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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선생 님의 서재입니다.

슬픈 고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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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얌선생
작품등록일 :
2023.04.25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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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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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5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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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전쟁 같은 날 (3)

DUMMY

선오가 논술 시험을 보는 17시험실은 3층이었다. 수험표가 붙은 자리에 털썩 앉아 선오는 숨을 몰아쉬었다.


시험실에 들어오기 전에 머리와 얼굴을 적신 빗물을 수습하고 싶어 화장실에 갔지만, 화장실에 들어찬 사람들을 보고 포기했다.


선오는 책상 위에 떨어진 빗물을 닦기 위해 가방 속을 뒤졌다. 논술 교재와 필기도구밖에 없었다. 교재라도 찢어서 닦아야 하는지 망설이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이걸로 좀 닦아요.”


오른쪽 자리 앉은 남자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얼핏 보아도 선오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였다.


“괜찮아요.”


고개를 숙여 사양하는데 남자가 말했다.


“시험 금방 시작하는데, 물기를 말리기에는 너무 많이 젖었어요.”


“아, 예, 감사합니다.”


선오는 손수건을 받아 안경과 얼굴, 머리카락을 닦고 책상을 닦았다. 돌려주는데 손수건이 물에 빠졌던 것처럼 흠뻑 젖어있었다. 돌려주는 손이 부끄러웠다.


남자는 손수건을 받아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고맙다는 선오의 말에 남자는 씩 웃었다.


시험실을 둘러보았다. 자리는 듬성듬성 비어있었다. 담임 선생님의 말 그대로였다.


“논술로 대학을 가려면 무조건 수능 시험을 잘 봐야 해. 논술 시험으로 대학을 가겠다고 지원해 놓고 수능 점수가 낮아서 최저 학력 기준에 미달한 아이들은 논술 준비를 아무리 많이 하고 또 논술을 아무리 잘 써도 자격이 되지 않아. 논술 시험의 경쟁률이 대개 40대 1에서 100대 1인 거는 너희들도 알지? 그런데 실질 경쟁률은 그렇지 않아. 최저 학력 기준을 맞추지 못한 아이들을 빼면 경쟁률이 절반 정도로 준다고 봐야 해. 그래서 논술 시험장에 가면 최저 학력 기준을 맞추지 못한 친구들의 자리가 많이 비는 거야.”


선오는 국어와 탐구 과목으로 K 대학과 D 대학의 최저 학력 기준을 맞췄다.


담임 선생님의 말이 맞다면, 선오는 지원자의 절반 안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실질 경쟁률은 K 대학이 40대 1 정도, D 대학이 15대 1 정도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경쟁률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해도 K 대학의 40대 1은 어려울 것 같아 선오는 K 대 논술 시험을 포기하려 했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면 혹시 모르는 거 아니냐는 아버지 말씀에, 또 K 대 시험으로 경험을 쌓으면 오후에 보는 D 대 논술 시험에 유리하지 않겠느냐는 어머니 말씀에 하루에 두 개의 논술 시험을 보기로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선오에게 중요한 것은 오후에 있는 D 대 논술 시험이었다. K 대학에 비해 D 대학의 실질 경쟁률이 낮을 뿐만 아니라 논술 학원에서도 D 대학의 문제 출제 경향에 초점을 맞추어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감독관들이 들어왔다. 문제지가 배부되었다.


대학입시 논술 시험으로는 첫 번째인데도 선오는 걱정했던 것보다 긴장되지 않았다. 어차피 합격할 가능성이 희박한 시험이기에 그런 것 같았다. 경험 삼아 K 대 시험을 보러 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지에 꽉 차게 지문은 길었고, 문제도 길었다.


추상적인 어휘들로 채워진 글들을 선오는 양미간에 세로 주름을 잡고 읽어 내려갔다.


“논술 시험이라는 거 대학교수들한테 갖다줘도 못 푼다잖아. 특히 일류대라고 뻐기는 대학들의 논술 시험은 가관이야. 출제한 교수들 말고는 다른 교수들은 답으로 뭘 써야 할지도 모른대. 그걸 고등학생들에게 풀라는 게 말이 되냐고. 죽어라고 어렵게 문제를 내야 지들을 더 대단하게 볼 거라는 오만함이 문제에 철철 넘치지. 그래도 어쩌겠어 대학에 가야 하는 너희들이 ‘을’이지······”


논술 학원 첫 수업에서 강사가 한 말이다.


선오는 처음에 논술 문제를 받아들고 막막해서 손도 못 댔었다. 다행히 점점 논술 문제에 적응해갔고, 선오는 잘 쓴다고 칭찬도 받았다. 엄마, 아버지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비싼 학원비를 낸 효과가 있었다.


선오는 이 논술 학원비가 오랫동안 가족들을 숨 막히게 했던 사교육비 가운데 마지막 학원비가 되길 간절히 바랐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한 답안을 쓰고, 선오는 뿌듯했다. 학원에서 수업받은 데로 잘 써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감에 차서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답안을 써 내려갔다. 한참 쓰다가 선오는 아차 싶었다.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의견을 묻는 문제에 뻔한 생각을 적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오의 답안에는 사회 발전에의 기여, 인도적인 차원, 포용 등의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학원 선생님의 말이 귓전을 때렸다.


