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비벗 - Be, But...

사회생활 잘하는 조던 남작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비벗
작품등록일 :
2022.09.15 03:52
최근연재일 :
2022.10.30 23:00
연재수 :
45 회
조회수 :
171,765
추천수 :
6,874
글자수 :
336,119

작성
22.10.19 23:00
조회
2,467
추천
122
글자
17쪽

Chapter 11 – 왕국의 몽상가 (2)

DUMMY

“드디어 왕도로군요······. 저는 절대 여기까지 못 올 줄 알았어요. 이 모든 것이 태양처럼 환한 조던 공의 은덕입니다.”


서부에서 왕도로 들어서는 관문인 디안교를 앞두고, 마차 위의 한스는 적절한 관용구를 곁들여 은덕을 말했다.

그게 날씨에 적절한 표현은 아니었지.

이틀에 한 번씩은 비가 내린다는 뤼드게리아 중북부답게 지금도 이슬비가 머리를 적시고 있어, 태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내 기분 역시 그 우중충한 날씨처럼 무거웠다.


“감사 인사는 결과가 나온 뒤에 해도 된다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으니.”

“하하. 일이 잘 안 풀린다면 제 운이 거기까지인 거겠죠. 습격을 염려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습격에 대한 염려가 무척 컸던 모양이군.”

“그렇죠, 그렇죠. 밥조차 마음 편히 먹을 수가 없으니 정말 죽겠더라고요. 그런 심적인 고통 때문인지 설사와 구토까지 이어져서, 이대로는 추격자들의 습격이 아니라 병 때문에 쓰러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놀라운 일이군. 그런 몸으로 그만큼 많은 수의 도적들을 쓰러뜨렸다니 말이야.”

“아이고, 말도 마세요. 마지막에는 눈먼 칼에 맞아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검과 함께 목숨까지 잃을 위기였던 절 구해주신 조던 공의 은혜는, 참으로 측량할 길이 없는 거죠.”


정말 한스가 그곳에서 죽었다면 그건 어마어마한 손실이었으리라.

왕실을 공주와 왕자를 아우르는 큰 판을 짤 기회가 내게 오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떠나서, 고작 20대 초반에 왕실 배너렛을 놀라게 만든 재능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혔으리라는 얘기가 되니까.

다만 한스 본인은 그런 스스로의 재능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듯했다.


“차라리 다른 왕국으로 도망쳐볼 생각은 하지 않았나? 오뤼트 남부에는 시타델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들었네만.”

“저도 그렇게 듣기는 했는데······ 뤼드게리아 말밖에 모르는 제가 오뤼트에 간들 어떻게 적응할 수 있었겠어요?”

“검술을 바탕으로 자리를 잡았을 수도 있지 않나?”

“제 검술로요? 에이, 그런 말씀 마십쇼. 저 따위는 마을 촌로에게도 이기지 못하는 한심한 실력인데요?”

“마을 촌로라. 그분이 그대에게 검술을 가르쳐준 스승인가?”

“검술을 가르쳐주셨다기보다는, 그저 틈날 때마다 나뭇가지를 들고 등 뒤로 다가와서 때리곤 하셨죠. 그럴 때마다 저는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했고요. 아주 성질이 고약한 분입니다.”

“그렇군. 그의 이름은 어떻게 되나?”

“어, 글쎄요? 이름으로 부를 일이 없어서······. 하는 짓이 워낙 별나셔서 저 말고는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없으셨죠. 그분에 대해서는 왜 물으십니까, 조던 공?”


어쩌면 대륙 제일의 검호가 될지도 모를 인물을 키워낸 명인을 알아두고 싶은 건데······

그렇게 말해본들 믿질 않으려나.


병든 노모를 모시고 한적한 산골에서 살던 한스는, 제대로 된 적수와 검을 맞대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다 기연처럼 만나게 된 스승이 하필 고수의 풍모라곤 하나도 없는 괴팍한 늙은이였던 거지.

덕분에 자신의 강함을 실감할 기회가 없었던 모양.

시타델의 경비병들을 쓰러뜨린 것도 어디까지나 기습에 운까지 따라줬기 때문이라고 믿는 듯했다.


