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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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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최근연재일 :
2018.03.26 19:27
연재수 :
36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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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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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37,868

작성
16.11.14 21:10
조회
758
추천
10
글자
11쪽

아프가니스탄 [학살조..8 도살자]

DUMMY

심상찮은 살기와 광기를 머금은 눈빛에 압도된 산토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지금 느끼는 고통을 그리워하게 될 것만 같아서, 이를 악물고 발에 힘을 줬다. 그를 본 사신의 눈빛이 한층 더 짙어진다.


“봐, 움직일 수 있잖아. 네가 정말로 해내면, 그 칼을 뽑아주마.”


놀랍게도 자신을 배려해주는 말에 감격한 산토는 눈앞의 무시무시한 사람이 그렇게 해주면 이 지옥 같은 상황이 없어질 거라는 망상에 빠진 채 신음을 흘렸다.


'빨리..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과 행태였지만, 본디 쉽게 올라선 자들이 와르르 무너질 때면 온갖 미친 짓을 다 하는 법이고.. 심지어 그는 마약중독자였다. 어쨌든 결국에는 일어서는데 성공한 산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붙잡은 채, 강아지 같은 눈으로 무서운 분을 바라봤다.


“부탁..합니다.” 그의 애달픈 목소리를 들은 도살자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그려진다.


산토 역시 마주보며 비굴한 웃음을 흘렸고 작게 고개를 끄덕인 도살자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곤 타깃의 왼쪽 어깨에 비스듬히 박힌 대검의 칼자루를 붙잡았다.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던 산토는 다시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조금만, 살살..아니요, 아니.. 그냥 감사합니다.”


칼자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니 자연스럽게 상처가 벌어져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그는 가까스로 씹어 삼켰다. 이제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은인에게 혹여 밉보일까 봐,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제발 좀 빨리.’


그를 본 도살자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며 말했다.


“약속은 지켜야지.”

“정말..감사..!”


도살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검을 뽑아내자 산토의 얼굴에 그려진 미소가 흉하게 일그러진다. 칼날 방향을 따라 그대로 그어내려서 왼쪽 어깨에 박힌 대검을 오른쪽 옆구리로 빼내 버린 것이다. 인간의 몸통을 뼈까지 단숨에 갈라버리는 초인적인 힘을 경험하였음에도 산토는 감탄할 수가 없었다. 두 눈을 찢어지라 부릅뜬 채,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고통 속에서 헐떡이며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왜..?” 어리석게도 믿은 나와 마음대로 약속을 지킨 너를 향한 물음이리라.


얼굴에 뒤집어쓴 핏물을 손등으로 닦아낸 도살자는 상처가 갈라지며 피와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며 옅게나마 미소를 그렸다. 전장을 더럽히는 오물덩이를 처리해서 기분이 산뜻해 진 걸까? 아니면 오래전 상실한 정의의 끝자락을 다시 맛봐서 일까?


모를 일이다. 광기에 모든 걸 바친 자는 기괴한 웃음을 띤 채, 죽어가는 이를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산토는 위층의 다른 이들이 그랬듯 몸 밖으로 흘러나오는 장기를 붙잡고 상처를 감싸려 애쓰다가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곤 자신이 쓰레기 취급했던 자들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붉음을 지켜보며 마지막 숨결을 뱉어냈다.


“아..빠.”


이제는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투정을 미처 다 뱉지 못한 산토가 그렇게 무너지자, 도살자는 인기척을 따라 고개 돌렸다. 잔혹하고 끔찍한 살육의 모습에 놀란 여인들이 겁에 질려 떨고 있다. 강제로 주입된 마약에 취해 폭행과 겁탈에 시달리며 지옥 같은 밤을 보냈는데, 눈을 떠보니 악마가 악인을 죽이고 있다. 이 믿지 못할 상황 앞에서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신이시여.’ 여인들은 그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막 소녀티를 벗은 처녀의 커다란 눈망울 속 고통을 살핀 도살자는 그들의 복잡한 감정을 명확히 읽어냈다. 몸을 더럽힌 원흉의 죽음에 희열을 느끼면서도, 살인의 현장이 주는 공포에 짓눌려 숨도 쉬기 어려운 지경이리라. 그리고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슴 한쪽에 품고 있겠지.


‘불쌍한 아이들이야.’


