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이먼 남작가의 여인이 헤리오스에게 크게 망신을 당한 사건은 수도 전역에 퍼졌다. 이왕자가 오크에게 습격당한 일보다 더욱 빠르고 또한 내용도 약간 변해서 사람들의 입에, 특히 귀족가의 여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카밀레아.”
“...네.”
“하아. 내가 처음에 가서 얌전히 있다가 입도 뻥긋하지 말고, 그냥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귀만 열어놓고 있다가 오라고 했다. 기억나니?”
“...네.”
“그런데... 왜 그런 미친 짓을 하고 온 것이냐?”
“...”
“너 하나 죽더라도 우리 가문은 이미 멍청이로 낙인 찍혔다. 뿐이냐? 왕실에 내가 직접 가서 사과를 해야 하고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구나.”
“...”
“그리고 너를 어찌 쓴단 말이냐? 다른 곳도 아닌 왕실에 찍힌 널 거둘 귀족가가 있을 것 같으냐? 다른 가문에 들어가지도 못할 신세가 된 넌 밥만 먹는 가축보다 못한 존재다. 알고 있느냐?”
“흐...흐흑...”
“울지 말거라... 그래도 가문에서 그 동안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었으니 이제 그 값을 해야 한다. 넌 어찌하여 그 벨로시아의 후계자에게 함부로 했지?”
사이먼 남작가의 가주이자 카밀레아의 오빠인 디클로스 사이먼은 여동생인 카밀레아의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부드러운 말투이지만 눈빛만은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어 카밀레아는 그의 오라비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땅으로 떨구었다.
“처음에 그는 가볍게 여인들을 맞이했어요.”
“그래...”
“그의 방에는 여기사가 땀을 흘리고 있었고요.”
“...여기사...가?”
“그리고 여기사가 나가고 난 후 여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가벼운 언행을 했어요.”
“그랬구나.”
“그 다음... 왕궁이 있는 곳이 가장 발전되고 훌륭한 곳이 아니냐는 말을 했어요.”
“...”
“그리고 정원사가 정원에 물을 주고 꽃을 가꾸는 것에 매우 놀랐고요.”
“...”
“그리고 이름을 이야기하고 인사를 했어요.”
“그래...”
“이름을 말하면서 내가 세 살이 더 많다고 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저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죠.”
“...”
“그는 분명 여자를 밝히고 가벼운 성격에 세상의 물정도 모르고 자존심을 지키는 법도 모르는 인물이라고 판단했어요.”
“알았다. 왕성에 다녀 오겠다.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거라.”
“흐... 흐흐흑. 저... 전...”
“다녀오면 그 때 말해주마. 네가 살아야 할지 죽어야 할지.”
디클로스 사이먼은 여동생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고는 그녀의 방에서 나갔고, 카밀레아는 그대로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다.
* * *
“생각보다 다혈질인 건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건가?”
근엄한 표정으로 왕좌에 있던 남자는 사라지고 소파에 몸을 쑤셔 박고 나른하게 앉아서 다리를 꼰 채 느긋한 목소리로 물어보는 반백의 남자.
이 나라의 왕이었다.
마주 앉은 남자... 아니 소년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마셨다.
“그 여자 분이 선을 너무 세게 넘으시니 참기가 좀 어려웠을 뿐입니다.”
“허허허허...”
“그래... 자꾸 무언가를 만들어서 왕실에 물어다 주는구만...”
“그저 충성심의 발로라고 믿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허허허허...”
카이 쥬 멘토라 브이 세이르멘. 이 나라의 국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다가 다시 물었다.
“그냥 말해도 좋아. 아니면 진짜 없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고...”
“무조건 말하겠습니다. 사실... 국왕령을 좀 돌아다니고 싶습니다.”
“응? 뭐 염탐이라던가 그런거 하려는 건가?”
“네. 뭐 비슷...하네요.”
“허허허허...”
국왕은 다시 실없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뭘 보고 싶은건데 그러는 건가?”
“사실... 바다도 좀 보고 싶고, 음식이라던가... 식료품은 어떤 것이 있는가... 사람들 옷은 어떤지... 병사들이 쓰는 무기는 어떤지... 밀은 얼마나 하는지... 철은 얼마나 하는지... 그냥 모든 것이 다 보고 싶습니다.”
“...자네는 아직 열 다섯 살이야.”
“저도 아직 열 다섯이고 싶지만... 사정 상 벌써 열 다섯이나 되었습니다.”
잠시 왕의 눈에서도 안타까운 눈빛이 서렸다.
