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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루 님의 서재입니다.

영웅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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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루
작품등록일 :
2011.10.21 16:16
최근연재일 :
2011.10.21 16:16
연재수 :
11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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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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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206,384

작성
10.03.2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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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55쪽

영웅담(英雄譚-이계편) 태제륙(太帝陸) 5-8

DUMMY

8.


국경에 자리한 호구평야를 지나다 만나는 양화산맥 줄기의 끝나는 곳.

좌우로 나무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마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날 만큼 넓은 길. 한 대의 마차와 두 필이 말이 자리한 길, 그 앞에 쓰러진 무장 난중을 보는 공승우의 눈에 일순 갈등이 인다.

도울 것인가, 말 것인가.

해서 공승우는 호약란을 바라봤다.

일단은 돕고자 하는 마음에서 말이다.

호약란은 공승우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흥!’ 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녀는 죽어가는 자를 돕든 말든 상관없었다.

단지, 공승우의 시선에 괜히 심장이 뛰어 싫었을 뿐이다.

남주상단에서 한차례 드잡이가 있고 나서 두근거림은 더욱 가속됐다.

그런 그녀의 변화를 공승우는 전혀 모르고 있지만.

호약란의 반응에 어깨를 으쓱한 공승우.

말에서 내려 쓰러진 난중에게 다가들 때, 마차 문이 열리며 한상준이 내려섰다.

“그자를 도울 생각인가?”

고개를 돌려 한상준을 한 번 바라봤다가 난중을 살피는 공승우.

- 예.

“그자가 누군지 아나?”

- 모릅니다.

“그자가 입은 군복은 사라국의 것일세.”

한상준은 현재 전쟁 중인 사라국과 상조국 간의 일이니 관여했다가는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기에 그리 말했다.

공승우가 다시 한상준을 바라보고는 답한다.

- 죽어가는 사람입니다. 살릴 수도 있고요.

“그자를 쫓는 자들이 있을 텐데?”

그건 공승우도 느껴서 안다.

- 마차에 태워야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헐헐.”

별 힘도 안 쓰며 난중을 번쩍 안아 들고 오면서 도와달라고 말하니 한상준은 별수 없이 마차 문에서 한발 비켜섰다.

“귀찮아질 걸세.”

씨익 낮게 긋는 한상준의 미소는 걱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앞으로 벌어질 흥미로운 일에 대한 기대라고나 할까.

아니나 다를까, 공승우가 난중을 마차에 눕히고 장여련에게 그를 돌봐 달라고 고개 숙여 부탁하고 나오니 20여 명의 군인들이 좌측 나무들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 빠르게 내달려왔다.

짙은 회색 갑옷을 걸친 그들.

다가든 선두에서 다시 앞으로 나서 입을 여는 군인의 갑옷 가슴엔 붉은색 코끼리 얼굴 옆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상조국 소속 이등장수. 력사의 신분 중 가장 아래라고는 하지만, 마황석이 담긴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자임은 분명하다.

그런 이등장수가 무장과 군사들을 이끌고 난중 같은 적 무장을 쫓는다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이곳으로 온 자를 보지 못했느냐?”

그다지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았음에도 상조국 이등장수는 공승우를 보자마자 강압적인 말투로 하대했다.

“…….”

공승우가 별말이 없자 이등장수 단충의 눈매가 사나워진다. 그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니 노인 하나와 마부, 마차, 어딘지 차갑게 느껴지는 여인뿐이다.

단충은 어딘지 조화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볍게 안심을 했다. 력사인 자신 이상의 실력을 지닌 자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말을 못 들은 것이냐?”

여차하면 무력을 쓰겠다는 듯 눈에 힘을 주는 단충의 모습.

그럼에도, 공승우 뿐만 아니라 노인도 여인도 마부도 아무런 대답이 없다.

노인, 한상준은 가는 미소를 그린 채, 마부로 인식된 용철은 불안하게 눈동자를 흔들고, 차가운 여인 호약란은 여전히 싸늘하게 있을 뿐이다.

‘이것들이!’

단충은 저들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되자 난중을 쫓으며 오른 열이 확 번져가는 바를 느꼈다.

호구평야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상조국 군장들, 한 것 고조된 그들은 일시적인 방심을 했고, 그 틈에 자신이 소속된 부대 상관 호장수 한 사람이 적 무장 난중이 기습적으로 쏜 화살을 울대에 맞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력사 중 상급에 속한 이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치욕스럽기까지 한 일이다.

당시 난중이 사용한 활은 력사급만이 쓸 수 있는 활로 모장궁(矛裝弓)이라 불리며 일반적인 활에 비해 날카로움이나, 대기를 가르는 속도는 물론 파공성마저 줄일 수 있는 특별한 활이었다. 다만, 무장급이 사용하기 어려우나 간혹 난중과 같이 력사의 등급을 받지 않았어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생기기는 했다. 그러한 사람들은 후에 성검사가 될 가능성을 지니지만, 실제로 성검사가 되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다.

하여간, 난중은 도주했고, 상조국 군단에서는 각 20명씩 두 개조가 난중을 추격했다. 그것이 한참 전이니 도주하는 난중은 물론 단충을 비롯한 상조국 무장과 군사들은 지치고 열이 오른 상태였다.

막 단충이 뭐라 말을 뱉어내려는 순간 한상준이 나직하나 뚜렷한 음성을 냈다.

“우린 남주상단의 식솔이오만.”

그러면서 슬쩍 눈짓으로 마차 한쪽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는 남주상단의 깃발을 가리킨다.

그에 단충이 한상준의 눈길을 따라 깃발을 확인하고는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찡그린다.

이번 전투에서의 승리에 남주상단주인 배염이 1황자 호만추에게 건넨 무엇이 큰 역할을 했다는 바를 장수인 그는 알기 때문이다.

단충의 말투가 조금은 바뀐다.

“미처 몰랐소. 허나, 내가 묻는 바엔 대답을 해주셔야 할 것이며. 그 마차 안도 살펴야겠소.”

존칭이기는 하나 반쪽짜리 그것도 공손함과는 거리가 먼 말투.

그에 한상준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공승우를 바라본다.

그의 행동에 이 무리의 결정권자가 공승우라 짐작한 그가 다시 공승우에게 입을 연다.

“그대가 행수인가?”

행수는 상행을 책임지는 대행수를 보좌하거나 이처럼 작은 규모의 상행을 책임지고 이끄는 자를 말한다.

공승우가 가만히 단충을 보다 심어를 건넨다.

- 나는 행수가 아닙니다.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음성에 깜짝 놀라는 단충.

“누구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무기를 꺼내 들고 주변을 훑는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검이며, 2급의 마황석이 함유되어 검의 강도 및 시전자의 내력 증폭에 유용한 전 대륙에 널리 분포된 강화검(强化劍)이다.

취잉.

단충이 손에든 강화검에서 낮게 울림이 전해지자 공승우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 당신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들려오는 음성에 단충이 뒤로 사락 물러나며 공승우를 노려본다.

“무슨 수작이냐?”

검 끝을 공승우의 면전으로 찍으며 소리치는 단충에게 공승우가 심어를 건넨다.

- 이곳으로 지난 사람은 없습니다.

머릿속으로 울리는 음성이 낯선 단충은 얼굴을 찡그리며 살기를 피워낸다.

“수작 부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그에 단충과 공승우를 싸늘하게 바라보던 호약란이 피식거리며 말한다.

“웅얼거리더니. 쯧.”

그 음성에 단충의 시선이 매섭게 호약란으로 향했다가 그녀가 마주 노려보자 인상을 한차례 찡그리고는 다시 공승우에게 돌려진다. 당장은 눈앞의 사내가 먼저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 단충에게 공승우가 어색한 표정을 그린다.

