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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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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최근연재일 :
2018.03.26 19:27
연재수 :
36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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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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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5
글자수 :
2,037,868

작성
16.11.04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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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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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글자
19쪽

아프가니스탄 [The Beast..다프네2]

DUMMY

왜 저런 곳에 떨어져 있는 걸까? 혹시, 이름을 불러 준 보답일까?


어떤 것이든 상관 없었기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움직였다. 지금 눈을 뜨고 있는 것만해도 기적이었다.



‘빨리.’


아이를 쓰다듬어주려고 했던 팔을 조금 더 뻗으니 손끝이 종이팩에 닿는다. 힘이 없어 떨리는 손가락을 모으고 모아서 가까스로 팩을 잡은 뒤에 팔을 당기려는데, ‘빌어먹을!’ 움직이질 않았다.


'조금만 더하면..' 안타까운 마음과 달리 속절없이 눈은 감겼고, 뭔가를 게걸스럽게 씹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싫어.’


거부하려고 했지만, 허락되지 않은 삶을 감히 탐하려고 한 것에 벌이라도 주려는 지 식[食]의 소리는 집요하게 귓속을 긁어댔다.


'그만.'


인육과 오물, 피비린내가 뒤섞인 익숙한 악취가 코끝을 맴돌더니 부드럽게 식도를 타고 넘어 갔다. 너무 달콤해서 오르가슴이 느껴진다.


‘안..돼.’


이번에는 짐승의 눈으로 보고 오감을 공유할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미친 듯 발버둥쳤지만, 뱉어진 건 이번에도 역시나 미약한 호흡에 불과했다. 오히려 입 안으로 뭔가 몰랑한 것이 들어와서 씹히기 시작했다. 아직은 흐릿한 시야 사이로 눈알이 없는 노인의 얼굴이 보인다.


'신이시여.' 절로 헛구역질이 나왔다.


제발 그만뒀으면 좋겠지만, 곧 짐승이 느끼는 희열에 취해 식인과 살육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리라. 그리곤 잠에서 깨 느낄 괴리감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자살충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이제 그만 좀.. 날 내버려 둬.’


이제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로 덧없는 넋두리를 뱉을 때, 너무 선명해서 소름 끼치는 아기 울음이 들려와서 뒤통수를 쾅! 하고 두들겼다. 어찌나 충격이 컸는지 잠에서 깨어 현실에서 눈이 부릅떠질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아니야.’


갓난아기 소리에 이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놀랍게도 그녀 자신이 아니었다.


‘대체 뭐였지?’


놈들이 인간의 아기 울음에 놀라 동요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감정의 흐름을 찬찬히 되짚어보고 싶었다. 하나 지금 중요한 건 그딴 호기심이 아니지 않던가?


‘빨리.’


그녀는 다급히 약을 집었다. 안간힘으로 팔을 당기며 있는 힘껏 목을 뺐다. 발악하듯 입을 벌리고 코앞의 종이팩을 향해서 길게 혀를 내밀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단내가 날 정도로 입안이 바싹 마를 때쯤, 보기와는 달리 부드러운 감촉이 혀끝에 느껴진다.


‘실수하면 안 돼.’ 그녀는 천천히 혀를 당기고 입을 닫았다.


종이팩 특유의 텁텁한 향이 코끝을 맴돌자 입가에 평온한 미소가 걸린다.


‘해냈어.’


이제는 알약을 삼킬 힘조차 없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어느새 녹아 종이팩 밖으로 스멀스멀 배어 나온 약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놀랍게도 약 1분여만에 온몸으로 퍼진 약기운은 꿈에 취해 움직이지 않던 몸을 거짓말처럼 회복시켰다.


“오늘은 정말 최악이었어.” 그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온다.


세상 그 어떤 각성제로도 거부하지 못했던 수마를 쉽게 잠재우는 약을 만난 이후로 오늘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마라톤을 한 듯 탈진한 상태라 한숨 자고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자 그녀는 작게 헛웃음을 흘리며 바닥을 짚었다.


‘이제는 진짜로 움직여야지.’


