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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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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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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4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작성
22.07.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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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아랑누_회한의 성벽

DUMMY

도조는 방안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아랑누를 재촉했다. 아침 식사를 끝내기도 전이었다.


“빨리 나가자니까요. 아랑누님, 감항의 겹보름 축제가 얼마나 유명한대요. 아주아주 화려하고 풍성하다고요. 인간세는 정말 재미있는 것도 많아요. 까악까악.”

검은 날개깃이 햇살을 받아 반질거렸다.


온설지도 거울 앞을 떠나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어 하나로 묶었다.


여전히 이불 속에서 나오지 못한 사람은 아랑누와 이연이었다.

아랑누는 계속 하품을 하며 벽에 기대앉았고, 이연은 구석에서 이불을 둘둘 말고 초록색 머리카락만 빠끔히 내놓았다.


“나도 열심히 돌아봐야지. 밤 풍경은 못 보니 낮에라도 실컷 봐둬야지. 안 그래?”

“온형, 여기 낮이든 밤이든 똑같은 사람도 있어.”


“아하하, 그런가? 난 나만 불쌍한 줄 알았지.”

온설지가 삐져나온 머리카락 한 올을 가지런히 올려붙였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역시 축제의 밤을 보고 싶었다. 밤 풍경은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공기조차 다르다던데. 별빛도, 등불도, 가라앉은 공기도 느끼지 못했다. 너른벌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던데, 대체 어떤 모습일까.


‘살아있는 동안 그런 날이 올까?’

온설지는 가슴이 먹먹해져 헛기침했다. 약한 마음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눈사람, 우리는 실컷 먹자. 맛있는 간식도 많을 거다.”

도조은 작은 부리로 끊임없이 조잘대느라 그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설령 시무룩한 얼굴을 보았다 해도 사람의 마음을 모르니 마찬가지였다.


온설지와 도조가 콧노래를 부르며 사이좋게 나간 뒤에도 아랑누는 햇살을 받으며 명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산들바람이 지나가고 불꽃이 생겨났다. 탁자 위 물잔에 담긴 물방울이 튀어 오르며 불을 삼켰다.


구석에 자리한 화분에서는 흙이 한 줌 떠오르더니 바닥을 싸르락거리며 쓸려 다녔다.


*


아랑누가 회한의 성벽에 도착했을 때, 노인과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터로 나갈 시간이었다.


갈말산성의 무너진 성벽이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성벽 둘레길과 반쯤 남은 탑을 보면 웅장했던 과거를 알 수 있었다. 상재믈의 어떤 성보다 높고 컸을 것이다.


조그만 소원 쪽지가 성벽 한쪽을 빼곡히 채웠다. 먼저 떠난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인사도 있고 건강과 안녕을 바라는 소망도 적혀있었다.


바닷바람이 들이치자 수많은 쪽지 중 세 개가 바람을 타고 회오리처럼 춤추며 아랑누에게 다가왔다. 말을 걸 듯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잠시 후 쪽지는 아랑누의 손바닥 위에 차분히 내려앉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춤추는 쪽지를 따라가다가 아랑누에게서 멈추었다. 눈가리개를 하고 흰 지팡이를 잡은 검은 옷의 여인은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바퀴 의자를 밀며 성벽을 돌던 하늬와 새얼도 그들을 따랐다.


아랑누는 쪽지 하나를 들고 누군가를 불렀다.

“가옴? 여기 가옴이란 분이 계신가요?”


중년의 여인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왔다. 하늬처럼 뜨개질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제가 가옴인데요. 그건 제가 붙인 쪽지예요.”

“남가가 천옥에 잘 도착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네요. 그리고···.”

아랑누는 여인에게 바짝 다가갔다.


귀에 닿을 듯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한판댁 일꾼보다는 자길만방 일꾼이 더 낫다고 하시네요.”

아랑누가 빙그레 웃었다.


여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쪽지를 받아들고 연거푸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랑누는 두 개의 쪽지마저 주인을 찾아주었다. 한 명은 눈물을 글썽이며, 다른 한 명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인사했다.


그들을 지켜보던 한 노인이 아랑누의 소매를 붙잡았다.

“우리 마누라는, 마누라는 안 왔나?”


하늬도 발돋움하며 소리쳤다.

