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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보(漫報) 님의 문피아 서재입니다.

HAZARD - 5부 외전 - 크라뮤의 매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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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보(漫報)
작품등록일 :
2013.02.10 16:07
최근연재일 :
2013.02.10 19:08
연재수 :
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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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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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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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2.10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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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55쪽

[HZ5外] 4장 매듭의 연결 (2)

DUMMY

결국 완전 무장을 한 추격자들은 크라뮤와 시바를 따라잡지 못한다. 인정사정없이 내달린 둘은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에 흠뻑 젖었다. 아마도 둘이 내달린 거리를 보자니 4~5루일은 족히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꽁지가 불안한 둘은 따라오는 자가 보이지 않아도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다시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숲이 끝난다. 그리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초원은 아닌 것이 넓게 펼쳐지며 시바의 눈에 들어온다.

“어? 숲이 끝이다. 근에 요상하게 빛난다?”

“음…. 이건 사막이군. 달빛을 받아서 빛나는 거다.”

“사막?”

“땅이나 산이 바람 많이 맞으면 저렇게 된데.”

“얼마나?”

“한 …십, 이십년?”

“꽥! 그럼 우린 아까 뛰면서 그렇게 바람 많이 맞았으니까 더 빨리 저렇게 되겠네?”

“늙어서 죽으면 다 흙이 된다고 하잖아.”

“음……. 앞으론 너무 뛰지 말아야겠군”

달밤에 바라보는 사막은 운치가 있다. 설경과는 달리 마치 검푸른 파도가 멈추어 있는 바다를 보는 듯하다. 하지만 이 둘은 바다를 본적이 없다. 그래서 이 표현은 둘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크라뮤도 말로만 듣고 책으로만 보았지 사막이라는 것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무엇이 그렇게 많이 들어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크라뮤는 헐렁한 로브 안에서 양초와 설원에서 보던 책을 꺼냈다.

“여기는 서부 끝이라고 했지?”

“응. 그거 뭐야?”

“애즈머드 할아버지 방에 있는 세계지도를 베낀 거.”

“컁?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꺼내 놓지!”

“내 그림 실력 아냐?”

“몰라.”

“봐라.”

시바는 크라뮤가 내놓은 책장을 보았다. 이상한 선과 꼬불꼬불한 그림, 점과 동그라미 등이 어지럽게 나열되어 있었다. 우선 시바는 이쪽 글자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다.

“응…. 아무리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당연하지. 나도 모르니까”

“껭?”

크라뮤는 시바가 이해하기 힘들다는, 의아해 하는 시선을 받으며 그 책을 다시 촛불에 가깝게 댄다. 시바는 설마 이 주인이 자기랑 같은 까막눈인가 하고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그 의심스러운 시바의 시선을 이해한 크라뮤가 입을 연다.

“지도라는 것은 동서남북이라는 방향 정하고 그려야 하는데 우선 그거 잘 몰라서 무시했고.”

“………응.”

“마을이름 다 적어야 하는데 귀찮아서 대충 큰 거만 적었고.”

“하긴 너 글씨 잘 못쓰니까.”

“뭐가 그렇게 꼬불거리는지 헷갈려서 강 같은 거 뺏고.”

“주인은 복잡 한 거 싫어하지.”

“할아버지의 지도에서 무지 크게 표시된 길하고 산맥, 사막 같은 것만 베껴 놨거든”

“………그런 걸 지도라고 불러도 돼?”

시바의 질문에 크라뮤는 교묘히 회피를 한다.

“이것은 나 크라뮤의 위대한 여행 아이템이라고. 할아버지가 위대한 왕일수록 자기가 살고 통치하는 세계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했어. 이거는 내가 직접 다니면서 완성하는 대마왕 크라뮤의 세계지도가 될 거라고. 자 보라고. 제일 중요한 마왕성의 웬만한 거는 다 적혀 있잖아.”

크라뮤는 책장을 몇 개 넘기고 다시 시바에게 보여준다. 이번 그림은 까막눈인 시바라도 금방 이해 할 수 있는 그림이었다. 아까 본 세계지도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어? 정원에 있는 다람쥐 집까지 그려있네?”

