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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님의 서재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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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작품등록일 :
2022.10.31 13:13
최근연재일 :
2022.12.28 22:25
연재수 :
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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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46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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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69,180

작성
22.11.04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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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글자
17쪽

태양의 우물(1)

DUMMY

눈을 뜬 그녀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무, 물론 지금 당장 가겠다는 소린 아니고요! ”

“왜요? ”


나는 릴리의 말을 중간에 잘라버렸다.


“이왕 갈 거면 당장 출발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우물쭈물하다가 겨울이 오면 발이 묶이기 십상일 텐데요. ”

“...제 고향은 여기서 엄청 먼 곳에 있어요. 어차피 한 번 이상 다른 곳에서 겨울을 나야 할 거예요. ”

“그러니까요. 지금은 가을이잖습니까. 날씨도 선선한 편이고. 그 은화가 있으면 여기보다 겨울을 나기 좋은 곳을 얼마든 찾을 수 있지 않겠어요? 당장 저 성벽 안에만 들어가도 훨씬 나을 것 같은데. ”

“그럼 이 마을은 어쩌고요. ”


나는 뒷머리를 긁고는 대답했다.


“솔직히 알 게 뭡니까? ”

“네? ”

“알 게 뭐냐고요. 저들은 그동안 릴리 씨의 호의를 이용해서 몰래 이득을 챙겨오다가, 자업자득으로 궁지에 몰리니 그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들킬 것 같으니 그제야 사과를 그것도 외부인의 입을 빌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제 생각엔 신께서도 기립박수를 치며 찬성하실 것 같은데요? ”

“제 작은 원한을 핑계 삼아 어려움이 경각에 달한 사람을 외면한다면, 제가 모시는 하나님과 무엇보다 저 자신이 저를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 설령 그들이 학자님의 신께서는 버린 죄인이라고 해도요. ”


이야, 이걸 안 밀리고 받아치네? 실화인가.


“릴리 씨는 진짜 무슨 성모님이라도 됩니까? ”

“성모님이요? ”

“전에 한 번 말했던 제 나라의 종교에 나오는 분인데... 인류의 죄를 사한 구세주의 어머님 되시든가 했을 겁니다. 그쪽에서는 자비의 상징쯤 되시는 분이죠. ”

“어머니라니, 다 큰 처녀한테 못 하는 말이 없으세요. ”

“글쎄요. 제 기준에서는 아직 덜 큰 처녀이신데. ”

“이래봬도 열여섯이거든요? ”


발끈해서 외친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덜 크신 거 맞네요, 뭘. 아직 애네. ”

“아, 아니거든요? 여행하느라 예식만 못 치렀을 뿐이에요! ”

“겨우 열여섯에 성인식을 한다고요? ”

“정확히는 열다섯에요. 미르 씨네 나라는 아니에요? ”

“너무 어린데. 열아홉은 돼야지. ”

“늦네요. 결혼을 늦게 하시나 봐요. ”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만... 보통 30살 전후? ”

“엑?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늦지 않아요? ”

“딱히요? 우리들은 100세 시대였기도 하고. ”

“100세라면 설마 100살...? ”

“음, 솔직히 100살은 오버지만 그래도 큰 병이나 사고가 없으면 8~90살까지는 살았죠. ”


릴리가 입을 떡 벌리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저런 표정일 때는 보통 괴상한 소리를 하던데.


“하, 하프엘프셨어요? ”


역시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생김새는 암만 봐도 휴먼이신데... ”


릴리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람 같다’는 표현이 이렇게 찝찝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네, 순도 100% 인간입니다. 그나저나 여긴 진짜 엘프가 있나 보네요? ”

“저도 원래는 옛 전설에나 나오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여행길에 몇 번 마주칠 기회가 있었거든요. ”


흥미가 돋았지만 더 물어보지는 못했다.

차가운 물방울이 돌연 내 볼때기를 때린 탓이었다.


-투둑, 툭.


