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쫓아내다.
“나 원 참. 그게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불가능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내 말에 성호준 비서관이, 황당하다는 표정과 함께 헛웃음을 친다.
국회의원이 하는 주된 업무가 입법 활동인데, 국회도서관에서 대출한 자료들을 보면서 내가 경악했다.
도대체 일국의 국회의원이란 양반들이 어떻게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엉터리를, 법안이랍시고 내놓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내 딴에는 그런 점을 개선할 방법으로, 국회의원의 입법 활동을 보좌하는 보좌진이 함께 모여서 공부하고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발의야 국회의원이 하지만 실제 필요한 자료를 조사하고 법안을 만드는 사람은, 국회의원이 아닌 보좌진이 전담한다.
그런데 성호준 비서관은 내 제안을 다 듣지도 않고, 헛웃음과 함께 나를 비웃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수·찬·보·좌·관·님. 국회 업무에 관해서 X도 모르면서, 적당히 나대시죠.”
“뭐요?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X도 모른다고요. 아닙니까? 시발 어디서 뭐 하면서 굴러먹던 놈인지 모르겠지만, 사모 밑구멍이나 살살 핥아준 덕분에 보좌관 자리 차지했으면, 국으로 가만히 앉아서 주는 월급이나 받아 처먹지, 설치긴 왜 설쳐?”
“하···. 성호준 비서관. 말 다 했어요?”
굳이 이 자리에서 내가 화를 낼 이유는 없었다.
사실 내가 성호준 비서관을, 이 자리에 불러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성호준 비서관은, 내가 오기 전까지 황 의원실에서 좌장 역할을 해왔다.
그랬기에 성호준 비서관 협조를 얻어 내 위치를 공고히 하든지, 그게 아니라면 내 위치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내쫓아야 한다.
그리고 성호준 비서관을 내칠 증거는, 지난 한 달간 퇴근 후 성 비서관 뒤를 쫓으며 이미 확보해 두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확실하면서 결정적인 건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런 생각으로 지금까지 어떻게 참고 살았어요? 나 같으면 화딱질 나서라도 진작 터트렸을 텐데.”
“지랄하네. 이제 현실을 제대로 파악했을 테니, 앞으로 깝죽거리지 마! 가만히 있으면 보좌관 대우는 해줄 테니까.”
“이렇게 매일 놀고먹으면 따분하지 않아요? 세금 내는 국민께 미안하기도 하고.”
“나만 이래? 여기 의원회관에 우리 같은 사람 수두룩해. 그리고 법안 발의야 외주주면 훨씬 더 번드레하게 만들어 오는데, 뭐가 문제야?”
“실정에 맞지 않으니 문제죠. 책상머리에 앉아 만든 법안이, 우리 실정에 맞는다고 생각합니까?”
국회의원의 원활한 입법 활동을 보조하기 위해, 국회의원 개개인에게 입법 활동비와 특별활동비가 책정되어 있다.
그런데 현재 아주 많은 숫자의 의원실에서는, 그 입법 활동비와 특별활동비를 직접 법안을 만드는 데 사용하기보다는 외부 기관에 외주를 주는 데 사용한다.
보좌진은 외부 기관을 선정하여 용역을 주고, 외주 기관에서는 적당한 폼을 만들어 의원실에 전달하는 형식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서로 친분을 다지기도 하고, 또 영수증에 장난치는 등의 행위로 뒷주머니를 채우는 식이다.
이런 현실에서 내가 성호준 비서관에게 한 제안은, 귀찮은 일을 벌이는 동시에 뒷주머니 채우는 일을 방해하는 일이다.
“아무튼 성 비서관 생각을 알았으니 됐습니다.”
“그래. 알았으면 이제 제발 알아서 기라. X도 모르는 게 어디서 굴러와서 깝죽거리기는.”
