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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님의 서재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LEV1
작품등록일 :
2022.10.31 13:13
최근연재일 :
2022.12.28 22:25
연재수 :
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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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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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69,180

작성
22.11.05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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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태양의 우물(2)

DUMMY

분위기가 싸해졌다.

궁내관과 부하들, 마을 사람들과 촌장은 물론, 방금 나를 고발했던 게일마저 할 말을 잃고 쩍 입을 벌렸다.


개의치 않았다.

그런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다.

내가 뛰지 않은 두 번째 이유는, ‘군자는 뛰지 않는다.’는 것을 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으니까.


아, 참고로 욕은 공자님도 잘만 하셨다고 한다.


“이, 이 자식이 진짜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나? ”

“환장할 노릇이지! 네놈 따위가 감히 나를 쥐새끼라고 부르다니, 내 나라였다면 즉시 재판에 회부해 엄한 벌을 내렸을 것이다! ”


모욕죄 형량이 얼마더라? 꽤 셌지?

궁내관이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말을 이었다.


“숨어서 엿듣기나 하는 놈이 쥐새끼가 아니면 뭔가? ”

“네 이노옴! ”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불손한 주둥아리 다물거라! 내 아무리 이국에서 변을 당하여 수발드는 하인 한 명 없는 처지가 되었기로서니, 자작가의 궁내관 따위에게 모욕을 당할 만큼 떨어지진 않았다! ”

“하! 꼴에 백작가의 도련님이라도 된다는 소리냐? 멍청한 마을 놈들은 속였을지 몰라도 나는 어림없다. 이제 보니 학자가 아닌 사기꾼이었군? 감히 귀족을 사칭하다니 내 당장 너를 극형으로 다스려... ”

“증거가 있다면? ”


그 말에 궁내관이 입을 다물었다.


“영주께서 서명한 신분증명서라도 갖고 있다는 얘기냐? ”

“멍청한 놈!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저 바다 바깥의 머나먼 이국 출신으로 조난을 당하여 건진 거라고는 옷밖에 없다. 그리고 고작 자작 따위가 발행한 인증서가 내 혈통의 1/10이라도 증명할 수 있을 성 싶으냐? ”

“감히 내 앞에서 영주님을 모욕했는가! ”

“지금 이 땅의 영주를 욕보이고 있는 것은 너다! ”


나는 오히려 일갈하며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섰다.


“변변한 작위도 없는 일개 기사 놈이 어디서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는 것이냐? 네놈이 진심으로 영주에게 충성하는 자라면 늦기 전에 말에서 내려 주군의 명예를 지켜라! ”

“... ”

“귀족을 사칭하는 자가 극형임을 안다면 귀족을 모욕하는 자 역시 극형 감임을 알리라! ”

“그래, 좋다. ”


궁내관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 호언장담에 잠시만 어울려주지. 하지만 증명하지 못하면 이걸로 네놈의 머리통을 쪼개버리겠다! ”


말에서 내린 궁내관이 로브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체인메일을 드러냈다.

차락차락 쇳소리를 내며 다가온 그가 허리춤의 메이스에 한 손을 대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보아라! ”

“흥! 대체 뭘 보라는 거냐? 내 눈에는 주제도 모르고 자기가 귀족이라고 우기는 사기꾼 한 놈 밖에 안 보인다만? ”

“입 다물고 어서 이 손을 보지 못할까? ”


나는 궁내관 앞에서 쫙 손바닥을 펼쳤다.

물론 신분증 따위를 내밀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나는 이곳의 영주와 일면식도 없었고, 주소의 개념조차 없을 만큼 행정력이 미비한 이 시대에 보편적으로 통하는 주민등록증 따위가 존재할 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시대에도 신분증명은 필요한 법. 그때 사람들은 무엇으로 스스로를 증명했을까?


‘ORACLE’로 검색해본 내 세상의 답은 간단했다.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내보였던 것이다.


자신의 ‘몸’과 ‘옷’.

이 세계라고 다르지는 않을 터였다.


