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대기 57 – VS 대명고 (4) 끊겨버린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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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7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애타게 부르는 듯한 목소리. 대답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러기엔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머리를 짓누르는 듯한 피로에 그냥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만 싶었다.
제발…… 일어나!
그런데, 이 목소리가 너무나도 애절했다. 잔잔히 떨리며 울먹이는 목소리. 그리고 이제는 추억마저 닳아버린 어머니의 향수가 떠오를 만큼이나 따뜻했다.
“으…….”
힘겹에 눈을 벌리자 환한 빛이 고문하듯이 쏘아졌다. 그리고 그 순간 칼로 째는 듯한 격통이 볼에서 느껴졌다.
“으으윽!”
“이봐 멍청이! 괜찮아?”
입이 마치 불로 지진 듯이 뜨겁고 아파왔다. 후들거리는 팔로 몸을 받치고 일어나 입에 가득 고인 것을 뱉어냈다.
“우웨엑!”
피와 침이 섞인 걸쭉한 것이 마운드에 쏟아져 내렸다. 한 주먹이나 되는 피에 마운드 한편이 붉게 물들었다. 볼은 퉁퉁 부어오르고 왼 쪽 눈은 제대로 떠 지지도 않았다.
“허억, 허억! 퉷!”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눈을 뜨자마자 터져나온 새빨간 선혈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뒤에 뱉어낸 하얀 조각.
‘이빨이…….’
입 안 깊숙한 곳에서 이빨 하나가 부러져 나갔다.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뭐, 뭐야. 대체 내가 왜 여기에……. 어윽!”
온 몸이 풍이라도 걸린 것처럼 떨려왔다. 찢어진 입술, 엉망이 된 얼굴. 흐릿한 기억을 되새겨 봤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경기는? 시합은?”
“생각…… 안나?”
그리고 한수연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혼미한 그때 들은 따뜻한 목소리는 네 것이었나?
“아무 것도 모르겠어. 왜, 왜 여기 있지? 타자는? 감현우는?”
머리는 멍 한 채 흔들리고 입가엔 비릿한 피의 향만이 감돌았다. 볼에 손을 대어 보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뜨겁고 딱딱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네가 기절한 지 오 분도 안 지났어. 아직 시합 중이야.”
“뭐……?”
고작 오 분? 떠지지 않는 눈과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일어서자 잃어버린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혼신의 힘을 실어 던진 직구, 그리고 그걸 받아친 감현우의 막강한 스윙! 그래, 그 타구에 얻어 맞았다.
그걸 깨달아 버리자 가슴이 요동쳤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우욱!”
식도로 넘어갔던 피가 위액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풀려버린 다리, 아직도 흔들리는 뇌. 난 그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허억, 허억! 힘이, 힘이 안 들어가…….”
마운드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떨구자 막혀있던 숨이 조금씩 트이는 것 같았다. 그래, 이대로 조금만 있자. 조금만…….
“자네 괜찮나? 시합을 속행해야 하니 어서 일어나거나 투수 교체를 하지!”
그때 다가온 심판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5도쯤 떨어진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한수연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남아 있는 타임 모조리 써도 좋으니까 제발 닥쳐요!”
“어? 어, 그, 그러지.”
익숙한 남자의 항의였다면 발끈했겠지만 쏘아붙이는 여자의 말에 심판은 당황해 물러섰다. 한수연은 답지 않게 내 옆에 딱 달라 붙어 계속 물어왔다.
“이봐 괜찮아? 걸을 수 있어?”
“어……. 자, 잠시만. 잠시만 쉬면 다시 던질 수 있어.”
던질 수 있다고……? 내가 한 말에 나 조차 어이가 없었다. 이 몸으로? 후들거리는 다리와 병신처럼 떨리는 팔로?
설상가상으로 눈 마저 멀어버렸다.
난 우완 투수다. 왼 눈을 앞으로 향해 목표를 잡고 공을 던진다. 하지만 이 눈으로 어림도 없었다. 퉁퉁 부은 붓기가 눈까지 잠식해 버렸다. 이 상태로 목표를 확인하고 던진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그나마 이건 가벼운 문제였다. 가장 심각한 것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후들거리며 말을 듣지 않는 다리였다.
‘젠장, 걷지도 못하곘다. 왜 이렇게 후들거리지?’
그때 최악의 가정이 내 머리 속을 스쳐갔다. 눈이 찢어질 듯 떠지며 한 순간 모든 움직임이 멎어버렸다.
설마?
그럴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내 가슴은 쿵, 내려 앉았다. 머리에 얻어 맞은 충격, 후들거리는 다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한 구역질.
이건 부정할 수 없는 뇌진탕, 최악의 경우 뇌출혈의 증세였다.
2회를 어떻게 넘겼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차가운 얼음의 감촉을 느끼며 흔들리는 기억을 되짚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 뒤의 난폭한 투구. 불완전한 모션에서 뿌려진 형편없는 공이 한참 빠진 코스로 빗겨갔다.
