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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선생 님의 서재입니다.

슬픈 고삼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중·단편

완결

얌선생
작품등록일 :
2023.04.25 00:21
최근연재일 :
2023.05.19 16:47
연재수 :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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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5
추천수 :
10
글자수 :
128,593

작성
23.05.1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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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23화. 현명하지 못한 선택 (3)

DUMMY

재우에게 벌어진 일의 전말을 듣고 난 그녀는 숨을 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한껏 풀이 죽은 그녀가 안쓰러웠는지 재우를 불러오겠다며 담임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무실에 덩그러니 있는 게 너무 답답해서 그녀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불안한 마음에 발걸음이 어지러웠다. 겨울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15분쯤 기다렸을까, 담임 선생이 머리를 두 어깨 속에 파묻은 재우를 데리고 왔다.


그녀는 목이 막혀 말 한마디 못 하고, 담임 선생에게 죄인처럼 머리만 조아렸다.



집에 돌아온 재우는 엄마와 형 앞에서 동철이가 망만 보라고 해서 망만 봤다고 했다. 옥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망을 보면 동철이가 쓰던 핸드폰을 주기로 했다고 했다.


재우의 말에 그녀와 재민은 몸이 부서지는 통증을 느꼈다. 무덤 속 같은 침묵이 세 가족의 공간을 메웠다.



매일 매일, 그녀는 욕설만 쏟아내는 여자아이 아버지의 전화를 셀 수 없이 받았다. 그때마다 그녀는 전화기를 붙잡고 미안하다는 말만 무한 반복했다.


잊을 만하면 걸려 오던 여자아이 아버지의 전화가 걸려 오지 않은 날, 저녁 늦게 학생부장이 전화를 했다.


학교 폭력 위원회에 참석하라는 말과 함께 여자아이의 부모가 합의금으로 300만 원을 요구한다고 했다. 재우네 집안 형편을 고려해 달라고, 어린 마음에 망만 본 재우를 용서해 달라고, 담임 선생과 교장 선생이 사정 사정을 해서 특별히 적은 합의금을 낼 수 있게 여자아이의 아버지를 설득했다고 했다.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돈은 마련할 수 있지만, 재민의 등록금으로 써야 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새벽에 집으로 오는 길에 진눈깨비를 맞아서 인지 열이 나고 몸 구석구석이 쑤셨다. 끙끙 앓으며 몸을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이 든 그녀는 징그럽게 울려 대는 핸드폰 벨 소리에 핏기 없는 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그녀의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재우 어머니시죠? 아직 주무시나 보네요.”


한심하다는 투로 상대가 말했다.


“저, 효정이 아버집니다.”


“아, 예, 예.”


여자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녀는 불에라도 덴 듯 화들짝 일어났다.


“잠이 안 깨셨으면 이따가 다시 전화를 할까요?”


“아 아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그러죠, 뭐 좋은 일이라고 다시 전화를 하겠습니까. 학교에서 폭력 위원횐가 뭔가를 연다는데 그 전에 합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합의를 먼저 하면 가해자인 재우한테도 징계가 좀 적을 거라네요. 이따 1시쯤에 시간이 되십니까?”


“아 예, 그게, 제가 드릴 말씀이 좀······”


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에 남자가 짜증을 냈다.


“재우 어머니에게 더 이상 들을 말이 뭐가 있겠어요. 그 새끼들이 우리 딸아이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모조리 소년원이라도 처넣고 싶지만 어린놈들 인생이 불쌍하기도 하고 또 부모들은 무슨 죕니까. 그래서 제가 눈 딱 감고 합의를 해주는 겁니다. 더 이상 죄송하다는 말도 듣기 싫고 솔직히 얼굴 마주하기도 싫습니다. 그래도 한 번은 만나서 처리할 건 처리해야 하니까 뵙자는 건데, 1시에는 어려우신가 보죠?”


“아 아닙니다. 1시에 뵙겠습니다.”


그녀는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맺히는 걸 느꼈다.