성 비서관의 말에 나는 피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의 한 달 가까이 성호준 비서관을 뒤따르면서, 그가 김수진 비서를 미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황성태 의원 분노를 사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고 황 의원이 성호준에게, 김수진 비서 뒤를 미행하라고 지시한 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런데 실제 더 큰 폭탄은 조금 전 내 앞에서 했던 폭언, 그것도 진짜 실세인 황 의원 부인인 이은미 여사를 향한 성희롱에 가까운 모욕성 발언이다.
“사모님. 이수찬입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에요?”
“잠시 서울에 올라오실 수는 없겠습니까? 언제든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무래도 성호준 비서관을 내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호준일? 호준이가 왜?”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가 좀···.”
일러바치는 것도 요령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다짜고짜 사모님, 성호준 비서관이 ‘사모님 밑구멍 어쩌고 했습니다.’라고 일러봐야, 순간적으로 화가날 지언정 그 효과가 오래가지 않는다.
그랬기에 사모님의 애를 태울 필요가 있었고, 나는 바로 녹음 파일을 들려주는 대신에 사모의 신경을 살살 긁었다.
“호준이가 무슨 소리를 했는데 그래? 나만 알고 있을 테니까, 빨리 얘기해 봐.”
“제 입으로는 차마···.”
“뭔데 그래? 나만 알고 있겠다니까?”
내가 계속 언저리만 돌면서 말을 살살 돌리자, 황 의원 부인은 열이 뻗치기 시작한 건지 새된 목소리를 낸다.
“차마 제 입으로는···.”
“말하라니까! 내가 이 보좌관을 왜 그 방에 꽂았는지 몰라서 이래?”
“알겠습니다. 들으시고 너무 화내진 마세요. 저도 그 양반이 그런 소리까지 할 줄은···.”
그러면서 나는 미리 맞춰둔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성호준이 밑구멍 어쩌고 씨불인 부분을 재생시켰고, 그러자 사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거친 숨만 토해냈다.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
이은미 여사의 거친 숨소리는 제법 오래 계속되었고, 덕분에 나는 전화가 끊기지 않게 동전을 몇 개 더 넣었다.
“이 보좌관.”
“예. 사모님.”
“전화번호 하나 메모해.”
“준비됐습니다.”
황 의원 부인은 서울 지역번호의 전화번호 하나를 불렀다.
“다섯 시간 후에 소공동 쪽으로 와서, 그 번호로 전화하도록 해. 지금이 다섯 시 다 되어 가니 열 시쯤.”
“알겠습니다.”
황 의원 부인 목소리에서 냉기가 폴폴 넘쳤다.
“여보세요.”
“이 보좌관이야?”
“예. 사모님.”
“지금 있는 곳이 어디야?”
“시청 쪽 공중전화입니다.”
“앞에 프라자호텔 보이지?”
“예. 알고 있습니다.”
황 의원 부인은 나를 플라자호텔 객실로 호출했고, 나는 잰걸음으로 황 의원 부인이 투숙한 호텔로 향했다.
‘똑!’ ‘똑!’
“열렸으니까 들어와.”
객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황 의원 부인은, 이미 옷까지 다 갈아입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황 의원 부인이 운전기사를 재촉해, 부산에서 이곳까지 쉬지 않고 밟았던 모양이다.
“이 보좌관. 커피 마실래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니, 내가 마시고 싶어서 그래.”
그러더니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협탁 위의 전화기를 들어 커피 두 잔을 부탁한다.
부산서 이곳까지 오는 도중, 황 의원 부인은 흥분을 많이 가라앉힌 분위기다.
“일은 할 만해?”
“아직 분위기에 적응하는 중입니다. 제가 의원실 분위기에 휩쓸려서 가야 할지, 아니면 제 나름대로 방법을 취해야 할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래. 이 보좌관이 알아서 잘 판단했겠지. 그런데 그 건은 어떻게 된 거야?”
그때 벨이 울렸고, 나는 일어나 문을 열었다.
“거기 내려놓고 가요.”
종업원이 테이블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고 나가자, 황 의원 부인이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황 의원 부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나도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자~ 이제 더 올 사람도 없으니, 편하게 이야기해 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대답 대신에 녹음기를 꺼내, 아까 낮에 휴게실서 녹음한 내용을 플레이시켰다.