그래서 처음엔 푀일이나 레오도르에게 부탁해 그 오해를 바로잡아줄까도 생각했다.

그러면 그들 중 하나의 제자가 되어 유망한 기사로 거듭나는 인생 루트가 생길지도 모르니.

하지만 검의 소유권을 인정받고 가문을 복권시키기만 한다면 곧바로 젊은 백작으로 거듭나게 될 처지라, 구태여 사실관계를 조목조목 말해줄 건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닐세. 이 이야기는 만약 일이 잘 안 풀린다면 그때 다시 나누기로 하지. 그리고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할 것이 있네. 오늘은 그대를 위해 움직이기 힘들 걸세. 일행이 모두 함께 학장의 생일 연회에 참여해야 하니 말이야. 당장이라도 억울함을 풀고 싶은 마음은 짐작할 만하네만, 모쪼록 푀일 경이 왕실 관료들과 접촉해 성과를 낼 때까지 기다려주길 바라네.”

“예, 물론이죠. 이만큼 도움을 받은 것만 해도 몇 번을 갚아도 모자랄 은덕인데, 어찌 제 일을 가장 우선시해주시길 바라겠습니까? 객실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해해주니 고맙군. 오랜만에 편안히 쉬도록 하게나.”

“헤헤. 예, 조던 공. 그런데, 저기······ 혹시 저 마녀가 왜 저렇게 노려보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 말에 돌아보니, 늘 그랬듯 일행에서는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에르나가 나와 한스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다.

분노해서 노려본다고 느껴도 이상하지 않을 태도.

하지만 몇 차례의 대화를 통해 그녀와 제법 가까워진 내게는, 그게 악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이 잘 보였다.


“아마도 집중해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는 모양일세.”

[앗, 들켰어? 미안해, 조던 공.]

“괜찮네, 에르나. 계속 듣게나.”

“마, 마법으로 듣고 있는 겁니까? 아이고······ 마녀라고 불러서 미안합니다. 그냥, 입에 붙은 대로 부른 것뿐이에요······.”

“왕국 서부에서 마법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는 점은 그녀 역시 잘 이해하고 있을 걸세. 그녀가 우리의 대화에서 심기가 복잡해진 지점이 있다면, 그쪽이 아니라 내가 그대를 연민하는 투로 말한 부분이겠지.”

“어, 그것이 왜 심기가 복잡해질 일입니까?”

“죽음을 떠올릴 정도로 무섭게 내몰렸던 그대에게는 이 말이 어찌 들릴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사실 그리 모진 성품은 못 된다네. 시타델의 명령에 의해 그대를 뒤쫓으면서도 스스로 손을 쓰지 않고 도적 떼를 이용했던 것을 보면 말일세.”

“아, 그렇습니다. 그런 생각도 하기는 했죠. 직접 기습하면 저 같은 건 몇 번이고 죽일 만큼 대단한 실력자 같은데, 왜 구태여 남의 손으로 포위망을 좁혀오는 걸까 하고요. 그래서 혹시나 하긴 했습니다. 어쩌면 생각만큼 무서운 마녀는- 흡! 새, 생각만큼 무서운 마법사는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시타델 서방파의 사냥개 중 한 명인 에르나는, 그러나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여본 적은 없다고 했다.

늘 다른 범죄 조직을 협박해 조종하는 식으로 움직였다고.

그런 탓에 쉬운 임무조차 그르칠 때가 많아 스승으로부터 자주 책망을 들었다는 거지.

내 입장에서나 한스 입장에서나, 가장 먼저 마법검의 꼬리를 잡은 것이 다른 위저드가 아닌 에르나였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노릇이리라.


“한스 그대에게는 호의를 품기 어려운 대상일 것을 알지만, 양해해주길 바라네. 시타델 입장에서도 경비병들을 쓰러뜨리고 보물을 빼앗아간 이를 추적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 아닌가? 에르나는 그들의 명령을 받아 검을 빼앗으려 했던 것뿐이라네. 지금은 그대 가문의 복권에도 힘을 보태주기로 했으니, 서로의 악감정을 풀었으면 싶구만.”

“······예, 조던 공.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사실 저도 그녀 개인에게 불만이 있는 건 아닙니다. 상황 때문에 서로 적대하게 됐을 뿐이니, 그 상황이 해소되면 서로 얼굴 붉힐 필요가 없는 게 맞겠지요.”

