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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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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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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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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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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아랑누_여관 산연곡

DUMMY

산꼭대기에 서서 온설지가 양 팔을 쭉 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대체 얼마나 넓은 거야? 가늠이 안 되네.”

“너무 크고 넓으면 오히려 크고 넓다는 걸 못 느껴. 지나치면 모자라느니만 못하다고. 사람의 눈과 머리의 한계지.”

아랑누는 산비탈 바위에 앉아 지팡이를 세웠다.


감항 평야는 넓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동쪽으로는 바다를 접하고, 서쪽으로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데다 땅속 깊이에서 온천이 솟아 나오는 축복받은 곳이었다.


“그럼 아누는 알 수 있어? 영안으로는 보여?”

“무슨. 나도 너나족이니까 당연히 모르지.”


온설지가 허탈하게 웃었다.

“실없긴. 그런데 꼬마는 왜 저래? 며칠 전부터?”


이연은 어깨를 움츠리고 나무에 기대앉았다. 산 아래 시원하게 펼쳐진 평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길잡이 구름이 감항을 가리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발걸음이 느려지고 힘겹게 터덜터덜 걸었다.


‘감항에 꼭 가야 하나요? 네. 그렇죠. 가야겠죠.’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아랑누의 팔을 잡았다.


‘진짜 거기로 가야 해요? 다른 곳으로 돌아가면 안 돼요?’

‘왜 그래? 아는 사람이 있어?’


‘아니오. 내 안의 넋이 두려워해요. 이유는 몰라요. 물어도 말 안 해요. 그러니까 나도 힘이 안 나요. 걸을 때마다 너무 힘들어요.’

‘길잡이 구름이 부른다면 이유가 있을 거야. 무슨 일인지 몰라도 조금만 더 힘을 내.’

겨우 달래가며 산을 넘었다.


아랑누는 이연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연아, 조금만 참아. 감항에서는 괜찮은 숙소를 찾아보자.”


나귀 보리의 등에서 졸고 있던 까마귀 도조가 벌떡 깨어났다.

“괜찮은 숙소라고라? 이번에는 좋은 곳을 잡는 거죠? 맞죠? 맞죠? 그렇다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꽉꽉거리더니 머리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이 몸이 가서 좋은 숙소를 찾아보겠습니다! 제가 또 보는 눈이 있지 않습니까! 아랑누님은 천천히 오십시오.”


도조는 크릉크릉 흥얼거리며 감항성을 향해 날아갔다.


“또 흥분했네! 까마귀에게 무슨 숙소가 필요하다는 건지. 쯧쯧.”

온설지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


감항에 들어서자마자 손바닥 모양의 구름이 사라졌다. 아랑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길잡이 구름이 사라진 건 여기에서 할 일이 있다는 뜻이지. 그렇다면···.’


아랑누는 망령을 찾아 거리를 헤맸다. 그들이 길잡이 구름이 멈춘 이유를 알려줄 것이다.


거리에는 상인과 여행자들이 몰려다녔다. 지팡이가 그들의 발에 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였다.

광장부터 넓은 공터, 시장과 작은 장터까지 들뜬 기운이 가득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덩달아 마음이 들떴다.

망령도 축제를 기다리는지 아랑누를 찾지 않았다.


먼저 출발한 도조가 아랑누를 알아보고 어깨에 내려와 앉았다.

“제가 설명해드리죠. 감항은 요양과 관광으로 유명해요. 바닷물도 따뜻하니 물고기도 잘 잡히고요. 농사도 잘된대요.

저 앞에 영은재라는 여관이 유명하거든요? 거기로 가시면 됩니다.”


“겹보름 때문에 방도 없을걸?”

온설지가 오가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화려한 옷을 입고 멋을 낸 사람들이 재잘대며 지나가니 탁라국에서 만난 아라치와 두나가 떠올랐다.