녹음된 파일은 굳이 내가 손댈 부분이 없었고, 또 내 입으로 황 의원 부인을 언급한 내용도 없다.
그러니 따로 잘라서 들려주기보다는, 차라리 녹음 파일 전체를 다 틀어주는 게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에서다.
“이 새끼가! 정말···.”
사무실서 나오면서 녹음 버튼을 눌러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부분까지 그대로 녹음 되었기에, 내가 황 의원 부인으로부터 오해살 만한 부분은 전혀 없다.
“이거 누가 알고 있어?”
“저하고 둘이 따로 이야기했습니다. 이때 의원회관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고요.”
“하···. 이 새끼를 어떻게 처리하지?”
“조용히 내보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남들이 알아봐야 좋을 일 없고요.”
“알았어. 그 테이프 나한테 줄 수 있지?”
황 의원 부인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녹음기에서 테이프를 꺼내 황 의원 부인에게 건넸다.
“이 보좌관.”
“예. 사모님.”
“이 보좌관은 어떻게 해서, 이걸 녹음할 생각을 다 했어?”
“형님으로 모시고 지내는 변호사님이 있습니다. 그 형님이 말씀하시길, 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항상 증거를 남겨두는 게 필요하다고 해서요.”
“그래. 잘했어. 혹시 나하고 대화하면서도, 녹음하고 있는 거야?”
“아닙니다.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말을 끝냄과 동시에 나는 가방을 열어 탁자 위에 쏟았고, 양복 상의를 벗어 황 의원 부인 앞으로 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치 공항 검색대에서 검색받듯이 두 팔을 양옆으로 펼쳤다.
“됐어. 그냥 자리에 앉아. 우리가 무슨 남들이 알면 안 되는 일을 한 거도 아닌데. 잠시만 기다려 봐.”
그러더니 황 의원 부인은 협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나야. 지금 소공동으로 와. 봉투 큰 걸로 하나 준비해서.”
전화를 끊은 황 의원 부인은, 식어가는 찻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묻기 시작했고, 나는 그간 의원회관서 경험한 일들을 차분히 설명했다.
‘찌~링’
벨 소리에 나는 벌떡 일어나 객실 문을 열자, 그곳엔 한림그룹 직원으로 보이는 남녀가 서 있었다.
“들어오시지요.”
둘은 내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나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와. 밤늦게 미안해.”
“아닙니다. 여사님. 지시하신 봉투는 여기 있습니다.”
“그래. 고마워. 그리고 이거 가져가서, 얘 적당히 처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이 보좌관. 이리로 와서 서로 인사해. 앞으로 자주 봐야 할 사이니까.”
입구 쪽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나는, 황 의원 부인 말에 다가가 먼저 명함을 내밀었다.
“이수찬이라고 합니다.”
“김정숩니다.”
“신미혜라고 합니다.”
명함에는 한림그룹 전략기획실 소속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 둘은 황 의원 부인 일을 봐주는 모양이었다.
“김 실장. 술 한잔할래?”
“괜찮습니다. 여사님.”
“괜히 빼지 말고. 앞으로 한 식구로 지내야 하는데, 오늘 같은 날은 한잔해야지.”
황 의원 부인 말이 떨어지자마자, 신미혜라는 여직원이 황 의원 부인 옆에 놓인 전화기를 든다.
“우리 미혜 술이 고팠구나?”
“여사님께서 부산에 내려가신 뒤에는, 아무도 술 사주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저 부산에 데려가시면 안 돼요?”
“내가 지시한 일은 어쩌고?”
“김 실장님 계시잖아요? 네~ 여사님.”
“1년만 더 고생해. 조만간 나도 회사에 복귀할 생각이니까.”
보아하니 이 양반들 소속은 한림그룹 전략기획실이지만, 황 의원이 수족처럼 부리는 직원인 듯했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들처럼 황 의원 부인이 부리는 장기판의 말이 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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