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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韓山) 님의 서재입니다.

1987 미안해 아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대체역사

한산(韓山)
작품등록일 :
2023.05.10 12:14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연재수 :
6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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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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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41화 다른 나라 DNA (4)

DUMMY

“긴데 말이야.. 이런 엄청난 사안을 가디고, 자네가 나를 찾은 이유는 뭐일까? 자네는 기야말로 온몸으로 민주주의를 증명한 민주화 투사가 아니냐, 이말이디. 헌데, 고런 민주화 투사가 국민들의 핏 값으로 얻어낸 직선제를 낼름 독재세력에게 다시 갖다 바칠 판국에, 태연하게 날 찾아와서리 집 타령을 한다?”



이제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그가 나를 보는 눈빛이 일치한다.



“핏 값을 두둑이 챙기려 합니다. 회장님을 도와드리는 대가로요.”


“나를 도와? 허허. 거, 어린 친구가 호기로운 것은 내레 높이 사갔어. 긴데, 누가 되든 그거이 나한테 큰 영항이 있을 것 같아? 기업하는 입장에서 정치인들은 고저 똑 같은 승냥이일 뿐이야.”


“회장님의 그 성정 때문에 제가 필요하신 겁니다. 말씀대로 승냥이는 승냥이일 뿐인데.. 조금 물어 뜯겼다고 구태여 사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승냥이 떼의 왕이 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뭐, 뭐이 어드래?!”



표정을 보아하니 그가 스스로 대통령이 되겠다는 대권욕심을 가진 건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그렇다면 현재로선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와 나를 위해서라도 그의 대선 출마만은 막아야 한다.



“이번 한번만 더 숙이는 척 하십시오. 솥뚜껑 꼬마의 집을 지어주는 것으로 IOC를 달래고, 저들이 그토록 목메는 올림픽을 무사히 치르게 하시죠. 거기다가 용돈 조금 얹어서 다음 정권에 확실한 빚을 안기면 됩니다. 뭐, 어차피 나갈 돈이라면, 이자를 두둑이 쳐서 돌려받을 방법을 궁리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정주열의 작은 눈동자가 그의 긴 눈매 안에서 비상하게 움직였다.


그러다 순간.



“처음엔 말이야.. 저거 뭐 하는 종잔가 했디. 내레 자네가 그저 입바른 소리나 해대는 치기어린 애송이인 줄 알았다 이말이야. 제 몸 타는 줄 모르고 천리로 옮겨 붙은 산불 끄겠다고 설치는 망나니 같은.. 긴데, 자넨 불구덩이에서도 허우적대지 않고 물길을 찾고 있구만 기래. 후후.. 닮았어. 나랑. 젊을 적에 나랑 아주 많이 닮았어. 큭큭큭큭..”



그의 마음속에 질러져 있던 빗장이 풀렸다.


아마도 그는, 다음 정권을 내가 모시는 어른이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숨을 고르는 내게서, 나이답지 않은 여유를 확인한 것 같았다.


또, 숨을 고르는 타이밍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IOC에 대한 정확한 예측과 그걸 이용해 다음 정부에게 빚을 지우라는 대안까지 내놓는 내게서, 흐름을 읽는 비상한 재주를 훔쳐봤으리라.


게다가 가족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자신의 대권 도전을 일축하는 모습에선 진심으로 자신을 인정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봤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으로 그건, 내가 목적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얼마나 철저하게 조사하고, 분석하는지를 보여준 기준이 되겠지.



“기래.. 기래서 말이야. 자네 같은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면 이 정주열이가 더 이상 정주열이 아니다, 이말이야. 내레 이래 뵈도 사람 보는 눈하고, 그 사람을 어드렇게 쓰느냐, 하는 걸로 지금의 현세를 일으켜 세웠거든.”



그의 눈가에서 웃음이 가셨다. 아마도 나름 중대한 결심이 선 것만 같았다.



“큼.. 기럼, 내레 단도직입적으로 말 하갔어. 우선은 철거민들 집 짓는 문제부터 정리해 보자우. 자네가 채금자(책임자)가 되서 그 일을 진행해 보라, 이 말이디. 어때? 자네.. 내 식구가 되라. 내레 그게 조건이야.”



세상 진지한 표정의 정주열 회장이 나를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나는 그의 호의에 충분히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단정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곤.



“죄송하지만, 그건 안되겠습니다. 회장님과 현세를 위해서라도, 저는 제 길을 가야합니다. 대신, 회장님이 저의 후원자가 되어주시지요. 대를 이어 군림하지 않는 동료가 되겠습니다.”


“뭐이 어드레? 군림하지 않는 동료? 허.. 하! 천하의 이 정주열이를 상대로 군림? 동료? 큭큭큭큭.. 으하하하하! 좋디. 좋아. 긴데, 기럼 자네가 가야할 길이라는 게 최소한 대통령 정도는 돼야 할 텐데, 자신 있어?”



그의 웃음소리가 넉넉해졌다.



“확답을 원하신다면, 네. 회장님께 서로 동등하게 공존할 수 있는 최초의 대통령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해 보시겠습니까?”


“뭐, 뭐이야?!”



나는 놀라움과 기특함을 담은 그의 감탄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심코 짚은 자리에 다 헤어진 그의 집무실 소파가 손에 걸렸다.



‘거, 노인네도 참. 어지간하면 하나 새로 사지..’