“마음이 넓군, 한스.”

“헤헤. 저는 사실상 조던 공 덕택에 다시 태어난 목숨 아니겠습니까? 예전의 원한에 집착해서 뭐 하겠어요? 그보다는 앞으로 평온하게 사는 게 더 중요한 일 같습니다.”


말이야 쉽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닐 거다.

의도치 않게 흙탕물 조금 튀긴 일 갖고도 오랫동안 타인을 증오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니까.

도적 떼를 이용해 뒤를 밟음으로써 몇 달 동안 피를 말리게 했던 추격자를 받아들이는 게 어떻게 쉬운 일이겠어.

어디까지나 순박한 한스이기에 웃으며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건 에르나 역시 마찬가지.

비록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사냥개 소리를 듣곤 하지만, 사실 그녀 개인은 시타델과는 다른 순수를 품고 있다.


“이야기는 잘 들었나, 에르나?”

[······미안해. 내가 엿듣는 거, 어떻게 알았어? 조던 공은 위저드가 아닌데······]

“위저드는 아니지만, 사람의 얼굴을 볼 줄은 안다네. 그렇게 빤히 집중하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는 속을 어찌 모르겠나?”

[응······ 그렇구나. 미안해. 나는 안 들킬 줄 알았어. 안 들켜도 미안한 일이지만, 조던 공을 기분 나쁘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 나는 정말 못된 아이야. 조던 공에게 큰 실례를-]

“에르나. 나는 그대의 행동을 비난하고자 알아차린 티를 낸 것이 아닐세. 그저 가까이 와달라 요청하고 싶었을 뿐이지.”

[가까이 와달라······?]

“그렇네. 그대가 계속 일행과 떨어져서 말을 몰았던 이유가 바로 이 청년이 아니던가? 자신에 의해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던 이에게는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 아예 얼굴조차 볼 일이 없도록 피하기만 했던 것이 아닌가?”

[아······ 응. 조던 공의 말대로야.]

“우리는 이제 곧 왕도에 들어설 걸세. 거기서도 그렇게 거리를 두고 걷는다면, 지난번 숲속에서 그랬듯 이번에는 인파 속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름이야. 그러니 이제라도 과거의 악연에 대해 서로 마음을 풀길 바랐네. 그것이 내 욕심이겠나?”


에르나는 즉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위해 나는 한스의 옆구리를 한 차례 찔러줬다.


“예? 어, 예. 그······ 메이지 에르나? 저는 그,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그쪽도 위에서 시키는 일이라 어쩔 수 없이 한 것을 알거든요. 그러니 근처에 오셔서 편하게 걸으셔도 괜찮습니다. 또 기습하시지만 않는다고 하면요.”

[나는 조던 공의 일행을 기습하지 않아.]

“에르나는 그대를 기습할 생각이 없다고 했네. 마법검 역시 푀일 경의 손에 있는 만큼, 염려할 필요는 없을 걸세.”

“아, 그렇죠. 그러면 뭐, 괜찮아요. 얼마든지 가까이 와도 됩니다.”

“그렇다는군, 에르나. 이만 우리 곁으로 다가옴이 어떤가?”

[······응. 그럴게. 조던 공, 고마워.]


에르나가 조심스레 속력을 높여 내 옆으로 다가온다.

이후 한스가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떤 탓에 잠시 주춤거리긴 하더라만, 다시 행렬 밖으로 도망치진 않더라.

그게 내게는 우울한 와중에 그나마 위로가 되는 일이었지.

전성 마법이 아니면 의사 표현을 할 수 없어 많은 오해를 샀던 에르나도, 앞으로는 조금씩 사람과 다가설 수 있을 듯하다는 게.


그렇게 개인과 개인은 악감정을 풀고 가까워질 수 있다.

그것이 사람이 어우러지며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현실.

그렇지만 그 범주가 사회의 단위로 올라오면, 다툼 없는 삶이라는 것은 오히려 몽상이라 불리게 되고 만다······.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건 그 부분이었다.

농노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줄 아는 마테르트 백작조차, 대귀족들의 마음을 바꿔 다 같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내게는 델런 연기만을 돌려줘야 했다는 지점.

