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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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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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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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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5
글자수 :
2,037,868

작성
16.11.0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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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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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글자
10쪽

아프가니스탄 [The Beast..4]

DUMMY

안 그래도 공포에 짓눌려 불안정하던 이성이 그대로 산산조각 나려 할 때, 여전히 빌어먹게도 정중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와 그녀를 붙잡았다.


“좋습니다. 남편에게 준 기회를 당신에게도 드리지요. 남은 40분을 견디면 저 소녀는 괜찮을 겁니다.”


실낱같은 희망 하나가 세상을 밝혀주는 순간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반사적으로 외쳤다.


“하겠어요! 내가 반드시 해낼 테니까.. 그 약속 꼭 지켜주세요.”

“물론입니다. 당신이 나를 놀라게 하면 딸은 재미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겁니다.”


그가 말하는 재미가 귀에 거슬려 추궁하고 싶었지만, 칼자루를 쥔 자가 누구인지 알기에 미주알고주알 떠들지 않았다. 조용히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서 딸을 한 번 꼭 안아주고는, 자신의 발로 짐승이라 불린 사내 앞에 섰다.


'할 수 있어.'


그녀는 죽은 남편이 끌려간 부엌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두 손을 모았다.


‘여보, 당신이 못다한 거 내가 해낼 테니까, 힘을 주세요. 우리 딸을 위해서..’


여인의 행동을 조용히 지켜보던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마의 입에서 음산한 주술음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도 툭 불거져 나온 핏빛 광채가 그녀의 가슴으로 파고들자, 한 남자의 아내이자 훌륭한 어머니로서 기억되고자 했던 여인은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벌레로 화해 꿈틀거리는 감각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버틸 거야!’


그 벌레들이 몸속으로 파고들며 동공부터 갉아먹기 시작할 땐 절규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어떤 다짐이나 결심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보다시피 생명체로서는 저 고통을 견딜 수가 없거든.’ 악마의 속삭임이 이제야 현실로 다가온다.


고통의 크기에 비례해서 시간이 늘어지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을 한 번쯤은 품어 봤을 거다. 웃어넘길 만한 통증은 순식간에 사라지는데, 눈앞이 아득해지는 고통을 느낄 때면 세상이 초단위로 흘러가지 않던가?


내게는 억겁 같은 순간이 웃는 타인에게는 찰나인 것이다. 하면, 인간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통증은 당사자에게 어떤 상황을 선사하게 될까?


그것은 육신을 짓이기고 이성을 파괴한다. 멀리 무의식으로 도망가려는 본능마저도 붙잡아서 난도질하니.. 죽기 위한 자해만이 유일한 위로가 되리라. 시간의 흐름은 어떠냐고? 그딴 게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이미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갇혀서 영원토록 절규해야 하는데.


죽어 원혼이 되어서도 울부짖어야만 하는 고통이 바로 저것이었기에, 불멸의 세월을 살아온 그림자가 손에 든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


“놀랍군.”


액정 속 타이머가 00:00:00을 가리키자, 제 할 일을 끝낸 라마가 어둠 속으로 스러진다. 짐승의 몸에 새겨진 술식과 혈문[血文]도 사라졌고 노부부의 고즈넉한 보금자리를 감싸던 핏빛기류 역시 흩어졌다.


“제법 당돌하다 싶더니, 보통 여자가 아니었어.”


일련의 그 끔찍했던 의식의 흔적이 씻은 듯 사라진 집안을 찬찬히 둘러본 그는 턱시도 상의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산책이라도 하듯 천천히 걸어가서 아직도 살아 있는 여인의 머리맡에 섰다. 그녀는 온몸이 뒤틀린 채 간간이 몸을 떨고 있었다.


“불가능하다 여겼거늘, 나는 아직도 그처럼 열지 못하고 갇혀 있었구나.”


탈인[脫人]하고도 고통을 감당치 못해 죽어간 아이들을 수없이 봐 온 불멸자에게 여인의 지독한 모정은 신선한 감흥을 자아내게 하였다. 세상만사를 놀이의 연장 정도로 여기는 이 절대자에게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이 될까?