“후후… 난 모든 세상을 내 손아귀에 쥐고서 어디에 누가 뭐하는지 다 알 거라고.”

“열심히 해라. 난 모르겠다. 난 내 모험기나 써서 내 후손에게 물려 줄 거야.”

“아! 그 위대한 똥개 시바의 모험기? 아직도 쓰고 있냐?”

“크앙! 제목 바꾸지 마! 저작권 침해다!”

“그래 알았다. ‘똥 먹고 똑똑해진 시바의…’ 로 고치지”

“주인아, 언제나 돼서 철들래?”

“너보다는 빨리 들 거다.”



BGM : Cotton tail from Ella Jane Fitzgerald



한동안 크라뮤는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르겠지만 작은 펜으로 [크라뮤의 나라]라는 정체불명의 수상한 책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다. 시바는 글을 모르니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알 리가 없다. 시바도 이에 질세라 크라뮤의 로브 안쪽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든다. 이것은 그의 [위대한 시바의 모험기]다.

시바의 괜찮은 능력의 하나로 얇은 종이 같은 것에는 눈빛으로 글을 세길 수 있다. 아니 글을 모르는 시바가 어떻게 쓰고 있냐고? 그야 물론 시바는 크로세아 공통어에 있어 까막눈이다. 대신 시바가 유일하게 아는 글이란 고대 룬어이다. 언제나 공부하기 싫어하는 크라뮤에게 애즈머드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책을 물어 전달해주다 보니 알게 된 것으로 크로세아 공통어는 말만 할 줄 알지. 읽고 쓸 줄은 모른다. 인간들은 공통어보다 어렵고 뜻으로 이루어진 룬어를 더욱 어려워하지만 시바의 아빠 라거도 그렇듯이 그 집안은 룬어 밖에 모른다.

동풍족의 민족어나, 남해족 고유어도 듣고 이해할 줄만 알았지 역시 까막눈이다. 하지만 별로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쪽 팔려서 숨기고 다니지는 않는다. 어차피 시바는 인간이 아니라 마수니까 말이다. 한참을 노려보고 오늘의 일대기를 정리한 시바는 뭔가를 적으면서 중얼거리는 크라뮤에게 다가간다.

“음…. 인간의 기사나 팰러딘은 가끔 끈질긴 집착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괜히 신경 건드리지 말고 그냥 무시하자.”

“게네들이 기사야?”

“그런가 보지 아직 사일렌서 급은 아니지만 끈질겼다.”

“사일렌서?”

“기사가 다음단계로 넘어가면 사일렌서라는 척후기병이 돼. 기동력이 뛰어나서 습격하는 게 장기래.”

“우와~ 아는 게 많네?”

“너하고 다르게 난 배운 게 많으니까.”

이 말에 시바는 눈을 흘기지만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자신의 모험기를 다시 째려본다.

“뭐하냐?”

“이 기회에 사람들 직업정리 좀 하게.”

“그거 정리해서 뭐하게.”

“나중에 싸움 날 것 같으면 도망가야 할지 붙을지 알아야 할 거 아냐.”

“그것도 그렇다.”

“주인은 애즈머드 할아버지한테 무지 많이 배웠잖아.”

“응.”

“자 불러봐.”

“내가 왜?”

“치사하게 혼자만 알고 있겠다 그거냐?”

시바의 투정에 사실은 약한 크라뮤다. 하지만 한번은 튀기고 본다.

“넌 어째서 그런 것도 모르냐?”

“우리 마왕군은 무조건 힘 센 순이잖아. 인간들은 뭐 그렇게 직업이 많은지 몰라.”

“그건 그렇다.”

“우선 좀 잘 나가면 귀신, 제법 잘 나가면 악마, 끝내주게 나가면 마왕, 더 잘 나가면 마신, 더더 잘 나가면 대마왕, 더더더 잘 나가면 대마신이잖아.”

“제국이 생기면서 장군도 생겼잖아.”