약의 효력은 지극히 한시적이었고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생각보다 행동을..'


머릿속이 언제나, 당연히, 끊임없이 혼란스러운 그녀의 유일한 행동강령이었기에 바로 움직였다. 관절인형같이 뻣뻣한 몸을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풀면서 창가로 다가갔다.


‘오늘 날씨가..’


창문을 가리고 있던 검은색 블라인드를 걷어내고 창 밖을 보던 그녀의 얼굴에 싱그러운 미소가 그려진다.


“죽이네.” 그녀는 날 듯이 걸어서 침실을 벗어났다.


방 안과 같은 형태의 천장조명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가다가 일제히 불을 밝히자, 어두컴컴했던 거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베이지색 벽지로 도배된 무려 20여 평의 거실에는 대형 벽걸이TV와 검은색 카우치 소파 하나, 고급스러운 가죽 시트 위에 놓인 리모컨과 노트북 한 대만 있을 뿐, 어떤 장식이나 가구도 없었다.


침실은 그렇다 쳐도 거실까지 이렇게 텅 빈 걸 보면, 그녀에게 집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다.


그녀는 집안의 모든 전기장치를 제어할 수 있는 리모컨의 스위치를 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발코니를 가린 두꺼운 커튼이 좌우로 열리자 방음 처리 된 유리문의 잠금장치가 해제된다.


"좋았어."


습관처럼 혼잣말을 하며 리모컨을 소파에 던진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산뜻한 바람이 불어와 온몸을 만져주니 절로 탄성이 나온다.


“와, 오늘 날씨 너무 좋아.”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려친 번개가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하얗게 물들였다. 이어진 천둥을 쫓아서 시선을 옮기니 엄청난 폭우가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예뻐라.” 그녀는 이런 날씨를 좋아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비와 천둥에 묻힐 때면 고요한 해방감을 느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빗소리와 향기를 충분히 음미하던 중, 해야 할 일이 떠오르자 문을 활짝 열어둔 채 거실로 들어왔다.


“빨리 끝내고 나가야지.”


들뜬 목소리로 중얼대며 거실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소파에 엉덩이를 걸쳤다. 노트북을 당겨와 열고 부팅이 되길 기다렸지만, 화면에는 그 흔한 윈도우 로고조차 보이질 않았다. 전원 케이블이 꽂힌 거로 봐서 배터리가 없는 것도 아닌 듯 한데, 왜 저렇게 반응이 없는 걸까?


답답하다.


부팅 시간 1, 2초에 희로애락이 갈리는 현대인이라면 벌써 노트북을 닫았다 열고 심지어 분해까지 했을 텐데, 그녀는 다소곳이 손을 뻗어 모니터에 가져다 댈 뿐이었다. 혹시 기계와 교감하는 능력이라도 있는 걸까?


설마..


그녀의 손바닥이 닿은 부분이 하얗게 변했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니 지문인식 따위를 한 것 같다.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온 화면에는 특별할 게 없는 메일 프로그램이 하나 떠올랐다. 회사 로고 조차 없는 프로그램에는 수신자와 발신인 그리고 전송 버튼만 있었는데, 수신자 란에 입력된 바알제불[Ba'al Zebul]라는 단어가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목소리를 떠올리게 했다.


“너는 정녕 네 어미의 뒤를 따를 테냐?”


더는 견딜 수가 없어 코카인을 구입했을 때 나타난 중년인의 눈빛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좀 전의 무례를 사과하지요. 지금 당신이 절벽 끝에 섰다고 여기신다면,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할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거짓말같이 신사의 얼굴로 돌아온 그는 젠틀했지만, 경이로운 미모에 꼬인 날파리들이 벌써 수 만가지 제안을 했었기에 관심이 없었다. 한데..


“한정적이지만 당신에게 일상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특별한 약이 있답니다. 꿈에서 깨어나는 약이지요.”


솔깃했다. 하지만 여태껏 만난 사기꾼이 한 트럭이었다.


“어차피 또 마약을 할 것 같은데, 밑져야 본전 아닐까요?”