“보고 느낀 바가 없는가? ”

“...손바닥에 굳은살이 없군. ”

“이제 알겠나? ”

“그래,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겠다. 농사나 잡역으로 먹고 사는 평민은 아니라는 거지. 하지만 이게 네가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진 못한다. 못된 돈놀이로 제 배를 불리는 상인들도 매끈한 손을 가진 것은 마찬가지니까. ”

“틀렸다. 무식한 놈이 역시 절반만 보았군. ”

“뭐라고? ”

“굳은살이라면 있다. ”

“뭐? 어디에? ”

“여봐라! 여기서 글 깨나 써봤다는 자 누구 없는가? ”


다들 눈치를 보던 중에 낯익은 노인이 손을 들었다.


“이 늙은이가 제일 경험이 많을 게요. 마을의 까막눈들 대신에 온갖 서류들을 혼자 정리해왔으니. ”

“그럼 한 가지만 부탁하겠네. ”

“말씀하십시오. ”

“내 오른손, 특히 손가락을 유심히 보게. 과연 저 자가 한 말대로 굳은살이 없는지. ”

“알겠소. 확실히 사내치곤 부드러운 손이지만 나름대로 단단한 구석 또한 있구려... 으음? ”


노인의 시선이 내 오른손 중지에 고정되었다.


“아아, 과연! 이건 틀림없는 ‘깃펜 혹’이로군. ”

“깃펜 혹이라고? 그게 뭔가? 촌장. ”

“말 그대로 깃펜을 오랫동안 잡은 자들의 가운데손가락에 생기는 굳은살이오. 이 분이 시인 혹은 행정관이 아니라면 학자라는 증거이기도 하지. 몇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십 권 이상의 책을 필사해야 비로소 나타나는 증상이니 말이오. 특히 이런 젊은 분이라면 늙은이의 짧은 지식으로는 대학이나 수도원의 학생과 학자들밖에 떠오르지 않소이다. ”


촌장의 말대로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내 고향 대한민국에서는 초중고 정규교과과정을 충실히 따라가며 열심히 필기만 해도 높은 확률로 생겼지만.


“으음, 그런가? 일단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남아있군. ”


감정을 다소 가라앉힌 궁내관이 두터운 턱을 쓰다듬었다.


“좋다. 그대가 타지에서 온 학자라는 점은 인정하지. 하지만 나는 영주님의 기사이자 궁내관으로서, 여전히 그대를 체포하여 압송할 수밖에 없다. 방금의 발언으로 그대는 나뿐만이 아니라 내 주군 되신 프란츠 자작님까지 모욕했으니까. 그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

“거부하겠다. ”

“그건 그대가 정할 일이 아니다. ”

“왜 아닌가? 평민이 귀족을 모욕했다면 그건 극형에 처할 죄겠지. 작위가 낮은 자가 높을 자를 모욕했다면 볼기짝을 때려야 할 죄이리라. 하지만 높은 자가 낮은 자의 잘못을 다소 꾸짖었다 하여 그것이 어떻게 높은 자의 죄가 되겠는가? ”

“그 말은 그대의 격이 영주님보다 높다는 뜻인가? 증명할 수 없다면 철회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

“그럴 필요는 없겠지. 이 자리에서 입증할 테니. ”

“허어! 무엇으로? ”

“아까 말하지 않았더냐? 옷 하나는 건졌다고. 그것이면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

“별 거 없어 보이던데. 튜닉치고 조금 짧다는 것 말고는. ”

“잠자코 보기나 해라. ”


나는 들고 있던 검정색 후드패딩을 펼쳐서 로브처럼 걸쳤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쭉 어깨를 폈다.


“영광인 줄 알거라! 이 보잘것없는 땅에서 찬란한 내 가문의 예복과 문장을 처음으로 영접하게 되었으니! ”


어우, 내 손발.

나는 솟아오르는 민망함을 데시벨로 바꾼다는 느낌으로 큰소리치며 패딩을 펼쳤다.


지구에서 KAIST 석사 연구원으로 있을 때 받았던 ‘휴브리스 컴퍼니’의 신제품.