“그 장군이라고 해봤자 전부해서 아홉뿐이잖아. 인간들은 무슨 놈의 장군이라는 게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더라.”

“너 장군은 뭐하는 건지 알고 있냐?”

“쫄다구 제일 많은 직업이잖아.”

“대장은?”

“동네에서 제일 힘 센 녀석.”

“짜아식 많이 알고 있군. 가르쳐 주려고 했더니….”

크라뮤는 재빨리 자기 책에 뭔가를 적는다. 이렇게 쓴다.

[장군=쫄병이 제일 많은 직업, 대장=제일 힘 센 녀석. 정확한 분석은 나중에]

자신의 무지함이 드러날까 조금 당황한 크라뮤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인간들 직업에 대한 지식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우선 인간들은 처음부터 자기가 타고난 자질을 알지 못해.”

“응. 그런 거 같더라.”

“그래서 우선은 한 열 살 정도까지 공부 가르쳐 주는 사원이나 영주인 귀족들의 도장에 다니지.”

“응. 응.”

“그러면서 거기서 수련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자기의 소질을 키워.”

“응, 응.”

“그리고는 요리사가 되던지, 사기꾼이 되던지, 깡패가 되던지, 마부가 되던지, 나무꾼이 되던지, 간호사가 되던지, 수학자가 되던지, 사냥꾼이 되던지, 도둑이 되던지, 가수가 되던지 해.”

“응…수학자에… 도둑에…가수.”

시바는 열심히 쓰기 위해 눈에 불을 켠다. 옆에서 빛나는 촛불이 무색할 정도다.

“그 직업으로 잘 나가면 이것저것 다음 단계로 전직을 한데. 그 중에는 사기꾼 마부라든가, 깡패 요리사라든가 해서 두 가지 직업을 가지는 놈들도 있데. 이외에 해결사나 장사꾼 같은 특별한 직업도 있는데 이쪽은 아예 처음부터 따로 키운다고 하더라.”

“어? 여기에는 기사라는 직업이 없는데?”

“그게 마부야, 기사라는 건 별명이래. 마부두목이 되면 사일렌서, 마부연합(길드)의 두목이 되면 팰러딘 성기사, 그 두목의 두목이 되면 하이로드라고 한다더군.”

“요리사는?”

“그건 칼잡이 검사.”

“사기꾼은”

“마술사, 마법가.”

“깡패는?”

“격투사.”

“나무꾼은?”

“전사.”

“간호사는?”

“프리스트.”

“수학자는?”

“천궁사.”

“사냥꾼은?”

“궁사.”

“가수는?”

“음유시인.”

“해결사는?”

“어쎄신”

“장사꾼은?”

“캐러번”

열심히 받아 써대는 시바는 눈살을 찌푸린다.

“뭐 그렇게 별명이 많냐?”

“그러니까 그냥 요리사에, 사기꾼에, 깡패라고 외워 두는 게 제일이야.”

“응, 그러는 게 낳겠다."

시바는 쓰는 것을 멈추고 수첩을 닫는다.

“어차피 이렇게 종족을 직업이란 것으로 나누고 좋아하는 거는 사람뿐이니까 다 알아도 별 소용이 없지만….”

갑자기 시바는 뭔가를 생각해냈는지 입을 옆으로 좌악 찢으면서 웃음소리를 낸다.

“이히히.”

“왜 웃어?”

“그러면 주인은 사람들 말로 할 때 사기꾼이네.”

이 말에 크라뮤는 별로 화난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전에 이 말을 배우면서 애즈머드 할아버지에게 자신도 같은 질문을 했고 그 답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얘기로 마법가에서, 마법사, 마도사, 대마도사로 나누어진다는데 이들은 모두 정령의 힘이나 자연의 조화, 세계를 이루는 마나들한테 사기 쳐서 자기 힘으로 쓴다고 해서 사기꾼이래.”

“음~. 그러면 언제나 주인이 쓰는 주문은 사기 치는 거야?”

