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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숨은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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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조회수 :
11,103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작성
22.07.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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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아랑누_지하 미로

DUMMY

고연재로 가는 골목에는 많은 사람이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틀 남은 축제를 기대하며 감항 사람들과 세 개의 대륙에서 건너온 여행자들이 합세해 어느 곳이나 북새통을 이루었다.


온설지는 바퀴 의자를 이리저리 굴려 사람들 틈을 빠져나갔다.

“너무 기막힌 우연이잖아? 이건 말도 안 돼.”

아무리 세상이 좁다 해도 지나친 우연이었다.


아랑누가 사람들을 피해 온설지의 뒤로 자리를 바꾸었다.

“온형, 이건 우연이 아니야. 성물이 주인을 찾기 위해 우리를 이용하는 거야. 사람에게는 기막힌 우연처럼 보이지만, 잘 짜인 극본 위에 있다고 봐야 해.”

“뭐야? 그럼 우리가 장기 말이란 거네?”


“음. 장기 말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이겨야지. 무조건?”

“오우, 아누, 그게 정답이야!”


이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새얼조차도 뭔가 각오를 다지는 기분이었다.


고연재 앞 화단에는 다봄에 어울리는 노란색과 빨간색 꽃이 가득했다. 어떤 것은 시들어가고 늦된 것은 겨우 봉오리를 맺었다.


새얼이 갑자기 허리를 돌리자 바퀴 의자가 비틀거렸다.

“왜 그래? 뭐가 있어?”

“저기 봐요. 저 분홍색 꽃. 저건 내가을에 피는 꽃인데? 딱 한 송이만 피었어요.”


아랑누에게는 어떤 것이 분홍색인지 안 보이지만, 막 피어난 꽃의 기운은 읽을 수 있었다.

“차원이 부딪친 거야. 다른 차원의 온도가 맞닿아서 그래.”

“저쪽 차원에는 다봄의 꽃이 피었겠네요?”

“그럴 수도 있고, 거기 어울리는 다른 것이 생겼을 수도 있고.”


차원의 경계를 지키는 신령수 동명이 생각났다.

‘신령수의 결계는 언제, 어디서든 찾을 수 있다고 하셨지. 다음에 꼭 찾아가야지. 노래도 불러드리고.’

아랑누는 뿌듯한 마음으로 책방 문을 열었다.


*


고연재에 들어오자 이연의 눈빛은 짙은 자주색으로 바뀌었고, 잃었던 친구를 찾는 듯 책을 돌아보았다. 새얼은 좋아하는 자리로 의자를 밀고 갔다.

아랑누와 온설지는 손님용 의자에 앉아 종이에 밴 시간의 흔적을 둘러보았다.


이연의 눈빛과 마주치자 을단은 홀린 듯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냈다.

“몸싸움하다가 찢어졌는데, 감옥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것만 남았어. 거약, 그놈은 지도가 있는지도 몰라. ”

벌써 이십 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그때의 고통이 고스란히 남아 진저리쳤다.


이연이 종이와 붓을 꺼내 들었다.

“다시 그릴 수 있으니, 잠시 시간을 주시죠.”


아랑누는 이연이 그림에 집중하도록 을단의 소매를 끌고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단미욱이 지하미로를 만들었나요?”

“아닐 거요. 사람은 못 만들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 만들었다오.”

“단미욱이 죽은 이유와 관련 있나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새얼은 눈을 빛냈다.

학자 단미욱은 새얼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부터 가슴이 떨렸다.


요양을 위해 감항에 간다고 할 때 선뜻 누나를 따라나선 것도 단미욱이 세운 고연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걸을 수 없어도 그녀의 숨결이 남아있는 것 같아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새얼은 을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사백 년 전인가···, 비슬홀이 형제들을 죽이고 성황이 되었지. 학자들을 가두고 책이란 책은 모조리 불태웠소. 책은 그릇된 사상을 갖게 한다고. 백성들이 지식을 가지면 반역을 꾀한다는 이유였어.


을단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연재에도 불을 냈는데, 단미욱은 불길 속에서 책을 옮기다가 숨을 거두었지.”


자신의 고조모인지, 그보다 더 오랜 조상인지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을단은 아련한 눈빛으로 책장을 둘러보았다.


“그 당시 단미욱에게 친구가 있었소. 그가 남은 가족들을 구해주고, 모든 장서를 비밀의 장소에 숨겼다오. 비밀을 이어받은 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고연재의 장서를 찾지 못하지.”

그 자신이 비밀의 전수자임은 구태여 밝히지 않았다.


“비슬홀이 죽고 오십 년이 지나니 책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오. 그랬더니 학자들만 오는 것이 아니라 거약 그놈 같은 파리까지 날아들었소.”