아직 이곳의 언어를 익히지 못해 말로써 대화가 안 되니 심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심어를 건네받은 상대는 일시적인 혼란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고.

공승우에게서 더 말이 없자, 왜인지 농락당하는 듯 느낀 단충이 눈에 힘을 주더니 외친다.

“마차를 뒤져라!”

그의 명령에 상조국 군사들 여섯이 일시에 마차로 다가들자, 한상준은 혀를 찼고, 공승우는 가볍게 고개를 젓더니 가볍게 발을 들어 올렸다.

호약란과의 겹친 기연으로 자신에게 생긴 능력.

소천공을 끌어 주변 자연지기를 응용하는 힘. 인간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자연의 힘이 공승우에게 스며들었다가 다시 그 권능을 드러낸다.

들린 발로 바닥을 차는 공승우.

둥. -우우웅.

공승우의 발바닥 아래에서 시작된 울림이 물결처럼 일더니 앞으로 번져나가 마차를 향해 달려들던 상조국 군사들을 휩쓸기 시작한다.

“억!”

“으앗!”

파도처럼 밀려든 경력에 그들의 몸이 출렁이며 달려든 속도보다 빠르게 뒤로 퉁기듯 날아가 바닥에 철퍼덕 뒹굴고 만다. 그들은 큰 충격 때문인지 단번에 의식을 잃고 말았다.

“!”

단충의 눈이 커진다.

처음 살폈을 때는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었다. 분명히.

그런 자가 단 한 번 발을 굴러 군사들 여섯을 모두 날려 버리다니.

주의 깊게 그러나 빠르게 공승우를 살피는 단충.

하지만, 언제 군사들을 날려 버렸느냐는 듯 기척을 느낄 수가 없다.

그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다고 느낄 뿐.

‘고요함!’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 성검사, 그것도 특급의 성검사들 중 저처럼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 것이다.

‘안 좋다!’

문득 단충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다.

그러는 사이 단충의 뒤에서 무장들과 나머지 군사들이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분개해 한꺼번에 무기를 고쳐 잡고는 공승우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단충은 그들을 막고자 들었던 손을 슬며시 내리는 대신 강화검을 잡은 손에 힘을 꾹 쥐었다.

츠링!

단충의 검에서 낮은 울림이 울기 시작할 때.

공승우는 늘 등에 메고 다니던 길쭉한 검은 천에서 용철이 막대기라 부르는 것을 꺼내 들었다.

백두산에서 회수한 신궁. 이곳의 단위인 1단(段)의 3분의 1정도의 크기, 약 40센티미터 정도의 길이에 활시위가 없는 궁(弓).

왼손으로 신궁의 중간 어림을 잡고 오른손 손가락으로 마치 시위를 당기듯 손짓을 하니 신궁의 양쪽에서 공승우의 손가락 사이로 하얗고 밝은 줄이 생겨났다.

스우우.

아지랑이 피듯 줄에선 기가 넘실거렸고, 신궁에서 마름모 모양으로 하얀 줄기가 팽팽하게 당겨지고는 그 하얀 아지랑이 줄 위에 그보다 굵은 줄기의 대롱들이 푸르르 생겨났다.

기로써 응집된 화살이 만들어진 것이다.

두웅.

당겼던 시위를 놓자 신궁에 어렸던 기의 화살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상조국 군사와 무장들에게 일시에 쏘아져 나갔다.

퍼버버버벅.

그들의 가슴과 어깨 등에 부딪히며 사르락 사라지는 기의 화살들. 하지만, 그 전해진 충격만큼은 적지 않았다.

“크아!”

“컥!”

무장과 군사들은 각각 비명과 신음을 흘리며 뒤로 벌러덩 넘어가더니 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바로 그때.

갑자기 공승우의 머리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단충이 두 손으로 잡은 강화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수하들이 공승우를 향해 달려들 즈음 그는 수하들의 사각을 통해 공승우에게 접근해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공승우가 특급의 성검사라는 생각에 력사급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수는 기습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차아압!”

크게 기합을 지른 단충이 사력을 다해 내리긋는 강화검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일렁인다. 강화검에 함유된 마황석이 단충의 내기를 한껏 빨아들여 증폭시키며 나는 현상이다.

공승우의 시선이 단충과 푸른 예기를 뿜는 검으로 향한다.

쩡!

“크으!”

무언가 꽉 막힌 곳을 후려친 소리가 들리고는 단충의 짧은 신음이 흐른다.

단충의 시선에 자신의 검이 공승우가 들어 올린 신궁에 부딪혀 막혀 있는 것이 보인다.

울컥.

목구멍을 타고 무언가 비릿한 것이 넘어오려는 것을 억지로 삼키며 검에 빗댄 공승우의 신궁을 밀면서 몸을 뒤로 빼내는 단충.

착 하고 바닥에 내려선 직후 푸악 하니 검은 피를 뱉고 만다.

자신이 질러낸 힘에 상대의 반탄력까지 더해져 내부를 진탕 시켰으니 충격이 상당할 것이다.

“너, 너는 누구냐?”

쥐어짜듯 이 한마디 물음을 던진 단충, 그에게 어느새 다가든 공승우가 주먹을 뻗어 단충의 배에 꽂아 넣는다.

퍽.

“커억.”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는 단충에게 공승우의 심어가 건네진다.

- 우리는 당신들과 충돌하고픈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단충이 흐려지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공승우가 심어를 잇는다.

- 당신들이 찾던 사람은 이곳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사정이 있어 마차 안을 보여 드릴 수가 없으니, 이점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털썩. 단충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런 단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공승우가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마부석의 용철에게 심어를 건넨다.

- 가시죠.

그에 용철은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로 쓰러진 단충과 상조국 군사들을 보더니 다시 공승우를 바라본다.

“저것들 상조국 새끼들이라면서, 괜찮을까?”

그에 공승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공승우를 바라보던 호약란은 팽 고개를 돌리고는 먼저 말을 몰아 나아간다. 그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한 용철이 가볍게 말 등을 후려 마차를 몰기 시작한다.

“이랴.”

백도 출신인 용철은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곳 골치 아픈 생각은 후딱 떨쳐버린다는 것.

마차가 나아가고 한상준은 용철의 옆자리로 이동한다. 그 곁으로 말에 오른 공승우가 다가들자 한상준이 초롱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본다. 마치 재미난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의 눈동자를 하고선.

한상준의 시선이 불편한 공승우가 그에게 묻는다.

- 왜 그러십니까?

그러자 한상준이 얼른 말을 잇는다.

“자네 나와 같이 가지 않겠나?”

- 지금도 같이 가는 것 아닌가요?

“아, 아. 그런 뜻이 아니고…….”

뭐라 더 말하려던 한상준이 잠시 멈칫하더니.

“아, 그렇지. 헐헐.”

결국, 웃음으로 얼렁뚱땅 넘기고 만다.

왜인지 지금 자신의 목적을 말하면 공승우의 입에서 ‘싫습니다.’라는 단호한 말이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다시 검은 보자기 안으로 들어가 공승우의 등에 매달린 신궁을 가리키며 묻는다.

“그건 뭔가?”

공승우가 힐끗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가 답한다.

- 활입니다.

“호오! 특급 마황석이 묻어난 병기 중에 그런 것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적이 없는데?”

- 이 활에는 마황석이 묻어 있지 않습니다. 제가 온 곳에서 함께 온 친구일 뿐입니다.

“친구?”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공승우.

신궁은 특별한 힘을 지닌 것은 둘째 치고 공승우게 이곳 태제륙에서 유일하게 고향을 볼 수 있는 물건이다.

“친구라. 그럼 이름이 있겠군?”

