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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님의 서재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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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작품등록일 :
2022.10.31 13:13
최근연재일 :
2022.12.28 22:2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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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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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69,180

작성
22.11.09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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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진실의 손(3)

DUMMY

“동작 그만. ”

“...네? ”

“손 당장 물리세요, 릴리 씨. ”

“왜, 왜요? ”

“그 물수건은 결코 환영의 표시가 아니니까. 오히려 기만이고 모욕이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군! ”


나는 분통이 터진 듯이 쿵 발을 굴렀다.


어쩌면 내가 오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저 물건의 원리가 내가 알고 있는 장난감 거짓말탐지기와 똑같다는 확신도 없고.


그렇지만 반대로 아니라는 보장도 없다.

만약에 그렇다면?


어쩔 줄 몰라 하는 릴리 앞으로 시녀장이 나섰다.


“죄송하지만 방금 말씀은 흘려듣기 어렵군요. 아무리 귀하신 손님이라지만 주인님의 성의를 모욕하는 것은... ”

“모욕? 지금 감히 모욕이라고 했나? ”


꽉 막힌 귀족 흉내를 다시 내야 할 때였다.


“모욕은 다름 아닌 내가 받았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일개 하인과 시녀장이 나와 내 치료사를 욕되게 하는가? ”


버럭 호통을 치고는 시녀장이 말리기 전에 ‘진실의 손’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나는 방금 너희에게 참기 힘든 모욕과 기만을 당했노라! ”


[진실. ]


장치의 돌이 녹색으로 빛났다.

움직일 수 없는 증거에 시녀장이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보았느냐? 다름 아닌 진실의 손이 그리 말하고 있도다! ”

“소, 송구하옵니다! ”


시녀장이 90도로 허리를 접었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모욕과 기만이라니요? 저희들이 한 짓이라고는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손님께 뜨거운 물수건을 준비하여 내드린 것밖에 없습니다. ”

“시점이 너무 이상했지 않느냐! ”

“예? ”

“우리가 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방에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갖다 줄 여유는 충분했지. ”

“늦은 것을 탓하시는 거라면 저의 불찰입니다. 하나... ”

“그것을 탓하는 게 아니다! 우연을 가장했지만 너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물수건을 내밀었다. 하필 내가 진실의 손을 쓰기로 마음먹은 그 때 말이다. ”

“그, 그것이 왜... ”

“정녕 아직도 모르겠는가? ”


나는 답답한 듯이 가슴을 탕 쳤다.


“시녀장! 나는 네가 장갑을 벗고 진실의 손을 맨손으로 만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내 눈이 틀렸는가? ”

“맞습니다. 진실의 손은 맨손으로 만져야 하니까요.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너의 세 치 혀를 믿고 이 손으로 저 수상한 기계를 만지려 했다! 한데, 너희는 딱 그때를 노린 것처럼 물수건을 내밀더구나.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불경함을 내가 모를 성 싶으냐? ”

“소, 송구하지만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

“답답하구나! 너는 ‘네’가 ‘맨손’으로 만졌던 저것을 이 ‘내’가 만지려 드니 ‘손을 닦으라’며 물수건을 내밀었단 말이다! ”

“...? ”

“그건 다시 말해, 나의 손이 너의 손보다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

“...예에? ”


내 억지에 시녀장이 대경실색을 했다.


“오, 오해십니다! 맹세컨대 그런 불경한 생각은... ”


고개 숙인 그녀를 나는 한층 세게 몰아 붙었다.


“그렇다면 저 수건으론 네 손이나 닦아라! 지금 물수건이 필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너일 것이니! 알겠느냐? ”

“아, 알겠습니다. ”


쟁반을 내려놓은 그녀가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분부대로 하였습니다. ”

“좋다. 시킨 대로 하였으니 해명할 기회를 주지! ”


이제 판가름을 낼 시간이었다.

내 추측이 과연 사실이었는지.

우연인지 필연인지.

실수인지 의도인지.


“너는 아까 맹세컨대 나를 기만할 의도가 없었다고 했다. 그 말은 진실인가? ”

“진실입니다. ”

“그렇다면 여기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기만할 의지가 정말로 없었음을. 저 자랑하는 ‘진실의 손’에 지금 당장 손바닥을 대어 증명하라! ”

“...! ”


시녀장이 다급히 치맛자락에 손을 닦았다.

그걸로 확신했다.

나는 방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뭐하는 짓이냐! 나는 ‘지금 당장’이라고 했을 텐데? ”

“자, 잠시만... 바로 하겠습니다! ”

“멈추어라! ”

“...? ”

“생각이 없느냐? 방금 옷자락에 손바닥을 닦았으니, 그새 손에 옷의 더러움이 또 묻었을 게 아니냐? 손을 다시 닦아라! ”

“그, 그런... ”

“냉큼 하지 못할까! ”


시녀장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때였다.


“그만두시죠! ”


-콰당!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예의 사내아이 하인이었다.


