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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선생 님의 서재입니다.

슬픈 고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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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얌선생
작품등록일 :
2023.04.25 00:21
최근연재일 :
2023.05.19 16:47
연재수 :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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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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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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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3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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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9화. 금쪽같은 내 자식 (2)

DUMMY

다음 날. 자영이 학급 조회에 들어가는데, 진수 어머니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 어제 재호 아버지하고는 얘기가 다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학교에 갈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짤막한 내용의 메시지였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순조롭게 해결된 것 같아 한달음에 교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진수의 자리는 비어있었고, 재호는 조회 시간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학급 분위기는 심해처럼 무거웠다. 자영은 자신의 기대가 섣불렀음을 느꼈다.


옆 반인 7반 교실 문을 두드렸다. 학급 조회를 하고 있던 홍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경수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무실에 오니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동그란 얼굴, 눈꼬리가 처진 눈을 보고 자영은 한 눈에 재호 아버지임을 알아차렸다.


애초에 진수 부모님과 만나기로 한 11시에 맞춰오겠다고 한 터라 자영은 의아했다.


한참 머뭇거리던 재호 아버지는 힘없이 말문을 열었다.


“어제 찾아간 길에는 진수 부모님을 직접 뵙고 사과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실은 만나주시질 않더라고요.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밤늦게 진수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어요. 금쪽같은 자식이 다쳤으니 부모 된 마음에 얼마나 맘이 상하겠어요. 저라도 화가 나서 막말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진수 어머니의 요구는 좀 지나친 거 같습니다. 20년 동안 치료할 돈을 내라니요. 이빨을 다친 건 평생 치료비를 받아야 하는 거지만, 제 사정을 봐서 20년 치 치료비만 받겠다고 삼천만 원을 내랍니다. 돈을 안 주면 경찰에 재호를 신고하겠답니다. 그리고 오늘 학교에 오지는 않으시겠다고 저보고는 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하더군요.”


자영은 귀를 의심했다. 치료비는 당연히 감당해야 했다. 그런데 삼천만 원이라니, 그 액수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재호야 며칠 자고 나면 멀쩡해지겠지만 그 아이에게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으니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돈이 있으면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삼천만 원이든 사천만 원이든 주면 끝인데. 누굴 탓하겠어요. 돈 없는 부모를 둔 놈이 잘못이지, 물어줄 돈도 없으면서 주먹질을 한 놈이 잘못이지.”


자영은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없어 무릎 위에 놓인 재호 아버지의 손만 쳐다보았다. 오리발처럼 주름지고 꺼칠한 손이었다.


“진수 어머니가 저에게 그러시더라고요. 형식적인 사과는 받았으니까, 저희 사과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치료비 내는 걸 보면 알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그리고 결정이 나면 그때 전화하랍니다. 오래 기다리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더라고요.”


재호 아버지는 말끝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하셨어요?”


얼떨결에 나온 말에 자영은 아차 싶었다. 남의 집 불구경이나 하듯이 무책임한 말을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수습할 말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재호 아버지가 말했다.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삼천만 원이 아니라 삼백만 원도 마련하기 어려운 걸요. 재호 살리겠다고 우리 세 식구가 살고 있는 지하방 보증금을 빼고 나면 저흰 어디서 살겠어요. 재호는 자기가 벌인 일이니까 자기가 책임지겠답니다. 그래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죠. 솔직히 그 방법 말고는 우리 식구들이 살 방법도 없고요. 가난한 아버지 만난 것도 지 놈이 감당해야 할 운명인 걸 어쩌겠습니까.”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재호 아버지는 죄송하다며 허리를 굽혔다. 진수 부모님을 설득해 보겠다는 자영을 두 손으로 만류했다.


“그러지 마세요, 선생님. 재호하고 진수네 대문 앞에서 두 시간이 넘게 기다려도 문조차 열어주지 않은 분들이에요. 힘겹게 살다 보니까 제가 사람 보는 눈은 좀 있는데, 사정하고 애걸복걸한다고 해서 들어주실 분들이 아닙니다. 선생님까지 험한 꼴 당하시면 재호가 더 힘들어 할 겁니다. 재호가 저에게 부탁을 하더라고요, 선생님만큼은 힘들지 않게 해달라고요. 그동안 제 부족한 아들, 잘 보살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팔을 붙잡은 자영의 손이 재호 아버지의 힘없는 표정을 대하자 스르르 풀렸다. 교무실을 나서는 재호 아버지의 처진 어깨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오전 내내 머리가 아파 자영은 점심 식사도 거른 채 강당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늦은 여름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뙤약볕 아래 앉아 있는 자영이 이상했는지 지나가는 아이들이 인사를 하고는 고개를 꺄우뚱거렸다.