“음. 파이어 볼을 보자면 인간들은 [대지를 이루는 원소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마나여. 안녕하세요. 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해서 마법을 쓰게 된 누구누구입니다. 그 동안 잘 지내고 계셨죠?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힘에서 나를 도울 수 있는 불의 힘들을 이곳에 모이게 해주세요. 그러면 나는 그들을 잘 교육 시켜서 행진하는 법, 노래하는 법, 춤추는 법을 가르쳐 다시 당신에게 돌려보내겠습니다. 나 당신의 이름을 흠모하여 계약한 무슨무슨 아무개는 이들을 모아 행진하며 춤추며 노래하면서 내 눈앞의 누구누구에게 가게 하겠습니다. 자 출발합시다. 출발의 구령은 파이어 볼이라고 하겠습니다. 당신의 이름과 나의 구령에 맞추어 행진합시다. 아! 대열에서 빠져 나오면 안돼요. 자 앞으로 가세요. 파이어 볼!]이라고 주문을 외운대.”

“웅갸, 좀 아부하는 경향이 있네?”

“그렇지. 게다가 너무 주문이 길어. 이런 레벨 1짜리 마법에 이렇게 긴 말이 필요하니 웬만큼 머리 좋은 아이가 아니면 마법가로 나가기 힘들데. 사실 남들보다 머리도 좋고 말도 잘해야 사기꾼이 될 수 있겠지만.”

“상급직으로 전직해도 주문은 똑같아?”

“아니 각 레벨이 올라 갈 때마다 주문도 새로 해야 하는데 최고직이 하는 스펠은 완전 협박, 공갈이라고 하더라.”

“음, 원래 성격이 못돼 먹은 주인 같으면 잘하겠다.”

“우리 마족은 인간들보다는 자연의 힘이나 마나와 친하게 지내는 편이고, 마신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오리지널 마나를 가지고 있어서 새로운 주문 같은 것도 만들더라.”

“나도 마수 중에서 주문을 쓸 수 있다고 했으니 마법을 쓸 수 있겠네?”

“그러니까 말을 하게 해준 내가 얼마나 고마운지 알겠지?”

“이왕이면 다른 걸로 말을 하게 했으면 얼마나 좋아. 지혜의 호두나, 마법의 참기름 같은 걸로 말이야.”

“망고의 열매가 더 구하기 힘든 거야 임마. 10년에서 100년에 한번 씩 응가 하는 드래곤을 찾아, 받아 와서는 10일 안에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기 전에 너한테 먹이느라고 얼마나 고생했었는지 알아?”

“흥, 날 똥…개라고 부르려고 일부러 그런 거 다 알아.”

“쳇, 주인에 대한 신용이 형편없군. 성안의 창고에 있는 흔해 빠진 것들보다는 좀 더 좋은 것을 주려는 내 마음을 그렇게 몰라주다니.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말이야”

“그런 고생을 '헛지랄'이라고 하더라.”

“헛…. 그런 쌍스러운 소리나 다하고. 음 다중에 다시 입 다물게 하는 아이템을 찾아야겠어.”

이 말에 시바는 약간 움찔 한다.

“그런 거 있어?”

“아직은 몰라. 나중에 할아버지한테 물어 봐야지.”

시바는 내심 안도의 숨을 쉰다. 그래도 말을 하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시바다. 물론 저 고약한 주인이 [똥개]라고 부르지만 않으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음. 어쨌든 나도 마수니까 너하고 같은 형식의 주문을 써야겠네?”

“음. 아마도 그럴 거야.”

“하나만 가르쳐봐.”

“가르쳐봐?”

“말 해보라고. 그럼 배워줄게.”

시바가 득의양양한 폼으로 다시 수첩을 열어 노려 볼 준비를 하고 있다.

“흥! 그래 가르쳐주지. 우리 마족이 쓰는 파이어 볼은 이렇게 말해야 돼. [너 불의 마나냐? 나 아무개인데 빨리 안 모여? 다 모였으면 앞으로 가] 라고 하는 거다.”

“……….”

시바는 눈이 풀리면서 글을 쓰지 못한다. 말도 없다.

“(뻥 친 거 들통 났나?) 왜 말이 없냐?”