“쯧... 다른 귀족 놈들이 붙는 것도 좀 문제겠지. 그래 다녀 와. 회의하고 달래고 윽박지르고 식량이든 돈이든 지원한다고 영지로 갔다가 다시 보내오려면 적어도 세 달에서 네 달을 걸릴테니... 반년 동안은 많이 보고 와.”
“현명하신 왕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대화가 끝났음에도 둘은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었다.
“...”
“...”
“왜? 할 말 있나?”
“저... 돈도 조금만 빌려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자네 영지가 진짜 그렇게 힘드나?”
“...제가 홀에서 한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이 슬플 따름입니다.”
“알아서 챙겨줄테니 다녀 와.”
“현명하신...”
“그냥 가. 또 뜯어먹을 생각하지 말고...”
“네...”
아쉬운 듯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헤리오스를 보며, 왕은 쓰게 혀를 찼다.
“쯧... 그냥 가게?”
“아니... 뭐 기분이 상하시기라도...”
“현명하신 왕이 기분이 상하시겠나? 그냥 가냐고 물어본 것 뿐이지.”
“...제가 어찌하면 자애로운 왕의 기분이 풀어질지 궁금합니다.”
“흠... 우리 둘째가 먹은 음식이 그렇게 맛이 좋았다지?”
“아...!”
이런 면에서 또 생뚱맞게 걸고 넘어질 줄 몰랐던 헤리오스는 잠시 멍해졌었다.
“싫음 말고...”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감히 왕성에 주방에 함부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국왕령 여기저기 다 싸돌아 다니겠다는 사람이 왕성의 주방은 안가고 싶다?”
“가야죠...”
“언제 갈 건데?”
“오늘 저녁에 막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국왕의 엉뚱한 모습에 당황한 헤리오스가 급하게 대답했다.
“허험! 거 젊은 사람은 좀 바빠도 돼. 어여 가봐. 자네 바쁘잖아.”
“예.” * * *
왕은 작정을 했는지 헤리오스가 주방에 내려간 그 순간부터 싸늘하면서 무언가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커다란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사람들이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헤리오스 앞에 서 있지만 그 눈빛과 기운은 철천지 원수를 대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헤리오스의 뒤를 따라온 시종장이 대수롭지 않게 상황을 설명했다.
“홀에서 이왕자님께서 공자의 영지에 대한 보고를 끝내고 식사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그런 음식은 처음 먹어보았다. 그런데 그 요리를 영지의 후계자가 했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후계자가 왕실의 사람에게 직접 요리를 해주는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그 맛 또한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라고 말씀이죠.”
“뭐... 이 세상의 것이 아니긴 하지.”
헤리오스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눈썹이 씰룩이는 주방장.
‘아...씨! 진짜 이 세상 음식이 아니니까 그러지. 이 세상 음식이었으면 내가 이 세상 것이라고 하지 안그러겠냐?’
그런 헤리오스의 속을 당연히 모르는 주방장은 전의를 불태우며 헤리오스를 슬쩍슬쩍 노려볼 뿐이었다.
“그럼 재료부터 살펴볼까요? 식자재 창고 한 번 보죠.”
왕이 시켰으니 해야 한다. 게다가 왕한테 돈까지 빌려가며 국왕령을 돌아볼 것 아닌가.
“따라 오시지요...”
주방장은 빠른 걸음으로 창고로 이동했고, 헤리오스가 바삐 따라가며 물었다.
“닭은 잡은 지 얼마나 된 것을 보관하고 있는 거지?”
“...알아 보겠습니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주방장이 고개를 숙인 채 대충 말을 한다.
“하... 이런 씨발...”
헤리오스가 주방으로 혼자 돌아가면서 말했다.
“주방으로 잡은 지 딱 하루 된 생닭 8마리. 감자 껍질 까서 30개. 알은 주먹만 한 것으로 향신료는 종료별로 한 접시씩 담아서 가져오고, 당근 껍질 까서 10개. 소금, 후추 잘 갈아서 모래보다 부드럽게 가져와. 확인해보고 엉망이면 우리 영지보다 재료가 정말 그지 같아서 요리 못한다고 해야겠다.”
헤리오스의 말에 기분이 더 상한 주방장이 알겠다고 하고 식자재 창고를 들어갔다.
헤리오스 역시 주방으로 돌아와 건방진 주방장을 어찌 할지 살짝 생각했지만 자기 주인 밥해주러 온 사람에게 텃새를 부리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화가 났다.