“선생님.”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필규가 다가오고 있었다.


“교감 선생님께서 1층 교무실로 오시래요.”


벤치에서 일어서는데 핑 현기증이 났다. 필규가 자영을 부축했다. 자영은 필규의 손을 풀고 구름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1층 교무실로 들어서는 자영을 발견하고 교감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채 선생님, 교장 선생님이 찾으세요. 같이 갑시다.”


교장실에 먼저 와 있던 학생부장 선생님이 자영에게 교장 선생님과 가까운 자리를 권했다.


“어제 채 선생님 반에서 일어난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다친 학생의 부모가 치료비로 삼천만 원을 요구했다고요. 그리고 때린 학생의 생활 형편이 그 돈을 감당할 형편이 못 된다고 들었는데···”


교장 선생님의 말에 자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선배 교사로서 채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런 일은 담임을 맡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고, 또 채 선생님이 지혜롭게 대처를 잘 해주셨다는 겁니다. 이 점 교장으로서 감사를 드립니다. 아쉬운 건 학교 입장에서는 부모님끼리 원만하게 해결되길 바랐는데, 더 이상 그걸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이 됩니다. 담임으로서 학급 아이들을 보호하고 싶은 채 선생님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지만, 이런 결정을 내린 교장의 마음도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결정을 내렸다? 이해해 달라? 자영은 긴장했다. 그 뒤로 이어질 말이 좋은 내용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런데 학교의 방침을 언급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빠르지 않은가.


교장 선생님은 자영의 도전적 눈초리를 외면하고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은 우정을 나누어야 할 친구인 두 학생이 주먹질을 했고,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고소까지 운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이것이 명백하게 학교 폭력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폭력에 대한 학교의 방침은 단호합니다. 그건 채 선생님도 잘 아실 겁니다. 저는 교장으로서 두 학생을 퇴학 조치할 것입니다. 물론 학교의 공식적 입장은 적법한 절차를 거치고 난 다음에 부모님들께 전달이 될 겁니다. 퇴학 처리를 함으로써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교장인 제가 집니다.”


자영은 너무 놀라 벌떡 일어설 뻔했다. 거대한 손이 목덜미를 조르는 것 같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북받치는 감정 때문에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교장선···”


간신히 입을 떼는데, 누군가 팔을 움켜잡았다. 학생부장 선생님이었다. 학생부장 선생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만 나가들 보세요.”


교장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팔을 잡아끄는 학생부장 선생님에게 이끌려 상담실로 왔다.


자영은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진수와 재호가 퇴학을 당하게 되었는데, 담임으로서 말 한마디 못 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절차도 무시하고, 해결을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학생의 징계만 운운하는 학교의 태도에 화가 났다. 교육 현장에서 교육은 실종되고, 최소한의 배려와 관용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몸담고 있는 학교가 이런 곳이었나 하는 실망에 점점 분노가 치밀었다. 너무 분해 눈물이 흘렀다. 앙다문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눈물을 꾹꾹 억누를수록 퇴학만은 막겠다는 각오가 가슴속을 채웠다.


자영은 학생부장 선생님이 내미는 휴지를 외면했다.


선생님의 입 끝이 살짝 올라가며 미소가 번졌다.


“채 선생님, 교장 선생님이 퇴학시키라고 한 이유를 정말 모르겠어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자영의 눈에 의아한 빛이 담겼다.



다음 날.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 자영을 보고 김 선생이 아는 척을 했다.


“채 선생, 방금 생활지도부실에 진수 부모님이 들어가시던데. 얼굴 표정이 영 안 좋더라. 채 선생은 거기 안 가 봐도 돼?”


입에 물고 있는 밥알이 곧추서는 것 같았다.


“글쎄요. 교감 선생님이 담임은 학교 폭력 위원회에만 참석하면 된다고 하셔서요.”


교장실에까지 들어갔다는 진수 부모님은 자영에게 들르지 않고 돌아갔다. 담임인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진수 부모님의 태도가 불쾌했지만, 부담스러운 자리를 피했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재호는 경찰의 조사를 받지 않았다. 진수의 임플란트 치료비는 재호네에서 부담하고, 차후의 치료비는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재호와 진수는 퇴학 처분을 받지 않았다.


모든 게 학생부장 선생님의 예상대로였다. 재호와 진수를 퇴학시키겠다는 학교 측의 강수가 진수 부모님의 고소와 과도한 치료비 요구를 제지시킨 것이다.



싸움이 있은지 꼭 일주일이 지났다.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학급 분위기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여전히 비어있는 진수의 자리 때문이었다.