“……그렇게 짧은 주문을 외는데 10분이나 더 걸리는 주인을 데리고 다니는 내가 한심해져서 그런다.”

“윽!(내가 내 무덤을 파고 말았군)”

“헛소리하지 말고 진짜로 말해봐.”

“칫! 짜식이 제법 머리가 커졌다고 잘 속지도 않는군. 좋아 그럼 레벨 1의 마법인 파이어 볼의 주문을 가르쳐 주지. 하지만 아직 그 힘들을 쓰기 위해서 정신력의 집중이 필요하게 돼. 이것을….”

“그건 안다. 얼마나 마나를 부르면서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는지를 천궁사들이 수학적으로 계산한 게 매직 포인트, MP지?”

“제법 아는 체 하는군. 그래 그 매직 포인트가 많을수록 우리나 인간들은 많은 마법을, 좀 더 하이레벨의 마법을 쓰게 되는 거지. 하지만 이것은 무척이나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은 피로를 동반하기 때문에 너나 나처럼 아직 어린 마족은 그 피로에 오랜 시간은 견디지를 못하게 되지.”

“하긴 주인도 잘 해봐야 하루에 2, 3개밖에 못쓰지?”

“나야 가지고 있는 MP가 많지만 이놈의 집중력에서 오는 피로가 너무 쉽게 오는 편이라서 그런 거지. 대신 MP가 많이 소모되는 하이레벨의 마법을 쓸 수 있는 거라고.”

“그래서, 그 마족의 파이어 볼 주문은?”

“그건 이래. [나 땅의 자식인 크라뮤는 너희들 마나의 힘을 부른다. 내가 있는 곳에서 가까이 있는 그대들은 나의 곁으로 오라. 그대들에게 부탁이 있으니 그것은 그대들이 가진 힘에서 모든 것을 태울 수 있는 불의 힘을 주기 바란다. 난 그 힘으로 나의 적들을 태우고 멸하려 하는데 이것이 성공하면 난 그대들의 힘을 경배하고 칭찬하리라.] 이게 기본이야.”

“그것도 짧은데 10분이나?”

어이가 없어서 경악한다는 표정으로 시바가 입을 딱 벌리고 자기를 쳐다보자 크라뮤는 재빨리 뒤의 말을 잇는다.

“바보야! 여기에 자신이 있는 위치와 상대의 위치, 불의 힘이 나갈 방향, 그 힘의 정도, 어떤 모양을 하고 나갈지를 말하고 여기에서 나의 힘을 느낀 마나들이 내 정신력과 유지력에 따라 이동을 시작한다고.”

“그럼 마법사마다 모양이 다 틀리겠네?”

“의지력이 약한 놈은 파이어 볼이 나가다가 중간에 다 흩어져 버리고 말지.”

“주인 파이어 볼은 왜 그렇게 크냐?”

“난 마나들을 잘 불러 모으기는 하는데 그게 어느 정도로 양을 조절해야 하는지는 잘 모른다고. 그러니까 대마신전에 가서 수업하라는 거겠지.”

“잘 조절을 못해?”

“난 머리 속에서 어떤 이미지를 생각해서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것은 잘하는 편이지만 그 크기나 나갈 방향 같은 것을 계속해서 생각하지 못해.”

“응갸, 한꺼번에 그걸 다 생각하고 외우고 하려면 머리 아프겠다.”

“너도 나중에 배워봐라. 머리 빠개진다.”

“상급 마도사들은 [야 나가라!]하면 끝이네?”

“응. 전에 봤잖아. 지옥9장군이고 상급소환사인 아키오스가 [야! 밟아]하니까 하늘에서 커다란 발이 나와서 까불던 놈들 끝내버렸잖아.”

“응. 소환사는 사람들이 뭐라고 불러?”

“이쪽은 장사꾼의 상급 직종으로 [인질범], [노예상인]이라고 하더라.”

“너도 레벨 높아지면 그냥 [태워!]하면 되겠네?”

“그건 그렇지만 머리 속에서 그리는 이미지하고 발사거리, 위력들을 생각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고. 말만 빨라지지 그 외에는 다 똑같다고.”

