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놈이 장땡! (수정)
침묵은 아주 길었다.
아니 정확하게 침묵이 유지된 시각이 오래되었다기보다는, 그 시각이 얼마든지 간에 그 순간이 내겐 억겁과도 같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이 여사의 행동은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도발이 아니라, 그 안에는 내가 짐작하지 못할 무엇이 숨어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졌다는 느낌이다.
“이 보좌관.”
“예. 사모님.”
“황 의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솔직하게 말씀드려야겠지요?”
“그래.”
“사모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이 건을 두고 황성태 의원님을 테스트할 생각이었습니다.”
“테스트? 테스트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테스트란 단어에 이 여사가 예민한 반응을 보였고, 동시에 허리를 숙여 얼굴을 내 쪽으로 바짝 내밀었다.
순간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은은하면서도 매혹적인 향이 내 코를 간지럽혔다.
“제가 판단하기에 직선제 개헌 건은, 투자한 노력 대비 효용성이 엄청날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저는 황 의원님께 이 건을 강하게 밀어붙일 생각입니다.”
“응.”
“의원님께서 제 설명을 들으시면 충분히 그 효과를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의원님께서 이 사안의 중요도를 인식하지 못하신다면 그때는···.”
“그때는 뭐?”
“의원님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을 생각입니다.”
이 말까지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황성태 의원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는다는 말은, 보좌관 자리를 내놓겠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여사께서, 이런 대답이 내 입에서 나오길 기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 기대할 게 없단 말이지?”
“죄송합니다.”
“아니, 이 보좌관이 죄송해할 일이 아니지. 그 인간이 국회의원으로 또 남편으로 자격 없는 인간일 뿐이지.”
근래 갑자기 부부 사이가 소원해질 일이 생긴 건지, 아니면 지난번 이 여사를 만났을 때는 체면을 차렸던 건지 모를 일이다.
지난번 만나서 황성태 의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는 분명, ‘우리 의원님’ ‘의원님’이라 불렀던 거로 기억한다.
그런데 오늘 이은미 여사의 입에서 나온 말에는, 황성태 의원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처지에 이 여사를 향해, 황성태 의원과 사이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지를 물어볼 수도 없다.
“그래. 이제 다른 이야기 잠시 좀 해보자. 이 보좌관, 수진이가 아예 마음에도 없어?”
“예? 아, 아닙니다. 그래서가 아니라···.”
“수진이가 홀딱 벗고 덤벼들었는데도, 손도 대지 않았다면서? 혹시 이 보좌관 거기에 문제가 있는 건 아냐?”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러면 말이 안 되잖아. 여자인 내가 보기에도 수진이 정도면 예쁠뿐더러 성적인 매력이 흘러넘치는 여자잖아. 그런 여자가 한밤중에 알몸으로 대시하는데, 그걸 밀어낸다는 게 말이나 돼? 이 보좌관이 황진이를 물리친 화담 서경덕 선생이라도 되겠단 거야?”
드디어 속으로 만세 부를 일이 생겼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언젠가는 황 의원 부인인 이은미 여사와 몸을 섞게 될 거로 생각하고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내 판단으로 지금 내 처지에서, 나를 구원하고 우리 집안을 일으키기 위한 유일한 동아줄이 이 여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전 상황처럼, 이 여사가 나를 유혹하는 분위기에서 내가 그 유혹에 넘어가는 식은 아니다.
이은미 여사와 몸을 섞더라도, 이 여사가 나를 꼭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나를 묶어두는 방편으로 몸을 섞는 일종의 거래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쪽이다.
그랬기에 내가 비싼 몸이란 사실을, 이은미 여사에게 각인하는 게 우선이다.
그 기회가 지금 찾아온 것이고, 동시에 이 여사에게 나를 차지할 방법을 알려줄 기회다.
“지난번 사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김수진 비서가 황 의원님 내연녀라고 하셨습니다.”
“황성태하고 잔 여자라는, 그 이유로 거부한 거야? 혹시 더러운 여자란 생각에?”
“아닙니다. 제 친구 중에는 술집 여자와 잠자리를 가지는 친구도 한둘이 아닌걸요.”
“그러면?”
“사모님께서 김수진 비서를 얼마나 믿으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직 김 비서가 한편이라는 확신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 비서와 그런 관계가 된다면, 이후 제가 어떻게 처신하게 될지 불확실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 이야기했으니, 이 여사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알아챘을 것이다.
“우리 이 보좌관이 정말 순진하긴 순진하네.”
“예?”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자는 자기가 몸을 준 사내를 잊지 못하는 법이야. 그리고 몸을 준 사내중에도, 젊고 강한 사내에게 끌리는 법이지. 그런 점을 생각한다면, 걱정할 사람은 이 보좌관이 아니라 황성태고.”
여자가 여자 심리를 더 잘 알 것이기에, 이 여사의 지금 저 말이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김수진 비서의 심리가 어떻든지 간에, 그건 내게 중요할 이유가 없다.
더럽고 치사한 말이지만 내게 중요한 여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눈앞에 있는 황 의원 부인인 이은미 여사 하나뿐이다.
여자로서 이은미란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출세하고 그로 하여 우리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 이 여사란 판단 때문이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말 가려고?”
“내일 출근하려면 이제 출발해야지 않겠습니까.”
순간 이은미 여사 얼굴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 나왔다.
사람에 따라 지금 내가 느낀 느낌을, 지나친 자의식 과잉이라며 비아냥댈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지금 이 여사 몸을 차지하려고 마음먹고 행동으로 옮긴다면, 결과는 단 한 가지 결과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호응해서 응하든, 아니면 거부하는 척하다가 몸을 허락하든 둘 중 하나일 뿐이다.