기능 및 수명을 대폭 개선한 차세대 고어텍스+케블라 겉감에 우주복에 사용하는 에어로겔 충전재를 채용한 내 시대 기준으로도 첨단기술의 결정체 같은 옷이었다.


장담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이런 옷을 엇비슷하게라도 재현할 수 있는 기술력이 없다고.

적어도 자작 레벨에서는 흉내조차도 무리다.


게다가 왼쪽 가슴팍 위에 떡하니 박혀 있는 팔각형의 거미줄 문양. ‘휴브리스 컴퍼니’의 엠블럼.


그것의 위치와 모양은, 중세의 귀족들이 스스로의 가문을 나타나기 위해 달고 다녔던 휘장과도 꽤 닮아 있었다.


아직 브랜드 의류는 존재하지도 않을 때니까.

결국 모든 것이 내가 말하기 나름, 그저 저들이 믿게 만들면 그만인 이야기였다.


나는 스스로를 설득할 겸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직도 믿지 못하겠는가? 네놈의 옹이구멍 같은 눈에는 이 옷이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싸구려로 보이느냐? ”

“으음... ”

“내 장담하건대, 아무리 돈이 썩어 넘쳐도 걸맞은 가문의 격이 없다면 이런 옷은 구경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

“이건... 부정할 수 없겠군. ”


내 옷을 뚫어져라 살피던 궁내관이 말을 흘렸다.


“확실히 처음 보는 옷감이군. 아니, 옷감이라는 표현이 옳은지조차 모르겠어. 가슴께의 휘장도 모양은 간단하지만 수놓은 솜씨나 마감이 믿을 수 없이 정교해. 어지간한 장인도 흉내조차 못 낼 수준인데... ”

“이제야 눈이 좀 뜨이는가? ”

“혹시 드워프나 엘프제입니까? ”


아무래도 이곳 사람들은 신기한 게 보이면 다른 종족들 타령부터 하는 습관이 있나 보다.


“우리 가문 전속 직인의 솜씨다. ”

“...대단하군. 이래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겠소. 이제 보니 안에 걸친 옷도 평범한 튜닉이 아닌데, 설마 편물(니트)이오? ”

“무식한 놈인 줄 알았더니 제법 아는 게 많구나? ”

“이래봬도 궁내관 짬이 십 년쯤 되니까. 방금까진 너무 얇아서 직물인 줄 알았지만... 편물을 직물처럼 가늘게 짤 수 있다니, 이런 마법 같은 조화가 가능한 줄은 몰랐소. ”


확 태도가 바뀐 궁내관이 투구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방금까지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의 이름은 잭슨 태너, 일찍이 소개했듯이 이 땅의 영주이신 프란츠 자작님의 기사이자 궁내관입니다. 귀하의 존함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

“이미르라고 한다. ”

“실례지만 가문명이? ”

“...휴브리스. ”

“이미르 휴브리스 님,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무리 대단한 분이셔도 이곳은 프란츠 영주님의 영지. 그분의 대리 된 자로서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자에게 함부로 말을 높일 수 없었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이해한다. 나 역시 그랬을 테니까. 이제부터라도 예의를 지킨다면 이전의 실수들은 전부 불문에 붙이겠다. ”

“고귀한 이름에 걸맞은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잭슨이 이내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영주님의 성으로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자작님께서도 분명 환영하실 겁니다. ”

“그것도 좋겠지. 하나 지금은 저들에게 볼일이 있네. ”


나는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리벙벙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중 유독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자가 있었다.


“거기, 방앗간지기. 이름이 게일이라 했던가? ”

“예, 예? 그, 그렇습니다요. 헤헤... ”

“내 고향에는 이런 말이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그게 무슨 뜻입니까요? ”

“귀족의 눈을 상하게 한 자는 그 눈을 뽑고, 이를 상하게 한 자는 이를 뽑는다는 오래된 법 구절이지. ”

“히익! ”

“내 그동안 너희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굳이 신분을 숨겨왔건만 네 탓에 이렇게 밝혀버리게 되었으니,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

“쇠, 쇤네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


게일이 넙죽 땅바닥에 엎드렸다.