그에 하릴없이 스스로에게 묻게 되고 말았던 거다.

나야말로 조던 남작보다도 무모한 몽상가는 아닐까 하고.


개인과 사회는 다르다.

이른바 군중심리라고 해서, 집단 가운데 속해 있다는 인지로 인해 개인으로서는 할 수 없었을 사고방식이 발현되는 식.

사회의 그 묘한 특성이야말로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역사 속의 무수한 비극들이 일어난 근원일 것이라는 연구가 많았다.


이 세계의 비극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전쟁신의 교단과 시타델 서방파를 등에 업고 거대한 전쟁을 일으켰다는 크멜비츠 국왕도, 농노들의 실상에는 관심도 안 주고 자기 배 불리는 일에만 골몰하는 귀족들도, 사실 개인으로서는 제법 괜찮은 사람들일지도 모르니.

그렇게 가문과 장원과 도시와 성과 국가라는 공동체야말로 악행들을 만들어내는 본질이라고 한다면······

그런 원흉들을 해체하지 않은 채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보수주의는, 조던 남작의 급진적인 개혁 사상보다도 더 어리석은 망상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

피 흘리는 혁명이라면 원치 않는다.

현대인인 내 개입으로 인해 왕국과 대륙에서 무수한 농노의 생명이 스러지는 일만큼은, 내게는 차라리 신분제를 공고하게 해서라도 피하고 싶은 불상사였다.


그런 내 변절을 과연 학장은 어떻게 받아들이려나.

백 하고도 아홉 살이라서 오늘내일한다는 양반과 굳이 학구적인 토론을 나눌 생각까지는 없는데, 그래도 궁금해지는 거다.

그 석학은 이 몽상을 어떻게 해석할지가.

혹시 그라면 내 타협적인 이상향에 큰 도움이 될 만한 지혜를 갖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독대했을 때 속내를 털어놓고 조언을 구해보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그 고민의 와중.

우중충한 안개 속에서 서서히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 디안교의 저편에, 얼핏 핑크빛의 무언가가 보였다.


“······언니! 언니!”

“전하! 이랴!”


린드벨라가 N극을 만난 S극처럼 달려나간다.

그런 그녀를 푀일과 왕실 기사들이 뒤따르고, 엉겁결에 후발대의 선봉이 돼버린 레오도르가 대포처럼 웃었다.


“어허허허! 조던 공!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닙니까? 환영 행렬을 이끌고 나온 엘리시아 전하께 맹렬히 달려드는 린드벨라 전하의 모습이, 마치 주점에서 술을 마시다 오랜 친구와 만난 술꾼처럼 정겹군요! 하하핫!”


핑크빛 자매 상봉을 술꾼 감성으로 짓밟지 말아줬으면.

어쨌거나 그 지점부터가 내게는 꽤 의외였던 거다.

왕도의 환영 행렬에 대해 이야기하던 린드벨라가 그 대표로 언니가 나올 리는 없다고 여러 차례 말했기에.

혼기가 찬 공주는 궁성 밖으로 나가는 일부터가 쉽지 않다는 논지였는데, 그런 엘리시아가 외성 바깥까지 나와서 우리를 반기는 모습을 보니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레오도르 경.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 공주께서 외성까지 행차하시다니, 별일이로구려. 그렇지 않소?”

“그러니까 말입니다, 하하하! 참으로 대단한 우애지요!”

“그런 말이 아니라, 무언가 변고가 있는 것이 아닐지 걱정돼서 하는 말이오.”

“아, 역시 조던 공께서는 왕실에 대한 충정이 깊으시군요! 그렇다면 어서 가서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시지요!”


그렇게 말하고 말을 달리기 시작한 레오도르야 귀가 너무 얇은 것 같긴 했는데, 사실 그게 틀린 말은 아닌 거지.

그렇기에 나 역시 황급히 다리의 끝으로 달려가본 결과.

엘리시아의 외출을 가능케 한 왕실의 변고는, 내 생각처럼 부정적인 방향은 아니었다.


