없이 말을 이어갔다.


[슬프게도 하늘의 모든 성좌들이 땅의 인간들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그들이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이들도 있고, 미워하는 자들도 많지요. 과거에는 저와 생각을 같이 하는 성좌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대부분 돌아서거나 사라져버렸답니다. 결국 제게 남은 선택지는, ‘땅의 운명은 땅 위의 존재에게 맡긴다.’는 ‘하나의 대원칙’을 환기시키는 것뿐이었죠. ]

“... ”

[하지만 그것은 다가오는 멸망을 제 힘으로 막을 길 역시 사라짐을 뜻했답니다. 제가 움직이는 순간 저와 생각이 다른 성좌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개입할 테니까요. 이 잠깐의 만남 역시 저 보름달이 그들의 눈을 가려준 사이 간신히 마련한 기회예요.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 바로 말씀드릴게요. ]


그녀가 비취색의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미르 님. 저의 ‘챔피언’이 되어주시겠어요? ]


챔피언(Champion).

우리말로 번역하면 대전사(代戰士).

누군가를 대신해서 싸우는 직업 전사를 일컫는 말.


때로는 옛 신화나 전설에서, 판타지 소설 혹은 게임에서, 왕이나 신의 대리인으로서 악의 무리들과 싸워 물리치는 영웅을 뜻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용사(勇士).

나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 알아보십시오. ”

[미, 미르 님! ]

“서로 손 안 대기로 했다면서요? 이거 협정 위반 아닙니까? 내가 왜 그쪽의 꼼수에 껴들어야 해요? ”

[그렇지 않습니다. 성좌들은 비록 땅의 일에 직접 개입할 순 없지만, 한 사람의 챔피언을 통해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는 있으니까요. 그들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유흥을 위해서, ‘유희’라고 하는 이름으로. ]

“그럼 더더욱 딴 사람 찾아보세요. 보아하니 여기 마법도 있는 세계관이더만. 저 같은 일반인보다 잘난 사람은 찾으면 얼마든지 있을 거 아닙니까? 당장 그 누구냐... 릴리라는 여자애만 해도 두 손으로 물을 만들어 내던데요. ”

[그 아이는... ]


무심코 뭔가를 말하려던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지금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군요. ]

“...? ”

[하지만 하나는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이건 미르 님이 아니면 안 돼요. 당신께, 오직 당신께만 그럴 힘이 있으니까. 이 땅의 사람들을 멸망으로부터 구해낼 힘이! 그러니 부디... ]

“죄송합니다. ”


나는 자칭 여신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군대에서 특급전사도 못 달았던 평범한 몸이다. 머리는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불세출의 천재까진 아니고.

세상을 구하는 영웅 따위 꿈꾼 적도 될 리도 없다.

게다가,


“제겐 제 세상이 있고 그곳의 소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살려주신 건 감사하지만 전 그들에게 돌아가야 해요. 그러니 부탁합니다. 절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


눈을 동그랗게 뜬 여신이 이윽고 탄식했다.


[아아, 당신마저 그들 같은 말을 하시는군요. ]


뜻 모를 말을 입에 담은 그녀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왠지 가슴 한 쪽이 시큰했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유감이지만 그 소원은 들어드릴 수가 없답니다. 제 능력 밖의 일이니까요. ]

“신을 칭하신 것치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으시네요. ”

[하지만 당신이 가진 힘의 일부를 돌려드릴 수는 있겠죠. ]

“네? ”

[시간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서 직접 확인하세요. 쓸 줄 모르는 자에게는 겉치레 장식만도 못하고, 그 무게는 가장 가벼운 단검보다 가볍지만, 그렇기에 저 하늘의 성좌들이 가진 눈조차도 피해 인과의 제약을 넘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 당신의 세계가 그대에게 남겨준 최대의 유산을. ]


여신의 윤곽이 바람에 날리듯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아까부터 계속 뜻 모를 이야기만 늘어놓고... ”

[살아가세요. 그리고 살아남으세요. 언젠가 그 여정에서 저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된다면, 그때는 저의 제안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주세요. ]

“기다려요! 아직 물어볼 게... ”

[그럼 다음 보름달이 뜰 때까지. ]


방의 풍경이 유리창이 깨진 것처럼 갈라졌다.

둥실 몸이 떠오르더니 다시 의식이 멀어졌다.



* * *



어느덧 아침이었다.