“음. 상급으로 올라갈 정도면 많이 연습했을 테니까 조절을 잘하겠지.”

사막의 달은 둘을 포근히 안아 주었고 두 사제(?)는 정겨운 말을 나누다 잠이 든다.



BGM : 고바야시 야스히로(小林靖宏)의 過ぎ去りし永遠の日々



크라뮤와 시바는 낮에는 걷고 밤에는 쉬면서 동남쪽을 향해 계속 갔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이들은 사막을 벗어났다. 이제 ‘검은 날개의 강’을 지나게 될 때였다. 사실 크라뮤와 시바는 성 밖을 떠나본 적이 없던 도시 촌놈이었고 마음먹고 여행을 시작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륙에서 3번째로 큰 강을 보게 된다는 생각에 새롭고 신기한 마음으로 가득했다. 대마신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임무에 앞서, 눈앞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의 모습들이 둘을 더욱 즐겁게 했다.

무덥던 사막을 지나 초목이 무성한 초원을 접하게 된 둘은 마음도 한결 가벼워져 뜀박질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원래 달리기에 일가견이 있는 시바와 어려서부터 달리기 시합을 해 왔기 때문에 뛰는 것에 자신이 있던 크라뮤는 자신들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는 싱그러운 바람소리에 신바람이 났다. 오랜만에 모든 것을 잊고 신나게 달린 둘은 어느 작은 마을에 도착하게 됐고 그곳에서 하루를 묵기로 결정했다. 마을에서 묵는다고 해도 마을 사람들이 모르게 마구간이나 소양간을 몰래 빌려 자고 아침 일찍 나오는 것이지만 자신들을 쫓고 있을지 모르는 ‘빛의 광장에 있을 것 같은 기사단’에게 행적을 들키지 않으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먹을 것 때문에 조금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올해는 풍작이어서 어느 마을을 가도 음식점에서 남은 쓰레기를 뒤지면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크라뮤와 시바가 늦은 시각에 잠입한 이 마을은 하실리아 지방 제일 동쪽에 위치한 마을 ‘코튼테일’이다. 척박한 대륙 서부지질에 비해 초원지대에 위치했고 적당한 기후 덕분에 생산되는 목화와 면직물, 식용유 등이 특산물이었고 하실리아, 중부지역, 남부 크로쥬 지방과 연결된 행상들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들썩이는 곳이다.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크고, 도시라고 하기에는 약간 작은 크기로 성장한 곳으로 아직 마왕군, 제국 사원이나 법전 등이 없는 곳이기도 했다. 크라뮤는 씩씩거리면서 뛰어와 자기가 먼저 도착해서 이긴 것을 기뻐하면서 시바를 놀려주기 위해서 말을 걸었다.

“짜~아~식. 역시 네 짧은 다리로 이 주인을 이기려면 아직 멀었다니깐. 오늘 밥은 네가 구해와.”

아주 약간이지만 늦게 도착한 시바는 숨을 몰아 쉬면서 눈을 흘긴다.

“헥, 헥, 조금만 더 있다가 두고 보자고. 우리 형도 어렸을 때는 달리기 잘 못했데…헥헥.”

“오늘은 닭고기가 먹고 싶은데 약간 매콤한 소스가 좋겠다.”

크라뮤가 마을 외곽에 쌓인 집단을 주워 나름대로 먹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서 하는 소리다.

“내가 주방장인줄 알아!”

“조용해라. 이미 마을 안인데 네가 말하는 거 사람들이 알면 넌 [오늘의 특선요리]된다.”

“끄응…두고 보자.”

시바는 할딱거리던 숨을 정리하고 으슥한 골목길을 둘러본다. 별로 조심할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외딴 마을에는 경비병같은 것도 없다. 제국이 성립되고 산적이나 도적들도 그들의 활동에 있어서 제국관리에 함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덕분에 나름대로 제국에게 보장을 받고 있는 안전성은 이전보다 훨씬 높아졌다고 하겠다. 시바는 크라뮤에게 음식을 담아올 작은 보따리를 받아 문다. 어색함이 없게 시바는 개처럼 코를 땅에 박고 냄새를 맡는 척 하면서 골목을 나선다. 이미 저녁때가 지났기 때문에 그들은 다름 사람의 눈에는 주목을 받지 않았지만 가끔 자기 구역에 들어온 불청객을 경계하는 집개들의 외침이 시바를 열 받게 한다.