- 이름…….

아직 신궁에 별다른 호칭을 달진 않았다.

그에 한상준이 말한다.

“아직 없나 보구먼. 그렇다면 내가 하나 지어 줄까?”

공승우가 가만히 자신을 보자 헐헐 웃은 한상준이 말을 잇는다.

“궁제(弓帝)가 어떤가?”

- 궁제?!

“그래. 궁제. 작지만 보아하니 다른 어떤 활과 겨뤄도 지지 않을 듯하니 말이야.”

그에 공승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궁제(弓帝). 활의 임금.

이름이 맘에 든 공승우가 가만히 미소 짓는다.

고대에서 전해진 신궁이 이름을 얻은 날이다.


공승우 일행이 사라지고 단충 등이 쓰러진 곳의 뒤쪽에서부터 여섯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낸다. 다섯의 사내와 한 사람의 여인.

청룡의 명을 따라 설빙궁의 생존자로 추정되는 호약란의 뒤를 쫓아 움직인 휘산영과 그녀의 호위들이다.

호위들은 주변에 널브러진 군사들을 살피고는 휘산영에게 다가왔다.

“죽은 자는 없습니다.”

“흐음.”

휘산영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긴다.

이들 모두를 쓰러뜨린 자는 그동안의 정보에 없던 자다.

회암산에서 망독군들을 처리한 이가 호약란이라 여기며 호승심마저 들었던 휘산영. 이곳에서 다시 그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그 사내가 누군지 알아와.”

그녀의 귀엽고 앙증맞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명령에 호위 중 한 사내가 급히 모습을 감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내내 정보를 제공해준 물산국 정보조직인 지영군(智影軍)과 접촉하고자 움직인 것이다.

호위 한 명이 사라지고 나서 휘산영이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두 팔을 교차로 가슴으로 모으자 민소매에 가슴이 파인 옷을 통해 뽀얀 둔덕이 탱글하니 드러난다. 그렇게 휘산영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갸름한 턱을 쓰다듬는다.

“설빙궁의 후인에다 정체 모를 사내라.”

왜인지 묘한 흥분으로 가슴이 뛴다.

그녀가 묻는다.

“이 앞쪽으로는 뭐지?”

그녀의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남은 사내 중 하나가 즉시 대답한다.

“양화산맥 끝에 자리한 후순(逅巡)이라는 마을이 나옵니다.”

“거기서 저들의 앞을 막아.”

“명!”

휘산영의 나직한 명령에 네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앞으로 내달린다.

사내들이 사라지자 휘산영은 발밑에 쓰러진 군사를 툭 차보고는 이내 사라진다.




휘산영. 청룡(靑龍)의 후인.




공승우 일행은 부지런히 마차를 몰아 야트막한 둔덕 아래에 도착했다.

저 고개를 넘어 조금만 더 가면 후순이라 불리는 마을에 들어간다.

일행은 후순에 들러 여행에 필요한 물품 몇 가지를 보충하고 하루를 쉬었다가 다린(茶璘)이란 소도시를 지나 소정항(紹汀港)에 들어설 예정이다.

소정항은 해인도와 북해도를 잇는 배편이 존재하는 항구도시로 무역과 어업이 발달한 사라국의 대도시 중 하나이다.

그렇게 둔덕의 경사를 따라 마차를 모는데 둔덕이 아래로 꺾이는 길 위에 네 명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모습에 용철의 이마에 주름이 생긴다.

“니미럴. 또 뭐야?”

용철의 투덜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네 명의 사내들은 미끄러지듯 경사를 내려와 두 필의 말이 끄는 마차 앞을 가로막았다.

사내 중 하나가 나서서 입을 연다.

“주인께서 그대들을 뵙고자 청합니다.”

그에 용철이 대뜸 소리를 지른다.

“주인이건 지랄이건, 비켜라 씨바! 배고파 죽겠다.”

후순에 들어가야 밥을 먹는다. 그리고 용철은 얼마 전 공승우가 상조국 군사들을 처리한 바를 보았기에 그를 믿고 큰소리를 치는 것이다.

용철의 음성에 사내는 눈매에 진득한 살기를 담아 용철을 쳐다본다.

“힉!”

막상 나서기는 했지만, 사내는 용철이 감당할 수 없는 기세를 지녔다.

움찔하니 고삐를 놓쳐버린 용철.

말들 역시 사내가 뿜어낸 기세에 놀랐던지라 용철이 고삐를 놓치자 푸득거리며 발을 구른다.

이대로 두면 말들이 흥분해서 자칫 사고라도 날 수 있는 일.

용철의 옆에 앉은 한상준이 재빨리 고삐를 잡아채 말들을 진정시킨다.

그러는 사이 사내들의 뒤쪽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비켜.”

맑고 나직한 음성. 여인의 음성이다.

청룡 휘정의 딸이자 청령기의 후인인 휘산영이 어느새 사내들 뒤쪽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가 모습을 보이자 고삐를 잡아챈 한상준의 눈매가 살짝 커졌다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가 익히 아는 하나의 기운이 휘산영에게서 풍겼기 때문이지만, 그의 눈매가 변하는 것은 아무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할 만큼 짧았다.

사내들을 제치고 나선 휘산영의 시선은 마부석의 용철에게서 한상준에게로 옮겨지며 살짝 고개를 갸웃했고, 공승우에게 이어져서는 그가 민망함을 느낄 정도로 한참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어진 시선의 끝엔 호약란이 있었다.

호약란을 똑바로 바라보던 휘산영이 실룩 귀여운 미소를 그리고는 입을 연다.

“설빙궁.”

한 마디뿐이었지만, 호약란에게는 그 파장이 거셌다.

지금 북해도로 가려는 것 역시 자신의 설빙궁을 몰살시킨 흉수를 찾고자 함이다. 그런 그녀에게 설빙궁을 익히 아는 듯 말하는 상대가 나타났으니.

다만, 설빙궁과 관련된 자들은 호약란에게 있어서는 호의적인 자들이 못된다. 눈앞에서 죽어간 부친. 가족들과 빙궁의 식구들.

호약란의 눈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와 주변을 휘감는다.

직후, 순간적으로 말 등을 차고 뛰어오른 호약란의 손에서 설빙혈편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휘산영을 향해 쭈욱 뻗어진다.

일단 들어야 할 말이 있기에 단숨에 죽일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좋게 말로 시작할 마음 역시 없는 그녀이다.

호약란의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휘산영에게서는 다급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도 매서운 공세인지라 빠르게 허리춤에 달린 검집에서 검을 뽑아 쇄도하는 설빙혈편을 향해 뿌렸다.

촤앙!

눈부시게 푸른빛을 발하며 뽑아진 검. 청령기를 품은 청룡의 무공. 그 중의 청룡검파(靑龍劍波) 일직세(一直勢)가 풀어진다.

단숨에 뻗어나간 휘산영의 검은 휘어들어오는 채찍의 변화를 교묘히 후려쳐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직후, 호약란이 바닥에 내려선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썹은 한껏 치켜 올라가 사나움을 가득 담는다. 자신의 기습 공격을 상대가 쉽게 막아낸 것이 첫 번째요, 네 명의 사내들이 자신과 상대의 간극으로 들어서 버린 것이 두 번째다.

사내들은 자신들의 주인인 휘산영을 공격한 호약란에게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다. 휘산영이 ‘쳐.’ 라고 말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달려들 기세이다.

하지만, 휘산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이 기다린 말이 아니었다.

“비키라고 했지.”

휘산영의 나직하나 싸늘한 음성에 사내들이 급히 뒤로 물러선다.

사내들이 지닌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휘산영은 그들의 주인이며, 그들 모두가 달려들어도 어찔할 수 없는 강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호약란과 대치하듯 선 휘산영이 입을 연다.