좌우를 둘러보니 보인 것은, 틈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엉성한 오두막과 조악한 지푸라기 침대, 꺼진 양초와 빈 나무 컵.


몇 시간 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어보였다.

생명수의 효능인지 잠자리가 불편했던 것치고는 피로감이 없었지만 정체불명의 힘이 솟구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개꿈이었나. ’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빼꼼 얼굴을 내민 릴리가 나를 불렀다.


“저, 학자님? 일어나셨으면 식사하실래요? ”

“고마워요. 지금 갈게요. ”


그래, 일단은 아침부터 먹자. 옛말에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지 않던가.


약간의 설렘을 안고 방문을 열었다.

어제 환자식은 솔직히 엉망이었지만 오늘은 좀 다르겠지.


거실 겸 부엌으로 나가자 릴리가 벽난로 위에 걸어 둔 냄비를 휘휘 젓고 있었다.


동시에 풍겨오는 익숙한 냄새.

품고 있던 기대감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녀가 냄비의 내용물을 거무튀튀한 원반 위에 철퍽 올린 순간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똑같구나. ’


딱딱한 빵으로 만든 일회용 그릇과 멀건 죽.

아무래도 환자식이 아니라 이 집의 고정메뉴였던 모양이다.


‘얻어먹는 주제에 뭐가 불만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보육원 시절 먹었던 묽은 들깨뭇국과 콩나물무침도, 군대 시절 악명을 떨쳤던 똥국과 조기튀김도, 이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해물비빔소스도 저것보다는 낫다.

그것들에는 아무튼 ‘맛’이라는 게 존재하니까.


‘대체 이건 무슨 요리람? ’


무심코 요리라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며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띠링!


알림음이 울렸다.


[이미지 검색을 실시합니다. ]


‘응? ’


이윽고 떠오르는 홀로그램 화면.


-딸깍!


[관련 검색어 : 귀리죽 (묽다.) ]


“뭐야! ”


나는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대체 뭔? ”

“죄, 죄송해요! 손님 대접이 영 별로죠? 그렇지만 당장은 이것밖에 없어서... ”


자기 몫의 죽을 든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녀에게 나는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그런 거 아닙니다. 갑자기 눈앞에 뭐가 떠올라서 그랬어요. 앉으세요. 주인이 드셔야 저도 편히 먹죠. ”

“아, 네! ”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양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본인은 부정했지만 역시 릴리는 훌륭한 수도녀다. 이걸 앞에 두고 신께 감사기도가 올라가는 걸 보면.

초코파이교 신자다운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그녀가 물었다.


“역시 입맛에 안 맞으시나 보네요. ”


감춘다고 했는데도 티가 났나 보다.

사실이긴 하지만 대놓고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제가 살던 데서 먹던 음식과는 많이 달라서요. ”

“죄송해요. ”

“죄송하긴요. 구해주신 데다 잠잘 곳이랑 음식까지 주시는데 입맛까지 따지면 도둑놈이죠. ”


후루룩 소리가 이윽고 와작 와작으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나도 그릇을 뜯어먹는 것을 사양하지 않았다.

딱딱한 끄트머리와 눅눅한 안쪽 식감의 대비가 재미있어, 물에 물탄 듯 맹맹한 죽보다는 그나마 나았다.


‘근데 아까 그건 뭐지? ’


<ORACLE>

[ ]


마치 대답하듯이 창이 떠올랐다.

반투명한 백색조의 바탕 위에 떠 있는 하얀 바(bar).


‘이건 설마 구골(Googol) 검색엔진? ’


스펠링을 보니 구골은 아니고 ‘오라클’이라는 듯하다.

‘신탁(신의 대답)’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여신이 줬다고 티라도 내겠다, 이건가? ’


아무튼 테스트 겸 머릿속으로 사념을 보내보았다.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이건 뭐지? ’


[이미지 검색을 실시합니다. ]


‘오? 된다! ’


-딸깍!


