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숨은 사명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조회수 :
11,083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작성
22.07.11 06:00
조회
48
추천
1
글자
8쪽

천계_율명의 각성

DUMMY

장엄관문에 들어서는 순간 인간세의 무겁고 텁텁한 기운이 씻겨나갔다.

여라함은 도사 틔움의 모습을 벗고 공명의 들판 아름누리를 넘어 곧장 진백성단으로 향했다.


헝클어진 그의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우주의 시작과 끝인 양 사방으로 펼쳐진 광활한 들판은 고요하기만 했다.

멀리 별의 무덤이 숨 쉬듯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율은 알겠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여라함은 율명의 침실이 있는 유민재로 영진성의 문양을 날려 보냈다.


영진성의 문양은 세 개의 동그라미를 불꽃이 감싼 모양이었다.

세 개의 동그라미는 진백성, 암흑성, 영진성으로, 셋이면서 하나인 그들의 운명을 나타냈다.


선대의 삼신성처럼 무결의 고리에 들어갈 때까지 함께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그들이었다.


바람과 공기로 이루어진 문양은 유민재로 스며들어 불꽃이 터지듯 넓게 퍼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진백성이 아무리 칩거 중이라 해도 그의 신호를 놓칠 리 없었다.


일상적인 방문이라면 느긋하게 성문을 열고 들어갔을 것이다. 정원을 거닐며 천인들과 인사를 나눈 뒤 진백성과 차를 마셨을 것이다.


문양을 날린 것은 그만큼 위급하다는 뜻이었다.


바람의 흔적이 사라지기 무섭게 율명이 성문 밖 여라함의 앞에 섰다.

여전히 건장하고 듬직한 체구였으나 지치고 어두운 낯빛 때문에 이전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여라함을 보자 율명은 애써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여하, 무슨 일인데 그런 얼굴이야?”


“해밀이 어디 있는지 알지?”

“해밀? 암흑성단에 있겠지.”

“납치되었어.”


율명이 굳은 얼굴로 뻐끔거렸다.

“누가 감히 암흑성단의 수석을 납치하겠어?”

“네가 모른다면 다른 곳이군.”


“설마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해?”

“바로 그 설마에 속해. 네가 아는 곳일 거야.”

율명은 여라함의 진지한 표정에 한동안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알다니?”

“진유가 어디 있는지 알아?”

엉뚱한 질문을 받자 율명은 입을 비쭉거렸다. 절도 있는 움직임이 몸에 배어 그런 표정조차 근엄해 보였다.


“진유를 의심하는군. 인간세에 내려갔어. 할 일이 있다더군.”

“그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어?”

율명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의아했다.


진유는 인간세에서 처리할 일이 있다고 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그리고 아유라도 그에게 찾아와 부탁했다.

자신을 돕게 해달라고, 잠깐이면 된다고 했다. 염라성으로서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진유가 하는 일이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대명천으로 기린각을 옮기는 정도겠지만, 무슨 일을 하든 그는 철저하게 준비하고 완벽하게 처리했다.


더욱이 아유라가 부탁한 일이니, 거절할 수 없었다. 염라성으로서의 일이라면 슬픈 영혼과 관계있을 테니까.


“아유라를 도와주러 갔어. 영천옥과 관련된 일이겠지. 곧 돌아올 거야.”


율명의 대답을 듣고 여라함은 한숨을 내쉬었다.

“염라성이 가장 처리하고 싶은 상대가 누구겠어?”


율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질문에 아유라가 가려놓은 얇은 막이 한 겹 걷혔다.


이상한 느낌에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암흑성단이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라함은 그의 얼굴을 보자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었다. 화가 가라앉고 측은한 마음이 자리를 대신했다.


세상을 위해 빛의 임무를 다하려고 매 순간 정진을 멈추지 않던 율명, 너무나 순수해서 아유라를 쉽게 믿어버린 그가 오히려 안쓰러웠다.


진백성은 우주가 이어지는 근간이기에 매 순간 빛과 세상의 무게를 견뎌야 했다. 그래서 아름다운 아유라에게 의지했는지도 모른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믿고 사랑했겠지···.’


“미사···?”

율명이 망설이다 간신히 답을 꺼냈다.


아유라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사람의 몸에 갇혀있어도 암흑성의 혼이야. 지금은 기억 못 하지만 곧 각성하겠지.’


그때부터 이미 준비한 걸까.


‘세상은 진백성 하나면 충분해. 너를 위해 나도 할 일이 있어.’

아유라는 그렇게 말했다. 모든 일이 이 세상을 위한 것이라고.


그러나, 순수한 선을 위해 완벽한 세상을 만들려는 자신의 꿈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어둠도, 균열도 없는 세상, 악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애써왔다.

불완전한 틈을 메우면 세상은 훨씬 아름다워질 거라 믿었다. 그래도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미사랑은 이미 신성의 지위를 버리고 인간세에 태어났는데 그 혼 조각까지 찾아내 죽이려 하다니. 게다가 암흑성단의 천인을 가두었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아유라가 그런 일을 할 리 없었다. 무언가 오해가 있을 것이다.

“아유라에게 가봐야겠어.”


“지금 암흑성단에 있을 거야. 난 시련의 동굴로 가야 해. 축이 흔들리고 있어.”

율명이 사라지자 여라함도 우주의 기둥 바로섬을 향해 돌아섰다.