“그 친구분은 어디로 갔나요?”

아랑누는 지도를 거의 완성해가는 이연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아닐 거라고만 들었소. 신선이라고. 그러니 하늘로 돌아갔겠지.”


을단은 지하 미로를 떠올렸다.

섬세하고 치밀한 구성도 놀랍지만, 그토록 오래 지났는데도 곰팡이나 이끼도 끼지 않았다. 하늘의 보살핌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연이 지도를 완성하고 붓을 내려놓는데 드르륵 거칠게 문이 열렸다.


자신이 도마에 오른 걸 아는지 거약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온천관리권을 가진 관료답게 화려한 겉옷을 입었으나, 그것 때문에 오히려 사람이 작아 보였다.

“내 책이 잘 있나 보러왔네.”


을단이 손을 부르르 떨며 일어났다.

온설지가 일어나 말릴 틈도 없이 거약은 이연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게 뭔가?”

거약의 눈이 빛났다. 눈을 깜빡일 틈도 없이 휙 종이를 뺏어 들었다.


을단이 가쁜 숨을 내뱉는 것과는 달리 이연은 앉은 채로 태연하게 거약을 올려다보았다.


“고연재의 지하 미로입니다. 그 지도가 있으면 모든 장서를 찾을 수 있지요.”

별일 아니라는 듯 붓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거약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이내 걸걸한 웃음을 토해냈다. 지도를 쥔 손이 환희에 넘쳐 부들부들 떨렸다.

“이게, 이게 진짜로 있었단 말이지.”


“예전 지도가 너무 낡아서 복원한 겁니다.”

이연의 말투는 여전히 차분하고 담담했다.


을단은 배신감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

‘저거, 저걸. 왜 저놈한테!’

비틀거리며 다가가자 거약이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을단은 가슴을 움켜쥐고 가쁜 숨을 쉬었다. 숨소리도 거칠어졌지만, 이연은 못 들었는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미로에 가실 때는 반드시 혼자 가셔야 합니다. 고연재는 비밀을 아는 단 한 사람만 받아주니까요. 혼자가 아니면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절대로.”

“잘 됐어. 어차피 나 혼자 갈 거니까. 다른 사람과 나눌 필요도 없지.”


거약이 종이를 접으려 하니 이연이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지금 가신다면 이쪽으로 가십시오. 딱 좋은 시간입니다. 통로의 돌이 빛을 반사해 문을 알려줄 겁니다.”


거약의 손이 멈추었다. 의심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지도가 넘어오다니.

‘설마 가짜는 아니겠지?’


책상 위의 낡은 지도를 대보았다.

찢어진 부분을 뺀 나머지는 정확히 똑같았다. 여기 더 머무를 이유가 뭐가 있는가.


을단의 낯빛이 하얗게 바뀌자 확신이 들었다. 눈엣가시 같던 노인이 몸을 떨며 화를 참는 모습이라니.


거약은 곧바로 뛰어나갔다.

을단의 피 끓는 비명이 귓가에 울리자 그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승리의 기쁨에 들떠 발을 멈추지 못했다.


“너한테 지도를 보여준 것이 실수였어. 널 어떻게 믿고!”

을단이 손을 떨며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이연은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덤덤한 이연을 보니 그는 혼이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어째서, 어째서···!”

“염려 마십시오. 거약은 황금문을 고를 겁니다. 미로를 만들 때 그것까지 계산해놓았으니까요. 탈출하거나, 수로에 빠지거나, 영영 나오지 못하거나 그건 본인의 선택입니다.”


아랑누는 숨은 넋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책에서 눈길을 뗀 지금이 기회였다.

“누구입니까? 그 미로를 만든 당신은?”


자신을 부르는 아랑누의 목소리를 듣자 이연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천인 무아. 미사랑님을 찾아 여기 왔습니다. 단미욱의 성품과 학식에 동화되어 함께 고연재를 세웠습니다. 인간세에서 유일하게 사귄 친구이지요.”


이연이 아랑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우아한 자태가 아직도 또렷합니다. 미사랑님이 암흑성이었다면 그녀의 혼은 분명 천인이 되었을 겁니다. 미사랑님이 사라진 뒤 많은 영혼이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미로는 무아의 선력으로 만들었군요. 그래서 선력을 모두 잃고 몸도 잃었군요.”

“인간세에 관여한 일로 이리되었으나, 괜찮은 선택이었습니다. 적어도 미사랑님을 도울 수 있으니까요.”


말을 마치자 이연의 눈빛이 옅어지더니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연아!”

온설지가 달려가 이연을 안아 올렸다.