“역시, 매서운 공격이야.”

그에 설빙혈편을 쥔 호약란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녀는 일단 휘산영을 바닥에 눕혀놓고서 묻고픈 것을 물을 생각이다.

그래서일까, 짐짓 과장된 표정을 그리며 휘산영이 말을 잇는다.

“이거 너무 하는데. 내가 말한 것은 단지 설빙궁뿐이야.”

호약란이 서서히 공격 자세를 취한다.

휘산영 역시 자신의 검. 비연검(飛燕劍)을 쥔 손에 힘을 주면서 입을 연다.

“보아하니 북해도를 찾아가는 모양인데, 그들의 몰락에 대해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그러자 호약란이 답한다.

“입만 열 수 있으면 되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재차 질러 드는 호약란을 보며 휘산영이 살풋 질린다는 표정을 그린다.

“호옷!”

그리고는 일반적인 검보다 가는 검폭을 지니고 푸른빛을 발하는 비연검을 횡으로 그었다가 이어 일 검에 세 줄기의 공세를 뿜어낸다.

그에 호약란은 일시 몸을 멈칫하며 횡으로 그어진 비연검을 흘리고는 머리와 양쪽 어깨 위로 쏟아지는 세 줄기의 검풍을 향해 빙천막(氷天幕)을 풀어낸다.

시리도록 하얀 기운이 호약란의 설빙혈편에 어리며 파고드는 휘산영의 비연검과 충돌한다.

츠파바바방!

검의 기운과 채찍에서 뿜어진 차가운 얼음의 기운이 대기 중에 부딪혀 주변으로 쪼개진다.

그에 한 상준이 ‘이크!’ 하는 소리를 내며 후다닥 마차 뒤로 몸을 날리고, 경악에 두 눈을 뜬 채 굳어버린 용철의 앞으로 공승우가 움직여 하얀 강기막을 만들어 쪼개져 날아든 기운을 차단한다.

한 번의 충돌이 있고 나서, 호약란과 휘산영은 더욱 거칠고 사납게 부딪혀 들기 시작한다.

그녀들에게 주변의 상황은 아직 눈에 들어차지 않는다.

오직 상대만이 보일 뿐.

공승우는 용철과 함께 서둘러 마차를 그녀들의 격돌 범위에서 물러나게 한 후, 마차 앞에 내려서 두 여인의 격돌에 시선을 돌렸다.

호약란의 설빙혈편과 휘산영의 비연검은 충돌하고 휘돌며 서로의 몸에 파고들고자 대기를 가르고 압력을 발산해 낸다.

피슉.

파밧.

짧은소리가 흐르며 호약란의 어깨에서 핏물이 튀고. 휘산영의 손목 어림에서 붉은 혈선이 그려진다.

그럼에도, 두 여인의 싸움은 더욱 거세지기만 하니.

그때, 공승우의 귓가로 한상준의 음성이 들려온다.

“두고 보고만 있을 텐가?”

그에 공승우가 난감한 얼굴을 한다.

- 그렇지만…….

지금의 공승우는 호약란에게 무조건 약하다.

그녀가 화를 내고 짜증을 내도 묵묵히 들을 생각이지만, 굳이 그런 꺼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휘산영을 상대하는 호약란의 눈가엔 집요함과 분노가 어려 있다.

공승우는 호약란 어디로 향해 가는 것인지 아직 모른다.

그녀가 말을 해주지 않는 이상.

그런 그녀가 설빙궁이란 말을 듣고 나서 예전 마녀라 불릴 때의 기운을 뿜어냈다.

아마도, 설빙궁은 그녀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리라.

공승우가 두 여인의 싸움이 격해져 핏물을 보이고 있음에도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그러는 사이 두 여인에게 또 핏물이 비친다.

옆구리와 허벅지.

상호 얼굴로 파고드는 공격을 우선 막아내는 탓에 보인 빈틈으로 파고든 공격의 흔적이다.

다시 한상준의 음성이 들려온다.

“쯧. 저러다 예쁜 얼굴들 다 망치게 생겼네.”

지나치듯 흘린 말이지만, 공승우의 결심을 세우기엔 충분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살다가 겨우 벗어던진 호약란이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상처가 남는다면.

‘그녀의 화풀이를 듣는 것이!’

마음을 잡은 공승우가 소천공을 풀어냈다.

대기가 동조하고 그의 몸에 기운이 어린다.

상황을 주시하던 또 다른 이들. 휘산영의 호위 사내 넷이 공승우의 변화를 눈치채고 급히 그에게로 공격해 들려 한다.

하지만, 그들 네 명은 눈앞의 풍경이 갑자기 일그러지자 화들짝 놀라 한발 물러서고 만다. 공승우가 그들 시선 앞의 대기만 뭉개 혼란을 일으키게 한 탓이다.

그 사이 공승우는 설빙혈편과 비연검이 대기를 마구 그어내는 공간 속으로 파고들었다.

절정의 무력을 지닌 두 여인 사이로 끼어든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공승우는 무리 없이 파고들었다.

자연의 힘을 느끼고, 그것을 몸에 담았다가 풀어낼 수 있는 공승우. 이전 소천공의 공능을 벗어나 새로운 능력을 담은 그의 눈은 두 여인 사이로 흐르는 기의 파장을 잡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승우의 그러한 움직임에 한상준 역시 가볍게 놀란다.

‘보면 볼수록 탐난다.’

그의 내심이 어떠하든 호약란과 휘산영 사이로 파고든 공승우는 양손에 기를 응집시켜 휘도는 설빙혈편의 끝과 찔러 드는 비연검의 중간을 잡아버렸다.

척. 텁 소리가 들리고.

우우우웅 하는 소리가 뒤를 잇는다.

나아가지 못하고 억눌린 기가 울어대는 소리에 자신들의 무기가 굳은 듯한 사내의 손에 잡혀 있자, 여인들의 눈에 놀람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예상대로 호약란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온다.

“저리 안 비켜! 죽고 싶어!”

반면 휘산영은.

‘어떻게?’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공승우를 바라본다.

자신이 누구인가. 팔룡선무회 청룡의 후인이다.

이곳 태제륙에서 가장 강한 여덟의 용.

각국의 성검사들이 존재한다 해도, 그들 열이 달려든다 해도 거뜬히 막아낼 수 있다고 자신했던 그녀이다.

“빠득!”

휘산영의 놀람이 이빨 가는 소리로 바뀐다.

호약란이 생각 밖으로 강해 쉽게 제압하지 못해서 은근히 부어 있던 울화가 한 사내의 손아귀에 자신의 검이 잡혀들자 확 폭발하는 순간이다.

“으아악! 이것들이 정말!”

버럭 소리친 휘산영이 검을 놓아버리고 공승우를 향해 득달같이 주먹을 질러 넣는다.

“헛!”

기함을 토해낸 공승우.

퍼걱!

휘산영의 검을 쥐느라 비었던 옆구리에 깊숙이 파고든 그녀의 주먹에서 울려지는 충격이 공승우의 내부를 휘저어 그의 두 눈을 치뜨게 한다.

그런 공승우의 안면에 발등 하나가 쐐액 하니 다가든다.

퍼억!

“으왓!”

강하게 얼굴을 걷어차인 공승우의 몸이 바닥에서 붕 떠올라 저만치 날아가 뒹군다. 그런 공승우의 양손 하나씩에 검과 채찍이 들려 있다.

중간에 막아섰던 공승우가 날아가자, 다시 대치한 호약란과 휘산영.

그녀들의 시선이 저만치에서 푸들거리는 공승우에게서 돌아와 서로 마주 본다.

노려보는 시선.

그러더니.