“우리 엄마랑 아빠는요? 우리 엄마는 안 왔나요?”


“예, 아쉽게도 제게 찾아온 혼은 세 위가 전부입니다.”

“저기, 내일은 오실까요?”


아랑누가 하늬에게 영안을 맞추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밝고 힘찬 기운이 흘러나왔다. 마음에 상처가 많은 데도 그걸 잘 싸매고 있었다.


그녀의 영안이 하늬의 바로 옆, 바퀴 의자에 앉은 소년에게로 향했다.

‘저 기운은···.’


산연곡 별찌방의 문을 가리던 기운과 똑같았다. 슬픔과 그리움이 깊이 자리 잡았는데 애써 감추려 했다.


아랑누가 두 아이에게 다가갔다.

“천옥에서 평안하시면 여기까지 나오기 어려울 거야. 영혼이 내려올 수는 없지만, 여기서 올리는 기도는 혼들의 씻김을 도와준단다. 그러니 열심히 기도하렴.”


사람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흩어졌지만. 하늬와 새얼은 떠나지 못했다. 새얼은 아랑누의 기운에 이끌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그 사람들, 진짜로 영혼이 찾아온 거예요?”

“응. 서로가 공명한 거지. 이름이 뭐니?”

“새얼이요.”


“새얼, 너도 기다리는 혼이 있니?”

“아빠와···.”

망설이던 새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다들 잘 계실 거예요. 하늬야, 그만 가자.”

“응. 오빠, 누리실로 갈까?”

“아니, 오늘은 고연재부터 가자.”

하늬는 아랑누에게 손을 흔들고는 돌아섰다.


이연은 고연재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몸이 굳었다.

새얼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아랑누가 고개를 돌렸을 때 이연은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연아, 왜 그래?”

“모르겠어요. 갑자기 놀랐나 봐요. 아, 제가 아니라 이 안의 넋이요.”


“우리도 따라가자.”

“예? 고연재에 간다잖아요?”

“옆방에서 나오던 그 기운이야. 왜 그런 염원을 가졌는지 알아봐야지.”

“그래도 이건 아닌데요. 아우, 몸이 굳었어요.”


“네 안의 넋이 어려워한다면 지금이 기회야. 왜 그런지 알아야 고칠 수 있잖아?”

“그것도 그러네요. 얼른 가시죠. 누님.”

이연이 막대기처럼 어기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아랑누는 저 멀리 앞서가는 바퀴 의자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눈가리개를 한 여인이 능숙하게 걷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회한의 성벽에서 아내를 기다리던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영혼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실망했어도 금방 나을 거예요. 감항은 그런 곳이래요.”


이연은 자신의 넋이 알려주는 대로 말을 옮겼다.

“소원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니까요. 여하튼 이루어질 때까지 믿는대요. 중요한 건 믿는다는 거죠. 사실이 아니라.”


아랑누도 누구의 말인지 알고 있었다. 비록 넋이 보이지는 않으나 감항과 인연이 깊은 넋임은 틀림없었다.


“여기 사람들은 작은 행운을 만나면 삼신성과 조상이 도와준 거라고 믿는대요. 언젠가는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믿는 거죠.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믿음이에요. 아무리 힘든 일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니까요.”


“연아, 네 안의 넋은 언제 여기 살았대?”

“저 성이 무너지기 전이라는데요.”

이연이 회한의 성벽을 가리켰다.


*


고연재 간판 앞에서 이연은 숙연해졌다.

간판도 그대로였다. 오래전 그 넋이 몸을 가졌을 때 써놓은 휘호 그대로였다. 한참 동안 간판을 바라보다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책방에 들어서는 순간 소년 이연의 혼이 잠들고 숨어있던 넋이 나왔다. 아랑누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온화하면서 강단 있는 성품이었다. 갈말산성이 무너지기 전이 아니라 까마득히 오래전부터 선도를 수련한 넋이었다.


아랑누는 기척도 내지 않고 그의 움직임을 영안으로 쫓았다.

이연은 그을음이 묻은 책에 손을 대고 바위처럼 멈춰섰다.


고연재의 주인 을단이 지팡이에 의지해 천천히 다가왔다.

축제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책방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처음 보는 손님이니 고연재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젊은이들이군. 책을 좋아하다니 반갑네.”