내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후일 그녀에게서 더 큰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거.”
“이건 뭡니까?”
“아까 얘기했잖아. 차를 하나 가져다 놨다고. 로비 데스크에 가서 말하면 차를 끌고 올라올 거야.”
“고맙습니다. 사모님. 잘 타겠습니다.”
“그래 운전 조심하고.”
신발을 신고 방을 나서려니 이 여사가 소나타 키를 내게 내밀었고, 키를 건네는 순간 내 손을 슬며시 쓰다듬는 느낌이다.
그만큼 아쉬움이 남는 것일 것이다.
황성태 의원 부인인 이 여사는, 여자로서 한창 몸이 뜨거울 40대 초반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그녀는, 대부분 시간을 남편인 황성태 의원과 별거 아닌 별거 생활을 하는 처지다.
그러니 그 뜨거운 몸을 달랠 상대가 필요할 것인데 내가 이렇게 자리를 떴으니, 어쩌면 그녀는 뜨거운 몸을 식히기 위해 다른 어떤 사내를 침대로 불러들일지 모를 일이다.
그녀가 가진 배경이라면, 얼마든지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적당한 사내를 들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부릉~ 부릉~’
검은색의 반짝반짝 윤이 나는, 그러면서도 각이 딱 잡힌 신형 소나타는 배기음부터 다르다는 느낌이다.
전체적인 외관은 스텔라와 비슷했지만, 파워 브레이크와 파워 핸들 그리고 자동 정속주행 장치인 크루즈컨트롤 기능까지 탑재된, 그들이 내세운 광고처럼 명실상부한 VIP를 위한 승용차였다.
과연 국회의원 보좌관에 불과한 내가, 이런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녀도 괜찮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 수준이었다.
텅 빈 밤거리를 정말 거칠 것 없이 시원하게 내달렸다.
‘삐!’ ‘삐!’ ‘삐!’
해운대에서 출발해서 민락교를 지나 수영 로터리 부근에 이르렀는데 삐삐가 다급하게 울렸고, 순간 무언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급하게 공중전화를 찾기 시작했고, 수영 로터리 약간 못 미친 지점 육교 아래에 있는 공중전화를 발견했다.
비상등을 켜고 차를 갓길에 주차한 나는, 우선 삐삐 액정을 확인했다.
삐삐 액정에는 아까와 똑같은, 그러니까 이은미 여사가 묵고 있는 파라다이스호텔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사모님. 이수찬입니다.”
“이 보좌관. 지금 나 좀 데리러 와.”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이 여사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역력하게 전해져오고 있었다.
방금 헤어진 이 여사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이 여사 신변에 무슨 급박한 일이 생겼다는 뜻일 것이다.
로터리까지 100m도 남지 않았지만 거기까지 갈 정신적 여유가 없었기에, 나는 육교 아래서 U턴해서 바로 해운대를 향해 내달렸다.
비상등을 켜둔 채 호텔 출입구에 차를 주차하고 차에서 내려 문을 열고 로비로 들어서니, 그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캐리어를 든 이 여사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사모님. 캐리어 주십시오.”
“차는?”
“입구에 세워뒀습니다.”
“그래. 빨리 가자.”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고 난 운전석에 앉았다.
“사모님 출발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합니까?”
“서울. A 병원으로 가.”
A 병원이라는 이 여사 말에, 나는 순간 한림그룹 이승주 회장이 위독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룸미러에 비친 이은미 여사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물어보는 걸 단념했다.
반여 IC에서 도시고속도로에 올렸고, 과속 단속은 아예 염두에 두지조차 않고 밤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달려 경주에 다다를 즈음 내 허리춤에선 다시 삐삐가 요동치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내 일 때문에 차를 세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삐삐는 이런 내 마음조차 모르고 쉼 없이 울음소리를 토해냈기에,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 보좌관.”
“예. 사모님. 어디 휴게소 들러서 전화 좀 하고 가자.”
“괜찮습니다. 사모님. 이 시간에 급하게 전화할 일 없습니다. 술 마시자는 놈이겠지요.”
“아니. 내가 전화 한 통하고 가야 할 거 같아서 그래.”
“알겠습니다. 그러면 경산휴게소에 들르겠습니다.”
이은미 여사도 끊임없이 울려대는 삐삐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20분 정도를 더 달려 경산휴게소에 도착할 수 있었고, 나는 공중전화와 가까운 주차면에 차를 주차했다.
“잠시만 차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차를 주차하고 허리춤에서 삐삐를 뽑아 든 나는, 이 여사에게 차에서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아니야. 나도 전화를 걸어야 할 거 같아. 같이 가자.”
내 허리춤서 연신 울어대던 삐삐소리 때문만은 아닌 거 같아 나는 내심 안도할 수 있었고, 아무리 고속도로 휴게소라지만 한밤중에 이 여사 혼자 차에 놔둔다는 불안함 또한 지울 수 있었다.
이 여사를 모시고 공중전화로 다가가면서 삐삐의 액정을 확인하니, 전혀 기억에 없는 서울지역 번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 여사가 수화기를 드는 걸 확인한 나는, 이 여사에게서 조금 떨어진 공중전화를 들고 액정에 표시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롯데호텔입니다.”
“예? 아, 807호 부탁드리겠습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 호텔 전화번호였다.
서울 지역번호에 일반 전화번호 그리고 그 뒤에 아까 이 여사가 삐삐를 친 것처럼, 객실 번호로 짐작되는 숫자가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객실로 신호가 가는 동안, 아무리 생각해도 서울의 호텔에서 내게 삐삐를 친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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