“볼!”
이어지는 폭투와 제구 미스. 감긴 왼 눈 만큼이나 눈 앞의 현실도 캄캄했다. 볼 데드(시합 중 사고로 인한 경기 중지)로 인해 4번 감현우는 여전히 철벽처럼 버티고 서 있었고, 난 쉼 없이 흐르는 피를 마시고 또 흘린 채 공을 던졌다.
그때 철탑처럼 기다리던 감현우의 배트가 우렁차게 날았다.
따아악!
맹렬한 타구가 외야 저 멀리 뻗는 것을 본 순간 간신히 버티고 있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쓰러지듯이 마운드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혼란스러웠다. 이 모든 게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사실은, 아까 맞은 타구에 아직 기절해 있는 건 아닐까. 이 모든 게 다 내가 상상해 낸 부질 없는 환상이 아닐까.
“아니!”
그럴리 없었다. 그렇게 믿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꿈이라면 이토록 분하진 않을 터였다. 꿈이라면, 이토록 엉망진창의 몸을 끌고 일어서 공을 던지진 않을 터였다!
“으아압!’
진땀이 흐를 정도로 기를 쓰자 몸이 움직였다. 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물고, 눈물이 흐를 정도로 뺨을 떄리자 몽롱했던 의식이 조금씩 돌아왔다. 비로소 그라운드의 상황이 명확해졌다.
감현우가 2루로 달려들고 있었다!
“세컨 중계!”
성래는 발빠르게 송구했지만 감현우는 여유롭게 2루 베이스를 밟았다. 분한 마음에 타석을 바라보자 5번 이수용이 타석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이 몸으로 대명고 타선을 막아낼 순 없어. 더 파격적인 투구를 하지 않으면 대명고 페이스에 말려버린다!’
그리고 내 머리 속을 스쳐간 단 하나의 비장의 수가 있었다.
‘싱커로 간다!’'
‘싱커? 이수용을 상대로?’
난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상대를 조금이라도 당황시켜 줄 히든 카드가 필요했다.
‘제발 들어가라. 들어가기만 한다면 못 친다!’
그렇게 주문을 외우며 빡빡한 그립의 싱커를 강렬하게 챘다. 평소보다 크게 그린 팔의 모션, 더 힘차게 내딛은 앞발. 보이지 않는 왼 눈은 그냥 감아버렸다. 오른 쪽 눈으로 목표를 포착하며 매섭게 공을 뿌렸다!
쐐애액!
눈물이 흐를 정도로 절박했기 때문이었을까. 싱커는 그림 같은 게적을 그리며 폭풍처럼 날아 미트에 꽂혔다.
“스트-라이크!”
“오 싱커다!
“태오야 나이스 볼!”
퉁퉁 부운 얼굴로 힘겹게 웃어주며 난 다시 호흡을 골랐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작 원 스트라이크를 잡았을 뿐이다.
‘다시 한 번 싱커!’
고집스러울 정도로 싱커를 고집하며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그립을 쥐었다. 결정구인 최고속의 직구를 살리려면 이 느린 싱커로 하나의 카운트를 더 잡아야 했다.
‘제발 치지 마라!’
다시 잡은 싱커가 세차게 날았다. 직구처럼 날다 기괴한 곡선을 그리며 인코스로 떨어지는 역회전의 싱커!
하지만, 두 번 같은 공에 당할 이수용이 아니었다.
“빚은 이걸로 갚으마!”
따아악!
이수용의 타구는 마치 포탄처럼 날았다. 낮은 탄도에 질풍같은 스피드. 야수들은 감히 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퍼엉!
타구는 펜스에 맞고서야 전진을 멈췄고 감현우는 홈으로 뛰어들었다.
“하아, 하아…….”
버텨봤지만, 기를 쓰고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분발했건만 결국 당해낼 수 없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오른 팔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숨이 더 가빠졌다. 그 거친 숨 사이로 혼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뒤의 기억은 참담할 정도로 끊겨져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난 어느새 벤치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기억은 두루뭉술하게 흩어지고 누워있는 얼굴에 전해지는 차가운 얼음 만이 내 의식을 증명했다.
“내가, 내가 어떻게 2회를 끝냈지?”
얼음 하나를 집어 얼굴을 문지르며 자리에 앉았다. 군데 군데 끊긴 기억이 날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스코어, 스코어를…….”
“안돼! 아직 더 앉아 있어야 해!”
“비켜, 확인 해야 돼.......”
한수연은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난 매정하게 뿌리치며 일어섰다. 한걸음, 두걸음 나아가 거대한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대명고의 이름 앞에 쓰여진 숫자 3. 난 벌어지지 않는 입술로 절규했다.
맞은 것이다. 절대 사수해야 할 곳에서, 난 또다시 얻어맞고 만 것이다.
- 작가의말
휴… 수정은 집에 빨리 가서 하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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