*


암흑성단 미사랑의 저택에는 아유라가 한가로이 날개를 흔들며 허공에 떠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나른한 매력이 넘쳐흘렀다.


저택을 지켜야 할 무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암흑성의 저택을 지키던 천인들이 한꺼번에 증발한 것 같았다.


율명은 아유라가 그곳에 있는 것이 낯설면서도 그녀를 만난 것이 싫지 않았다.


그동안 일부러 그녀를 찾지 않았다.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가려면 언젠가 아유라까지도 소멸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갈등이 깊었다.

‘천선계가 하나가 되기 위해 아름다운 그 모습도 함께 지워야 한다니···.’


무엇보다 아유라를 보면 자신의 검 끝에서 산산이 부서지던 미사랑이 생각나 가까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미사랑에 대해 말할 때마다 마지막 모습이 또렷해져 가슴이 따끔거렸다.


율명을 발견하자 아유라의 얼굴에 싸늘한 그늘이 스쳐 갔다. 하지만, 이내 눈웃음으로 바꾸었다.


나긋나긋한 그녀의 목소리가 정원에 울렸다.

“네가 찾아오다니 행복한데.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여기서 뭘 하고 있어?”

“누군가는 암흑성단을 지켜야지. 설마, 화났어?”


아유라는 웃음을 놓치지 않았다.

율명은 그녀의 말을 믿었다. 암흑성단의 힘이 약해지면 천선계 전부가 위험해지니까.


그녀가 한 일이 아니라고 확신하면서도 진지하게 물었다.

“해밀을 납치한 건 아니지?”


“납치라니, 내가 그런 일을 했겠어? 그냥 쉬라고 한 거야. 그동안 고생 많았잖아. 불쌍하게도···. 조금도 쉬지 못했을 거야.”


“어디 있어?”

“음···. 글쎄?”

아유라는 가느다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내어 웃었다.


율명에게는 그 작은 소리가 귀를 찢는 듯한 아픔이었다. 머릿속을 산산이 쪼개놓을 기세로 날카로운 바늘이 파고들었다.


그가 얼굴을 찌푸리고 몸을 웅크리자 아유라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이제라도 바로잡을 거야. 실패는 한 번이면 충분해.’


웃음소리가 율명의 눈과 귀를 찌르다 점차 사라졌다. 그녀가 율명에게 다가갔다.


율명의 눈썹 사이로 깊게 팬 주름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너도 새로운 차원을 보게 될 거야.”


“아유라···, 너, 암흑성이 되려고 여기 온 건가?”

“호호, 순진하긴. 내가 겨우 암흑성에 연연할 것 같아?”


아유라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

“으음, 염라성역에서는 신력이 회복되지 않는 건 맞아. 힘의 원천이 필요해.”


율명은 눈앞의 여인이 자신이 아는 아유라인지 혼란스러웠다.

예전의 아유라는 더없이 다정하고 온화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고, 그의 마음을 모두 가진 상대였다.


“뭘 원하지?”

“그런 거 없어. 어차피 일어날 일을 빨리 끝내려는 것뿐이야.”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알고 싶어? 모르는 게 좋을 텐데?”


아유라가 생글생글 웃음 지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숨은 사명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24 사로잔_예기치 못한 모임 22.07.14 46 1 11쪽
123 사로잔_포로가 되다 22.07.14 42 1 14쪽
122 사로잔_참수리호 22.07.13 47 2 12쪽
121 사로잔_월영국 나슬항 22.07.13 46 1 13쪽
120 사로잔_대장 누리예 22.07.12 49 1 10쪽
119 사로잔_가락국 산곡 22.07.12 49 1 10쪽
118 천계_해야 할 일 22.07.11 49 1 7쪽
» 천계_율명의 각성 22.07.11 49 1 8쪽
116 아랑누_배웅과 마중 22.07.10 47 1 10쪽
115 아랑누_새얼의 의지 22.07.10 50 1 10쪽
114 아랑누_축제 구경 22.07.09 49 1 9쪽
113 아랑누_보물 사냥꾼 22.07.09 48 1 10쪽
112 아랑누_새로운 인연 22.07.08 47 1 11쪽
111 아랑누_공격과 회복 22.07.08 52 1 10쪽
110 아랑누_대결 준비 22.07.07 51 1 11쪽
109 아랑누_지하 미로 22.07.07 47 1 12쪽
108 아랑누_또 하나의 반월도 22.07.06 49 1 11쪽
107 아랑누_신령수 동명 22.07.06 47 1 11쪽
106 아랑누_천인 무아 22.07.05 46 1 12쪽
105 아랑누_무용수 사란야 22.07.05 47 1 12쪽
104 아랑누_책방 고연재 22.07.04 48 1 11쪽
103 아랑누_회한의 성벽 22.07.04 45 1 11쪽
102 아랑누_여관 산연곡 22.07.03 44 1 10쪽
101 아랑누_상재믈국 감항 22.07.03 44 1 12쪽
100 천계_암흑성단의 비밀 22.07.02 46 1 11쪽
99 천계_아유라_발견 22.07.02 50 1 9쪽
98 천계_아유라_깨달음 22.07.01 47 1 11쪽
97 천계_아유라_선택 22.07.01 45 1 10쪽
96 천계_아유라_다른 차원 22.06.30 43 1 13쪽
95 천계_아유라_회귀 22.06.30 43 1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