“비가 오나보네요. ”

“그러네요. 아! 내 정신 좀 봐. 빗물을 받아둬야겠어요. ”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릴리 씨가요? ”

“빨래나 목욕물은 빗물을 모아서 쓰는 게 편하거든요. ”


하긴 매연이나 산성비 걱정은 아직 안 해도 될 때구나.


“물동이를 가져와야겠네요. 미르 씨는 들어가서 쉬세요. ”

“저도 돕겠습니다. ”

“괜찮아요. 어려운 일도 아니고. ”

“할 일이 너무 없으니 좀이 쑤셔서 그럽니다. ”

“하하. 그럼 부탁드릴게요. ”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가 반신욕도 할 법한 커다란 나무통을 들고 돌아왔다.


“...응? ”

“왜 그러세요? ”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하면 되죠? ”

“여기다 두시면 돼요. ”


식탁을 치우고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곳 아래에 물동이를 놔두었다.


벽난로 앞에 나란히 앉아 젖은 옷과 몸을 말리고 있자니 의문이 일었다.


“근데 이거 의미 있습니까? 물을 받을 목적이면 차라리 밖에 두는 게 낫지 않아요? ”

“지붕으로 들어온 물이 이쪽으로 모이거든요. 아직까진 방울방울이지만 곧 쪼르륵 흘러나올 거예요. ”


그녀의 말마따나 떨어지는 물줄기가 점점 강해졌다.


“진짜네? 무슨 장치라도 해놓은 건가요? ”

“그런 건 아니고요. 지붕 밑에 깔려있는 유포가 낡아서 가운데 부분이 찢어졌거든요. 차라리 잘 됐죠, 뭐. ”

‘유포? ’


검색해 볼까 하다가 퍼뜩 생각을 멈추었다.

이건 그냥 릴리한테 물어보는 편이 낫겠네.


“유포가 뭔가요? 뭔가를 퍼뜨린다는 뜻은 아닐 거고. ”

“기름 먹인 천이에요. 아마포에 끓인 아마씨 기름을 발라 만드는데 가죽보다 가볍고 싼데다가 방수 효과도 좋아서 외벽이나 지붕의 마감재로 많이 써요. ”

“상식이 늘었네요. ”

“헤헤, 보셨죠? 저도 꽤 아는 게 많다니까요. ”


나는 헤실헤실 웃는 릴리와 살짝 틀어둔 샤워기 같이 된 천장을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객관적으로는 지지리 궁상맞은 광경이겠지만 막상 자신이 안에 있으니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나저나...

머릿속에서 뭔가 생각이 날 것 같은데.

뭘까?

뭐지? 이 알 수 없는 기시감은?


방수포.

한데 모여서 떨어지는 물방울.

커다란 물동이.


오?

오오?

오오오?


“유레카! ”

“네엣? ”


갑작스런 외침에 릴리가 놀라서 어깨를 떨었다.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세요? ”

“떠오른 것 같습니다. ”

“뭐가요? ”

“결국 이 문제는 릴리 씨의 생명수가 가진 예상 밖의 효능과, 마을에 제대로 된 담수원이 없다는 점이 겹쳐서 일어난 일이잖아요? ”

“그렇... 죠? ”

“그럼 해결책은 간단해요. ”


나는 영문을 몰라 하는 소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생명수가 나오는 우물’을 파주면 되는 겁니다. ”



* * *



다음 날, 패딩을 손에 들고 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생명수로 만든 귀리죽을 먹은 탓인지 내 세상에서보다 몇 시간 일찍 잔 탓인지 생각보다 몸이 가뿐했다.


아직 완전히 동이 트지 않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마을 광장에 나와 있었다.


좀 이상할 정도로 많이.


다시 보니 양쪽으로 편이 갈려 있었다.

한쪽은 어제 보았던 마을 사람들, 나머지 한 쪽은 오늘 처음 보는 낯선 무리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근처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척 봐도 낯선 무리들의 옷차림이 훨씬 좋았다.

