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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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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은깨비
작품등록일 :
2012.04.05 01:07
최근연재일 :
2012.04.05 01:07
연재수 :
8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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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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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27,977

작성
11.12.23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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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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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봉황대기 52 - 백일현

DUMMY

Chapter 52


카페에서 나오자 세상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포탄이 떨어진 곳의 자욱한 매연 자국처럼, 온갖 석유 폐기물처럼.

“젠장, 우중충한 비유 밖에 못 들겠네.”

눈치 보지 말고 달려가 보라는 말을 들었을 땐 앞이 환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기 천사들이 내려와 하프를 연주하고 영롱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지. 하지만 결국 이 모양 이 꼴이다.

“개자식들, 광주제일고 자식들 모조리 다 죽여버리겠어!”

그렇게 이를 뿌득뿌득 갈며 집으로 향하는데 저 앞에서 커다란 덩치가 보였다. 190cm를 훌쩍 넘는 장대한 기골, 그 곁의 호리호리한 장신의 남자. 그리고 무엇보다 긴 머리를 흩날리는 서영하까지!

“설마……홍진성? 그리고 서영하와…… 백, 백일현?”

이런 젠장! 나도 모르게 피할 곳을 찾고 있었지만 이런 큰 길에 숨을 곳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홍진성이 한 달음에 달려왔다.

“이거 태오 아니야?”

“너…….”

사람 좋은 척 웃어대는 홍진성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내가 일각이 여삼추로 광주제일고와의 일전을 고대하는 이유엔 이 녀석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오랜만이군.”

그래. 오랜만 이었지만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녹양공원에서 녀석이 받아 친 그 홈런 타구. 비록 컨디션이 형편 없을 때의 일이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아 있었다.

“놀랐어. 설마 너 혼자, 그리고 그 따위 팀을 이끌고 준결승전까지 올라오다니. 대단해! 박수라도 쳐 주지.”

울컥! 다른 놈의 도발이라면 모를까 홍진성의 비꼼은 정말 참아주기 힘들었다. 속으로 이빨을 갈고 주먹을 세차게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이대로 한 방 갈겨버리고 싶었다!

‘젠장…….’

하지만, 하지만 뒤에 서영하가 있다. 적어도 그녀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한숨을 내쉬며 주먹에 쥔 힘을 풀었다.

“그래. 열심히 박수 쳐 봐라. 결승전에서 네 녀석들 모조리 꺾어버릴 테니 그때도 잊지 말고.”

“크핫! 입은 제법 살아 있구나?”

그때 묵묵히 서영하의 곁을 지키던 백일현이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뭔가 전신을 휘감는 오싹한 기세가 느껴져 나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나 백일현이다.”

“……오태옵니다.”

백일현은 별 다른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 굳은살 박힌 손을 쥐는 순간, 백일현의 손을 타고 거대한 것이 전해져 왔다. 위압감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난 백일현의 앞에서 움츠러드는 자신을 보았다.

‘젠장, 뭔가 달라. 홍진성과도 다른 뭔가가 있다…….’

함부로 대하기 힘든 거침 없는 기운이 백일현에게서 은은하게 풍겨 나왔다. 수치상으로는 나보다 조금 클 터인데 악수를 청한 백일현의 모습이 너무나도 거대해 보였다.

“준결승에서 대명고랑 붙더군.”

“…….”

백일현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시원스럽고 헌헌한 미목, 전신에서 넘쳐흐르는 투지. 백일현은 그야말로 최강자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쪽이 올라온다고 해도 즐겁게 기다려 보겠다.”

광주제일고는 당연히 올라간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난 백일현에게서 왠지 모를 적개심이 피어났다. 이상하게 이 자식의 하나 하나가 마음에 들질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영하가 네 옆에 찰싹 붙어있는 게 가장 재수없다고!