“풋.”

먼저 실소를 흘리는 휘산영.

자신의 주먹에 실린 힘과 호약란의 힘이 실린 발등에 차이고도 사내는 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사내가 지금 보이는 모습도 엄살 피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긴 휘산영은 이 상황이 왠지 우스웠다.

“그만하죠.”

휘산영이 말한다. 말투도 바뀌어 있다.

하지만, 호약란의 눈에는 여전히 살기가 그득하다.

그녀는 휘산영처럼 간단간단하게 했다가 그만 두기를 할 심정이 아니다.

꽈득 쥐어지는 호약란의 주먹을 보며 휘산영이 여전히 쓰러져 부들거리는 공승우를 쳐다본다.

자신에게서 시선을 거두자 울컥한 마음이 들은 호약란. 하지만, 그녀의 시선 끝에 공승우가 있음을 알기에 호약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공승우를 쳐다봤다. 그 시선 속에 자신의 어깨에서 흐르는 핏물도 보인다.

그는 자신이 상처 입자 끼어들었을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살벌한 틈으로 파고들어 양쪽의 무기를 잡아챘다. 그리고는 고스란히 얻어맞고는 저 멀리 날아갔다.

호약란이 아는 그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뭉클.

자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헛!’

놀라 고개를 강하게 저어 부정하는 호약란.

‘그럴 리가 없잖아…….’

생각이 그리 이어지자 눈앞의 상대를 반드시 눕히고는 묻겠다는 의지가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다시 시선을 돌리니 상대 여인, 휘산영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본다.

휘산영 역시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고 있다. 그다지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그녀가 말한다.

“뭐, 순서는 바뀌었지만, 인사하죠. 나는 휘산영이라 합니다. 물산국에서 왔어요. 물산국 모관께서는 설빙궁의 멸문에 관련된 사항을 조사했지요.”

호약란의 바짝 독 오른 음성이 이어진다.

“왜 너희가 그 점을 조사했다는 거지?”

어깨를 한번 으쓱한 휘산영이 답한다.

“모관의 뜻이었으니 자세한 바는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조사하던 중 당신이 설빙궁의 유일한 생존자 일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오늘 이렇게 접촉을 시도한 것입니다. 어때요? 우리와 함께 물산국으로 가시겠어요?”

호약란의 크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린다.

누가 설빙궁에 혈사를 일으킨 것인가는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복수!

그 하나만으로 힘들고 어려운 삶을 버텨왔고, 세인들의 외면과 손가락질도 견뎌왔다.

그 복수의 대상을 물산국에 가면, 들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의 마음에 파랑이 인다.

한편, 옆에서 가만히 듣던 한상준의 눈빛도 깊어진다.

‘역시 그들 중 누군가가 설빙궁, 아니 빙괴를 가져갔겠군. 물산국 모관이라면 휘정이로군. 그가 조사를 한다라. 어느새 그들 사이의 골도 깊어진 것인가……. 가만, 저 꼬맹이가 휘산영이라고 했지. 그의 딸이겠군. 후후. 그 조그맣던 아이가 어느새 저만큼 자랐구먼. 헐헐.’

한상준이 휘산영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그녀는 호약란에게 자신과 함께 갈 것을 말하고 있었다.


공승우 일행은 후순에 들어섰다.

휘산영은 여전히 답하지 않는 호약란에게 시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후순에 들러 식사라도 함께하자는 제안을 했고, 용철과 용소, 용하의 열렬한 호응을 업고 이렇게 후순의 한 식당에 들어온 것이다.

마차에 태웠던 사라국 무사 난중은 후순에 들어서면서 바로 의관에 치료를 맡긴 터라 이곳에 함께 오지는 않았다. 대신 휘산영의 수하 한 명이 그를 사라국 군부로 인계하도록 조치를 내리고 말이다.

그렇게 공승우와 호약란, 한상준, 용철, 용소, 용하, 장여련 그리고 휘산영과 넷의 사내. 들어선 이들이 11명이나 되니 제법 넓은 식당임에도 일시적으로 꽉 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후순 역시 사라국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길목 중 하나인지라 사람들의 왕래는 제법 잦은 편이다. 그런 곳이다 보니 후순의 중심가엔 식당과 숙관(宿館)의 수가 일반 가정의 수보다 많았다.

그리고 지금 들어선 이곳은 후순에서도 제법 객이 많이 찾아드는 담우손가(湛牛孫家)라는 이름을 지닌 식당이다. 하지만, 이름처럼 소고기를 즐기는 손씨네 집이라고 불리지 않고, 그저 소고기 집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점원은 일행을 한 곳으로 안내하고 자리에 앉자 능숙하게 주문을 받고 나서 물러갔다.

점원이 사라지자 휘산영은 일행을 둘러보며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곳 고기가 맛있어요.”

자신 있게 말한다.

지영군에게 공승우에 대한 정보를 받아오라고 보낸 수하에게서 그에 대한 것은 전혀 얻지 못했고, 대신 이곳 소고기가 맛있다는 엉뚱한 정보만을 받은 셈이지만, 이용함에 주저하지 않는 휘산영이다.

그녀의 말에 용철은 벌써 입에서 침이 고여 나와 연방 쓰읍 손으로 닦느라 바빴다. 그에겐 특히 소고기는 쉽사리 먹을 수 없는 고기다.

백도 신분의 용철에게 고기는 사냥을 통해 얻은 것이 전부였다. 물론 그것 나름대로 맛을 느낄 수 있는 고기 요리가 되겠지만, 이처럼 식당에서 근사하게 다듬어진 고기 요리는 처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구울 불판이 준비되고 곁들여 먹는 야채와 양념들이 나오면서 커다란 접시 여러 개에 들려 함께 날아 온 고기가 식탁에 내려앉자 용철의 손길이 바빠진다.

그의 손길은 능숙하고도 빨랐다. 물론 입 역시.

익자마자 게걸스럽게 먹는 용철을 바라보며 쌜쭉하니 웃은 휘산영이 호약란을 힐끗 보아 살폈다가 시선을 공승우에게로 돌린다.

‘흠.’

제법 잘생겼지만, 절세의 미남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를 향한 호감은 무럭무럭 커가기만 한다.

지영군에서도 파악하지 못하는 사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다는 수하의 보고를 듣고는 피식 웃어버린 휘산영. 기실 그 표현이 정답이었지만, 그녀는 진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상조국의 군병들을 쉽게 처리할 정도의 뛰어난 무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겉모습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게다가 과묵한 것인지 자신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그 점이 더 이채롭다.

그가 고기 한 점을 들고 입에 넣어 우물거리는 것을 보면서 휘산영이 묻는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나요?”

그에 공승우가 가만히 휘산영을 쳐다본다.

깊고 맑은 눈동자.

두근.

휘산영은 그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묘하게 울리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낯설게 여기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아니면, 말을 못하는 것인가요?”

언제나 그렇다.

이곳의 언어를 빨리 익혀야겠다는 내심에 고소를 짓는 공승우.

그 모습이 또한 묘하다.

물산국에서 휘산영은 유명인이다.

파릇하고 귀여우면서도 무력이 강한, 물산국의 대표 성검사.

그런 그녀를 향한 사내들의 접근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자신이 한껏 귀엽게 말했건만, 어딘지 못마땅하다는 웃음을 그린다.

살짝 눈썹을 꿈틀거린 휘산영이 말을 잇는다.

“솔직히 나는 그쪽에 관심이 많아요.”

그녀의 성격이다. 직선적이고, 개방적인데다가 어느 정도의 단순함을 곁들인.

휘산영의 말에 공승우의 눈동자가 조금 커진다.

그리고 그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생각에 잠겼던 호약란의 눈동자도 커진다.