[관련 검색어 : 트랑쇼와르 (딱딱하다.) ]


‘트랑쇼와르? ’


[검색어 ‘트랑쇼와르’의 상세정보를 표시할까요? (Y/N) 출처 : 세피로스위키 ]


‘Yes. ’


[트랑쇼와르(tranchoir) : 중세시대에 주로 생산 및 소비되었던 ‘도마’ 빵. 둥글고 판판한 원형의 검은 빵을 구운 뒤 1주일동안 방치해서 딱딱해지면 그릇으로 사용하였다. 깨끗한 물의 지속적인 공급이 어려웠던 시기, 그릇을 닦아 쓰는 것보다 일회용 빵 그릇을 만드는 것이 간편하고 위생적이었기에 애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때로 ‘베푸는 그릇’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귀족계층이 식사에 사용한 음식 국물이 밴 트랑쇼와르를 빈민들에게 적선하였기 때문이다... ]


“와, 씨! 쩌네? ”

“네? ”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

“혹시 어디가 아프신 거면 말해주셔야 해요? ”


걱정스런 표정으로 보는 릴리를 외면하며 빵조각을 씹었다.

꿈속에서 여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쓸 줄 모르는 자에게는 겉치레 장식만도 못하고, 그 무게는 가장 가벼운 단검보다 가볍지만, 그렇기에 저 하늘의 성좌들이 가진 눈조차도 피해 인과의 제약을 넘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 당신의 세계가 그대에게 남겨준 최대의 유산을. ]


‘그게 이 뜻이었구나. ’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어젯밤 내가 꾼 것은 개꿈 따위가 아니었다.

자칭 여신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내게 준 힘은 ‘정보’.

출처는 십중팔구 내 세계의 ‘인터넷’.


지적재산권 침해가 걱정될 만큼 친숙한 검색화면과 무엇보다 중세라는 표현을 보면 확실하다.


물론 이 세계가 내 세계의 중세와 같다는 보장은 없다. 마법 같은 게 실존하는 만큼 다른 점도 있겠지.

그러나 어쨌건 사회상의 여러 부분들이 유사한 듯하고, 그런 이곳에서 ‘중세’라는 단어는 굉장히 어색한 말이었다.


중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중세가 곧 현대니까.


그러니 내가 받은 정보들은 지구 것일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원래 내가 가진 힘을 돌려준다.’는 언뜻 들으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도 성립했다.

나를 비롯한 현대인들은 평생 동안 인터넷을 써왔으니.


생각이 정리된 나는 테스트를 계속했다.


‘오라클? 내가 나온 보육원 누리의 집 전화번호는? ’


[YYY-ZZZ-XXXX. ]


‘전화를 걸어줄래? ’


[실패 : 착신불가. ]


역시 인터넷전화는 안 되는구나.


‘혹시 www.googol.co.kr에 접속 가능하니? ’


[가능합니다. 해당 화면을 표시할까요? (Y/N) ]


이걸로 데이터베이스가 내 세상의 인터넷이라는 가정은 확실해졌다.


‘Yes, 해당 포털 사이트의 최신 글을 열어줘. ’


[ㅁㅊ! 방금 뜬 뉴스 실화냐? 우리 다 X된 듯. ]


단박에 눈길을 끄는 제목이 튀어나왔다.


‘클릭! 아니, 상세정보 표시였나? 암튼 자세히! ’


[미안하다. 이거 보여주려고 어그로끌었다... ]


‘에라이. ’


낚였네.

그렇게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이쪽도 낚은 게 있었다.

심지어 대어였다.


‘글 제목 밑에 표시된 작성시간이 어제야. ’


나는 분명히 최신 글을 열어달라고 했는데.


검증을 위해 대한민국 최대의 커뮤니티사이트에 들어갔다.

무려 2천만 개 이상의 글이 올라와있는 최상단 게시판, 그곳을 살펴본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오늘 올라온 글이 없었다. 단 하나도.


어제자로 시간이 멈춘 인터넷, 그것은 인터넷이라기보다 엄청나게 커다란 백과사전 같았다.


머릿속의 세상을 움직였다.

이쯤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현대의 지구보다 문명수준이 수백 년은 떨어지고, 신적 존재와 마법이 실존하는 이세계에 떨어져버렸다는 것을.


그럼에도 소위 여신이란 자의 가호로 일방통행으로나마 웹 서핑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앞으로 이 힘을 이용해 이 땅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내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때까지.


“식사 중에 무슨 고민을 그리 깊게 하세요? ”


릴리의 말에 현실로 돌아온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를 현실이라 생각해야 하는 내 처지가 우스워서.


“와. 진짜 먹기 싫으신가 보다. 그냥 저 주세요. ”

“아닙니다. 잠시 고향 생각을 좀 했거든요. ”


나는 남은 트랑 머시기 조각들을 입에 털어 넣었다.