“저 자 말대로 할 필요 없어요, 엠마. 당신은 프란츠 자작님의 시녀이지 저 외국인의 하녀가 아니니까! ”

“하, 하지만... ”


소년이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휴브리스 공과 릴리 양의 결백은 아주 잘 알았으니 곧 프란츠 자작님을 뵐 수 있을 겁니다. ”

“글쎄? 이제 와서 그럴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군. ”

“영주님을 뵙지 않고 그냥 돌아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아니! 그게 아니고... 말입니다. ”


나는 실시간으로 말투를 바꾸고 어조를 확 낮추었다.


“저는 벌써 영주님을 뵙고 있는 것 같거든요. ”

“...무슨 소릴. ”

“새파란 젊은이라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로 어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프란츠 자작님. ”


쐐기를 박는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움찔거렸다.


“휴, 휴브리스 님!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

“됐어, 엠마. 이미 확신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뭘. ”


머리를 긁은 소년이 낡아빠진 로브와 후드를 벗었다.

화려한 자수가 새겨진 짐승의 털로 만든 옷과 잘 관리된 금발머리가 드러났다.


“후. 언제부터 눈치 챘지? ”

“물수건을 들고 올 때부터 짐작은 했습니다. ”

“어떻게? ”

“급하게 온 것치고는 뛰는 소리가 안 들렸지요. 숨을 몰아쉬면서도 얼굴에는 땀 한 방울 나지 않았고요. 다음에는 관자놀이에 물 몇 방울을 떨어뜨리시는 게 나을 겁니다. ”

“그렇군. 참고하지. ”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녀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어린 하인한테 지나치게 깍듯하더군요. 일개 하녀도 아니고 시녀장이라면 이 근방에선 꽤 지체 높은 집안의 여식일 텐데 말입니다. ”

“쯔쯧! ”


혀를 찬 소년이 시선을 돌리자 시녀장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게 하대를 하라니까! ”

“제가 어찌 감히... ”

“덕분에 들켜버렸잖아. 아, 보다시피 저래서 어쩔 수가 없었어. 아무리 연기라도 그것만은 못 하겠다네? ”


릴리와 또래거나 약간 더 어려보이는 외모의 소년이 벽에 기대서더니 바닥을 발끝으로 톡톡 찼다.

나는 한 발자국 그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방금 범한 결례에는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자작님. ”

“용서하지. 먼저 속이려고 한 것은 이쪽이니 우리도 그대들의 용서를 구해야겠군. 부디 해 주겠는가? ”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계신다니 이해해 드려야겠지요. 릴리 양만 괜찮으시다면요. ”

“아... 네! 전 괜찮아요. ”

“둘 다 고맙군. 그나저나 궁금한 걸? 어떻게 진실의 손의 비밀을 대번에 간파해낸 거지? ”


똑같이 생겨먹은 장난감이 내 세상에도 있으니까, 라는 소리는 아무래도 그랬다.

이왕 잡은 컨셉을 제대로 밀고 나가는 게 좋겠지.


“학자로서 원리를 탐구하다 보니 그리 됐습니다. ”

“원리라? ”

“저 장치에 손바닥을 대야 한다는 것은 곧 그 행동이 판별에 필요하다는 말과 같지요. 그리고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일에 손바닥이 필요하다면, 십중팔구 손에 땀이 차는지를 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과연... ”


‘쇼킹라이어’의 작동원리도 마찬가지였다.

흔히 거짓말탐지기라고 부르지만 쇼킹라이어는 인체 전도율, 즉 ‘몸에 전류가 얼마나 잘 흐르는지’를 측정하는 장치니까.


‘거짓말을 하면 손에 땀이 찬다’는 속설을 이용한 것으로, 손에 땀이 차면 땀이 전류의 전도체 역할을 해서 인체 전도율의 측정값이 올라가고, 그 수치가 평균보다 높을 경우 기계가 거짓말로 판단해서 빛이나 전류 등을 흘려보낸다.


한 마디로 손에 물기가 있나 없나를 보는 기계인 거다.

비슷하게 생긴 진실의 손도 유사한 구조였던 모양이고.


“흠... 하지만 내가 알기로 두 번째 시연을 하기 전에 엠마의 손은 젖어있지 않았는데? ”

“손을 대기 직전에 머리카락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만지더군요. ‘거짓’이 나온 후에는 옷자락에 손을 닦았고요. ”

“그것까지 보고 있었나. 눈썰미가 좋군. ”


프란츠 자작이 픽 웃고는 이마를 쓸어내렸다.


“보여드려라, 엠마. 그 고운 머릿결을 더 이상 상하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

“예. ”


그녀가 묶음머리를 풀자,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물망처럼 생긴 섬유질 덩어리가 떨어졌다.