“일어나거라. 방금 말하지 않았나? 그동안 저지른 무례는 불문에 붙이겠다고. ”

“저, 정말이십니까요? ”

“이곳의 영주님께는 큰 빚을 졌지. 자작님의 넓은 은혜 덕에 난파를 당하고도 살아남아 시원한 생명수까지 얻어마시게 되었으니, 그분의 귀한 자산인 자네를 손님된 자로서 어찌 함부로 해칠 수 있겠는가? ”

“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요, 나리! ”


거듭 큰절을 하는 게일 옆에서 궁내관 잭슨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은근슬쩍 영주를 띄워준 게 점수를 딴 모양이다.


돌아가는 상황이 썩 나쁘지 않았다.

나는 일련의 사태 탓에 미뤄두었던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 물값을 치러야겠지? ”

“아아, 괜찮습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일을 당하신 참에... 외람된 말씀이지만 가진 돈도 없으시지 않습니까? ”


‘있지만 굳이 지금 쓸 필요는 없지. ’


나는 주머니 속 은화 한 닢을 만졌다가 놓았다.


“사양하지 말게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물에는 물로 갚으면 되는 법이니. ”


나는 아직도 엎드려있는 게일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게일 자네가 힘을 좀 보태주면 좋겠군. ”

“예에? ”


고개를 들은 그에게 나는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게일이 밉지 않았다.

그래서 딱 생각했던 만큼만 부려먹기로 했다.


몇 시간 후,


-쿵!


“아이고, 나 죽네! ”


물통을 내려놓은 방앗간지기가 허리를 부여잡으며 곡소리를 했다.


“어허, 엄살은. ”

“나리께서 한 번 해보시든가요! ”

“손바닥을 보면 알겠지만 그런 일엔 익숙지가 않아서. ”

“용서해 주신다더니만 순 뻥이셨어... ”


볼멘소리를 한 게일이 헛기침을 하더니 내 눈치를 살폈다.


“크, 크흠! 아무튼 된 겁니까요? ”

“글쎄? 한 두 통쯤은 더 있어도 될 것 같은데? ”

“아니, 이걸 들고 또 바닷가까지 가서 물을 길어 오란 말씀이십니까? 차라리 죽이십쇼! ”

“그럴까? ”

“마,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

“뭐, 고생했네. 일단 이 정도면 오늘 실험에 쓸 양으로는 충분하겠어. ”


게일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던 그가 내가 앉아있는 그루터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 있는 것은 삽 하나와, 평소 게일이 목욕용으로 쓰던 널찍한 나무통. 지붕 수리용으로 보관해두었다던 돗자리 크기의 유포 한 장과, 총 세 번에 걸쳐 길어온 바닷물 여섯 동이.


“근데 저걸로... 참, 앞으론 뭐라고 불러드려야 합니까요? ”

“아, 그거 말인데. 그냥 하던 대로 합시다. ”

“하던 대로라면 학자님 말씀이십니까요? ”


되묻는 게일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말투도 원래 쓰던 걸로 고칠게요. 여기는 내 나라가 아니고 게일 씨는 내 백성이 아니니, 내가 굳이 그쪽을 낮춰 불러야 할 이유도 없지 싶습니다. ”


평생을 민주공화국 시민으로 살아온 내게, 귀족 흉내라는 것은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었다.


유교문화권에서 자란 입장에서 삼촌뻘 되는 사람을 일방적으로 하대하는 것도 어색했고.