호약란은 이대로 북해도를 향한 여행을 계속하느냐, 물산국으로 방향을 돌리느냐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휘산영이 방금 한 말을 듣고는 왜인지 불끈하는 심정이 울컥 솟았다.

‘그저 설빙궁이란 한 마디 뿐이었지.’

휘산영이 자신에게 한 말은 설빙궁에 대한 말과 물산국에서 설빙궁의 몰락을 조사하고 있다는 말뿐이었다.

그 외의 자세한 바를 털어놓은 것도 아니다.

그런 그녀의 짧은 말만을 믿고 방향을 돌린다는 것도 우습다.

게다가 복수를 누구의 힘을 빌려 할 마음이 추호도 없다.

그 복수의 대상을 찾아내는 것 역시.

단지, 좀 더 빨리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갈등이 일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방금 휘산영의 한 마디가 자리를 잡아 주었다.

호약란의 입이 열린다.

“휘산영이라고 했지.”

그러자 공승우를 바라보던 휘산영의 시선이 호약란에게 돌려진다.

“그래요.”

“나는 북해도로 갈 것이다.”

그에 휘산영이 어깨를 한 번 추어 보인다. 예상했다는 듯.

“어머, 그것 참. 아쉽네요. 좀 더 쉽게 갈 수도 있는데.”

“너를 어떻게 믿고.”

“뭐, 안 믿어도 내겐 손해가 없어요. 그쪽만 멀리 돌아갈 뿐이지.”

“흥!”

냉랭하게 코웃음을 친 호약란이 공승우를 째려보고는 다시 입을 연다.

“그놈은 머릿속으로 웅얼거리는 바보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식당을 벗어나고자 움직인다.

그런 그녀에게 심어를 건네는 공승우.

- 식사는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웅얼거리지 마!”

라는 호약란의 뾰족한 대답만을 받는다.

머쓱해진 공승우.

휘산영은 방금 호약란과 공승우 간에 어떤 식으로 대화가 오고 갔다는 바를 눈치를 챘다.

그녀에게는 호약란을 물산국으로 데려가야 하는 임무가 있다. 다만, 그 기한은 특별히 정해지지 않았다. 바르면 좋겠지만.

일단, 호약란이 설빙궁의 후인이라는 바를 그녀의 반응으로 알았으니 하나는 된 것이다.

휘산영이 공승우에게 묻는다.

“어떤 식이죠?”

무엇을 묻는지 안다.

공승우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휘산영에게도 심어를 건넨다.

- 심어라는 겁니다.

“호오!”

- 이곳의 언어는 아직…….

“이곳의 언어라면…… 어디 다른 데서 왔다는 말인가요?”

호약란의 물음에 공승우는 잠시 고민했다.

왜인지 한상준에게처럼 바로 얘기하기가 조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런 공승우를 보던 휘산영이 입술을 삐죽이고는 말한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어디 출신이라는 건 지금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웅얼거리는 것은 상당히 불편하겠네요?”

- 뭐…….

불편하다. 호약란의 핀잔도 그만 듣고 싶고.

“좋아요. 그럼 내가 가르쳐주지요.”

- 예?

“말이요. 내가 가르쳐 준다고요.”

- 하지만, 말이라는 것이 그렇게 금방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임무가 설빙궁의 생존자를 확보해 물산국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말했지요.”

끄덕.

“그런데 생존자인 그녀가 북해도로 간다고 하니. 뭐, 귀찮기는 하지만 나도 그녀를 따라가야 하지 않겠어요?”

- 굳이…….

“그래서 가는 동안 내게 배우라는 말이죠. 뭐, 나중에 고맙다고 술 한 잔 낸다면 사양치 않을 생각이고요.”

하고 말하며 배시시 웃는다.

같이 간다고 말한 이는 아무도 없건만, 기정사실처럼 못을 박아버리는 휘산영을 보며 공승우는 다소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아직은 호약란에게는 초대받지 못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다.

그런 공승우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휘산영이 말을 잇는다.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동행한다는 것은 그녀에게도 그리 나쁘지 않을 테니까. 이것저것 정보가 있거든요. 내겐.”


다음 날.

결국, 휘산영은 수하들을 모두 물리고 공승우의 일행에 합류하였다. 물론, 그녀의 수하들은 일정거리 떨어진 곳에서 따라오기는 하겠지만.

호약란은 그녀의 동행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공승우를 향해 그것 보라며 웃는 휘산영 그녀를 매섭게 노려본 것으로 대신하고 말이다.

그날부터 휘산영은 공승우에게 태제륙의 언어를 가르쳤다.

용소에게서 배웠던 니이미라든지 씨바, 씨부랄이 아닌 제대로 된 언어를 배우게 된 것이다.

공승우의 언어 습득은 상당히 빨랐다.

절실함도 이유겠지만, 그의 두뇌 역시 예전보다 월등히 발달했기 때문이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심어를 함께 운용하니 그 뜻이 빠르게 다가들었던 것이다.


일행은 그렇게 며칠을 이동해 다린(茶璘)이라 불리는 도시에 도착했다.

도시를 크게 둘러싼 옥빛의 일렁임.

태제륙 전반에 널리 유통되어 누구나 즐기는 보편적인 차. 옥차(玉茶).

도시 이름 자체를 다린이라 지을 만큼 이곳은 옥차를 생산하여 유통하고자 특성화된 곳이었다.

옥빛의 일렁임 속에는 꽤 많은 사람이 등을 굽혀 찻잎을 따내고 있었다. 가끔 허리를 펴서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내는 사람들의 얼굴은 다소 밝았다.

“좋구나.”

마차의 어자석에 용철과 함께 앉은 한상준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바람결에 흘러오는 차향에 미소를 그렸다.

고삐를 쥔 용철이 그런 한상준을 보며 중얼거린다.

“누가 탱이 아니랄까 봐.”

나직한 음성이나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감았던 눈을 떠 용철을 바라보는 한상준.

“자네는 참으로 재미나.”

용철이 쳇 하고는 투덜댄다.

“재미나긴 개뿔. 아. 씨바 배고프다.”

아침부터 움직여서 이곳에 도착한 시간이 점심때를 지났으니 용철의 심기는 아니, 그의 뱃속은 아우성 중이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하던 짜증이 줄기줄기 터져 나왔다.

용철의 인상이 구겨졌음을 보고 히죽 웃은 한상준은 다시 눈을 감고 수많은 옥차에서 한꺼번에 번져오는 향내를 맡으며 미소를 그렸다.

“좋구나.”

“아, 씨바.”


§


공승우 일행이 다린에 도착할 즈음 사라국 최남단의 성인 자공성(紫珙城)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서 대규모로 이동 중인 상조국의 군대 때문이다.

상조국과의 첫 전투에서 패한 사라국. 저하된 사기. 그에 비례해 끓어 오른 분노로 대부분이 말수가 줄었기에 그 긴장감은 더했다.

그런 속에서 1황자 강황은 자공성주 기요환과 함께 자공성 내성 중앙에 성주 집무실에서 한 인물을 만나고 있었다.

그 인물은 40대 초반의 사내로 강퍅한 인상에 붉은빛 머리카락을 지닌 자였다.

“그러니까 그대가, 아니 그대가 속한 조직이 우리를 돕겠다?”

강황의 말투는 상당한 불쾌감이 섞여 있었다.

“그렇습니다.”

담담히 말하는 사내. 자신을 황철영이라 밝힌 그는 시종 여유를 보였다.

다시 인상을 찡그리는 강황.

비록 상조국에 패해 이곳까지 물러났지만, 자신은 사라국의 1황자이다.

그런 자신을 대해는 상대의 태도는 맘에 들지 않았다.