특히 촌장과 마주서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남자는 소매 없는 기다란 로브를 입고 있었지만, 그 사이로 삐져나온 금속제의 투구와 갑옷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틀림없겠지? ”

“그렇소. 도련님의 분부대로 순수한 생명수 45갤런을 준비해놓았다오. ”

“강물이나 바닷물을 섞진 않았고? ”

“귀한 분께서 드실 물인데 설마 장난을 쳤겠소이까? ”

“모르지. 영주님의 의중도 묻지 않고 멋대로 우물을 다시 판 것도 모자라, 거기서 길은 물을 허가 없이 팔아넘기기까지 했으니, 지금도 시커먼 속에 더러운 꿍꿍이를 감추고 있을지 누가 알겠나? ”

“오해하신 게요. 물장수들 등쌀에 하도 정신이 없어 늦게 말씀 드렸을 뿐인... ”

“주둥아리 다물라! ”


나이로 따지면 족히 아버지뻘은 될 촌장에게 갑옷 입은 사내가 일갈했다.


“이미 ‘진실의 손’이 그 말이 거짓부렁임을 밝혔거늘 어디서 오리발을 내미느냐? ”

“... ”

“그리고 도련님이 아니라 영주님이시다! 잔망스런 머리와 세 치 혀를 놀려 선대 영주님들의 총애를 받았기로서니, 감히 이 땅과 네놈들의 정당한 주인이신 프란츠 자작님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이냐? ”

“아, 아니오! 절대로 아니오! ”

“하면? 설마 저잣거리에 감도는 허튼 소문 따위를 믿고 영주님의 정당한 계승을 의심이라도 하는 것인가? ”

“그, 그럴 리가 있겠소? 그저 늙은이의 머릿속에 총명하시고 따뜻한 아이셨던 옛 자작님의 모습이 아른거렸을 뿐이외다! ”

“말 속에 뼈가 있구나! ”


소리친 남자가 좌중을 둘러보더니 크게 외쳤다.


“이거 안 되겠군! 영주님 말씀대로 도무지 믿지 못할 녀석들이다. 아무래도 네놈들을 전부 진실의 손 앞으로 데려가 거짓 증언을 한 자의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겠다! ”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무하십니다. 나리! ”

“믿어주십시오! 결단코 속이지 않았습니다! ”

“거짓을 고한 적이 없다면 걱정할 일도 없을 것이다! 네놈들이 과연 진실의 손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지 보자! ”


그가 뒤를 돌아보며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그때 풍차가 있는 언덕에서 한 중년인이 뛰어내려왔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궁내관 나리! ”

“뭐냐? 방앗간지기 게일인가. 너도 예외는 아니다. ”

“부디 쇤네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래주시면 저희가 저지른 잘못을 낱낱이 고하겠습니다! ”

“뭐라? 하하! 역시 숨기고 있는 게 있었군? ”


기겁한 마을 사람들이 그를 향해서 소리쳤다.


“뭐, 뭔 소리야, 게일!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

“이웃을 팔아넘기고 혼자 살면 그만이다, 이거야? ”

“입 다물게, 지미!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우리들이 정말로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이 들리잖나! 이보게, 게일! 무슨 오해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


촌장의 만류에도 게일은 당당했다.


“모르는 놈들은 닥치고 있어! 촌장님도 나서지 마쇼! ”


거칠게 팔을 휘둘러 마을 사람들의 입을 닫게 한 게일이, 궁내관 앞에서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쇤네들이 고결하신 영주님께 그만 죄를 지었습니다요. 모쪼록 은혜를 베푸시어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

“용서는 영주님의 소관이다. 죄부터 소상히 고하라. ”

“예. 실은... ”


우물쭈물 망설이던 그가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45통 중에 44통은 순수한 생명수가 맞을 겁니다요. 제 아버지의 명예와 진실의 손에 대고 맹세할 수 있습죠. ”

“그 말은 한 통은 아니라는 얘기로군. 왜지? ”

“어젯밤에 제가 우연히 보았던 게 맞는다면, 한 통에는 빗물이 조금 섞여있을 겁니다요. ”

“뭐라? 어째서 그런 짓을 했나? ”

“양이 모자라서였지요. 아시겠지만 생명수는 이틀에 한 번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솟습니다요. 부족한 양을 맞추려면 빗물을 섞을 수밖에 없었지요. ”


게일의 말을 들은 궁내관이 눈을 부라렸다.