“그럼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다음엔 보다 구체적으로 회장님께서 궁금해 하시는 것들과 그 방법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나는 교도소의 태근이 형님처럼 무언가에 홀린 듯한 그를 두고 돌아섰다. 그리고.



“아, 참.. 그전에 한 가지 더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울산을 비롯한 노동조합에 관련해선 인정하시고, 협상할 방법을 찾아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게 비용을 최소화하는 가장 적절한 대응이까요. 회장님과 함께 지금의 현세를 일군 직원들도 이 정권에 맞서 맨주먹으로 직선제를 쟁취해낸 국민들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회장님도 평생 못이긴 권력을 힘없는 그들은 이겨냈다, 이 말입니다.”



언제나 유머를 잊지 않는다는 그의 얼굴에 이젠 일말의 웃음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바로 직전 회의에서 싸 들고 온 나머지 공부를 내가 적절히 건드려 드린 탓이겠지.



“그러니까, 모조리 해고하고, 죽일 생각이 아니시라면 타협하시고, 회장님이 아끼는 회장님의 사람들과 제대로 나누십시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누구보다도 가난했던 회장님께선 그럴 마음도 있으시고, 또 이젠 그럴 때도 됐습니다.”



나는 어린놈의 치기어린 조언으로 다시 한 번 왕회장의 허를 찌르곤, 그의 집무실을 나섰다.


남은 것은 이제, 건국 이래 가장 독보적인 기업가로서, 대한민국 기업가 정신의 표상으로 인정받는 저 양반.


현세 그룹 정주열 회장의 결단에 달려있다.




***




“작은 선생님께 미리 연락은 받았습니다만, 농지에 수도나 정화 시설까지 구비된 땅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말씀하신대로 여기..”



오전 일찍 정주열 회장을 독대한 나는 지금 일산읍 정발산의 꼭대기에 서 있다.



“총 2만 5천 평입니다. 시세로는 2억이 약간 넘는 데, 제가 좋은 일 하신다고 해서 지주들하고 조금 조정을 했습니다.”



2년 뒤, 정발산역이 들어설 토지 인근 2만 5천 평이다.



나는 미리 예령이 이모를 통해 이 땅에 대한 계약서를 작성했다.


아. 나한테는 쑥맥 같아 보이기만 했던 예령 이모는 원래 우리 할망구에게 태원각을 물려받을 만한 재목으로 지목받아, 그 시절 배꽃여대까지 나왔던 인물이었다.


다만 본인이 의지가 없고, 과거의 상처로 인해 칩거해 있었을 뿐.


세간에서 그녀를 태원각의 작은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이유는 말 그대로 그녀가 태원각의 다음 각주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걸 깨닫는 데까지는 한참이 걸렸지만 말이다.



“네. 좋네요. 그럼 최대한 빨리 소유권 이전 문제를 정리해 주세요. 당장 이곳으로 들어와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나는 이모가 선택한 그 중개업자에게 남은 서류 절차를 독촉했다.



“예, 아무렴요. 작은 선생님께 그렇게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저로선 정말 영광입니다.”



50은 되어 보이는 중개업자가 꼬박 꼬박 40줄의 예령 이모에게 존대를 했다.


우리 할망구를 대신해 소소한 부동산들을 운용하던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도움을 줬으리라.



“예, 부탁드립니다. 그럼 내려가 보세요. 저는 여기서 또 만나 뵐 분이 있어서.”



저마다 무언가를 얻을 자리에선 자기를 낮추는 법이다.


그 또한 그렇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저 사람의 깍듯한 예의를 진심이 아니라고 폄하할 수는 없다.


나는 그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그가 나에게 다시 한 번 목례를 하고 돌아서 산을 내려가던 그때.



“뭘,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그만 나오시죠. 선생님.”



나는 이제 막 뉘엿뉘엿 떨어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누군가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아름드리나무 한 쪽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잘 지내셨어요, 선생님?”



나는 그 사내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누가 보면 숨어 있던 걸로 알겠네. 나야 그저 아우님 말씀 나누시는 데 방해가 될까봐서 기다렸던 건데.”



빈민의 벗, 철거민의 대부. 제경구 선생이었다.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나는 재경구 선생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9일, 한율이의 노제 때에도 목동 철거민들의 삶을 살피느라 참석하지 않았던 그였다.



‘이한율 열사께는 죄송합니다만, 저는 지금 살아있고, 살아야 할 이들이 더 시급합니다.’



초청을 하는 민추협 사무실에 그가 보낸 답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내 전화 한 통에 여기까지 와 준 거였다.



“선생님. 일단, 이곳입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집에 돈이 조금 있어서, 우선 사비를 털었습니다.”


“음.. 좋다. 근데, 아무리 임시라지만, 상계동 식구들만 이주시키기엔 너무 넓은데.. 우리 막내, 무슨 딴 생각 있구나?”



재경구 선생이 특유의 매력적인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게 어깨동무를 했다.


언제나 장난처럼 짓궂은 그의 눈빛이 결코 장난만은 아니라는 듯, 온통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호기심에 선뜻 응해줄 생각이 없다.


내가 그의 조언을 통해 설계한 그림은 그의 순수성과는 조금 다른 모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본 작품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모티브로 한 것이나, 등장 인물이나 단체의 이름, 역사적 사실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 된 픽션임을 밝힙니다.

* 공모전 참여 중입니다. 많은 관심과 추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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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44화 잠룡들을 움직이다. (1) 23.06.02 117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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