이연은 ‘유우대륙의 역사’라는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들어 책방을 둘러보았다.


“금서가 풀렸는데, 나와 있지 않네요.”

“어떤 금서를 말하나?”

“단미욱이 쓴 책이죠. ‘성황의 지혜’와 ‘인간세 표류기’.”


을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책은 없는데. 다른 책은 어떤가? 우리 책방에는 희귀본이 아주 많단다.”


이연이 을단을 향해 똑바로 돌아섰다.

“지하 두 번째 층 세 번째 갈림길에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아직 잘 있나요?”


을단의 얼굴이 흙빛으로 바뀌었다.

‘어, 어떻게···. 지하 미로를 저렇게 생생하게···. 대체 누구인데?’


손을 덜덜 떨며 뒷걸음치다가 자신의 지팡이에 걸려 넘어졌다. 낮은 서가 위에 쌓아놓은 책이 와르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안쪽에서 책을 찾던 하늬가 뛰어나왔다.

“할아버지!”

“괜찮다, 괜찮아. 어지러워서 그래.”


하늬는 을단을 부축해 응접실 의자에 앉히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제야 다른 손님이 가까이 있음을 깨달았다.


하늬는 그 손님이 아랑누임을 알아보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쪽지? 아까 그 쪽지 언니 맞죠!”

폴짝거리며 손뼉을 쳤다.


“오빠, 새얼 오빠! 빨리 와봐!”

바퀴 의자를 굴리며 새얼이 다가왔다. 새얼의 눈도 두 배로 커졌다.

“어? 회한의 성벽에서 본!”


하늬는 흥분해서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성벽에서의 일을 을단에게 이야기했다.

아랑누도 그 옆에 앉아 조금 과장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고연재에 들어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지만, 놀라운 인연인 듯 미소 지었다.


그동안 이연은 책방을 둘러보았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책을 대했다. 어릴 때 헤어진 가족과 재회하는 듯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늬와 새얼의 이야기를 들으며 을단은 입술이 떨렸다.

‘삼신성이 보내셨구나. 아내가 내 기도를 들어준 거야. 고연재를 지키게 도와주려는 거야.’


을단은 떨리는 다리를 쓰다듬으며 아랑누 앞에 엎드리려 몸을 숙였다. 아랑누가 그의 팔을 잡았다.

“괜찮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저는 모여사원의 귀령송환사 아랑누입니다.”


을단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손에 수많은 글자와 종이와 붓이 겹쳐 보였다. 마비가 시작된 손으로 울부짖으며 붓을 던지고 종이를 찢는 장면이 지나갔다.


그것은 고문에 의한 후유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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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천계_율명의 각성 22.07.11 49 1 8쪽
116 아랑누_배웅과 마중 22.07.10 47 1 10쪽
115 아랑누_새얼의 의지 22.07.10 50 1 10쪽
114 아랑누_축제 구경 22.07.09 49 1 9쪽
113 아랑누_보물 사냥꾼 22.07.09 48 1 10쪽
112 아랑누_새로운 인연 22.07.08 47 1 11쪽
111 아랑누_공격과 회복 22.07.08 52 1 10쪽
110 아랑누_대결 준비 22.07.07 51 1 11쪽
109 아랑누_지하 미로 22.07.07 47 1 12쪽
108 아랑누_또 하나의 반월도 22.07.06 49 1 11쪽
107 아랑누_신령수 동명 22.07.06 47 1 11쪽
106 아랑누_천인 무아 22.07.05 46 1 12쪽
105 아랑누_무용수 사란야 22.07.05 47 1 12쪽
104 아랑누_책방 고연재 22.07.04 48 1 11쪽
» 아랑누_회한의 성벽 22.07.04 46 1 11쪽
102 아랑누_여관 산연곡 22.07.03 44 1 10쪽
101 아랑누_상재믈국 감항 22.07.03 44 1 12쪽
100 천계_암흑성단의 비밀 22.07.02 46 1 11쪽
99 천계_아유라_발견 22.07.02 50 1 9쪽
98 천계_아유라_깨달음 22.07.01 47 1 11쪽
97 천계_아유라_선택 22.07.01 45 1 10쪽
96 천계_아유라_다른 차원 22.06.30 43 1 13쪽
95 천계_아유라_회귀 22.06.30 43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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