“학교 앞길 건너편에 보니까 가든이라고 커피숍이 있던데, 그럼 거기서 1시에 뵙겠습니다. 합의금 가지고 오시면 제가 합의서는 써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맥없이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눈앞이 새까매지며 현기증이 났다. 멍하게 앉아있는데 설움이 북받쳤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엄마”


재민이었다.


“어, 왜?”


그녀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바꾸어 대답했다.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방으로 들어온 재민이 이불 밑으로 발을 집어넣고 앉았다.


“방금 전화 온 게 혹시 그 여자아이 집에서 온 거예요?”


그녀는 눈길을 피하며 이불을 끌어다가 재민의 무릎을 덮어주었다.


“뭐래요?”


허공에서 모자의 시선이 잠깐 부딪쳤다.


또다시 눈길을 피하는 그녀 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재민이 이불 위에 놓인 그녀의 마른 손을 감싸쥐었다.


“우리 엄마 이제 보니 순 거짓말쟁이네. 아버지 돌아가시고 약속한 거 잊으셨어요? 우리 세 식구 절대로 비밀 없기로 했잖아요.”


재민의 손안에 든 그녀의 손이 꿈틀했다. 그녀는 손을 빼서 반대로 재민의 두툼한 손을 감쌌다.


“재민아, 이건 비밀이라서 말 안 하는 게 아니야. 어른들 세상의 이야기라서, 아직 어린 너한테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서 안 하는 거야.”


“저도 이제 스무 살이에요. 엄마 눈에는 아직 어리게 보일지 몰라도 이젠 어엿한 성인인걸요.”


그녀의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졌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그녀가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참, 재민아, 합격자 발표 날 때 되지 않았니?”


재민이 잡힌 손을 뺐다.


“방금 났어요.”


허리를 곧추세우며 그녀가 큰소리로 물었다.


“그래! 어떻게 됐니?”


재민이 힘겹게 입을 열어 나지막하게 말했다.


“죄송해요. 전부 떨어졌어요.”


그녀의 숨이 턱 막혔다. 귀가 먹먹해지며 몸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는 힘을 주던 소망이 결국 절망으로 바뀌고 만 것이었다.


“정말, 정말이니?”


그녀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가까웠다.


“죄송해요.”


아들의 손을 잡는 엄마의 손이 중풍 환자처럼 떨렸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불거져 올라왔다. 그녀는 터지려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패배감과 절망감에 힘겨운 아들에게 자신의 슬픔까지 주는 것은 너무 가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엄마와 아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는 아들의 가슴에 난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싶었고, 아들은 엄마의 슬픔에 희망을 주고 싶었다.


“엄마, 학생들 사이에는 우스갯소리로, 재수하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마라, 그런 말도 있어요. 앞으로 1년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내년에는 꼭 국립대나 시립대에 당당하게 합격할게요. 아빠도 대학 떨어져서 재수하셨다면서요. 제가 별걸 다 닮았죠? 만약 아빠가 계셨다면, 힘들겠지만 힘든 만큼 얻는 것도 많을 거라고 기운 팍팍 내라고 말씀하실 거예요. 그리고 엄마, 이번에 재우 일로 많이 실망하셨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저도 재우도 너무 엄마를 힘들게 하네요. 죄송해요. 그래도 절대 자책하지 마세요. 저희들 이렇게 잘 키워주신 엄마한테 늘 고마워하고, 엄마 정말 사랑해요. 재우도 많이 뉘우치고 있어요.”


앞에 앉은 아들에게서 그토록 다정하던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남편이 죽고 난 다음에도 혼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두 아들이 있었기에.


하지만 늘 남편의 자리까지 감당하지 못한다는, 아이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훌쩍 커버린 아들에게서 남편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그 불안감을 지울 만한 새로운 힘이 솟는 걸 느꼈다.


몸이 개운한 건 아니었지만, 재민과의 대화를 통해 마음속의 커다란 돌덩이 가운데 한 개 정도는 드러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대강 외출 준비를 하고 여자아이의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은행에 들렀다.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이십 분이나 늦게 나왔다.