“사라국이 우습게 보이나?”

사내 황철영이 나직이 미소를 그리고 답한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말은 아니라고 하나 그의 눈빛은 그렇다고 하는 것만 같다.

강황의 말투에 노기가 물든다.

“사라국은 너희 같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

말과 동시에 손을 휘젓는 강황.

그의 태도는 분명한 축객령이건만 황철영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연다.

“상조국에서 이번에 승기를 잡은 것이 온전히 그들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은근히 부아를 건드는 말이다.

강황이 말을 받는다.

“그래서?”

“아직 모든 것을 밝혀낸 것은 아니지만, 상조국은 분명히 다른 곳의 도움을 받았을 겁니다. 상조국 황자인 호만추가 입은 갑주가 그 예이지요. 아, 그들의 환요병도 그와 유사한 갑주를 걸쳤었지요.”

“…….”

강황이 모르는 내용이다.

호만추의 능력이 월등해졌다고만 생각했지, 갑주 따위로 그런 힘을 냈다고는 생각지 못한 강황이다.

“갑주라고?”

“예. 저희가 알아낸 바로는 호만추가 걸친 갑주는 분명히 초특급의 마황석이 녹아든 물건이지요. 그런 갑주를 보유할 수 있는 곳은 드물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상조국은 지금까지 그러한 물건이 없었고요.”

“비밀리에 만들 수도 있지 않나?”

“상조국엔 그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단언하듯 말하는 황철영을 보는 강황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어떻게 그리 단정할 수 있지?”

“하하. 그것까지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히 묻힐 사항도 아니지요. 후에 자연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물론, 상조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이겠지요.”

강황은 사내 황철영를 보다 유심히 살폈다.

국가의 황자를 대함에 보이는 담대함은 그가 비범하지 않다는 바를 뜻하는 것이고, 강황 자신이 은근히 보낸 투기와 살기를 무리 없이 받아넘기는 것을 보니 그 지닌바 능력도 적지 않음이다.

또한, 그가 한 말에 크게 믿음이 가는 것도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강황이 묻는다.

“왜지?”

황철영은 강황이 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는 답한다.

“더 큰 대의를 위함이지요.”

“사라국이 상조국을 꺾고 그들이 가진 것을 취한다는 것이 그대들의 대의인가?”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희는 두 나라 간의 이권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저희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은 태제륙의 전반을 보고 있지요.”

강황이 헛웃음을 흘린다.

“허. 태제륙을 일통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황철영이 답한다.

“저희가 원한다면 그리되겠지요.”

“무엇이?!”

강황이 노기를 뿜어낸다.

황철영의 말에서 사라국을 아래로 본다고 여긴 것이다.

“아, 제 말에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희는 하나가 아닙니다. 게다가 일통이라는 것 역시 저희의 목적이 아닙니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태제륙의 재구성 정도라고나 할 수 있겠습니다.”

“뭐라? 재구성?”

“예. 저희의 뜻에 사라국은 그 재구성의 한 구성원이 되길 바랐기에 오늘 이렇게 찾아 뵌 것이지요.”

“…….”

강황은 눈앞의 사내가 매우 의심스럽다.

그가 하는 말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그들이 사라국을 적대시하지 않겠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겠다.

이권을 생각했다.

‘이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힘을 보탠다면?’

그 정체가 모호하다는 것만 빼고는 나쁘지 않다.

게다가, 자신은 얼마든지 황철영, 아니 그들이 말하는 조직 따위는 쓰다가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래 어떻게 돕겠다는 것이지?”

강황이 물었다.

씨익 미소를 그리는 황철영.

그의 입이 열린다.


§


다린 외곽에서 중심부로 향하는 공승우 일행은 느긋하게 움직였다.

도시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배를 채운 덕에 용철의 얼굴에 짜증은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마차 안의 상황은 조금 묘했다.

용소, 용하, 장여련이 한쪽에 앉고 공승우, 호약란, 휘산영이 다른 한쪽에 앉아 있었는데, 그런 공승우 양쪽에 두 여인이 나뉘어 앉아 있으며, 휘산영은 계속해서 입을 열고 공승우는 조금 난감한 얼굴로 호약란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곁에 나란히 앉아 있으니 보통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공승우의 태제륙 언어습득은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 간단한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어자석에서 한상준의 음성이 들려온다.

“오늘은 저곳에서 묵도록 하지.”

그의 음성에 휘산영이 마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확인하고는 웃으며 말한다.

“네-.”

그들의 앞에 장포숙관(薔鋪宿館)이라는 간판을 내건 점포가 하나 보인다. 그 숙관의 외벽엔 일반적인 장미보다 작은 검은색 꽃봉오리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이곳에서 분장(分薔)이라고 부르는 장미과 꽃으로 특히 사라국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었다.

분장은 보통 5월에서 8월 사이에 피었으니, 지금 핀 모양으로 보면 6월 즈음. 여름으로 가는 길목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휘산영은 장포숙관의 외벽을 타고 흐르는 검은빛 물결이 무척 마음에 들어 한상준의 제안에 더 볼 것 없다는 듯 대답했다.

공승우가 슬쩍 호약란을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조금 화나있는 표정만을 그릴 뿐이었다.

용소, 용하, 장여련이야 어디를 가든 개의치 않았으니.

마차는 장포숙관의 외벽을 타고 돌아 정문으로 들어섰다.

장포숙관은 상당히 큰 숙관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서 보이는 앞마당과 두 채의 건물, 그 한쪽으로 지어진 마사가 제법 큰 것을 보니 말이다.

용철은 마차를 마사 쪽으로 몰아 정지시켰고, 마사에서 대기 중이던 숙관 직원은 깍듯이 인사를 하며 일행을 맞아들였다.

그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일행은 장포숙관의 첫 번째 건물로 들어섰다.

와글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그들의 귀로 울려왔다.


다린에서 옥차를 취급하는 상단은 세 군데가 있었다.

그 중 긴상단(緊商團)과 요하상단(燎花商團)이 규모가 컸고, 나머지 한 개인 황덕상단(黃悳商團)은 한창 상세를 넓혀가는 중이었다.

규모가 큰 두 개의 상단이 태제륙 전반에 걸친 유통을 했고, 황덕상단은 주로 동호대륙 내부와 화인대륙, 남주대륙의 초입까지만 유통을 맡아서 하고 있었다.

워낙 소모량이 많아 이 세 곳의 상단은 언제나 바빴다.

바쁜 만큼 걷어 들이는 염폐의 액수는 상당했다. 사라국에 세액으로 4할을 낸다고 해도 말이다.

만약, 이 세 곳의 상단을 한 곳에서 독점하듯 관리한다면, 태제륙 전반에 걸친 거대 상단으로 발전할 것이다. 옥차만이 아닌 다른 여러 물품을 취급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옥차 사업은 사라국에서 나라차원의 간섭을 하는지라 어디도 병합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원활한 간섭을 위해서는 세 곳 정도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사라국 군황부의 생각이다. 그러니 괜히 일을 벌였다가 축출되면 그 상단만 끝장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도 시간이 지나고 욕심이 생기면 방법을 찾는 법.

다른 상단에 비해 규모가 작은 황덕상단은 대대로 만족하며 살았지만, 이번 상단주인 황수곤은 생각이 달랐다.

“그들이 왜 망독군 따위를 연결해 주었는지 모르겠느냐?”

올해로 59세가 된 황수곤은 자신 앞에 앉아 불만스러운 표정을 그리는 아들이자 부상단주인 황관에게 나직이 말했다.

그에 황관이 단호하게 답한다.

“쓰다 버리라는 뜻이겠지요.”

“그런 뜻도 있지.”

“다른 뜻도 말씀드립니까?”

“해보아라.”

