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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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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프
작품등록일 :
2023.05.12 23:43
최근연재일 :
2024.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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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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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결 (1)

DUMMY

그 일이 있고 난 후 칠 개월.

어느덧 벌써 연말에서 연초로 넘어가는 1월이 되었다.

칠 개월이라는 시간을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체감되는 시간의 속도’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한다면 여럿 갈릴 것이다.

일 년도 되지 않는 시간이 뭐가 기냐고 하는 짧다 파가 있을 것이고, 반 년을 넘어가는 시간이 왜 짧냐고 하는 길다 파가 있을 것이다.

지금 왕의 집무실에서 집무하고 있는 이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한다면 무조건 짧다고 대답할 것이다.

어느덧 대리청정만 칠 개월째인 가스페르는 거의 좀비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결재하는 기계.


지금의 가스페르에게 더없이 적절한 별칭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전국 여행 다니시면서 다른 행성도 놀러 가는데, 난 왜 여기서 썩어야 하는 거지.’


대리청정이 삼 개월쯤 되던 달.

돌연 제퍼는 국왕직을 거의 완전히 내려 놓은 채 피오렐라를 데리고 전국 일주를 시작했다.

지구 혹은 다른 행성이었다면 땅덩어리 하나만 신경 쓰면 그만인 일이었지만 헤랴에게 전국이란 행성 전역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가스페르는 그나마 제퍼가 맡고 있던 결재분마저 완전히 떠넘겨 받은 채 직무를 보았고, 그것이 어느덧 7개월이 된 것이다.


“이 개 같은 일 그만하고 싶다아아아아!”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 무턱대고 소리를 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허완도 7개월 전 잠에 든 이후로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 양반은 대체 어딜 간 거야.”


짧은 신세한탄도 잠시일 뿐이었다.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비서가 가스페르에게 공표의 시간이 되었음을 전했다.

오늘은 상 발표가 있는 날이다.

가장 번성한 지역부터 가장 일을 잘한 직원까지.

하나하나 사소한 것부터 표창을 하는 바람에 가스페르의 몸이 남아 나질 않았던 것이었다.


“가겠네.”


왕이라는 막중한 무게를 견디기에 그런가 칠 개월 새에 가스페르의 말투는 사무적이고 어딘가 딱딱하게 느껴졌다.


무수히 많은 표창을 비서들에게 넘긴 후 가스페르는 옷을 갈아 입었다.

은빛의 옷가지에 뜨문뜨문 박혀 있는 금빛의 자수가 한결 밝은 느낌을 주었다.


저벅 저벅.


고풍스러운 발걸음에 근위대가 문을 열어 배웅해 주었고, 수도와 전국의 주요 인사들과 원형으로 둘러진 돔 형태의 장.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장내를 가득 채운 백성들이 집결한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스페르가 마력으로 이루어진 목소리 확성기를 잡고 크게 이야기했다. 그것의 이름은 ‘마력 확성기’였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현 국왕의 아들이자 국왕 대리 가스페르 반 아이데입니다. 먼저 여러분의 영원한 열성과 성원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늘 시작 멘트를 담당하는 말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식이 시작되었다.


퍼버벙!


식을 시작하는 축포가 성대히 터졌··· ···.


“여기서 터진 거 맞아?”

“정숙하게. 국왕께서 앞에 계시잖나.”

“축포 규모의 소리가 아닌데?”


장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반과 위화감 섞인 불안에 요동치는 반으로 나뉘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리고 이 이상함을 감지한 것은 그들 반뿐만이 아니었다.

가스페르와 근위대 대장.

둘은 묘한 기시감이 장내를 휘감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콰과과과광!


이전 축포 소리와 섞갈릴 정도의 위력과는 차원이 다른 폭발음이 돔 바깥에서 선명하고 시끄럽게 넘실거렸다.

가스페르가 다급히 마력 확성기를 잡고 고막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다들 침착함을 유지하고··· ···.”