‘그 친구들도 이런 거 좋아하겠지? 겹보름이라···. 달과 삭이 똑같이 보름이 되는 게 보통 일은 아닌데. 그걸 못 보다니.’


온설지가 입을 삐죽거리자 도조는 자신에게 야유하는 것으로 여겼다.

까마귀의 몸으로 여관에 방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볼 수는 없지 않은가.


도조는 콧방귀를 뀌고는 아랑누의 반대편 어깨로 옮겨가 앉았다.

“겹보름 축제는 아주 유명해요. 봐요, 사람들 엄청 많죠? 등도 엄청 많이 달리고. 야식도 그득그득하겠죠?”

꿀꺽 침을 삼켰다. 밤새 펼쳐질 축제와 야시장을 생각하니 가릉가릉 노래도 흘러나왔다.


아랑누가 한 여관 앞에 멈추자 도조의 콧노래가 뚝 그쳤다. 날개를 퍼덕이며 허공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여기가 아니라니까요! 영은재는 맞은편이라고요.”


아랑누는 도조의 고함에는 아랑곳없이 낡은 대문 앞으로 다가섰다. 도조가 깍깍거리며 소리쳤다.

“이름도 산연곡이 뭐예요, 산연곡이!”


“그러니까 너한테 방이 왜 필요하냐고. 아무 데나 선반 하나면 충분하잖아?”

온설지도 도조의 투정을 들은 척 만 척 성큼성큼 들어갔다.


“나도 멋진 방을 쓰고 싶다고요. 아랑누님!”

도조가 불렀을 때 아랑누는 이미 하인에게 방을 알아보고 있었다.


산연곡은 여관이라기보다 휴양소였다. 오래 투병한 사람들이 마지막 끈을 붙잡는 심정으로 오는 곳이라 공기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랑누는 그 속에 스며있는 희미한 영기에 이끌렸다.

“여기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 연이도 빨리 쉬어야 하고.”


도조는 이연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가뭄에 시든 이파리처럼 축 처져있었다.

“어휴, 그러니까 꼬맹이를 위해서도 영은재가 낫다니까요. 헹! 차라리 노숙이 낫겠다.”


“그럼 해 떨어지면 나하고 같이 가자.”

온설지가 꼬리를 잡아채려 하자 도조는 깍깍거리며 지붕 위까지 튀어 올랐다.

“됐다고, 됐어. 그냥 여기서 쉴 거다. 치잇.”


*


하인들이 빈방을 청소하는 동안 주인 할머니가 응접실로 차를 가져왔다.

“오래 비어있던 방이라 그렇지, 금방 정리될 거유. 여긴 환자들이 많아 여행자들은 안 오는데 이렇게 인연이 닿았고만.”


주인은 아랑누의 눈가리개를 보고는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 지긋한 노인이 다정하게 말하자 아랑누는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평안해졌다.


이연은 푹신한 의자 끄트머리에 앉자마자 꾸벅꾸벅 졸았다. 백호족 온설지만 꼿꼿하게 앉아 접시 위의 과자를 우적우적 집어 먹었다.


“축제를 보러 오셨나?”

“예.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겹보름 축제가 유명하다고 해서요.”

“이 년 반 만에 오는 겹보름이니 성대허지. 그래도 조심하셔.”

“무슨 일이 있나요?”


주인은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깊은 한숨이 지나갔다.

“너른벌에 요즘 해괴한 일이 많으니께. 어디선가는 이백 명 넘는 사람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지. 한 집에서 하룻밤 만에, 흔적도 없이 말이여.”


말하다 말고 창밖을 흘끗 보았다.

“저 영은재에서 일하던 사람 하나도 도통 소식이 없더니 얼마 전에 돌아왔다오. 삼 년 동안 깜깜무소식이었거든. 뭔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못하고. 여하튼 간신히 살아났다더만.”