‘이 빌어먹게 생긴 자식, 결승전에서 서영하가 보는 면전에서 쳐 부줘 주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이빨을 앙다문 상태에서 으르렁거리듯이 내뱉었다. 백일현은 피하지 않고 눈을 마주쳤다. 맹수의 독기와 패자의 투지가 팽팽하게 맞섰다.

“난 준결승에 등판하지 않는다. 힘을 비축해서 오로지 결승 무대에서 내 최고의 공을 던질 생각이다.”

“…….”

에이스를 등판하지 않고도 결승전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저 자신감. 아까부터 가슴 속을 불안하게 적시는 적개심이 저 끝없는 자신감을 만나자 성난 채 날뛰었다.

“올라와봐라.”

“그럴 생각입니다.”

나와 백일현은 약속이라도 한 듯 손을 놓고 등을 돌렸다. 그래, 이걸로 나와 백일현의 대화는 끝이었다.

저 녀석은 어떤 얼굴로 돌아섰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충혈된 눈과 힘껏 깨문 입술, 두 주먹을 꽉 쥔 채로 걸어갔다. 몸에 힘을 꽉 준 채로 놓지 않았다.

새가슴이어서일까, 아니면 꼴사나운 내 속 마음을 인정할 수 없어서일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비참한 나머지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시간은 단숨에 지나갔다. 고작 사흘. 엎치락 뒷치락 호쾌한 난타전을 이어갔던 백상고와의 일전의 여파는 아직도 여실하게 내 어깨에 남아 있었다.

“으윽!”

테스트 겸 던진 공이 미트로 날아가 꽂혔다. 구속도 구위도 써먹을 정도는 되었지만 문제는 어깨. 아직 완벽하게 풀리지 않은 어깨가 변수였다.

“제길, 하루 정도만 더 있었으면 완벽한 상태로 나갈 수 있는데…….”

백상고와의 일전에서 던진 공의 투구수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3일간의 조정기간, 이건 혹사나 다름 없었다.

‘그나마 중간에 태경이가 교대해 준 것이 천만 다행이었어.’

7회까지 던진 투구수만 해도 근 150가까이 되었다. 다량의 파울, 그리고 화려한 난타전의 후유증이 고스란히 누적된 것이다.

‘무엇보다 움직이지 않는 팔을 억지로 비틀어 던진 게 컸어. 뼛속부터 욱신거린다……. 이건 큰일이야.’

“태오야 오늘은 이 정도만 던질까?”

“어…… 10개쯤 던졌나? 이 정도면 충분해.”

형진이는 만족한 표정으로 장구를 챙겨 팀 훈련에 합류했다. 난 어깨를 부여잡은 채 벤치에 주저앉았다. 아직 경기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내 머리 속은 온통 패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명고에게 이길 확률. 과연 얼마나 될까.

중심 타선 몇 명만 치는 타선에 새가슴 투수, 실전 경험 부족한 3류 포수에 감독까지 없는 팀. 준결승에 진출한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웠다.

“우리가 이길 가능성이 있다면 단 하나야.”

어차피 대명고 투수진을 상대로 대량 득점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답은 하나, 대명고 중량타선을 내가 완벽하게 틀어막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꿈과 같은 소리고.’

파르르 떨리는 오른 팔을 내려다 보았다. 내 팔의 증상은 더욱 기괴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분명 만루일 때만 굳어지던 것이 어느새 위기 상황에만 몰리면 비슷한 증상이 나타났다.

‘그래도 만루가 아니면 억지로 비틀어서 던질 수는 있어. 평소의 10배쯤 힘들고 구속도 얼마 나오진 않지만…….’

하지만 그 어설픈 공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 만큼 대명고 타선이 만만치 않다.

임재훈을 한번에 무너트려 버린 그 공포스런 타력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왔다.

“……어디에 기대야 할까.”

그라운드를 보았다. 녀석들이 마지막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자 외야 펑고 간다!”

따악!