재호는 그 빈자리를 멍하니 바라볼 뿐 하루 종일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며칠 전, 부기도 거의 가라앉고 해서 조만간 학교에 나오겠다고 한 전화 통화 이후로 진수와는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쌍둥이 동생 경수도 등교를 하지 않았다.


자영은 불안했다. 교감 선생님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그 불안이 마침내 현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채자영 선생님, 지금 진수 어머니께서 전학 서류를 들고 오셨어요. 제 자리로 잠깐 내려오셔야겠어요.”


계단을 내려가는데, 자영은 다리가 비척거려 넘어질 뻔했다. 내내 자영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 가운데 전학은 없었다. 아들들에게 끔찍한 부모이기에, 아들들에게 해가 될 게 뻔한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제쳐두었었다.


“진수 어머니, 서류에 담임 도장 찍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겠어요. 하지만 이건 진수와 경수를 위해 절대 바람직한 게 아닙니다.”


자영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은 진수 어머니는 자영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턱을 치켜들고 모로 앉은 자세를 전혀 흩트리지 않았다.


자영은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진수하고 경수는 고등학교 2학년 2학기예요. 그런데 전학이라니요. 제법 멀리 이사를 가도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전학만은 시키지 않는 나이입니다. 어머니께서는 다른 아이들이 손가락질하고 왕따 시킬 거라고 하시는데, 우리 학교에 그런 나쁜 애들 없습니다. 그럴 나이도 아니고요. 정 못 미더우시면 저와 여기 계신 홍 선생님이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리고 진수 어머니 그 전학이라는 거, 아무 때라도 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일단 진수와 경수를 학교에 보내시고 좀 지켜보시다가 그때 가서 결정을 하셔도 됩니다. 어머님, 제발 ······.”


진수 어머니는 노골적으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자영을 외면하고 교감 선생님에게 말했다.


“교감 선생님, 저희 아이들을 전학시키는데 절차상 뭐 잘못된 게 있나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교감 선생님이 말을 받았다.


“사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2학년 2학기 때는 전학을 가지 않습니다. 고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새 학교에 적응하고, 새 친구를 사귀려면 아무래도 공부의 맥이 끊기지 않겠습니까. 담임인 채 선생님이나 홍 선생님으로서는 진수나 경수를 생각해서 당연히 말리고 싶은 거죠.”


“교감 선생님, 이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도대체 얼마나 더 큰 일이 생겨야 특별한 경웁니까. 그리고 저희 진수나 경수를 생각하시는 분들이라면 그렇게 행동하시지 말았어야죠. 한 번 따져보세요. 잘못도 없는 아이를 퇴학시키겠다고 하는 선생님들이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겠습니까, 아니면 부모가 자식의 장래를 더 생각하겠습니까?”


말끝에 진수 어머니는 불쾌감이 잔뜩 담긴 눈으로 자영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은 자영에게 벽이었다. 그것이 오해에서 비롯되었든, 진수 어머니의 말마따나 자영과 학교의 잘못된 행동에서 비롯되었든.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 예감을 떨쳐버리려는 듯 자영은 매달렸다.


그런 자영의 행동에 대해 진수 어머니는 시종일관 싸늘한 시선과 상처가 되는 말로 대응했다.


자영과 진수 어머니의 지루한 공방에 교감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채 선생님, 선생님 말대로 아이들이 전학 가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부모님께서 이렇게 절차를 밟아 오시면 학교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물론 이 시점에서 전학을 가는 게 아이들의 장래에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진수의 입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학교에 나오는 게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진수의 장래를 염려하는 선생님의 맘을 진수 어머니인들 왜 모르겠습니까. 허나, 진수 어머니의 뜻 또한 확고하신 것 같습니다.”


자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만난 벽 또한 허물 수도 넘을 수도 없는 것인가. 벽의 높이도 가늠치 못하고 그 견고함만 확인한 채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인가. 피할 수 없는 답답함이 에워쌌다.


전학 서류에 이름을 쓰고 도장 한 번 찍는 게 무슨 큰 의식이나 된다고 자영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하고 싶은 말을 목 뒤로 삼키며 진수 어머니에게 고개만 숙였다. 진수 어머니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진수와 경수는 전학을 갔다. 신발을 밟은 사소한 사건이 눈덩이처럼 구르고 굴러 어린 가슴에 선명한 상처를 주고받으며 익숙하고 정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마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출석부 첫 장에 있는 아이들 이름 가운데 ‘김진수’, 세 글자를 수정테이프로 지웠다. 자영의 가슴 한구석에 또 하나의 시퍼런 멍이 들었다.


출근하려고 화장을 서두르다가 불쑥, 지하철에서 낯선 교복을 입은 남학생과 스치다가 불쑥, 출석부를 펼칠 때마다 불쑥, 수업 시간 진수의 빈자리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불쑥, 그 멍이 새파래지며 징징 울렸다.