“답안지 수십 장 가운데 뽑히는 한 장의 내용은 어떨까? 시험 보는 아이들과 비슷하게 쓰는 답은 바로 쓰레기통이야 쓰레기통. 수십 장 답안지 가운데 뽑히는 한 장이 되려면 승부를 걸어야 돼. 예를 들어, 남들이 대개 이런 내용으로 쓸 거 같으면, 무조건 반대 입장을 내세워. 그게 니들 생각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일단 다른 아이들의 답안지와 차별이 되어야 해. 그걸 논리적으로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는 그 다음 문제야. 논리적으로 꿰맞추면 그게 바로 창의적 사고가 되는 거고, 합격이 되는 거야. 창의적이라는 게 뭐 별건 줄 알아. 남들과 다르면 그게 창의적인 거야. 알았어?”


학원 선생님의 말대로 선오의 답안지는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내용이 뻔한 답안지일 것 같았다.


시계를 보았다. 수정해서 쓰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선오는 쓰던 걸 멈추고 멍하니 답안지를 쳐다보다가 오른쪽 남자를 보았다. 책상 위에 바짝 엎드려 답안을 쓰는 데 여념이 없었다.


선오는 재킷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희정이 준 반지가 두툼하게 만져졌다.


반지를 꺼냈다. 반지는 약지에 끼기에는 작았다. 좀 헐렁했지만 반지를 새끼손가락에 껴보았다. 한결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작성을 마친 답안지를 들춰보았다. 1번 문제에 대한 답안을 제외하고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험 시간이 5분 정도 남았다.


선오는 답안지를 미리 정리했다.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답안지를 마무리하느라 열에 들뜬 얼굴들이었다.


왼쪽 사선으로 앉은 여자가 갑자기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신음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린 감독관과 선오의 눈이 마주쳤다.


선오는 필기도구를 가방에 넣었다. 이제 시험이 종료되면 누구보다도 먼저 시험장 빠져나갈 준비를 마쳤다.


종료를 알리는 차임벨이 울렸다.


선오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면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가 가지 않았는데,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선오의 목소리는 급했다.


“방금 시험 끝났어요. 아저씨는 어디 계세요?”


퀵 아저씨의 목소리도 덩달아 급했다.


“오토바이는 못 들어가게 막아서 학교 안으로 못 들어갔어. 지금 내가 어디 있냐 하면, 학생이 경영관에서 시험 본다고 했지? 거기가 언덕 같은 데로 쭉 올라가면 있잖아. 그러니까 경영관 건물을 나오자마자 언덕 내리막으로 곧장 내려와, 건물 세 개 지나면 왼쪽에 동문회관이라는 간판이 붙은 건물이 있는데 그 앞에 내가 있어. 빨간 오토바이야. 지금 사람들이 막 나오니까 빨리 와야 해. 그래야 빠져 나가기 쉬어.”


주변이 시끄러운지 퀵 아저씨가 악을 쓰듯이 말을 해서 또렷하게 들렸다.


계단을 한달음에 내려온 선오는 회전문을 향해 달렸다. 회전문 바로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선오의 오른발이 귀를 찢는 마찰음을 내면서 쪽 미끄러졌다. 바닥에 떨어진 빗물을 밟은 것이다. 선오는 필사적으로 두 팔을 저어 나동그라지려는 몸을 간신히 가눴다. 빠작. 그 결에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지며 액정이 거미줄처럼 박살이 났다.


선오는 창피했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겨를 없이 핸드폰을 주워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건물 밖으로 막 나온 선오는 우산을 시험실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산을 가지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선오는 아까보다 한층 굵은 비가 내리는 언덕길을 냅다 뛰어 내려갔다.


동문회관 건물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건물 앞에 꽤 많은 퀵 오토바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오가 뛰어가자 헬멧을 쓴 아저씨들이 너나 할 거 없이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댔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아이들을 태우고 출발하는 오토바이들의 엔진 소리로 아수라장이었다.


‘최선오, 최선오, 최선오’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노란 헬멧을 쓴 아저씨 앞으로 뛰어갔다.


“네가 최선오냐?”


“예.”


“빨리 타라.”


올라타려는데, 아저씨가 소리를 질렀다.


“우비 없니?”


가방을 열어 비옷을 꺼내는데, 빗물이 가방 속으로 들이쳤다. 우왕좌왕 비옷을 입는 선오를 아저씨가 거들었다.


“아이고, 벌써 많이 젖었구나. 아니 아니, 먼저 팔부터 껴야지. 그래 그래, 이제 헬멧 쓰고 단추 채워라. 됐다. 올라 타 봐라. 아저씨 허리를 잡지 말고, 다리 사이에 끈 있지? 그래, 그 끈을 꽉 잡고 머리를 아저씨 등에 기대라. 비가 와서 미끄러우니까 끈 꽉 잡아야 한다. 대학 시험 보는 게 무슨 전쟁 난 거 같구나.”