그는 흰색 알약 한 알이 담긴 조그만 종이봉투를 내밀었고, 바로 그 순간부터 이 불쌍한 여인의 구원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당신에게는 고가의 약이었군요. 이거 참, 죄송합니다.”


약간의 중독성을 빼고는 완벽한 약효를 겪고 보니 그는 세상 둘도 없는 악덕상인이었다. 그래서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으로 딜을 걸었다.


“섹스요? 물론 그대는 제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당신의 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그 아름다운 외모가 아닌 악몽을 사고 싶군요.”


뭐야, 변태였어?


“꿈 속 에피소드 하나 당 1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어떤 상황이라도 좋으니까, 담아두지 마시고 제게 털어놓으세요. 이제부터 꿈꾸는 걸 즐기시게 될 겁니다.”


하루 평균 16시간 이상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제안이었다.


“계약을 체결한 기념으로 작업하기 좋은 장소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그저 작은 펜트하우스니까, 부담 갖지 마십시오.”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만일 그녀가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알았다면 대명천지 있을 수 없는 계약이라 진의를 의심했을 거다. 하나 그간의 지옥 같던 삶 속에서 만난 건 발정 난 짐승이 전부였다. 언제나 눈을 뜨면 침대였고.


‘그냥 다 꿈이라 여겼지.’


그나마 괜찮은 사람들도 몇 명 있긴 했지만, 이 미치고 쓸데 없이 이쁘기만한 년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 떠나버렸다. 곁에서 세상을 가르쳐 줄 사람은커녕, 작은 조언이나마 들려 줄 인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이번엔 마약은 아닌 것 같으니까.’ 이미 삶을 반쯤 자포자기 했기에 그녀는 쉽게 계약을 맺었다.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도 믿을 만 했고 말이다.


“자, 여기에 동의 하신다면 이 노트북의 모니터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십시오.”


마치 처음부터 옆에 있었던 것처럼 나타난 포니테일의 비서가 검붉은 노트북을 열어서 내밀었을 때, 별다른 거부감 없이 그렇게 했다. 화면에 흰색 손 모양이 나타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중..


“자, 그럼 가실까요?” 기다란 리무진이 미끄러져왔다.


그렇게 홀린 것처럼 계약은 성사되었고 다행히도 그는 사기꾼이나 변태, 포주가 아니었다. 편한 보금자리와 뭔지 모를 일자리를 정말로 준 것이다.


‘세상에, 정말로 입금 했어!'


지난밤에 꾼 악몽을 두서 없이 써 갈긴 대가로 1만달러를 벌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삶에 서광이 비치는 걸 느꼈다.


‘그때는 약을 쓴 대가가 이런 건지 몰랐어. 사실 알았다고 해도 계약을 했겠지만..’


그후 1년이 흘렀다. 이제 세상물정에도 제법 밝아져서 이런 저런 활동을 하던 중,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을 뒤적였다. 검색어는 악몽과 그 사람에 관한 것이었는데, 채 10분도 되지 않아서 인터넷과 전기가 끊겼다. 전화와 휴대폰도 먹통이라 나가려 했지만, 문이 열리질 않았다.


“뭐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1시간쯤 갇혀 있으니, 항상 찾아오던 포니테일의 비서가 아닌 그가 직접 대문을 열었다.


“다프네 양, 당신은 지금 아주 잘못된 길로 발을 들였습니다. 과거와 현재, 지옥과 천국은 양립할 수 없음을 명심하십시오.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는 크고 돌이킬 수 없을 겁니다.”


정말 몰라서 그랬다고, 죄송하다 사과하려 했지만, 감히 입 밖으로 뱉을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중했고 행동은 젠틀했지만,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는 눈빛은.. 처음 봤던 날을 되살리게 하는 포악한 짐승의 것이었다.


‘무서워.’


어쨌든 그날 이후로 두 번 다시 그 사람이나 꿈에 관해 알아보지 않았다.


‘그래, 그가 악취미를 가진 외계인에 마피아, 정부요원 테러리스트면 또 어때? 그냥 나는.. 이렇게 살아 갈래.’