“이건? ”

“정원에서 자라는 식물의 열매를 삶아서 껍데기를 벗긴 것이라네. 엠마 말로는 설거지할 때 쓸만하다하더군. ”


[연관 검색어 : 수세미 (촉촉하다.) ]


“진짜 수세미를 보는 건 처음이네요. ”

“오, 이름이 수세미였나? 그건 몰랐는데. 식물학에도 조예가 깊으신가 보군. ”


소년이 탁, 발을 구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 보통내기는 아니야. 이국에서 건너온 고귀하고 지혜로운 학자라고 들었는데, 잭슨의 말이 허풍은 아니었어. ”

“과찬이십니다. 여기서는 그저 한 줌의 지혜로 살 길을 도모해야하는 이방인일 뿐이지요. ”

“지나진 겸손은 관두게. 그나저나 내가 만든 꾀에 내가 당하다니, 지금만은 아버님이 안 계셔서 다행이야. ”

“자작님께서 직접 만드신 겁니까? ”

“나와 궁정마법사의 합작품이지. 매번 손님이 올 때마다 마법사의 손을 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름 잔재주를 부려 봤다네. 원본에 비하면 조악하기 짝이 없지만 이 정도만 해놔도 걸릴 놈은 걸리거든. ”


씩 웃는 소년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외람되지만 손에 땀이 차는 건 거짓말을 할 때만이 아닐 테지요. 원래 땀이 많을 수도 있고 날씨가 더워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긴장을 하는 경우에도 식은땀이 나죠. ”

“그렇기는 하지. ”

“거짓이 참으로 나오는 경우는 비교적 적을지언정 참을 거짓이라 판별하는 경우는 부지기수였을 겁니다. ”

“그건 나도 알고 있네. 이미 충분히 감안하고 있고. ”


금발의 소년이 나이에 비해 날선 눈빛을 보냈다.


“그래서 내 평판까지 깎아가며 소문을 퍼뜨린 거야. ”

“소문이라 하시면? ”

“못 들어봤나? 누굴 가뒀다거나 죽였다거나 하는 소문들. 덕분에 손이 ‘거짓’이라고 판정만 내려주면 다들 넙죽 엎드려서 술술 속셈들을 불어대지. 아주 편리해. ”

“말씀드렸듯이 그게 전부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지요. ”

“글쎄, 대부분은 맞을 걸? 내가 하는 질문은 ‘나를 암살하러 왔느냐.’ 따위가 아니야. 그저 못된 꿍꿍이가 없나 두루뭉술하게 물을 뿐이지. 그 정체는 날카로운 비수일 수도 있지만, 사기나 위험한 장사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어. 어쩌면 나이가 어리다고 나를 무시하는 태도나 저잣거리의 소문을 믿고 속으로 내뱉었던 욕설일 수도 있지. ”

“흠... ”

“중요한 건 찾아오는 녀석들이 나를 능멸하지 못하도록 겁을 주는 걸세. ‘거짓’이 나온다고 다짜고짜 옥에 가두거나 고문을 하지는 않아. 대부분의 쓰임새는 방금 그대들에게 시도했듯이 ‘거짓’이 나오도록 유도한 다음, 그걸 이용해서 입장의 우위를 점하는 것이지. ”

“그렇군요. ”

“물론 정말 의심스러울 때에는 ‘진짜’를 빌리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보이는군. ”


자세를 바로 한 프란츠가 옷깃을 여미면서 말했다.


“나의 영지에 온 것을 정식으로 환영하지. 이국의 학자 이미르 휴브리스, 생명수의 소녀 릴리 누. 이 땅의 주인이자 별의 여신님의 종복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그대들을 대접하겠어. ”


거창한 선언이었지만 결국 다 같이 점심이나 먹자는 얘기였다.



* * *



본 학자는 오늘 자작님에게 매우 실망했다!


물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내심 짐작하고 있기도 했고.

돌이켜 보면 ‘설마’ 싶은 불안감이 있었다.


오라클로 틈틈이 중세를 검색하면서 당시의 궁색한 식문화에 대해 약간이나마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도 명색이 이세계인데 좀 달라도 되지 않아?

더군다나 귀족이잖아? 공후백자남 중 꼴지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도대체 왜?


나는 눈앞의 그릇을 퀭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미지 검색을 시작합니다. ]


-딸깍!


[연관 검색어 : 귀리죽 (걸쭉하다.) ]


이 세계에 온지 어느덧 나흘째.

오늘 메뉴도 변함없이 귀리죽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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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호손시(市)의 사정(1) +1 22.11.09 1,544 43 19쪽
» 진실의 손(3) +5 22.11.09 1,562 50 13쪽
11 진실의 손(2) +2 22.11.08 1,622 42 15쪽
10 진실의 손(1) +4 22.11.07 1,816 53 15쪽
9 태양의 우물(3) +3 22.11.06 1,879 53 16쪽
8 태양의 우물(2) +1 22.11.05 1,925 48 18쪽
7 태양의 우물(1) +3 22.11.04 2,041 48 17쪽
6 생명수의 소녀(3) +3 22.11.03 2,125 62 17쪽
5 생명수의 소녀(2) +2 22.11.03 2,293 61 16쪽
4 생명수의 소녀(1) +9 22.11.02 2,720 72 19쪽
3 불시착(2) +8 22.11.01 3,305 88 19쪽
2 불시착(1) +11 22.11.01 3,762 190 14쪽
1 프롤로그 - 두 번 다시 없을 기회 +17 22.11.01 4,295 198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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