[시끄러 임마! 난 개 아냐!]

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던 시바는 어슬렁거리다 제법 번화한 거리의 식당을 발견한다. 마왕의 제국이 된 후로도 별 다른 것 없이 지내는 일반 마을 사람들은 악마들의 철없는 횡포만 조심하면 되기 때문에 오늘도 일을 끝낸 마을 사람과 여행자들이 술을 마시고 떠드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려왔다. 실제 과거에는 귀족이나 특권층이 몰래 뒷구멍으로 챙기는 모습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지금 이 세상을 통치하는 마귀족들은 대부분 아주 확실하게 자기 감정표현을 했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지금 시대가 낳다고 말하는 이도 있는 편이다. 이런 시간에 길가는 별로 인적이 드물다. 시바는 쏜살같이 대로를 가로질러 식당 뒤로 간다.

[킁 킁! 이곳은 제법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어떤 음식점이건 먹고 남은 음식은 가축 사료로 쓰기 위해서 뒤에 따로 모아두는 장소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냄새는 식당 요리사 실력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된다. 물론 맛있는 가게라면 남은 음식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식당은 음식과 술을 같이 팔았고 술꾼에게 있어서 음식이란 안주에 불과하다.

덕분에 시바는 맛있어 보이는 아직 따끈한 닭찜과 빵, 운이 좋게 한입도 대지 않은 것을 건질 수 있었다.

[우와 신난다….]

시바는 환호를 마음속으로 올리면서도 성에서 맛있는 진미를 포식하던 과거를 떠올리며 기운이 빠진다.

[에이… 주인 한번 잘못 만나서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다니…끙. 뭐 또 다른 거 없나?]

시바는 약간 화가 나서 슬쩍 열린 문을 통해 주방 안을 들여다본다. 마침 요리사는 자리에 없고 조리를 돕는 사람은 조리대 건너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맛있어 보이는 요리가 두 접시.

막 만들어 졌는지 아직 따끈한 김이 솔솔 날린다.


약간 재빠른 움직임이 있은 후 식당이 있는 골목길에서 두툼한 주머니를 문 검정 강아지가 어슬렁거리면서 길로 나온다. 그 검은 개는 다른 개처럼 꼼지락 거리는 기미도 안보이고 쪼르르~르~ 굴러가듯 부드럽게 길을 건너더니 반대편 으슥한 골목길로 사라진다.

조금 있으니 식당 안에서 접시의 요리가 너무 적다고 불평하는 손님의 항의가 들려온다.


크라뮤는 시바의 용맹함과 결단력, 행동력을 칭찬하면서 열심히 닭다리를 뜯고 있다. 시바도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입에 대고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쩍! 쩍! 거리면서 씹고 있었다. 시바는 사막을 지나오면서 운 좋게 샘이 있는 오아시스를 발견해서 물과 이름 모를 과일을 먹고 약 반 날 정도를 설사로 고생을 했고, 크라뮤가 파이어 볼로 정말로 운 좋게 5번 만에 잡은 숯검정덩이 새고기를 뜯어먹고 속이 쓰려 고생을 한 것을 생각하면서 그것은 지금 이 진수성찬을 위해서 있었던 시련이었다고 생각을 했다.

“우갹, 우걱, 시바 넌 정말 용감해. 물건을 홈치다 걸리면 사정없이 두들겨 맞거나 강제노동 100일인데. 꿀꺽.”

“쩝, 쩝. 훔친 거 아냐. 쩝! 훔친 거 아냐. 반씩만 주워 온 거라고.”

“어쨌든 장하다. 나중에 내가 왕 되면 너한테 전용 요리사 딸려줄게. 끄억!”