그는 인간의 외관을 상실한 핏덩이 옆에서 무릎을 굽혔다.


“내게 새로움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신다면 당신은 딸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스스로 다 뜯어내 듬성듬성 남은 머리카락을 선홍빛 핏물로 정갈하게 쓸어 넘겨주고, 누렇게 바래진 외 눈을 조심스레 감겨줬다.


“그대의 핏줄은 천수를 누리며 원하는 삶을 마음껏 영위해갈 겁니다. 그저 믿고 편히 쉬세요.” 그제야 여인의 몸에서 경련이 잦아든다.


그는 떠난 여인을 조금 더 살피며 오랜만의 감흥을 잠시 음미하다가, 제물의 죽음으로 술이 완성되는 순간을 목도하려고 시선을 옮겼다.


언제나 그렇듯 멋들어진 특수효과 따위는 없었다.


변태의 간격을 끝낸 사내는 분명히 다른 존재가 되었지만,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는 모습은 그저 흔한 벌거숭이에 불과했다. 시뻘건 핏물을 뒤집어쓴 채 덜렁덜렁 거리며 일어서는 것을 보니 조금 민망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할 건 하고, 지킬 건 지켜야겠지.’


그는 공중으로 떠오르듯 일어서서 상의를 살짝 바로잡은 뒤에, 오른손으로 중절모를 든 채 부드럽게 허리를 숙였다.



“300년 만에 깨어난 네 번째 일족이여, 저는 다섯 번째로서 일곱 욕망 중 하나의 본위인 바알제불이라고 합니다.”


역시나 재미없게도 사내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거실 구석으로 터덜터덜 걸어가서 한때 아버지라 불렀던 노구를 게걸스레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네 가족의 피로 목을 축이고, 부모의 살로 배를 채워라.’ 이는 태초에 짐승을 잉태한 어미의 의지요, 본능에 새겨진 유일한 명령이고 각성의 조건이었다.


가진바 권능을 발현하지 못한 짐승은 바닥에 고인 핏물 속 파편까지도 개처럼 핥아 먹은 뒤 허기진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마침 살아있기까지 한 싱싱한 먹잇감이 눈에 들어오자 군침을 삼키며 일어섰다. 그리곤 적이 아닌 자를 힐끔 쳐다보고는 벌써 몇 시간째 멍하니 서 있는 소녀를 향해서 걸었다.


‘부드럽겠군.’


가느다란 팔을 뜯어낼 생각에 흥이 돋아 절로 입가가 일그러질 때, 막연한 거부감을 들게 한 자가 먹잇감을 향한 동선을 막아선다. 그와 동시에 물에 빠진 듯한 압박감을 느긴 짐승이 걸음을 멈췄다.


‘왜?’ 의문을 떠올리자 시꺼먼 놈의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쉽게도 이 아이는 당신에게 허락된 먹이가 아닙니다. 이만 가야 할 시간이니까, 옷이나 걸치십시오. 썩 보기 좋지만은 않군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자를 가만히 노려보던 짐승은, 벽이 앞을 막으면 돌아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보기 좋게 무시당한 자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저를 두려워하지 않는 건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서두르지 않으면 그대의 왕이 기다리게 될 테니, 거기까지만 하십시오.”

“왕?”


짐승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약간은 거칠고 투박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목소리였다. 바알제불은 어린 짐승의 물음에 간단한 답변을 하고는..


“예, 당신들의 왕.” 상의 안주머니에서 작은 구슬을 꺼내 던졌다.


반사적으로 구슬을 받아 든 짐승은 영혼을 옥죄이는 무적자의 음성을 듣고 그의 절대적 존재감에 전율하며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제왕이시여.’ 어떤 말이나 행동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죽은 듯 엎드려서 높디높은 자가 내리는 절대의 명을 경청했다. 이윽고 왕의 형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다가 겨우 고개를 드니, 코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 나쁜 놈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리는 게 보인다.


