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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선생 님의 서재입니다.

슬픈 고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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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얌선생
작품등록일 :
2023.04.25 00:21
최근연재일 :
2023.05.19 16:47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677
추천수 :
10
글자수 :
128,593

작성
23.05.12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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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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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19화. 전쟁 같은 날 (2)

DUMMY

희정은 버스 정류장 두 개를 지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마디 말도, 눈짓 한 번도 주지 않고 버스에서 내리는 희정의 뒤를 따라 선오도 내렸다.


10시가 넘은 시각.

많은 상점의 불이 꺼졌고, 거리에 인적은 드물었다. 희정과 선오의 발소리만이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에 섞였다.


멀리 희정의 아파트 불빛이 보였다. 갑자기 부는 센 바람에 희정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눈을 꼭 감고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던 희정이 다시 발걸음을 떼면서 말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도민이가 아무 말 하지 말고 옆에 있어 주라고 하더라.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네가 말하든 안 하든 뭐가 달라지겠어. 그냥 편하게 말해.”


“내가 도울 건 없을까?”


희정이 눈길을 돌려 선오를 한 번 보고 긴 숨을 내쉬었다.


“누가 대신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 너도 알잖아. 그냥 죽은 듯이 버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더라. 내 몸이 땅바닥에 붙어버린 것처럼 눈을 뜨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고 듣기도 싫었어. 잠에서 깨고 나면 또 자고 계속 잠만 잤어.”


생기가 빠져나간 희정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아파트 경비실을 지나쳐 현관 앞에 멈춰 섰다. 로비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희정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얀 목도리 깊숙이 목을 파묻고 있었다.


희정이 한참 만에 입을 뗐다.


“중학교 때부터 고삼 때까지 그 많은 수업 시간에 정말 열심히 했는데, 밤 10시까지 하는 자율학습에 빠진 적도 없는데, 과외도 받고, 학원도 다니고, EBS 강의도 들었는데. 그런데 왜? 내가 잘못한 게 뭐야? 수능 시험에서 모의고사보다 서너 문제 더 틀렸을 뿐인데 입시 기관에서 발표하는 정시 배치표마다 내가 가고 싶은 대학교에 가기에는 10점이 모자라대. 겨우 서너 문제를 더 틀렸기 때문에 안 된대. 그 대학교에 가려면 내 꿈 같은 거 버리고 비인기 학과로 바꾸어야 한대. 그래도 논술 시험만 잘 보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시험장에 가서 알았어.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거. 내 옆에서 시험 본 아이는 감독관이 들어오니까 기도를 했어. 기도를 하는 손이 막 떨리더라.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도 났어. 모두 나만큼 열심히 공부했다는 걸, 나만큼 간절하게 논술 시험을 잘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어. 수학적으로 내가 시험 본 시험실에서 합격할 학생은 0.8명. 경쟁률은 50대 1이 넘는데, 그 강의실에는 40명 가까이 앉아 있었거든. 그래도 누군가는 붙을 거고 그게 나일 수도 있으니까 죽을힘을 다했어. 미친 듯이 논술 답안지를 썼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잘 써야 하니까. 답안지를 쓰다가 옆에 있는 사람들을 봤어. 여기도 저기도 새까맣게 메워진 답안지뿐이었어. 정말 정말 슬펐어.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데 길에는 온통 사람뿐이었어. 사람에 밀려 밀려 걸어갔어. 그때 알겠더라, 시험 결과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걸.”


희정이 재가 되어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항상 그녀의 눈동자에 있던 반짝이는 별이, 볼에 있던 발그레한 홍조가 없었다.


선오는 느꼈다. 그녀의 아픔은 누구도 나눠질 수 없는 것이며, 그녀가 아파해야 하는 시간과 통증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선오는 희정의 발치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로 인해 희정이 조금이나마 통증을 덜 느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둘 사이로 겨울바람이 기다란 꼬리를 매달고 지나갔다.


희정이 비밀번호를 눌렀다. 현관문이 열렸다.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희정이 문 뒤로 사라졌다.


희정의 뒷모습 위로 또 다른 희정의 모습이 겹쳤다. 수백 날, 자율학습을 마치고, 학원을 마치고, 저렇게 지친 모습으로 집으로 들어갔을 희정의 모습이었다.


핸드폰을 꺼냈다. 희정에게 위로가 될 만한 메시지라도 보내주고 싶었다. 썼다가는 지우고 썼다가는 지우고 있는데, 현관의 센서등이 켜졌다.


희정이 다시 나왔다. 선오는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황급히 주머니에 넣었다.


“왜 집에 안 갔어?”


“으응, 지금 가려고.”


“이거.”


희정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영문을 몰라 선오는 엉거주춤했다.


“이거 받아.”


희정은 선오의 손을 잡아끌어 손바닥에 작고 반짝이는 것을 올려놓았다.