주인은 장님이 겹보름 축제를 즐길 수 있을까 의아해하면서 아랑누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많으면 일이 생기기 마련이니께, 조심하셔들.”


주인에게는 아랑누가 불쌍했지만, 정작 축제를 못 보는 사람은 온설지였다.


*


하인이 닻별방의 문을 열어주자 이연은 곧장 침대 위에 엎어졌다.


아랑누는 복도에 서서 다른 방을 둘러보았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별찌방에서 이상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망령의 기운 말고도 여러 색깔의 감정이 뒤섞여 회오리쳤다. 한숨, 원망, 슬픔, 그리움이 깊게 자리 잡았다.


“저 방은 누가 쓰나요?”

“새얼이랑 그 애 누나요. 열다섯 밖에 안 되는데 오래 앓았더라고요.”

하인의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왔다. 소리 내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어린데, 참 불쌍하죠. 부모도 안 계시고 둘 뿐이라더군요. 물려받은 재산도 다 썼나 봐요. 사란야가 무용수로 일하지만, 많이 어려울 거예요.”

쯧쯧 혀를 차다가 자신의 말에 화들짝 놀라 말을 끊었다.


“에효, 아니에요. 여기 들어온 사람치고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하인은 편히 쉬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아랑누는 애원과 회한이 꿈틀대는 방문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사란야는 오후 공연을 마치고 답답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뒷문으로 나갔다. 좁은 골목이 어지러이 이어져 미로를 이루었지만, 고개를 들면 회한의 성벽이 올려다보였다.

계절은 다봄이라 노란 꽃들이 갈말산의 경사로를 가득 채웠다.


식당 겸 극장 예다움은 갈말산 초입에 있어서 회한의 성벽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자주 찾았다.

그녀는 극장 뒷문에 서서 갈말산을 올려다보는 것이 좋았다. 산은 여덟 개의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엄마, 아빠. 걱정 마세요. 새얼은 제가 잘 돌볼게요.’

영혼을 기다리지는 않지만, 회한의 성벽을 보면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별똥별처럼 지나가는 짧은 기도라도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사란야! 부단장님이 찾으신다!”

동료가 뒷문을 열더니 소리쳤다.


사란야는 머리 위로 팔을 쭉 뻗어 어깨를 몇 번 돌리고 문으로 돌아섰다.


순간, 담 너머 좁고 어두운 골목에서 시커먼 것이 움직였다. 음습하고 기분 나빴다.

‘들개가 다니나?’


검은 덩어리가 꾸물거리더니 연기가 되어 솟아올랐다. 검은 연기는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연기가 걷히자 골목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뭔가 보았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응? 내가 잘못 봤나?’

사란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뒷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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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천계_율명의 각성 22.07.11 50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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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아랑누_축제 구경 22.07.09 49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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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아랑누_대결 준비 22.07.07 51 1 11쪽
109 아랑누_지하 미로 22.07.07 48 1 12쪽
108 아랑누_또 하나의 반월도 22.07.06 49 1 11쪽
107 아랑누_신령수 동명 22.07.06 47 1 11쪽
106 아랑누_천인 무아 22.07.05 46 1 12쪽
105 아랑누_무용수 사란야 22.07.05 47 1 12쪽
104 아랑누_책방 고연재 22.07.04 48 1 11쪽
103 아랑누_회한의 성벽 22.07.04 47 1 11쪽
» 아랑누_여관 산연곡 22.07.03 45 1 10쪽
101 아랑누_상재믈국 감항 22.07.03 44 1 12쪽
100 천계_암흑성단의 비밀 22.07.02 47 1 11쪽
99 천계_아유라_발견 22.07.02 50 1 9쪽
98 천계_아유라_깨달음 22.07.01 47 1 11쪽
97 천계_아유라_선택 22.07.01 45 1 10쪽
96 천계_아유라_다른 차원 22.06.30 44 1 13쪽
95 천계_아유라_회귀 22.06.30 43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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