'이놈이..'


절로 이가 악물어져서 으르렁거리니, 놈은 진홍빛 눈동자처럼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쓸데없는 오기 부리지 말고 어서 갑시다. 당신의 왕에게 이름을 하사받기 위한 전투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전투?”

“오롯이 당신을 위한 전장을 아프가니스탄에 마련해 뒀습니다. 상대는 기껏해야 총을 든 인간에 불과하니까, 즐거운 만찬 정도가 되겠군요.”

“만..찬.”


굶주린 짐승은 거만한 놈의 뒤로 보이는 가느다란 허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지만, 어둠 속에서 날아든 옷가지가 시선을 가리는 순간 욕정을 삼켰다.


'아직은 아니야.'


놀랍게도 그는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는 노부부가 아들을 위해서 준비해 둔 흑갈색 정장을 걸쳤다. 잘 다려진 셔츠가 부드럽게 몸을 감싸며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자, 그의 시선이 이제는 핏자국만 남은 어떤 흔적을 더듬었다. 혀끝을 맴도는 피비린내가 썩 반갑지만은 않아서 한숨마저 나올 때..


“죄송하지만, 싸구려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의 왕도 만나야 되고, 블라블라 영웅담을 듣고 만찬도 치러야 하니, 어서 좀 움직이시죠.”


마음까지 읽는 상대의 도 넘은 간섭에 다시 살의가 일었지만, 어느새 소녀까지 챙겨 현관을 나서는 놈의 뒷모습을 보자 그냥 힘이 쭉 빠졌다.



'일곱의 본위라고? 그게 무슨 개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네놈도 언젠가는 내가.. 한데, 그건 그렇고 아프가니스탄의 만찬이라.'


예전과 달리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전장 중 한 곳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뒷골이 저릿해져왔다. 과연 어떤 향연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래도 도착하기 전에 배를 좀 채웠으면 좋겠는데.’ 그는 더할 나위 없이 가벼운 발걸음을 놀려 현관을 나섰다.


그렇게 짐승은 떠나갔고 어둠을 뱉어낸 밤하늘은 붉음을 띄기 시작했다. 노부부의 아늑했던 보금자리가 한 폭의 그림처럼 불타오를 때, 총을 든 인간에 불과한 먹잇감들.. 광기에 영혼을 바친 학살자들이 짐승의 사냥터로 초대 받았다.



그래, 그곳은 허기진 짐승처럼 피에 굶주린 학살자들의 전장이었던 것이다. 아직 어린 짐승은 모르리라. 어미가 품은 광기의 뒤틀림을.. 그 역한 증오를.



네 번째 아이는, 무서운 어미의 눈을 피해 먹이의 탈을 써 버렸네.


셋과 넷은 시선을 피했지만, 버리고 뒤집어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영원히 고통 받으리라.


다시금 저주하리라.


작가의말

다음 챕터는 아프가니스탄 [학살조] 입니다.

늦었지만, 오랫동안 기다려 주신 분들에게 그저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감기도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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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아프가니스탄 [The Beast..전운1] 16.11.22 754 13 14쪽
27 아프가니스탄 [The Beast..학살조장] 16.11.21 816 12 14쪽
26 아프가니스탄 [The Beast..9] +1 16.11.21 743 13 12쪽
25 아프가니스탄 [The Beast..8] 16.11.18 646 1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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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아프가니스탄 [The Beast..6] 16.11.17 726 12 11쪽
21 아프가니스탄 [The Beast..5] +1 16.11.17 835 13 12쪽
20 아프가니스탄 [흐름] +3 16.11.15 841 1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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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아프가니스탄 [학살조..8 도살자] +1 16.11.14 758 1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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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아프가니스탄 [학살조..6 도살자] 16.11.11 854 15 13쪽
15 아프가니스탄 [학살조..5 도살자] 16.11.10 851 13 12쪽
14 아프가니스탄 [학살조..4 구원자] +1 16.11.09 1,055 15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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