“아이들이 그러더라, 여친 반지 갖고 있으면 시험 잘 본다고. 모레, 논술 시험 보잖아, 시험 잘 보면 내 덕분에 잘 본 거야.”


“그럼, 희정이 넌?”


펴고 있는 선오의 손가락을 감싸 오므리며 희정이 말했다.


“여친 반지를 가지고 있는 남자가 시험 잘 본다고 이 바보야. 내가 이 반지를 꼈는지 안 꼈는지가 아니고.”


말끝에 힘을 주며 핀잔 투로 말하는 희정의 눈을 가만히 쳐다봤다. 선오는 손가락 사이로 반지를 놓칠까 봐 손가락에 잔뜩 힘을 주었다.


“왠지 너라도 논술 시험 잘 보면, 나도 앞으로 남은 논술 시험 잘 볼 거 같아. 그러니까 시험지가 뚫어져라 시험 봐, 알았지?”


손등으로 선오의 배를 툭툭 치고는 희정이 웃으며 돌아섰다.


돌아오는 길에 선오는 반지를 주머니에 넣으면 혹시 빠질까 싶어 지갑을 꺼내 주민증을 빼고 넣었다. 반지 때문에 지갑이 불룩해졌다.




논술 시험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선오는 거실 유리창을 열었다. 빗발은 어제 저녁보다 한결 굵었다. 한숨이 나왔다.


“하필 시험 보는 날 비가 온다니. 선오야, 비 오는데 괜찮겠니?”


주방에서 엄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괜찮지. 뭐 나만 비 맞나.”


“시험만 보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비 오는 날 오토바이가 위험하다든대.”


“괜찮아, 도민이가 비 한 방울 안 맞을 비옷도 사줬어. 한 번 볼래, 엄마.”


설레발을 치며 방으로 가는 선오를 보며 엄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K 대 건물은 아직 보이지 않는데, 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험 시간이 가까워지자 운전석에 앉은 아버지와 선오의 말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에 도로에는 빨간 브레이크등 불빛만 가득했다.


집에서 두 시간이나 서둘러 나왔지만 이제는 여유가 없었다.


벌컥, 앞차의 문이 열렸다. 여학생이 차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여학생은 손에 들고 있는 우산을 펴지도 않고 차들 사이를 헤집으며 도로를 가로질러 뛰어갔다.


“안 되겠어요, 아버지. 저도 그냥 뛰어갈게요.”


“그 그럴래?”


아버지의 얼굴에 안쓰러운 감정이 그대로 담겼다. 선오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데 차들이 움직였다.


“다녀올게요.”


“그래, 시험 잘 봐라.”


움직이는 차들이 선오 때문에 움찔하며 경적을 울려댔다. 짜증스러운 기분을 선오에게 쏟아내는 것 같았다.


인도에 올라서고 나서야 선오는 우산을 펼쳤다. 사람이 너무 많아 우산을 펴는 데도 불편했다.


부딪치고 밟히면서 정신없이 걷다 보니 K 대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선오는 사람 기둥에 갇혀 걸어갔다.


가방에서 시험장 위치를 프린트한 종이를 꺼냈다. 그런데 위치도만 봐서는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보이는 건물들은 낯설었고,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시험 시간이 20분도 남지 않았다. 그때 선오의 눈에 파라솔이 보였다. 파라솔을 향해서 사람들을 비집으며 나아갔다. 예상대로 파라솔 밑에는 안내라고 적힌 띠를 맨 남자가 있었다.


안내를 해 준 남자가 손가락 끝으로 가리켜 준 언덕을 향해 선오는 뛰었다. 가방이 등 뒤에서 절그렁 절그렁 소리를 내며 요동쳤다. 우산을 받치고 있었지만, 비는 거침없이 얼굴을 때렸다. 빗물이 맺힌 안경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즐거운 글 읽기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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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0화. 전쟁 같은 날 (3) 23.05.15 17 0 13쪽
» 19화. 전쟁 같은 날 (2) 23.05.12 23 0 8쪽
18 18화. 전쟁 같은 날 (1) 23.05.11 19 0 9쪽
17 17화. 번지점프대에 서 있다 (3) 23.05.10 18 0 12쪽
16 16화. 번지점프대에 서 있다 (2) 23.05.09 19 0 8쪽
15 15화. 번지점프대에 서 있다 (1) 23.05.08 24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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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3화. SKY 그게 뭐라고 (1) 23.05.05 23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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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화. 기념이 될 성적표 (1) 23.05.02 25 0 14쪽
10 10화. 입 없는 얼굴 23.05.01 24 0 13쪽
9 9화. 금쪽같은 내 자식 (2) 23.04.30 26 1 19쪽
8 8화. 금쪽같은 내 자식 (1) 23.04.29 30 1 21쪽
7 7화. 꿈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꿈이다 23.04.28 30 1 20쪽
6 6화. 수채화로 그린 사랑(2) 23.04.27 34 1 16쪽
5 5화. 수채화로 그린 사랑(1) 23.04.26 39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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