“······그렇게 태자비께서 예정일보다 일찍 순산하시게 돼서, 다들 그 일로 정신이 없네. 처음으로 왕손이 태어난 경사니까. 그래서 내게 이 자리가 돌아오게 된 거야.”

“아, 그렇구나. 축하해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언니가 여기까지 나올 수 있었다니, 기뻐!”

“후후, 보는 눈도 많은데 계속 아이처럼 굴 거니?”

“앗, 음, 어흠. 영광스러운 뤼드게리아 왕실의 스콰이어이자 일곱 번째 공주 린드벨라, 모든 임무를 완수하고 왕도에 돌아왔음을 보고드리는 바입니다.”

“영광스러운 뤼드게리아의 다섯 번째 공주 엘리시아가 그대의 귀환을 환영하오. 신들의 자비가 발끝에 머물기를.”


태자 알브레히트가 득남을 했다는 소식을 곱씹어본다.

당장 다음 제위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 경사를 본 것이니 권력을 탐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가 그쪽으로 달려갔을 것이고, 덕분에 나와 엘리시아의 해후가 몇 시간 앞당겨진 셈.

그 일로 계획에 이런저런 변수가 생길 것 같긴 한데······

동생과의 인사를 마친 엘리시아가 내게로 다가오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모든 생각을 멈춘 채 그녀의 걸음걸음만을 초고속카메라 영상처럼 느리게 인지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공주가 내 앞에 선 순간.

내 귀는, 적어도 30가지 이상을 상정해뒀던 상황별 시나리오 중 무엇과도 유사한 지점이 없는 속삭임을 들었다.


“오랜만이에요, 조던. 튀링겐에 무사히 잠입하신 듯해 기뻐요.”


······이거 설마.

마테르트 백작에게 엘리시아 때문에 변한 거냐는 말을 듣고 혹시나 하긴 했는데, 이거 설마······


“빨리 보고를 듣고 싶어 안달이 나네요. 예정보다는 조촐해질 생일 연회를 마친 뒤, ‘그곳’으로 오세요. 왕국의 변혁을 위한 대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지 어서 확인하고 싶어요.”


나는, 그런 생각들은 했었다.

아나키스트인 조던 남작의 관심을 끈 공주라면, 엘리시아에게도 미모 외의 특별한 점이 분명 있을 거라고.

푀일 같은 진중한 기사를 팬클럽으로 만들 정도라면 당연히 그 인망이 대단한 여성일 거라고.

그리고 그녀의 외조부인 마테르트 백작이 학장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니, 어쩌면 조던 남작과 처음 만난 장소도 전쟁신의 성소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고.


그래도 이럴 줄은 몰랐던 거지.

설마 대업의 보고를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난 공주였을 줄은.

왕국의 변혁을 말하며 비에 젖은 핑크빛 눈동자를 반짝거리는 혁명가였을 줄은.


왕국의 몽상가는, 조던 남작 한 명이 아니었던 듯했다.


작가의말

혁명을 싫어하는 현대인 앞에 마침내 최종보스가 등장했네요.

혹시라도 뜬금없는 전개라고 느끼시는 분이 계실까 걱정이 되기도 하는데, 엘리시아는 처음부터 저런 캐릭터로 기획돼 있었습니다.

혁명밖에 모르던 조던 남작조차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끝판왕...

그런 인물을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에 대해서도 기대해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내일부터는 이사 준비로 인해 한동안 연참이 어려울 듯합니다.