“아니... 주인이 맛난 거 먹고 싶다고 하면 지가 얼른 배워서 만들어 줄 생각을 해야지. 이건...”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바닥에 밀가루와 고기 비계가 굴러다니고 있고, 물이 빠지는 하수구에는 찢어진 야채들이 널려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은데...?”
위생관념만큼은 21세기 지구의 그것도 대한민국의 것을 가지고 있는 헤리오스의 눈에 주방의 청결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 곳은 먹던 반찬을 다시 담아 손님에게 내어주는 식당은 처벌까지 받는 나라였으니까.
그릇이 있는 곳을 보고 설거지를 하는 물통을 확인한 후 천정에 있는 기둥의 먼지와 구석에 있는 쥐똥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인 문제구만... 쯧...”
잠시 후 주방장이 사람들을 이끌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말씀하신 닭과 감자, 당근...”
“됐고. 나 돌아간다. 여기서 음식 못만들겠어.”
“...네?”
주방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종장!”
헤리오스는 큰 소리로 시종장을 불렀다.
그러자 없던 것 같은 시종장이 불쑥 헤리오스의 뒤에서 나타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씨! 깜짝이야! 언제부터 있었어요?”
“계속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만...?”
잠시 시종장을 보고 눈을 꿈뻑이던 헤리오스가 시종장에게 말했다.
“주방이 너무 더러워서 여기서는 음식을 만들수가 없습니다. 여태껏 이런 곳에서 나온 음식을 먹고 있었다니 우리 영지는 가난해도 최소한 이렇게 무능하고 게으른 주방장은 쓰지 않습니다.”
무능하고 게으른이라는 말에 시종장의 눈이 번쩍였고, 주방장은 발끈하여 소리쳤다.
“괜한 트집입니다. 시종장님.”
하지만 헤리오스의 뒤에서 갑자기 나타날 정도로 기척을 숨기는 능력이라던가 가끔 씩 헤리오스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는 시종장이 그냥 시종장일 리가 없다.
“여기도 정신교육이 필요할 것 같은데... 쯧.”
“여기도...라는 말씀입니까?”
일이 또 커져버렸다.
헤리오스의 발언은 왕궁의 주방이 벨로시아보다 더럽고 주방장은 더욱 게으르고 엉망이라는 이야기니까.
해서 왕이 직접 주방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살다보니 주방까지 내려 와보는군.”
주방의 인물들은 바닥에 엎드린 채 벌벌 떨고 있었고, 헤리오스도 굳은 표정으로 왕을 맞이했다.
“그래... 이 소란의 주인공은 무엇 때문에 또 시끄럽게 하는 건가?”
“솔직한 대답을 원하십니까? 듣기 좋은 공식적인 대답을 원하십니까?”
“뭐... 일단 공식적인 것부터 듣지. 조금 있으면 회의를 해야 하니 빨리 이야기 해주겠나?”
“예. 식사란 사람이 살기 위해 하는 행동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왕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분의 입으로 가는 것이라면 작은 실수도 있어서는 안되고, 또한 여기서 생기는 작은 사건도 후에 왕국의 운명을 바꿀 중요한 요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왕궁의 주방에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헤리오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왕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솔직한 대답은?”
“주방장 저 인간이 음식 만드는데 불편하게 자꾸 협조를 안하네요. 안그래도 저녁에 왕실의 귀한 분들 식사 재료를 찾으려면 시간도 없는데...”
“하? 주방장 텃새에 내가 여기까지 왔단 말이지...?”
국왕의 눈에 불이 뿜어져 나왔고, 주방장은 땅에 머리를 박으며 용서를 구했다.
처음 시골 영지의 귀족 하나가 주방에서 요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웃었다. 그리고 그 요리가 왕실에서 먹었던 어떤 요리보다 맛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났다. 얼마 후 그 젖살도 안 빠진 남자아이 하나가 귀족이랍시고 와서 주방을 훑어보는 모양새가 어찌나 건방져보이던지.
그래서 무시했다. 귀족가의 후계자라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얼마나 힘이 없고 못났으면 주방에 요리를 하러 올까?
잡은 지 하루 된 닭을 찾기에 짜증나서 답도 해주지 않았다. 자신이 주방에서 땀흘리며 일한 시간이 얼마인데 다 쓰러져가는 귀족가의 피를 좀 이었다고 여기서 잘난 척이라니... 라고 생각을 하던 주방장은 국왕까지 내려오는 사태에 숨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아니... 겨우 한끼 먹을 것 만드는데 무슨 왕국의 운명이...?
그리고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국왕의 얼굴은 정말 화가 난 것인가?
“뭐가 문제인지 몰라?”
또 저 얄미운 인간은 뭐가 문제라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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