가스페르의 목소리가 데크레셴도처럼 점점 작아지더니 다시 한번 마력을 폭발시켰다.


“엎드려어어어어!”


가스페르의 신호와 동시에 돔의 둥근 뚜껑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맑은 하늘이 아니··· ···. 스산해진 어둠이 돔을 드리웠다.


[여기가··· ···.]


낯설지만 또한 낯익은 목소리.

‘신언’이었다.


[헤랴인가?]


‘신’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총 둘.

감당하기 힘든 신언을 들은 이들은 하나둘 바람 빠진 풍선처럼 풀썩 쓰러져 기절했다.

대부분은 그랬다.

평소 마력에 대한 적응 훈련을 누구보다 강하게 해 온 왕실 근위대와 마력에 분명한 저항이 있던 군인 일부가 그 신언을 견디고 있었으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절하지 않고 버티는 것뿐.

싸울 수 있는 인원은 근위대 대장 하나였고, 그 마저도 충분한 전력이 되기엔 한참 부족했다.


[저것들은 뭐야?]


그때. 가뭄의 단비처럼 나타난 존재가 있었으니.


“성주님.”


칠 개월간 힘을 축적하고 있던 허완이었다.


“저것들은 뭡니까?”


가스페르가 그들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하나는 여인의 형상을 하고 셀리노프와 비슷하게 은빛의 달 기운을 품고, 동시에 발현하고 있었지만 그 격은 셀리노프와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라고 말하기에도 부족한 위력이었다.

다른 하나는 전형적인 남성의 형상을 하고 저 은빛에 버금가는 오히려 뛰어넘는 해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가스페르는 허완의 답이 돌아오지 않자 재차 물었다.


“성주님? 저놈들은 누굽니까?”


허완이 침묵을 고수했다.

참다 못한 가스페르가 허완을 향해 고개를 돌려 따지려 했으나 고개를 돌리자마자 가스페르는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으려는 듯한 허완을 보았다.


“성··· ···주님?”


허완이 꾸역꾸역 성대에서 말이라는 것을 쥐어 짜냈다.


[신.]


“네?”


[신··· ···이다.]


가스페르는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신의 자격을 가진 허완. 하지만 그는 본디 위인이자 영웅.

그런 이가 신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은 딱 한 부류뿐이었다.


“태생··· ···신.”


무수히 많은 지성체들의 상상력이 동원되어 탄생한, 날 때부터 신의 자격으로 삶을 영위하던.

신이었다.

분명 저것은 신의 본체가 아니다.

그것을 허완과 가스페르는 분명 인지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지금의 가스페르는 절대 신의 일부조차 탐닉할 수 없는 그저 지나가는 개마 한 마리만 못한 존재.

개미 한 마리는 호랑이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호랑이는 결코 개미를 잡아먹지 않으니까.

하지만 개미보다는 월등히 뛰어난, 여차하면 호랑이와 같은 이들에게 잡아 먹힐 수 있는 존재는 그들을 목도하는 동시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이를 테면 지금 가스페르는 개미. 허완은 피식자인 것이다.


[도··· ···도망쳐야 돼.]


“도망이요?”


가스페르는 일순간 망설였다.

절대 자신의 성주(星主)를 믿지 못해 드는 느낌이 아니었다.

이길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그런 바늘 구멍보다 작은 희망이 주는 도파민에 취해 버린 탓에 사리분별이 흐려졌다.

가스페르가 아르코 솔을 집어 들고는 둘을 향해 총 두 발의 화살을 장전해 발포했다.


[잠깐 ··· ···.]


허완이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가스페르에게 정지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화살은 가스페르의 손을 떠났다.


파스스 ··· ···.


가스페르의 상상력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은 화살이 둘의 근처에도 닿지 못하고 바스러졌다.

둘 중 하나. 해의 기운을 품은 그릇이 화살의 출발점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위압감에 허완은 서서히 가라 앉았고, 가스페르는 그 그릇에게로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네가 ··· ··· 태양 신을 표방하려 하는 ··· ···.]