“사실인가, 촌장? ”

“그랬던 모양이오. ”

“그랬던 모양? 그게 지금 촌장으로서 할 말인가? ”

“이 늙은이도 방금 들은 얘기라... ”

“아직도 그따위 변명만 늘어놓을 참인가! ”

“미, 미안하오! 기력이 달려 마지막까지 일을 확인하지 못했던 내 잘못이오. 다음에는 결단코 이런 일이 없게 하겠소. ”

“오, 기력이 달리신다? 그럼 앞으로 영주님의 성으로 식사를 하러 가실 여력도 없으시겠군. 내 꼭 말씀드리지. ”

“... ”

“게일! 빗물이 섞인 물통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나? ”

“물론입지요! 저기 수레 맨 위에 따로 빼둔 저겁니다. ”

“그렇군. 저것만 따로 올려둔 이유가 있었어. 그렇다면 어째서 내게 미리 말하지 않았나? ”

“영주님께 드릴 방앗간 사용료를 계산하던 중에 그만 시간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요. ”

“나는 믿어주고 싶지만 영주님께서도 그러실지 모르겠군. 애초에 양이 모자랐던 것부터가 문제고 말이야. ”

“부디 궁내관 나리께서 잘 말씀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참, 여기 이번 달의 방앗간 사용료입니다요! ”


게일이 내민 가죽주머니를 열어본 궁내관이 찰나였지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한 놈만은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있군. ”


두툼한 주머니를 품속에 넣은 궁내관이 소리쳤다.


“여기 정직한 방앗간지기가 솔직히 얘기한 점을 참작하여 이번에는 넘어가주겠다! 대신 오늘 영주님께 드리지 못한 한 통은 다음 주에 다섯 통으로 갚아야 할 것이야! ”


사람들 사이에서 안도와 걱정이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 풍경을 뒤로 한 궁내관이 손을 위로 들자, 뒤쪽의 부하들이 그가 탈 말을 끌고 다가왔다.

말에 올라탄 그가 고삐를 잡으며 말했다.


“잊지 마라, 촌장! 다음 주부터는 50갤런이다. 만에 하나라도 모자라는 일이 없도록. ”

“...명심하겠소이다. ”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어어, 그런데... ”


다시 끼어든 게일이 다분히 의도적인 신음을 흘렸다.


“뭐냐? 방앗간지기. 아직 할 말이 남아있나? ”

“저어, 그것이... ”

“바쁘니 뜸들이지 말고 말해라. ”

“죄, 죄송합니다요! 이번 일은 정말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지만은, 쇤네들의 작은 억울함만은 풀고 싶어서... ”

“억울하다? 무엇이? ”

“그게, 사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생명수 45갤런이 딱 맞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요. 빗물을 채울 필요 따위는 없었지요! ”

“무슨 말이지? 방금 전엔 어젯밤에 양이 모자라서 빗물을 섞었다고 하지 않았나? ”

“그것이, 한창 물통을 수레에 싣고 있던 와중에 난입한 사내가 멋대로 물을 마셔버린 탓인지라. ”


게일의 푸념을 들은 궁내관이 노발대발했다.


“뭐라고? 감히 영주님께서 드실 물에 겁도 없이 입을 대었다는 말이냐! 언놈이냐? 내가 이 자리에서 벌을 내리겠다! ”

“당연히 우리네 사람은 아니었습니다요. 머나먼 외국에서 왔다는 새파란 학자 놈인데, 외국 출신치고 우리말이 너무 유창한 것이 여간 의심스러운 게 아니었지요! ”


입술을 비죽인 게일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내 쪽으로.