“우리 황덕상단도 그렇게 하겠다는 뜻이겠지요.”

“후후.”

황수곤이 웃고는 말을 잇는다.

“망독군은 욕심이 많은 자들이다. 위험하고 잔혹하기도 하지. 게다가 제법 그 수도 많고.”

“…….”

황관은 가만히 듣겠다는 눈빛이다.

황수곤의 말이 이어진다.

“옥차는 나라의 물건이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 상단도 나라의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 언제고 힘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꼼짝없이 내줘야만 하는. 그런 나라의 물건을 건드릴 수 있는 자들이 누가 있겠느냐. 현재로서는 망독군이 적격이지. 망독군은 생각이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유희뿐이지 않더냐.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 그것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을 쓰기엔 부담이 큽니다. 통제도 어려울 터이고요.”

“아들아, 너는 길현이라는 자를 어찌 보았느냐?”

황수곤이 말하는 길현은 이곳 황덕상단에 들어선 망독군의 수령이다.

황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황수곤이 말을 잇는다.

“알아보니 그자가 상단에 들어선 망독군의 수령이 된 것이 근래에 있던 일이더구나. 그리고 말이야……. 그가 지닌 눈빛은 결코 망독군의 눈빛이 아니었다. 길현은 그들과 연관된 자일 것이다. 그러니 망독군을 쓰는 것은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우리는 길현. 그자를 살펴야 할 것이고, 그들이 내건 약속에 흔들림이 일 때를 놓치지 않고 잡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속아주는 것이지. 우리는 상인이다.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렇지 않으냐?”

그에 황관의 눈빛에 조금씩 힘이 들어간다.

그러더니 굳은 목소리로 말한다.

“물론이지요.”


장포숙관의 첫 번째 건물 1층 식당은 저녁이 되면 주류를 판매한다.

게다가 이곳의 음식은 맛있었다.

특히 사라국에서만 생산되는 화화주(火華酒)의 맛은 매력적이었다.

목젖을 떨어 울릴 정도로 독하지만, 식도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고선 올라오는 향과 화하니 풍겨주는 아릿함이 좋았다.

공승우도 모처럼만에 술 맛을 느끼고 있다.

태제륙에 떨어지고 근 한 달 가까이 흐르는 동안 오늘처럼 편안히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

늘 눈치를 보게 되는 호약란도 오늘은 왜인지 공승우에게 눈총을 주지 않은 채 술만 마시고 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입을 열었던 휘산영도 나름 지친 바가 있었는지 공승우에게 말을 거는 대신 호약란 앞에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공승우 앞자리에 앉은 용철이야 이미 거나하게 취해가는 중이고, 한상준은 볼일이 있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이다.

장여련과 용소, 용하는 벌써 자러 올라갔고 말이다.

화화주 한잔을 비우고 주변을 둘러보는 공승우.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다르지 않는구나.’

가만히 미소가 그려진다.

예전 쉐도우에서 오연화와 정찬욱, 민초련과 함께 술 마시던 그때가 떠오른다.

‘잘 지내고 있겠지…….’

보고 싶은 사람들이다. 특히 오연화를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심하게 아려온다.

그녀의 미소,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내음.

탁.

누군가 공승우 앞에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아 공승우의 상념을 깨뜨린다.

가만히 고개를 돌리니 볼이 살짝 상기된 호약란이 공승우를 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 거지?”

역시나 오늘도 그녀의 시선과 음성은 곱지 않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공승우와 호약란은 깊은 관계를 맺었다. 물론 연인의 감정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공승우는 호약란의 이 같은 태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호약란이 재차 공승우에게 까칠한 음성을 내뱉는다.

- 그저 지난 생각을…….

공승우가 심어를 전하려 하자 호약란이 그것을 끊는다.

“두고 온 애인이라도 생각했나 보지?”

- 그건…….

공승우가 다소 뭉그적거리자 호약란의 눈매가 화륵 올라간다.

“진짜야? 너! 두고 온 애인이나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버럭 소리를 질러 놓고는 급히 입을 가리는 호약란.

‘내가 왜 이러는 거야?’

그녀의 볼이 새빨개지고 두 눈에 이슬이 방울방울 맺힌다.

조금 전 화화주를 마신 호약란은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의 일들에 고민하다가 문득 공승우의 얼굴 옆선을 힐끗 보고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이 솟아 대뜸 다가와 시비조로 말을 건넸다.

공승우의 눈가에 맺힌 그리움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근래 자신이 아닌 휘산영과 붙어 있던 공승우 때문이기도 하리라.

조급함. 불안함. 왠지 모를, 아니 이제는 자신이 왜 그러는지 호약란은 잘 안다. 그녀도 아이가 아니다.

어엿한 성인이며 게다가 여인이기도 하다.

자신이 공승우에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과 그를 대할 때마다 짜증을 내는 것.

어느덧 그가 그녀의 가슴에 들어섰으며, 그런 감정을 애써 지우려 하는 것과 그를 향한, 아니 세상을 향한 그녀의 자존심과 목적이 가슴을 채우기 시작하는 애정이라는 존재를 밀어내려 하는 것.

“정말 싫어!”

빽 소리친 호약란이 몸을 홱 돌려 문으로 나가버린다.

공승우가 살짝 놀라 호약란의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자, 다가든 휘산영이 묻는다.

“둘이 무슨 사이죠?”

흥미로움에 살짝 깃든 질시로 반짝이는 휘산영의 눈빛.

- 그건…….

정말 무슨 사이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공승우가 잠시 고민하자 휘산영이 말을 잇는다.

“하여간 두 사람 재미있어요. 그건 그렇고 이 화화주라는 술. 참 묘하네요. 얼마 마시지 않았는데, 몸도 나른해지고 기분도 싱숭생숭해지고.”

반짝였던 휘산영의 눈매가 일시에 풀어져 버린다. 그리고는 다시 술잔을 잡아가는 그녀.

그랬다. 독한 술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 공승우. 주변을 빠르게 둘러본다.

용철은 이미 엎어져 잠에 취했다.

다른 자리에도 술을 마시는 이들이 여럿 있다.

그들도 취했고, 음성은 높아만 간다.

‘뭐지?’

그런데 묘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떠드는 사내들.

‘저들, 우리가 이곳에 들어올 때는 없었어.’

나중에 술을 마시고자 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숙관.

술을 마실 수야 있지만, 주점과는 다르다. 보통은 숙관에 머무는 이들만이 내려온다.

게다가 몇몇씩 모여 술을 마시는 사내들은 마치 공승우 일행을 둘러싸듯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호약란이 문을 나서자마자 자리를 뜬 사내들도 있다.

저녁 시간이라지만, 숙관의 주인은 물론 직원들도 보이지 않는다.

‘이 자들 뭔가 노린다!’

그리 생각되자 주변 사내들을 보는 공승우의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


많이 늦었습니다. ^^ㆀ

올해 초에 직장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비교적 이직률이 잦은 직업이라... 아하하...

벌서 3월이군요.

올해 제 주변에서 이것저것 몇 가지가 달라졌는데, 어느덧 이만큼이나 와버렸습니다.

^^*

휴-.

요즘 좀 답답합니다.

월급쟁이 생활이라 매번 같은 조건이다 보니 아쉬울 때가 잦습니다.

들어갈 것은 자꾸만 늘어 가는데, 채울 수단이 딱 그만큼이니 말입니다.

아후. 젠장입니다.

냐하하.

하여간, 오늘 날씨가 뿌옇기는 하지만 즐거운 하루 되시고요.

이만 휘리릭 하겠습니다. ^^.


氣高萬丈님께 정말 죄송합니다.

노력.

매번 하는 변명이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에헤헤…….

^^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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