그래도 휴재는 없게끔 최대한 비축분을 만들어두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사회생활 잘하는 조던 남작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죄송한 말씀을 올리게 됐습니다. +25 22.10.31 1,506 0 -
45 Chapter 15 – 암살자의 신조 (1) +2 22.10.30 909 44 16쪽
44 Chapter 14 – 권리를 수복하는 법 (3.) +2 22.10.30 1,067 46 18쪽
43 Chapter 14 – 권리를 수복하는 법 (2) +2 22.10.28 1,208 56 16쪽
42 Chapter 14 – 권리를 수복하는 법 (1) +1 22.10.27 1,322 70 17쪽
41 Chapter 13 – 사농공상 (3.) +14 22.10.26 1,401 91 16쪽
40 Chapter 13 – 사농공상 (2) +2 22.10.25 1,532 70 19쪽
39 Chapter 13 – 사농공상 (1) +4 22.10.25 1,714 83 16쪽
38 Chapter 12 – 스승을 설득하는 법 (3.) +9 22.10.23 1,837 94 16쪽
37 Chapter 12 – 스승을 설득하는 법 (2) +21 22.10.22 1,926 83 17쪽
36 Chapter 12 – 스승을 설득하는 법 (1) +8 22.10.22 2,097 88 15쪽
35 Chapter 11 – 왕국의 몽상가 (3.) +21 22.10.20 2,360 111 18쪽
» Chapter 11 – 왕국의 몽상가 (2) +16 22.10.19 2,468 122 17쪽
33 Chapter 11 – 왕국의 몽상가 (1) +15 22.10.19 2,598 123 17쪽
32 Chapter 10 –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3.) +12 22.10.18 2,768 144 19쪽
31 Chapter 10 –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2) +9 22.10.17 2,838 126 16쪽
30 Chapter 10 –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1) +10 22.10.16 3,030 146 16쪽
29 Chapter 9 – 갈등 조정 (3.) +15 22.10.15 3,170 159 18쪽
28 Chapter 9 – 갈등 조정 (2) +4 22.10.14 3,174 159 16쪽
27 Chapter 9 – 갈등 조정 (1) +14 22.10.13 3,446 164 16쪽
26 Intermission – 반상을 뒤엎는 법 +21 22.10.12 3,439 192 16쪽
25 Chapter 8 – 마술사와 마법사 (3.) +13 22.10.11 3,327 174 16쪽
24 Chapter 8 – 마술사와 마법사 (2) +10 22.10.10 3,337 142 17쪽
23 Chapter 8 – 마술사와 마법사 (1) +3 22.10.09 3,355 144 16쪽
22 Chapter 7 – 이벤트 알림 (3.) +4 22.10.08 3,360 135 16쪽
21 Chapter 7 – 이벤트 알림 (2) +2 22.10.06 3,476 133 14쪽
20 Chapter 7 – 이벤트 알림 (1) +4 22.10.05 3,746 137 15쪽
19 Chapter 6 – 마음을 확인하는 법 (3.) +3 22.10.03 3,813 147 16쪽
18 Chapter 6 – 마음을 확인하는 법 (2) +1 22.10.02 3,983 144 15쪽
17 Chapter 6 – 마음을 확인하는 법 (1) +2 22.10.01 4,212 162 15쪽
16 Chapter 5 – 조던 남작을 찾아서 (3.) +5 22.09.30 4,465 146 16쪽
15 Chapter 5 – 조던 남작을 찾아서 (2) +6 22.09.29 4,553 170 17쪽
14 Chapter 5 – 조던 남작을 찾아서 (1) +10 22.09.28 4,673 187 15쪽
13 Chapter 4 – 핑크 프린세스 (3.) +11 22.09.28 4,704 222 17쪽
12 Chapter 4 – 핑크 프린세스 (2) +15 22.09.26 4,775 200 16쪽
11 Chapter 4 – 핑크 프린세스 (1) +10 22.09.25 5,005 207 18쪽
10 Chapter 3 – 중간관리자의 역할 (3.) +5 22.09.24 4,998 206 18쪽
9 Chapter 3 – 중간관리자의 역할 (2) +7 22.09.23 5,076 194 16쪽
8 Chapter 3 – 중간관리자의 역할 (1) +17 22.09.22 5,075 202 16쪽
7 Chapter 2 – 몰락귀족이 살아가는 법 (3.) +12 22.09.21 5,654 206 17쪽
6 Chapter 2 – 몰락귀족이 살아가는 법 (2) +14 22.09.20 5,640 211 18쪽
5 Chapter 2 – 몰락귀족이 살아가는 법 (1) +8 22.09.18 6,049 215 15쪽
4 Chapter 1 – 튀링겐의 군주 (3.) +13 22.09.18 6,265 256 17쪽
3 Chapter 1 – 튀링겐의 군주 (2) +10 22.09.16 7,202 232 16쪽
2 Chapter 1 – 튀링겐의 군주 (1) +11 22.09.15 8,943 255 15쪽
1 Prologue – 상사를 설득하는 법 +21 22.09.15 11,728 276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