차마 엄마처럼 자살할 수는 없어 억지로 버텼던 비루한 삶이 이제는 달에 수십만 달러를 버는 능력자의 것이 되었으니.. 만족을 넘어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돈은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하니까.

자신을 도태시키고 유린했던 사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회와 소스를 제공해줬다. 존중과 매너는 덤이겠지.


“다프네 양, 직접 겪어보니 어떠십니까? 여기 이 라인만 넘지 않으면, 당신은 누구보다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결코 새장이 아니에요, 제 말을 믿으십시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비유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의 말은 지극히 옳았다.


꿈을 극복하기 위해 악몽 속에서 살아야 하는 모순적 상황에서도 그녀는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아갔다. 기회가 되면 뭐든 열정적으로 배웠고, 콘서트부터 영화관람에 쇼핑 등의 꿈도 꾸지 못했던 문화생활을 즐겼다.


‘이런 삶은 영화 속에만 있는 줄 알았어.’


하지만 타인과의 친분을 만드는 경우는 없었다. 그녀에게 인간은 돈과 욕정을 따라서 모여드는 벌레일 뿐이었으니까.


‘천금 같은 시간을 왜 쓸데 없는 감정낭비에 사용해?’


사투 끝에 쟁취한 과일은 그렇게나 달콤하고 소중했지만, 매일 찾아오는 절망과 고통에 비하면 미흡하다 여길 때도 많았다. 때때로 그 치열한 간극 사이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면..


‘이러다 약이 떨어지면 다 끝이잖아? 순식간에 지옥으로 떨어 질 거야. 그러면 이딴 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어쩌면 이것도 다 꿈일지 몰라.’


우울증에 빠져서 죽음을 그리곤 했다. 하지만 엄마 덕분에 생긴 트라우마와 어느 날 불쑥 찾아온 그가 던진 말 때문에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다프네 양, 당신에게 우울할 시간이 있다는 게 놀랍군요. 남들에게 죽음이 당신에게는 영면[永眠]일지도 모릅니다. 영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생각은 그만하고 주어진 걸 고맙게 여기세요.”


이번에도 그의 조언은 닥치고 들어야 할 정도로 맞는 말이었다. 어쨌든 그는 은인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 깔보는 듯한 시선과 말투가 불쾌한 것 또한 사실이라, 오늘처럼 놈의 목소리가 떠오를 때면..


“재수 없는 새끼!”하고 욕을 했다.


그리곤 한참동안 입술을 삐죽이며 노트북을 쏘아보던 그녀는 새하얀 손을 들어 노트북 위에 올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냥 후딱 해치우자.’


그녀는 억지로 외면하고 있던 악몽 속 처절한 죽음들을 떠올리며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자세하게 적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불편한 포니테일 비서가 찾아와 다그칠 게 뻔하였기에, 악몽을 몇 번이고 복기해야만 했다.


‘질질 끌면 나만 힘들어질 뿐이야. 최대한 집중해서 한 번에..’


주소를 아는 만큼 적고 기억 속 장면들을 떠오르는 대로 두들기는 것 까지는 쉬웠다. 하지만 사건으로 들어가면 너무 힘겨웠다.


‘아, 정말 싫어.’


갈기갈기 찢어진 여인이 어떻게 발버둥을 치고 무슨 말을 했으며 어떤 비명을 지르다 언제 어떻게 무엇을 하며 죽었는지, 잡아 먹힌 아기의 생김새는 어떠했고 먹은 짐승은 어디부터 어떻게 먹었으며 얼마나 만족했는지를.. 다 끝낸 후에는 또 어떤 행태를 보였는지 세밀히 묘사해야만 했다. 토악질이 나온다.


‘젠장, 언제쯤 익숙해질까? 아니지, 익숙해 지면 안 되는 거잖아? ’


다행히도 아직 빈 속이라 소파를 버리지는 않았다.


‘아, 돈 벌기 힘들어라.’


그녀는 손을 들어 젖은 입술을 훔친 뒤, 언제부터 흘렀는지 모를 눈물을 닦았다.


‘또, 울었구나.’