“저기 저 나무 뒤에 숨어있는 저놈입니다요! ”

“이놈! 쥐새끼처럼 숨어있지 말고 썩 나오지 못할까! ”


궁내관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하긴 언덕 위의 제분소에서는 여기가 훤히 보였겠네. ’


어차피 들킨 이상 시치미를 떼도 역효과일 테니 순순히 모습을 드러내기로 했다.

아주 천천히.


“저게 거북이 고기를 삶아 먹었나? 당장 뛰어오지 못해? ”


저 소리는 무시했다. 의도적으로.

두 가지 이유에서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첫째는 시간 끌기.

나는 참다못한 궁내관이 부하들에게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을 선에서 최대한 느린 걸음걸이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어젯밤 잠들기 전에 보았던 것들을 떠올렸다.

캄캄한 방에서 지푸라기 침대에 누워 읽었던 내용들을.


이 세계의 밤은 길어도 너무 길었다.


자전주기가 달라 하루가 48시간이거나 해서가 아니라 전등이 없는 탓에 해가 지는 순간 하루일과의 대부분이 셧 다운 돼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는 밤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공부.

머릿속 인터넷 오라클은 여전히 쓸 수 있었으니까.


자리에 누워 자연스럽게 잠이 쏟아지기 전까지, 나는 팔자에도 없다고 생각했던 세계사 공부를 했다.

특히 서양의 고대에서 중세사를 위주로.


그 중에서도 신분제도나 예법 쪽을 주의 깊게 읽었다.

그게 내가 살던 현대와 이 세계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이자 여차하면 내 목숨을 좌지우지할 위험요소로 보였으니까.


물론 내 세상의 것과 100% 같지는 않겠지만, 비슷한 시대상끼리는 상당한 유사성이 있으리라.


잠귀신이 찾아오기 전에 내가 내린 결론은, 생각보다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특히 릴리 덕분에 자연스럽게 잡게 된 ‘다른 나라 출신의 학자’라는 컨셉은 굉장히 유용했다.


다소의 차이나 실수는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을뿐더러, 석사는 물론 박사도 발에 치이는 현대와 달리 지식인이 귀한 중세 무렵인 만큼, 누가 나를 학자님이라고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대우가 두 단계는 높아지는 느낌이다.


애당초 그 만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지체 높은 집안 출신이라는 증거이기도 할 테고.


지금만 해도, 궁내관이 답답해하는 와중에도 내 신병을 강제로 확보하는 것만은 꺼리는 게 보인다.


방앗간지기 게일이 나를 학자가 아닌 부랑자나 도망 농노 따위로 소개했다면 진작 포승줄에 묶였으리라.


그런 점에서 나는 게일이 생각보다 밉지 않았다.


“새파란 녀석이 잉크 물 좀 먹었다고 뵈는 게 없는 건가? 네가 지금 누구 앞에 서있는지 아느냐? ”


궁내관의 이목구비가 자세히 보일 정도로 다가가자, 슬슬 한계인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이 된 그가 소리쳤다.


“모르겠는데? ”

“맹랑한 놈!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고결하신 프란츠 자작님의 기사이자 이 일대를 관리하는 궁내관으로... ”


일장연설을 하는 그의 옆에 선 게일이 ‘어제 나한테 쪽을 줬지? 어디 맛 좀 봐라!’라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불과 몇 초 후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다름 아닌 내가 돌려준 대답 때문이었다.


“알겠느냐! ”

“어. 그런데 어쩌라고? ”

“...뭐? ”


나는 노빠구로 직진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 새끼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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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생명수의 소녀(1) +9 22.11.02 2,720 72 19쪽
3 불시착(2) +8 22.11.01 3,303 88 19쪽
2 불시착(1) +11 22.11.01 3,762 190 14쪽
1 프롤로그 - 두 번 다시 없을 기회 +17 22.11.01 4,295 198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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