단풍이 돌아온 교정 여기저기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신이 내려준 망각이라는 명약 덕분에 교실은 활기를 되찾았고, 출석부 첫 장에 있는 수정테이프 자국도 더 이상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진수’라는 이름은 불에 덴 상처처럼 흉터로 남았지만, 그로 인해 더 이상 아파하지 않을 때였다.


하늘색 편지 봉투가 자영의 책상에 놓여있었다. 받는 사람을 쓰는 곳에는 ‘2학년 8반 나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사람을 쓰는 곳에는 ‘김진수’라고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편지 봉투를 손에 쥐니 진수의 손을 잡은 것 같았다.


종례를 하기 위해 자영이 교탁 앞에 섰다. 수업을 마쳤다는 아이들의 흥분은 소란스러움으로 바뀌어 교실 안에 가득했다. 평소 같으면 칠판이라도 두드려 그 소란스러움을 가라앉혔겠지만 자영은 아무 말 없이 손에 쥔 칼로 봉투의 끝을 잘랐다.


하늘색 봉투 속에는 연한 하늘색 편지지가 들어있었다. 반듯한 글씨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손 편지였다.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이 안개가 걷히듯 사그라졌다.


“받는 사람 2학년 8반 나의 친구들, 보내는 사람 김진수.”


자영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잘 지내고 있지, 친구들아. 오늘로 내가 너희들 곁을 떠난 지 꼭 백 일이 됐어. 사람 일이라는 거 모른다더니 정말 그런 거 같아. 내가 학교를 떠나게 될지, 또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될지 생각도 못 했잖아. 갑자기 너희들 모습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백 일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내가 떠올린 모습 그대로지? 학교가 뭐 다 그렇더라. 나는 우리 학교만 좋은 줄 알았는데, 여기 학교도 좋아. 우리 학교보다 운동장도 넓고 밥도 맛있고. 친구도 몇 명 사귀었는데 좋은 아이들 같아. 우리 학교보다 공부도 잘한대. 그래서인지 수업 시간에 무지 진지해. 왜 우리들은 좀 시끄럽잖아. 우린 활발한 거라고 우겼지만 말이야. 내 걱정 많이 했지? 설마 안 한 건 아니겠지? 이젠 걱정 마. 우리 학교보다 조금은 못하지만 그래도 꽤 좋은 거 같아. 후후. 게다가 내 성격이 훌륭하잖아 사교성은 굿이고 후후후. 딱 하나. 여기엔 진표도, 선철이도, 필규도, 정모도, 도형이도, 해영이도, 재호도, 원엽이도 없다는 거 그거 딱 하나가 아쉽긴 해. 친구들아 섭섭해 하지 마. 우리 반에서 못생긴 아이들 이름만 대표로 썼으니까. 아 참 우리들의 담임 샘 자두 샘을 뺐네. 자두 샘이 자두같이 얼굴 빨개져서 잘 삐져도 이 정도 일로 삐지지는 않으시겠지? 그리고 친구들아 우리 반 단톡방으로 초대해줘서 고마워. 근데 나 그 방 안 들어갈 거야. 학교가 달라서도 아니고, 너희들이 하는 이야기에 끼지 못해서도 아니야. 그냥 너희들이 너무 보고 싶어지더라. 공부도 못하고 잠도 못 자게 하더라. 그래서 그러는 거야. 다시는 우리 교실 내 자리에서 너희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쉽지만 달리 생각하면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던 건 행운이고 축복이었어. 친구들아 고마웠다. 잊지 않을게. 참 내 자리에 아직 아무도 안 앉는다고? 그 자리는 인기도 많아지고 성적도 쑥쑥 오르고 친구가 넘쳐서 생일날 선물도 무지 많이 받는 자린데. 이제 내 자리에 앉는 거 허락할게.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나도 너희들에게 미안해하지 않을게. 나의 친구들아 대학 캠퍼스에서 만나자. 그때 내가 큰소리로 이름을 불러도 놀라지 마라. 너무 부르고 싶은데 부르지 못해서 그러는 걸 테니까. 항상 너희들 곁에 있는 영원한 친구 진수가. Adios Amigo(아디오스 아미고)’


투둑 투둑. 유리창에 부딪히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더니 자국을 따라 흘러내렸다.


하늘색 편지지는 어두워지는 날씨에 눈물에라도 젖는 듯 짙게 변해갔다. 편지지를 접어 봉투에 넣는데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자영은 편지지를 코끝에 가져갔다. 상큼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건드렸다. 자영은 진수가 편지지에다가 향수를 뿌리는 장면을 떠올렸다. 자영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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