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치알리시움의 법칙
“믿을 수 없군요.”
네팔인들의 사냥을 눈으로 확인한 에이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시 박사가 말한 타케아돈의 천적이 있다면 그건 바로 저들일 것 같군.”
태이는 사냥한 짐승을 싣고 유유히 사라지고 있는 네팔인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들이요?”
“저 짐승을 죽인 자를 봐. 저자가 입고 있는 짐승의 가죽 말이야.”
에이미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타케아돈을 떠올려야 했다.
“설마 저게.”
“맞아. 타케아돈의 가죽이야. 갑옷 같은 비늘 가죽 말이야. 저걸 어디서 얻었겠어.”
“저들이 타케아돈을 볼 수 있을까요?”
“글쎄, 확실하지는 않지만 저들이 타케아돈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저들의 겹 눈동자가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지도 모르지.
저들은 숲의 보이지 않는 식인 식물군집도 피해 다녔어.”
“저들이 타케아돈을 볼 수 있다고 해도 저런 창 정도로 죽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타케아돈은 우리의 블레이저 건도 견디는 놈이에요.”
“아까 그자가 저 짐승을 죽인 장면을 잘 돌이켜 봐.
저들은 저 짐승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어.
그리고 그 약점을 말도 안 되는 균형 감각과 운동신경으로 빠르게 찔러댔어.
이 행성에서 오랜 세월 타케아돈과 혈투를 벌인 사이라면 타케아돈의 약점을 잘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렇다면 타케아돈을 잡을 방법도 알고 있는 거야.”
태이는 자신이 계곡에서 타케아돈을 죽일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타케아돈의 목과 등으로 이어진 부분의 갑옷 같은 피부를 집중적으로 공격해서 무력화시키고 칼을 깊숙이 그곳에 찔러 넣었던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타케아돈을 죽인 무기는 블레이저 건이 아닌 긴 칼이었다.
네 개의 깃털을 꽂은 자도 약점을 노리고 집중공격하는 방식으로 저 짐승의 숨통을 끊었다.
저들의 사냥 능력이라면 타케아돈을 잡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타케아돈의 가죽을 벗겨 입은 것도 타케아돈의 천적이 될 수 있음을 뒷받침했다.
타케아돈은 자신들이 맞닥뜨린 것들만이 아닌 다른 개체도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었다.
어딘가에 타케아돈이 더 있을 것이었다.
저 네팔인들과 적이 되는 것보단 친구가 되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타케아돈을 능가하는 최대의 위협적인 존재들이다.
“서둘러 돌아가지. 너무 시간을 많이 보냈어.”
태이는 에이미와 바위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짐승을 뿔 달린 짐승이 끄는 수레에 싣고 다리를 건너는 네팔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던 델리안이 일행들의 침묵을 깼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저렇게 커다란 괴물을 사냥했어.
저 생명체들도 괴물 같은 존재들 같아.”
“어제도 숲에서 사냥하고 오늘도 사냥하고, 저들은 매일 사냥을 하고 사나 봅니다.”
토미가 델리안을 보며 말했다.
“이 행성은 각종 생명체 간의 전쟁터야.
서로 죽여야 살 수 있는 그런 곳이지.
우린 또 다른 생명체로 이 행성에 발을 디딘 것이고.
지나고 보니 우리도 이 행성의 생존 방식대로 살고 있었군그래.”
맥스는 자신들도 이 행성의 생존법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글의 법칙이 강하게 적용되는 행성이었다.
생명체들 간의 목숨을 건 생존 경쟁, 그 경쟁에 자신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었다.
글라치알리시움.
이 행성에 남아 있는 한 당연히 행성의 법칙에 따라야 했다.
문뜩 이 행성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일지 몰랐다.
맥스는 천천히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구조선이 언제쯤 올까요?”
브라임은 이 행성을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느 누구도 브라임의 심정과 다르지 않았다.
“글쎄, 지니의 구조 신호를 제때 받고 또 우리의 구조 신호도 받았다면 이 항성계에 이미 들어와 있을 거야.
빠르면 이미 이 행성 부근까지 도착했을 수도 있어.
물론 재빠르게 떠날 준비가 된 구조선이 있었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
매리언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이 행성에 불시착한 지도 22개월이 넘었습니다.”
델리안의 말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우리 위치를 알릴 수 있는 단파송신기를 찾아야겠군요.”
브라임의 음성이 조금은 밝아졌다.
단파송신기의 회수.
맥스나 매리언이나 그 지점에서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단파송신기가 멀쩡하게 있어야 했고 호전적인 저 네팔인들에게서 무사히 회수할 수 있어야 했다.
거대한 짐승을 사냥한 네팔인들이 다리를 건너 사라진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열매를 따고 밭에서 일하던 네팔인들이 하나둘씩 안으로 사라졌다.
기다리던 태이와 에이미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미셸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돌아오기로 약속했던 시간을 한참이나 넘겼기 때문이었다.
미셸은 태이를 굳게 믿고 있었고 그 믿음은 한 번도 배신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셸은 하리노프의 표정을 살폈다.
그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고 눈을 고정하지 못했다.
“미셸 중위님 아무래도 우리가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미셸과 눈이 마주친 하리노프가 여태 참았던 말을 꺼냈다.
“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런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고 어디부터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군.”
미셸은 답답했다.
타케아돈과의 계곡 혈투에 중장거리 통신기기를 잃었다.
가지고 있는 것은 수백 미터 정도 유효 범위를 가진 특수기동대 팀원 통신용 단거리 헤드셋이 전부였다.
그거라도 태이에게 줬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저 네팔인들의 거주지가 섬인지부터 확인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저 강을 따라 위로든 아래로든 움직였을 겁니다.