“지도를 만드느라 선력을 다 썼어. 한동안 무아의 넋은 나오지 못할 거야.”

아랑누는 측은한 마음에 이연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어쩌면 다시는 나오지 못할지도···.’


을단과 새얼은 눈만 깜빡이며 굳어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소년이 먼저였다.


을단은 구석의 쪽방으로 온설지를 안내했다. 새얼도 바퀴 의자를 굴려 그들을 따라갔다.

두 사람 모두 보고 들은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


산연곡 닻별방에 들어서자 도조는 한껏 가슴을 부풀리고 깃털을 세웠다.

부녹에게 받은 금화 주머니를 아랑누 앞에 들이밀며 까각 소리를 냈다.


“내가 이 정도입니다. 얼마나 빠르고 정확합니까? 꺄꺄꺄.”

“그러느라 종일 시장에 있었다고? 그게 뭐가 빠르냐?”


온설지는 저녁 식사로 나온 고기볶음과 국수를 입으로 밀어 넣었다. 곧 날이 어두워지기에 좋아하는 음식을 빨리 먹고 싶었다.


“꼬맹이 왜 저래? 벌써 잠들었나?”

도조는 이연에 대해 물으면서도 날개와 눈은 금화 주머니를 떠나지 않았다.


온설지가 우물거리며 대꾸했다.

“꼬마에게 숨어있던 넋이 나왔다 들어갔어. 조금 지나면 깨어날 거다.”

“세상에나···. 저런 꼬맹이 몸을 빌리는 넋이 누구래? 하릴없는 넋일세.”


아랑누가 이연을 보살피다가 도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천인 무아라고 하던데. 도조는 알아?”

“에? 누구요? 처, 천인 무아요?”


도조는 숨이 넘어갈 듯 머리를 뒤로 젖혔다. 쿵하고 넘어진 도조는 머리를 사람으로 만들더니 부산스럽게 일어났다.


이연의 배 위로 날아와 콩콩 뛰었다.

“무아요? 진짜? 진짜?”


“아는 사이야?”

“본 적은 없지만, 얘기는 무지하게 많이 들었죠. 엄청 유명해요. 세상에 그 무아님이 여기 숨어있었다니.”


온설지가 그릇을 내려놓고 물을 따라 마셨다.

“가만. 넌 선계에서 왔다며? 천인이 선계에 사나?”

“눈사람,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 무아님은 천인이면서도 선계에까지 이름을 떨치신 분이야. 왜 선계에 살지 않냐고 선인들이 안타까워할 정도라고.”


도조가 이연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부채를 찾으러 간다고 하고는 사라졌는데 어찌 여기 계셨대? 상관없다. 내가 무아님을 찾아냈다니. 캬캬캬.”


도조는 발을 굴렀다가 날갯짓을 하더니, 콧노래를 부르다가 뱅글뱅글 돌았다. 온설지는 소란을 피우는 도조를 향해 손사래를 치더니 곧바로 방을 나갔다.


아랑누는 가만히 이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아.’

어쩐지 낯익은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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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천계_율명의 각성 22.07.11 50 1 8쪽
116 아랑누_배웅과 마중 22.07.10 47 1 10쪽
115 아랑누_새얼의 의지 22.07.10 50 1 10쪽
114 아랑누_축제 구경 22.07.09 49 1 9쪽
113 아랑누_보물 사냥꾼 22.07.09 48 1 10쪽
112 아랑누_새로운 인연 22.07.08 47 1 11쪽
111 아랑누_공격과 회복 22.07.08 52 1 10쪽
110 아랑누_대결 준비 22.07.07 51 1 11쪽
» 아랑누_지하 미로 22.07.07 48 1 12쪽
108 아랑누_또 하나의 반월도 22.07.06 49 1 11쪽
107 아랑누_신령수 동명 22.07.06 47 1 11쪽
106 아랑누_천인 무아 22.07.05 46 1 12쪽
105 아랑누_무용수 사란야 22.07.05 47 1 12쪽
104 아랑누_책방 고연재 22.07.04 48 1 11쪽
103 아랑누_회한의 성벽 22.07.04 47 1 11쪽
102 아랑누_여관 산연곡 22.07.03 44 1 10쪽
101 아랑누_상재믈국 감항 22.07.03 44 1 12쪽
100 천계_암흑성단의 비밀 22.07.02 47 1 11쪽
99 천계_아유라_발견 22.07.02 50 1 9쪽
98 천계_아유라_깨달음 22.07.01 47 1 11쪽
97 천계_아유라_선택 22.07.01 45 1 10쪽
96 천계_아유라_다른 차원 22.06.30 44 1 13쪽
95 천계_아유라_회귀 22.06.30 43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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