격의 크기가 얼마나 아득한 것인지 말을 하는 도중에 신언이 끊겨 버렸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동시에 피식자와 개미에게로 눈을 돌렸다.

피식자는 가까스로 도망칠 힘만 남은 상태였다.

개미는 그저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피식자가 다급히 고개를 돌리더니 왕실 근위대 대장의 몸으로 들어갔다.

임시 피난처인 셈이었다.


“허억! 허어억!”


근위대 대장이 가쁘게 숨을 몰아 쉬었다.

그 눈빛에 휘말린 건 가스페르와 허완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질식사에 이르기 직전, 근위대 대장의 몸에 허완이 강림해 숨통을 트이게 해 주었다.

서로가 서로의 구원자가 된 셈이었다.


“가··· ··· 가스페르 님.”


애타지만 작은 목소리가 가스페르를 불렀다.


“근위대 대장인가.”

“예, 그렇습니다.”


허완의 격이 깃든 근위대 대장이 위로 고개를 들었다.

한낮의 태양을 마주하는 것처럼 눈이 부셔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잘 생각해 보면 그들은 강림한 이후 그들을 바라만 볼 뿐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저 몇 마디의 신언을 흘린 것뿐, 물론 신의 피조물들은 그것에도 파멸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근위대 대장의 시선으로 그들을 응시한 허완이 가스페르에게 말했다.


[저놈들 ‘제약’에 걸렸어.]


“제약이요··· ···?”


[그래. ‘제약’은 그들의 가진 상상력이 지역의 ‘허용 상상력’을 넘었을 때 걸려.]


희미하지만 분명한 사슬이 각각 둘을 휘감고 있었다.

제약이 쇠사슬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허용 상상력이 실시간으로 폭증하고 있어. 조금 있으면 제약이 해제되고 말 거야.]


“그럼 어떻게··· ···.”


[나도 모르겠어. 빌어먹을 저 새끼들이 여기 왜 온 거야.]


***


{여기서 죽기엔··· ··· 아쉽지.}


***


둘을 감싸고 있던 쇠사슬이 점점 스러졌다.

허용 상상력이 그들의 상상력을 거의 다 담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허용 상상력과 둘의 상상력이 완벽하게 맞아 들어 가스페르와 허완은 격을 발현하는 것마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때, 가스페르와 근위대 대장의 몸에서 빠져나온 허완의 영혼이 천천히 금색으로 화했다.

가스페르는 이 현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찬··· ···.’


잊고 지냈던 두 음절이 다시 한번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두 신을 마지막으로 가스페르의 시야는 거멓게 변했다.


“흐어!”


가스페르가 눈을 떴을 때 그곳의 위치는.


빵! 빠앙 빵!

부우우웅.


지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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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결 (1) 24.02.02 35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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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악의 몰락 (5) 24.01.28 31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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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악의 몰락 (3) 24.01.24 47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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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악의 몰락 (1) 24.01.21 60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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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가스페르 (9) 24.01.10 30 0 9쪽
83 가스페르 (8) 24.01.07 46 0 10쪽
82 가스페르 (7) 24.01.05 55 0 10쪽
81 가스페르 (6) 24.01.03 42 0 10쪽
80 가스페르 (5) 23.12.31 43 0 10쪽
79 가스페르 (4) 23.12.29 54 0 9쪽
78 가스페르 (3) 23.12.27 87 0 9쪽
77 가스페르 (2) 23.12.24 40 0 10쪽
76 가스페르 (1) 23.12.22 69 0 10쪽
75 가월의 밤 (5) 23.12.20 44 0 10쪽
74 가월의 밤 (4) 23.12.17 69 0 10쪽
73 가월의 밤 (3) 23.12.15 60 0 9쪽
72 가월의 밤 (2) 23.12.13 82 0 10쪽
71 가월의 밤 (1) 23.12.10 58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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