길게 한숨을 뱉어내며 ‘그는 흰색 랜드로버를 몰고 사무엘스 공항으로 갔음.’이라는 문장을 끝으로 커서를 움직였다. 발신인 란에 자신의 이름 ‘다프네[Daphne]’를 입력하고 전송버튼을 눌렀다. 전송완료 메시지가 뜨는 걸 확인하고 덮개를 소리 나게 닫은 뒤 욕을 하며 일어섰다.


“변태 새끼.”


이제 발코니로 가서 머리를 좀 식히려다가, 그냥 빨리 나가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원피스를 벗었다. 손에 들고 샤워실로 걸음을 옮기자 움직임을 감지한 센서가 다시 조명을 밝힌다. 은은한 불빛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나신은 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은 것처럼 매혹적이었다.


어떻게 저런 곡선을 가질 수 있는 걸까?


이미 수많은 남성을 수컷으로 만들면서 순수를 잃었음에도 티없이 하얗고 탄력적인 피부는 더없이 투명했다. 매혹적인 얼굴과 어우러지면 그저 섹시했고. 그녀를 겪은 사내들이 원인 모를 갈증 속에서 우울증과 향수병을 앓다가 시든 이유가 바로 저것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완벽한 외모를 부러워할 필요는 없는 게.. 권능으로 위장된 재앙의 업을 이었음에 생존을 위해서 선택된 필요불가결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잠들어 있는 못난이를 아껴줄 사람은 가족 말고는 없지 않겠는가?


아니라고, 우리는 이성적인 인간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모든 동물의 외모는 삶의 질을 결정한다.


한데 모순적이게도 저 아름다움 때문에 역대 예지자들은 더 비참한 삶을 살아갔다고 한다. 아마도 탐욕과 음심 때문이리라. 이는 지양하고 조절해야 할 마음이었지만, 뭐 어쨌든 이렇게 지켜보는 입장에선 즐거우니 조금만 더 보도록 하자.


그녀는 고혹적인 자태로 샤워를 하며 몸 곳곳을 찬찬히, 꼼꼼히 씻었다. 전신 거울 속 촉촉한 자신을 보며 풍만한 가슴을 모으고 잘록한 허리와 완벽한 골반을 쓸어내리는 등의 섹시한 포즈를 취하며 자신을 유혹 하듯 쳐다보다가, 소녀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누구한테 보여줄 것도 아니고.”


그녀는 'Walking On Heaven'을 콧노래로 흥얼대며 샤워를 마무리 하고 나오다가, “그런데 왜 그렇게 충격받은 거지?”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정말로 죄책감을 느낀 건가? 그러고 보니 그 짐승은 뭔가 달랐는데..’


문득 떠오른 의문을 되짚어 보며 타월로 몸을 감싸고 드레스 룸으로 향할 때, 예지자의 메시지를 받은 바알제불은 단출한 디너 파티에 참석하기 전, 왕을 만나 허락을 구했다.



“직접 움직이겠다는데, 내가 어찌 말리겠나. 그런데..”

“하명하십시오.”

“직접 움직이겠다고?”

"예."

"직접 움직이겠다?"

“뒤집어 쓴 무게에 압사하기 전에 한 번 봐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도 300년 만인데..”


둘은 같은 색깔의 무감정한 눈으로 서로를 보다가, 너나 할 것 없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왕이 먼저 입을 연다.


“지켜봐야겠지.”

“지켜봐야합니까?”

“자네가 보지 않는 게 있던가?”

“허락하신 곳만 눈에 담았습니다.”

“하면 이번에는 감게.”

“안내자로 끝내도록 하지요.”

“잘 부탁하네.”

“받들고 물러납니다.”


왕은 영원히 허기진 짐승이 사라지는 걸 조용히 바라보다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자 홀로 중얼댔다.


“어떤가?”

“어리고 사악한 놈이지만, 아직은 몰라.”

“잘 부탁하네.”

“나도 받들고 물러납니다.”


킬킬대는 웃음을 끝으로 짧은 대화들은 막을 내렸다. 멀리 밤하늘을 올려보던 짐승의 왕은 300년 만에 태어난 아이가 걸어야 할 길을 떠올리며 흐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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