거기부터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하리노프는 가만히 있는 게 더 힘들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가만히 기다리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무모해. 이 시간이면 이미 파악하고 다른 장소에 있을 시간이야.
태이 대장님은 다른 것을 알아보고 있을 거야. 그건 분명해.”
미셸은 자신의 흔들리는 믿음에 스스로 경고를 하듯 분명하다는 말에 힘을 주었다.
“태이 대장이 늦는군.”
맥스도 자신의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동안 맥스 일행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네팔인들과 주위를 경계했다.
모두가 지루해질 때였다.
“드디어 저기 오는 것 같습니다.”
하리노프가 동작 감지기의 신호가 잡히는 방향으로 손을 가리켰다.
미셸은 하리노프가 가리킨 방향을 보며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맥스는 태이가 가쁜 숨을 가라앉힐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태이의 주변으로 일행들이 모여들었다.
“네팔인들의 거주지는 강 복판에 있는 섬이 맞습니다.
다리가 있는 이쪽 반대편에는 가시덩굴만 잔뜩 깔렸습니다.
그곳은 다리가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태이는 손으로 반대편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반대편 땅에는 돌과 바위들뿐입니다. 예전 용암지대였던 것을 증명하듯 뜨거운 용암에 바위나 돌들이 녹아 만들어진 모양입니다.
생명체가 살기엔 굉장히 척박한 땅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쪽은 드나들 다리를 놓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대신 경계를 위한 탑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저 거대한 바위산 뒤에 구조물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네팔인들의 주거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곳에도 밭과 나무가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수의 네팔인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판단입니다.”
맥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이는 뒤이어 네팔인들이 어떻게 거대한 짐승을 사냥했는지 상세히 묘사했다.
“저들과 전면전은 피해야겠군요.”
델리안의 말이었다.
“가능하면 저들을 적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최선이야.”
맥스가 델리안의 말에 동의했다.
“저들과 적이 되지 않고 송신기를 가져올 방법이 뭘까요?”
매리언이 맥스를 바라봤다.
맥스는 생각에 잠겼다.
“몰래 들어가서 가져오도록 하죠.”
하리노프가 말했다.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저들 거주지를 다 뒤질 수도 없잖아.”
델리안의 말이었다.
“라이언이나 조나단을 찾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직 살아 있다면 그들이 송신기의 행방을 알 테니까요.”
“라이언이나 조나단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 아냐?”
“죽이지 않았다면 어디에 가둬놓았을 테죠.
가둬놓을 만한 장소는 찾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 같군요.”
하리노프가 태이를 봤다.
“커다란 위험을 감수해야 해. 저 안쪽의 구조를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는 상당히 헤매게 될 거야. 그러다 들키면 교전이 불가피할 수도 있어.”
“감수해야죠. 까짓거”
하리노프는 의지를 불태웠다.
태이는 미셸과 에이미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들도 하리노프의 의견에 찬성하는 것 같았다.
“침투해 보겠습니다.”
태이가 맥스의 동의를 구했다.
“위험해. 자네들 목숨이 달린 문제야.”
“우리 모두를 살릴 방법입니다. 꼭 성공할 겁니다.”
“저도 끼워주십시오.”
알랭이 자신도 특수기동대와 함께하기를 원했다.
“알랭 참모. 우리는 조나단 행정관을 구하러 가는 것이 아니오.”
태이가 알랭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조나단 행정관이든 라이언 중위든 그들의 구조나 안위를 무시할 거요.”
알랭이 합세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단독으로라도 조나단을 구하려 한다면 그것은 큰 위험이 될 수 있었다.
“물론입니다. 저도 송신기의 회수를 누구보다 바라고 있습니다.
조나단 행정관님의 회수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알랭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알랭의 간절한 눈빛이 태이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알랭은 진심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조나단에 의해 트라이던트 호 생존자들의 비극이 시작됐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자신도 조나단에 물심양면으로 협조했었다.
남은 생존자들이라도 꼭 살아서 구조되어야 했다.
“알랭 참모가 단독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맹세할 수 있다면 같이 가도록 하겠소.”
“얼마든지 맹세하겠습니다.”
알랭은 과도하리만큼 고개를 끄덕였다.
태이는 알랭을 비롯한 특수기동대를 모아놓았다.
“먼저 정찰부터 한다.
우선하여 알아내야 할 것은 경계 상태야.
몇 명이 어디서 얼마 동안이나 경계를 서고 언제 교대하는지 그리고 그들의 사각지대가 없는지부터 살핀다.
살핀 결과에 따라 우리의 침투로가 결정될 거야.
그리고 부가적으로 저들의 행동 양식이나 생활방식을 살펴본다.
그것이 침투와 탈출 시간을 결정하게 될 테니까.
당연히 탈출로도 마련해야 해.
저 바위산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턴 모두 임기응변으로 대응해야 한다.
만약을 대비한 도피와 탈출에 대한 계획도 세운다. 그리고······.”
태이는 네팔인들의 상태나 반응에 대한 세밀하고 구체적인 대응책을 말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교전 수칙을 마련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진 않을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경우에 대한 대비책을 미리 숙지하고 있어야 했다.
태이의 지시에 특수기동대와 알랭이 동의의 고갯짓을 했다.
맥스도 그들의 계획을 승인했고 침투를 하게 될 특수기동대와 알랭이 네팔인들의 특징을 알아내기로 했다.
태이와 특수기동대는 숲으로 들어갔던 네팔인들이 거주지로 돌아가는 대로 네팔인들의 거주지를 은밀히 탐색하기로 했다.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네팔인들의 거주지에서 움직임이 많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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