두 사람은 조그만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았다. 남자는 거들먹거렸다. 그녀는 남자의 말을 연신 굽실거리며 들어주었다.


돈이 든 봉투를 건넸다. 지폐를 세는 남자의 손이 검었다. 남자는 합의서가 들었다는 흰색 봉투를 내밀었다. 꺼내 보지 않았다.


남자는 약속에 늦었다며 휑하니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자꾸 헛구역질이 났다.




자갈밭을 지나듯 흔들리고 덜컹거리던 재민네 가족의 일상은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재우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고, 재민은 보름 전부터 도서관에 간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도시의 그늘진 구석에 있는 회색빛 잔설도 점점 녹아 사라졌다.


그녀는 느지막이 아침 겸 점심을 차려 먹고 은행에 갔다. 내년에 재민의 등록금으로 쓸 적금을 들기 위해서다.


적금을 들고 은행 문을 나서는데 화창한 햇살에 눈이 부셔 잠깐 멈칫하고 섰다.


지나치던 남자가 아는 체를 했다. 검정 뿔테 안경을 보고 생각이 났다. 재민의 담임 선생이었다. 이름이 박준우 선생이었던 거 같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그녀를 보고 담임 선생이 말했다.


“재민이 학교 잘 다니죠? 예비 합격자 번호가 하도 안 빠져서 재민이가 재수를 하게 되나 보네 하고 저도 포기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3차 발표에 그렇게 합격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것도 H 대도 아니고 K 대에 붙었으니 얼마나 좋으세요. 시립대에 갔으면 좋았겠지만, 경영학과라면 공부 좀 한다는 놈들은 K 대를 더 들어가고 싶어 해요. 국가에서 주는 장학금 제도를 잘 이용하면 알바 하면서 졸업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재민이 한 번 학교에 들르라고 해 주세요. 제가 이것저것 일러둘 말이 좀 있으니까요.”


반가운 목소리로 시작한 담임 선생의 말소리에 점점 힘이 빠졌다.


마주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점점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기 때문이다.


작가의말

그동안 제 글을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늘 소망과 행운이 가득한 일상이 되시길 바랍니다.


조만간 새로운 작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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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화. 현명하지 못한 선택 (3) 23.05.19 14 0 10쪽
22 22화. 현명하지 못한 선택 (2) 23.05.18 14 0 10쪽
21 21화. 현명하지 못한 선택 (1) 23.05.16 19 0 7쪽
20 20화. 전쟁 같은 날 (3) 23.05.15 18 0 13쪽
19 19화. 전쟁 같은 날 (2) 23.05.12 25 0 8쪽
18 18화. 전쟁 같은 날 (1) 23.05.11 20 0 9쪽
17 17화. 번지점프대에 서 있다 (3) 23.05.10 18 0 12쪽
16 16화. 번지점프대에 서 있다 (2) 23.05.09 20 0 8쪽
15 15화. 번지점프대에 서 있다 (1) 23.05.08 24 0 8쪽
14 14화. SKY 그게 뭐라고 (2) 23.05.06 25 0 10쪽
13 13화. SKY 그게 뭐라고 (1) 23.05.05 24 0 9쪽
12 12화. 기념이 될 성적표 (2) 23.05.03 29 0 16쪽
11 11화. 기념이 될 성적표 (1) 23.05.02 25 0 14쪽
10 10화. 입 없는 얼굴 23.05.01 24 0 13쪽
9 9화. 금쪽같은 내 자식 (2) 23.04.30 28 1 19쪽
8 8화. 금쪽같은 내 자식 (1) 23.04.29 33 1 21쪽
7 7화. 꿈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꿈이다 23.04.28 31 1 20쪽
6 6화. 수채화로 그린 사랑(2) 23.04.27 34 1 16쪽
5 5화. 수채화로 그린 사랑(1) 23.04.26 39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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