날카롭게 쏘아진 포물선을 향해 달려간 명호가 그림 같이 캐치해 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빠른 송구! 펑고를 치던 이명원이 엄지 손가락을 올렸다.

“다음!”

밝은 표정으로 펑고를 치던 이명원, 가볍게 몸을 풀며 공을 받는 팀원들. 녀석들은 내일 이 시간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내일 이 시간이면 모든 게 결정 나 있겠지.”

그라운드는 이미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제 오늘이 저물어 간다. 발 끝에서부터 조금씩 실감이란 것이 밀려왔다.

고교 최강 백일현을, 그리고 홍진성을 꺾는 것! 그리고 이 팀을 살리고 미국에 가는 것. 이 모든 목표를 위해선 김광호가 지키고 있는 대명고라는 관문을 뚫어야만 했다.

“가 보자. 결과가 어떻더라도.”

팔은 여전히 떨렸고 팀은 여전히 약했다.

하지만 여전히 겁에 질려 떨고 있지는 않았다. 어쩌면 아주 작은 한걸음일지도 모르겠다. 형편 없이 패배해 널브러질 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난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은 그저 이 것만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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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봉황대기 80 - 결승전! 광주제일고 <10> 터널의 끝 +19 12.03.26 2,463 28 15쪽
80 봉황대기 79 - 결승전! 광주제일고 <9> 종막을 눈앞에 두고 +12 12.03.21 2,216 25 15쪽
79 봉황대기 78 - 결승전! 광주제일고 <8> 불운 +12 12.03.17 2,367 25 15쪽
78 봉황대기 77 - 결승전! 광주제일고 <7> 조그만 결의 +15 12.03.16 2,256 25 15쪽
77 봉황대기 76 - 결승전! 광주제일고 <6> 회광반조 +11 12.03.10 2,319 21 11쪽
76 봉황대기 75 - 결승전! 광주제일고 <5> 맹독의 전초 +12 12.03.06 2,536 26 10쪽
75 봉황대기 74 - 결승전! 광주제일고 <4> 최강이라는 이름 +13 12.02.29 2,816 27 8쪽
74 봉황대기 73 - 결승전! 광주제일고 <3> 격돌 +9 12.02.25 2,723 19 13쪽
73 봉황대기 72 - 결승전! 광주제일고 <2> 괴물의 힘 +12 12.02.22 2,615 18 12쪽
72 봉황대기 71 - 결승전! 광주제일고 <1> 이곳에 서서 +15 12.02.18 2,765 19 9쪽
71 봉황대기 70 - 꿈의 무대로 +9 12.02.16 2,762 17 11쪽
70 봉황대기 69 - 매듭 +5 12.02.15 2,368 17 11쪽
69 봉황대기 68 - 파워 진통제 +10 12.02.12 2,551 21 15쪽
68 봉황대기 67 - 아버지... +6 12.02.09 2,525 19 14쪽
67 봉황대기 66 - 노을은 밝건만 +12 12.02.08 2,726 18 8쪽
66 봉황대기 65 - VS 대명고 終 +11 12.02.06 2,738 22 17쪽
65 봉황대기 64 - VS 대명고 (11) 누가 비극을 바랬나 +10 12.01.30 2,696 22 16쪽
64 봉황대기 63 - VS 대명고 (10) 무제 +4 12.01.30 2,540 15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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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봉황대기 60 - VS 대명고 (7) 힘 +5 12.01.17 2,642 1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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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봉황대기 57 – VS 대명고 (4) 끊겨버린 기억 +7 12.01.12 2,677 16 9쪽
57 봉황대기 56 - VS 대명고 (3) 이변 +9 12.01.10 2,670 14 9쪽
56 봉황대기 55 - VS 대명고 (2) +7 12.01.07 2,668 15 10쪽
55 봉황대기 54 - VS 대명고(1) +8 12.01.04 2,675 17 12쪽
54 봉황대기 53 - 조약돌 +9 11.12.28 2,743 1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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