“잘 먹었습니다. ”

“잘 먹었습니다. ”


릴리가 나와 함께 식탁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내가 다 먹기를 기다려준 모양이었다.


그녀가 바로 정리정돈을 시작했다.

몸에 밴 동작대로 조그마한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눈이 부시다는 생각이.


그제야 나는 밤의 어둠 속에 가려져있던 그녀가 처음으로 밝은 햇빛 아래 나와 있음을 깨달았다.


여기서도 통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동서양의 아름다움을 두루 지닌 소녀였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 동글동글한 생김새는 전형적인 동양인의 것이었지만, 오똑한 코나 탁 트인 미간이 이국적인 매력을 더했다. 혼혈인가?


조금만 더 크면 절세라는 표현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저 밝은 성격과 온화한 성품까지.


척 봐도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것 같진 않은데 사회복지제도가 정비된 현대국가도 아니고 이런 유사 중세랜드에서 잘도 저렇게 컸구나 싶었다.


아까의 부실한 식사를 생각하면 특히.


의문이 들었다.

진짜로 그랬다.

뭔가 이상했다.


‘방금 식사, 맛은 그렇다 치고 영양학적으로 괜찮을까? ’


굳이 머릿속 인터넷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릴리 씨. 죄송한데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

“잠시 이것만 치우고요. 네! 말씀하세요. ”

“궁금해서 그러는데 릴리 씨의 식사는 늘 이런 식인가요? ”

“아, 그게... 최근 몇 달 간은 그랬어요. ”

“안 좋은데. 제가 사람 몸을 조금은 아는데, 솔직히 이런 식단으로는 건강을 유지하기 힘들거든요. ”


그나마 보이는 것이라곤 탄수화물뿐. 단백질도, 지방도 엄청나게 부족한 식단이다. 무기염류와 비타민까지 가면 말해봤자 입만 아프고.


이 집이 가난하다는 건 딱 봐도 알겠다.

아무리 그래도 이틀 연속 이런 식사는 지나치다.

장기로 가면 병난다.

엥겔계수가 높아지는 한이 있더라도 개선이 필요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릴리가 말했다.


“실은 올 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땐 소금에 절인 청어를 조금 넣을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마을의 사정이 나빠져서... 여름에 바닷물이 범람해서 춘경지 3분의 1을 덮쳐버렸대요. 아직은 청어철도 먼 모양이라. 죄송해요. 손님대접을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건 아는데... ”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밥투정이 아니라 릴리 씨의 건강이 걱정돼서 물어본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역시 학자님이시네요. 그래도 어디가 아프거나 하진 않아요. 하나님의 축복 덕분이죠. ”

“‘생명수’ 말이죠? ”


나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래, 여긴 마법과 기적이 실존하는 세계지.


정리를 마친 그녀가 외출채비를 했다.


“잠시 일하러 갔다 올 테니 쉬고 계세요. 잘 풀리면 오늘은 말린 소시지라도 좀 얻어올게요. ”

“저 때문이라면 무리 안 해도 됩니다. ”

“저도 맛있는 건 좋아하니까요.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려고요. ”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들어간 릴리가 외출복인 듯한 짙은 색의 로브를 입고 나왔다.


그녀가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그새 내 방에서 패딩을 입고 나온 탓이었다.


“배웅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

“혹시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 해서요. ”

“괜찮아요. 아직 몸 상태를 장담할 수 없으니까 무리하지 말고 쉬세요. ”

“충분히 쉬었습니다. 멀쩡해요. ”


난감한 표정을 짓는 릴리에게 나는 본론을 말했다.


“괜찮으시면 오늘 릴리 씨를 따라다녀도 될까요? 짐꾼이라도 생긴 셈 치세요. 심심하면 말이라도 거시고. ”


돌아갈 방법을 찾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상 여기의 주민들과 접촉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생김새도 차림도 상당히 이질적일 나로서는 적지 않은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


이왕이면 관계자가 옆에 있을 때 얼굴을 비춰두는 편이 나을 거다.


“정말 괜찮은데. ”

“저도 세상 구경 좀 하고 싶어서요. 제가 못미더우시거나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

“아!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


고개를 끄덕인 그녀와 함께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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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생명수의 소녀(3) +3 22.11.03 2,125 62 17쪽
5 생명수의 소녀(2) +2 22.11.03 2,294 61 16쪽
» 생명수의 소녀(1) +9 22.11.02 2,721 72 19쪽
3 불시착(2) +8 22.11.01 3,305 88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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