도살자는 그녀들을 안심시키려고 흐릿하게나마 웃음을 보였다. 그러자 여인들 중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 한 명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은인에게 고개 숙인다.


“구해 주셔서..감사합니다.”


부드러운 미소로 답례를 대신한 도살자는 산토의 왼쪽 옆구리에서 데저트이글을 꺼내 들곤 다시 한 번 죄 없는 자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를 본 여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손을 맞잡는 순간, 그는 한 치 망설임도 없이 타깃들의 머리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곤 쓸쓸히 중얼거렸다.


“작전지역 내 모든 생명체를 제거하라.”


정확히 총알 두 발의 무게만큼 가벼워진 데저트이글은 이름값을 했고 커다란 침대는 붉게 물들었으며, 명령은 이행되었으니 모든 게 다 잘 해결되었다. 한데..


'그냥 여기에서 죽은 게 저들한테도 나은 거야.'


눈 깜박할 사이에 즉사해서 어떤 고통도 느끼지 못했을 거라 위안하며 가슴 속 어떤 역함을 한숨에 실어 뱉었다.


‘당연히 해야 될 일이었지만, 이런 건 아닌데.’


2년 전, 어렵사리 ‘나’를 찾은 뒤부터 생긴 고뇌가 머릿속을 맴돌자, 마찬가지로 그때부터 생긴 변명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래서 검이 아니라 총으로 죽인 거잖아.’


언젠가부터 적군이 아닌 단순 희생자는 자동화기로 처리했다. 죽음에 정도가 있겠냐 만은 나름의 자위고 배려였다. 하지만..


‘웃기지 마, 배려가 아니라 총기술의 단련이겠지.’


그는 광기의 속삭임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호화로운 밀실의 한쪽 벽을 다 차지한 거울 속 미치광이를 애써 외면한 채, 벌거벗은 여인들을 이불로 덮어주려고 한 걸음 움직였다. 그때..


“악..마.”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막은 듯 억눌린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돌아서니 턱수염을 덥수룩히 기른 30대 중반 정도의 사내가 보였다. AK소총을 든 채 벌벌 떨고 있는 걸 보니, 기다리던 문지기가 분명했다.


‘빌어먹게도 멋진 타이밍이군.’


도살자와 눈을 마주친 문지기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다가 실수로 방아쇠까지 당기고는 총소리에 놀라 도주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 행태가 여태껏 죽인 버러지들과 다를 게 없었음에, 그는 다시 살의가 돋는 걸 느꼈다.


‘네놈들 때문에 전장이 더럽혀지는 거야.’


벌레 한 마리를 죽이니 다른 한 마리가 나오고, 그 놈을 짓밟다 보니까 또 다른 하나가 나와서 속을 긁어댄다. 한데 그 와중에 놈이 쏜 총알이 오른쪽 상완 어림을 찢어버리기까지 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우연이겠지만, 그게 또 속을 뒤집어댄다.


‘운이 좋아서 죽지 않은 거야. 만약에 머리나 가슴을 맞았다면? 그래, 고작 이 정도가 내 한계인데 가책 따위에 짓눌리다니.’


상대가 연사라도 했다면 치명상을 입었으리라.


‘우연히니까 괜찮다고? 아니, 전장에 우연히 죽은 시체 같은 건 없어. 그러니까 더 강해져야 해.’


결국에는 머릿속이 그렇게 정리되니 입가에 비릿한 살소가 걸린다.


‘죽이고 죽이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혼자 넘어지고 뒹굴던 먹잇감이 긴 통로를 지나서 계단 쪽으로 사라지는 게 보인다. 듣기 민망할 정도로 고함을 질러대는 게 더 살심을 자극해왔다.


“도망쳐! 악마, 악마가 나타났다!” 문지기 나지르는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산토의 몸을 사선으로 갈라버리는 괴물 같은 힘과 산토의 몸에서 터져 나온 핏물을 뒤집어쓴 채 웃고 있던 살인마의 미소는, 그가 1층 피바다의 원흉이며 인간이 아닌 악마라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고맙다며 고개 숙이는 소녀들의 조그마한 머리통을 터트린 뒤 빙그레 웃던 얼굴이 아직도 눈앞을 아른거린다. 그야말로 경전 속 악마의 모습이 아닌가? 그래서 외치고 또 외쳤다.