다행히 내가 외국인이라는 점은 이럴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외국인보다는 외계인에 가깝겠지만.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요? ”

“물론 궁내관이나 귀족들 앞에서는 족보가 꼬이면 피차 곤란하니 하대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둘만 있을 때는 편하게 부르세요. 물론 막말은 하지 마시고. ”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나중에 불경죄로... ”

“그럴 일은 없다고 내 가문의 문장에 걸고 맹세하지요. ”


나는 가슴팍의 휴브리스 컴퍼니 로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행동은 제법 효험이 있었는지 게일이 진심으로 감명 받은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요. 내가 그동안 학자님을 오해했던 모양입니다. 배우신 분이라서 그런지 꽉 막힌 분은 아니시구먼요. ”

“배운 사람의 똥고집을 제대로 본 적이 없으신가 보네요. ”

“예? ”

“아니, 혼잣말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아까 물으시다 만 것 같은데, 이것들로 뭘 할지가 궁금하신 거죠? ”

“말씀 대로입죠. ”

“우물을 만들 겁니다. ‘생명수가 떨어지는 우물’을요. ”

“예에? ”

“정확히는 그 시작품, 샘플이지만요. ”

“나중에 한 말씀은 뭔 뜻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물을 새로 파시겠다고요? 하이고, 절대로 무립니다! ”


뒷머리를 벅벅 긁은 게일이 말을 이었다.


“10년 전 닥친 지진에 광장의 우물이 말라버린 이후로, 우리들이라고 뭔 짓을 안 해봤겠습니까요?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저 도시에서 흘러 내려오는 똥물 말고는 물길 비슷한 것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요. 오죽하면 릴리가 오기 전엔 반나절은 떨어진 강 상류의 물장수들에게 비싼 돈을 주고 물을 사왔겠습니까요? ”

“그랬나요? ”

“그랬습죠. ”


나는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대답했다.


“뭐, 일단 수맥은 찾아뒀습니다. ”

“아시겠지만 물길이란 게 그리 쉽게... 찾았다고요? ”


게일이 눈을 크게 뜨고 캐물었다.


“어, 어딥니까요? 요 근방이라면 제가 놓쳤을 리 없는데? 그새 새로 생겼나? ”

“아뇨.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그것도 수백, 수천, 아니, 수십 억 년 전부터요. ”

“에이, 아무리 학자님 말씀이어도 못 믿겠습니다요. ”

“저겁니다. ”


나는 언덕 너머로 보이는 수평선과, 그 위로 막 얼굴을 내민 태양을 가리켰다.


“이것은 태양이 높게 평가! ”


나는 어젯밤에 이어 추억의 Y자 포즈를 취했다.

이래도 별로 쪽팔리지 않는다는 게 이 세상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였다.


게일이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더니 되물었다.


“학자님께서는 태양신 판 님의 신도셨습니까요? ”

“음, 태양신의 신도는 아니지만 어느 태양의 전사와 오랜 시간을 함께하긴 했죠. ”


물론 현실이 아니라 모 비디오 게임 속에서.


“부르기만 하면 나타나서 대가도 받지 않고 함께 싸워주었던 든든한 친구였습니다. 어두컴컴한 영혼의 여행길을 걷는 동안 제가 참 많이 의지했었죠. ”

“모르긴 몰라도 대단하신 분이구만요. 기사셨습니까요? ”

“아스토라의 상급 기사였습니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종탑의 가고일 두 마리를 모두 잡을 수는 없었겠지요. ”

“가, 가고일이라 굽쇼? 괴물 사냥도 하셨습니까요? ”

“옛날 얘기입니다. 자, 슬슬 우물이나 만들어볼까요? ”


내가 일어나서 삽을 들자 게일이 슬그머니 발을 뺐다.


“어이구, 그것 참...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요! 그러면 쇤네는 얼른 제분소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비법으로 만든 맛 좋은 빵을 구워 학자님께... ”

“가긴 어딜 가요? 땅은 게일 씨가 팔 건데. ”

“... ”

“여기 삽 드릴 테니 따라오세요. ”

“아이고, 내 팔자야! ”


울상이 된 게일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불과 몇 분 후,


“그쯤 하시면 될 것 같군요. ”

“엥? 벌써 말입니까? ”


땅을 파던 게일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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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생명수의 소녀(2) +2 22.11.03 2,293 61 16쪽
4 생명수의 소녀(1) +9 22.11.02 2,720 72 19쪽
3 불시착(2) +8 22.11.01 3,304 88 19쪽
2 불시착(1) +11 22.11.01 3,762 19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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