오토바이에 시동이 걸렸다. 이마를 댄 아저씨의 등은 비에 잔뜩 젖어 축축하고 차가웠다. 비옷 위로 우둑우둑 비가 떨어졌다.


옆 오토바이에 타고 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노란색 비옷을 입은 여학생이었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보이는 가느다란 눈에 겁이 잔뜩 담겨있었다.


선오는 자신의 모습도 똑같으리라고 생각했다.


오토바이가 움직이자 여학생은 눈을 질끈 감았다.


뒤따라 선오가 탄 오토바이도 출발했다. 오토바이가 가다 서다를 반복할 때마다 몸이 심하게 쏠렸다. 놀란 선오는 끈을 잡은 팔에 힘을 잔뜩 주었다. 그랬는데도 오토바이가 멈칫할 때마다 선오의 얼굴은 아저씨의 등에 눌려 일그러졌다.


동문회관 앞으로 해서 K 대를 빠져나오는 길은 차와 오토바이,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간신히 도로로 나와도 마찬가지였다. 시험이 끝난 아이들을 태우러 온 차들과 지나는 차들이 뒤엉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오토바이들은 뒤엉켜 있는 차 사이의 좁은 틈으로 아슬아슬 빠져나갔다.


빵! 빵! 빵! 빵!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클랙슨이 울렸다.


“학생! 학생!”


아저씨가 하는 말은 주변의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선오가 큰소리로 되물었다.


“왜요?”


“D 대에 한 시까지 가야 한다고 했지?”


“예.”


“이러다가 늦겠어. 꽉 잡아.”


아저씨의 말과 동시에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커졌다. 선오를 태운 오토바이가 왼쪽으로 급하게 껴들었다.


빵! 빵! 빵!


뒤차가 위협적으로 클랙슨을 울렸다. 아저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토바이를 중앙선 쪽으로 몰았다.


노란 중앙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진행하는 차와 차 사이의 틈은 훨씬 넓었다. 그 틈으로 노란 중앙선을 밟으며 오토바이가 속력를 내기 시작했다.


선오는 빠르게 스치는 반대편 차와 부딪칠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꽝!!!!


앞에서 도끼로 철판을 내리찍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선오의 얼굴이 아저씨의 등에 무섭게 부딪쳤다. 선오의 몸이 오른쪽으로 날았다. 끈을 잡고 있던 손이 힘을 이기지 못해 끊어지듯 풀렸다. 주변의 사물들이 눈앞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선오의 오른쪽 팔꿈치에서 첫 번째 스파크가 일었다. 통증이 팔 전체를 찌르는데, 두 번째 스파크가 등에서 번쩍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학생! 학생! 괜찮아?”


선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학생! 괜찮아?”


빗물이 얼굴로 떨어졌다.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퀵 아저씨였다. 말을 하려고 몸을 뒤척이는데, ‘악!’, 무시무시한 통증이 몸을 덮쳤다. 평행봉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을 때보다 백배는 더 강했다.


“만지지 마세요. 119 불렀으니까 금방 올 거예요.”


“119 올 때까지 절대 가만둡시다.”


“학생이 비에 젖어서 추울 텐데, 이걸로 좀 덮어주세요.”


처음 듣는 목소리들이었다. 하나 같이 소리가 컸고 다급했다.


모포 비슷한 것이 선오의 몸을 덮었다. 바닥으로부터의 올라오는 축축한 기운은 여전했지만, 한결 포곤했다.


선오가 왼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허전했다. 희정이 준 반지가 없다. 등 뒤에 맸던 가방도 없다. 그제야 선오는 D 대학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행복한 글 읽기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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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화. 전쟁 같은 날 (3) 23.05.15 18 0 13쪽
19 19화. 전쟁 같은 날 (2) 23.05.12 23 0 8쪽
18 18화. 전쟁 같은 날 (1) 23.05.11 20 0 9쪽
17 17화. 번지점프대에 서 있다 (3) 23.05.10 18 0 12쪽
16 16화. 번지점프대에 서 있다 (2) 23.05.09 19 0 8쪽
15 15화. 번지점프대에 서 있다 (1) 23.05.08 24 0 8쪽
14 14화. SKY 그게 뭐라고 (2) 23.05.06 24 0 10쪽
13 13화. SKY 그게 뭐라고 (1) 23.05.05 24 0 9쪽
12 12화. 기념이 될 성적표 (2) 23.05.03 27 0 16쪽
11 11화. 기념이 될 성적표 (1) 23.05.02 25 0 14쪽
10 10화. 입 없는 얼굴 23.05.01 24 0 13쪽
9 9화. 금쪽같은 내 자식 (2) 23.04.30 27 1 19쪽
8 8화. 금쪽같은 내 자식 (1) 23.04.29 30 1 21쪽
7 7화. 꿈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꿈이다 23.04.28 30 1 20쪽
6 6화. 수채화로 그린 사랑(2) 23.04.27 34 1 16쪽
5 5화. 수채화로 그린 사랑(1) 23.04.26 39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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