“도망쳐, 이곳에서 벗어나야 해!”


1층으로 올라와 정신없이 뛰다가 동료의 시체에 걸려 넘어지며 바보처럼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엉금엉금 기어서 겨우 건물 밖으로 뛰쳐나가니, 세상은 이미 불지옥으로 변해있었다. 사방팔방에서 비명이 들려온다.


“이런 씨팔!”


이제 방법이 없었다. 막다른 길이고 절벽 끝이며 지옥이었다.


"그렇게 죽기는 싫어."


산토처럼 두 쪽이 나서 내장을 쏟거나 머리통이 터져나갈 거라는 생각에 눈앞이 하얘졌다. 이 모든 재앙의 원흉인 악마로부터 도망가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영혼을 빼앗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자, 곧 악마가 튀어나올 시꺼먼 입구만 눈에 들어왔다.


‘막아야 해, 저곳을 막아야만 해!’


그래서 총알을 퍼붓기 시작했다. 절규하며 마지막 희망인 신을 찾았다.


“제발, 제발 좀 도와주세요.”


정말 간절하고 또 절실히 기도했다. 그렇게 빌고 또 빌다 보니 놀랍게도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우레와 같은 굉음과 함께 내려온 신의 잣대는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일거에 앗아갔다.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문지기의 간절한 기도와 몸부림은 구원자의 광기를 눈뜨게 했다. 이것이 그토록 찾고 바라던 신의 뜻이요 운명인 걸까? 모를 일이다. 죽은 자를 극한으로 몰아붙인 악마조차도 한숨지을 뿐이었으니까.


‘정말 이게 맞는 걸까?’


건물 입구에 선 도살자는 학살조의 광기 아래 도륙당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무[武]를 위해서 살[殺]을 취하고 광기에 젖었을 땐 몰랐지만, 조장의 도움으로 조그만 언덕 하나를 넘고 보니 덧없는 살육이 언제나 반갑지만은 않다.


‘젠장.’


‘왜 강해지려고 하는가?’ ‘지금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이곳에서는 찾을 수 없었기에, 이만 검을 거두고 싶어졌다. 좀 전까지만 해도 두 눈을 벌겋게 물들이고 먹잇감을 쫓았건만,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이렇게 고뇌하고 있다. 바로 이런 게 광증이라는 것 또한 언덕을 넘어서며 깨달았기에, “그냥, 저 둘에게 맡길까?” 하다가도, 귓가를 맴도는 목소리가 있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이제 하늘 아래 단 한 명밖에 없는 명령권자의 모습이 어른거리자 그는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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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아프가니스탄 [The Beast..학살조장] 16.11.21 816 12 14쪽
26 아프가니스탄 [The Beast..9] +1 16.11.21 743 13 12쪽
25 아프가니스탄 [The Beast..8] 16.11.18 646 10 13쪽
24 아프가니스탄 [The Beast..7] 16.11.18 658 1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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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아프가니스탄 [The Beast..6] 16.11.17 726 12 11쪽
21 아프가니스탄 [The Beast..5] +1 16.11.17 835 13 12쪽
20 아프가니스탄 [흐름] +3 16.11.15 841 17 11쪽
19 아프가니스탄 [학살조..9 도살자] 16.11.15 943 14 11쪽
» 아프가니스탄 [학살조..8 도살자] +1 16.11.14 759 10 11쪽
17 아프가니스탄 [학살조..7 도살자] 16.11.14 788 6 14쪽
16 아프가니스탄 [학살조..6 도살자] 16.11.11 855 15 13쪽
15 아프가니스탄 [학살조..5 도살자] 16.11.10 851 13 12쪽
14 아프가니스탄 [학살조..4 구원자] +1 16.11.09 1,055 15 17쪽
13 아프가니스탄 [학살조..3 구원자] +1 16.11.09 1,163 20 13쪽
12 아프가니스탄 [학살조..2 폭탄마] +2 16.11.08 1,253 19 12쪽
11 아프가니스탄 [학살조..1 폭탄마] 16.11.08 1,427 21 14쪽
10 아프가니스탄 [The Beast..4] +3 16.11.07 1,309 25 10쪽
9 아프가니스탄 [The Beast..3] 16.11.07 1,510 22 12쪽
8 아프가니스탄 [The Beast..2] +2 16.11.05 1,924 3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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