“쩝, 쩝, 난 입이 고급이다.”

“걱정 마. 일급요리사로 세 명 딸려줄게. 아예 전용 식당도 차려주지 뭐.”

말이라도 고마운지 시바는 마지막 고기조각을 삼키면서 크라뮤를 물기 젖은 눈으로 쳐다본다. 크라뮤도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시바를 바라본다. 둘은 역경을 같이 겪으며 다져진 우정으로 난관을 헤치고 대 모험을 마치고 모두에게 환영을 받으며 귀향하는 서로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아름다운 상상이었다. 덕분에 둘은 갑자기 나타난 인영(人影)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그림자는 천천히 둘이 식사중인 장소로 다가왔다.

“와아 귀여운 강아지네? 네 개니?”



BGM : Gerard Joling의 TICKET TO THE TROPICS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소리에 시바는 입이 딱 멈추었고. 크라뮤는 놀라서 제대로 음식을 삼키지 못하고 그냥 꿀꺽 삼키고 만다.

“아까 식당에서 웬 개가 음식물을 넣은 것처럼 보이는 주머니를 물고 가는 것을 보고 신기해서 따라 와봤는데, 이렇게 작은 주인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 걸? 어려보이는 데도 똑똑한 강아지 인가봐?”

둘의 식사장소로 들어서는 사람은 옅은 보랏빛 채색이 된 경장차림을 한 여자였다. 겉에는 가죽과 면으로 짜인 검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낸 사람은 크라뮤와 시바가 있는 곳까지 왔다. 짧은 갈색머리를 한 여자다. 가까이서 보니 머릿결에 윤기가 흐르고 있었고 잘 빗어 넘긴 시원한 이마가 호감을 가지게 한다. 머리호보를 위한 가벼운 금속 띠가 있었는데 상당히 발랄해 보이는 그녀의 성격과 어울려 보이는 분위기였다. 크라뮤는 먹던 음식을 삼키고 시바는 자기가 한 말을 들었을까 해서 입을 꾹 다문다. 갈색머리 여자는 크라뮤와 시바 앞까지 와서 쭈그려 앉고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시바의 등을 쓰다듬는다.

“그것 봐! 내가 보는 눈이 틀림없었다니깐. 개가 먹을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먹지 않고 어디로 가져가는 걸로 봐서 주목한 게 다행이었어.”

[누구한테 하는 소리지?]

크라뮤는 그녀가 자기나 그녀 자신에게 하는 말투가 아님을 느꼈다. 시바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는 그 갈색머리 여자 등 뒤로 다른 여자가 서 있다. 제법 활발한 갈색머리와 다르게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이다.

“난 몰리야. 몰리 에푼. 뒤에 있는 건 언니 엘리야.”

뭐가 좋은지 먼지투성이 시바를 쓰다듬고 있던 갈색머리가 인사를 해온다. 크라뮤는 골목 입구에서 거리의 빛을 등지고 서있는 엘리라는 여자를 보았다. 무언가 모르게 풍족함을 느끼게 하고 과거를 상기시키는 친숙한 모습이다. 크라뮤가 알고 있는 몇 안되는 미인(이라고 해봤자 그렇게 많은 인물을 알고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인 리아만큼은 아니더라도 인간으로 치면 상당한 미인이었다. 엘리는 깨끗한 회백색 천으로 짜인 옷을 입고 있었다. 시바를 쓰다듬고 있는 갈색머리 여자와 같은 머리색에 짙은 감색(紺色)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풍기는 인상은 포근하지만 눈은 감정이 깃들여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블루였다.

“이곳에 사니?”

“아니, 난 시바랑 여행 중이야.”

크라뮤는 자기들에게 적의가 없어 보이는 것 같은 두 자매를 보고 안심을 했는지 별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도 이 두 자매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물론 예절 같은 것이나 사회 관념에 묶여 있지 않은 크라뮤지만 도망자생활(?)중에 만나자마자 대뜸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상대가 가진 어떤 분위기 때문인 것 같았다.

“흐응. 시바라고 하니? 둘 다 어려 보이는데 대단하네. 엘리, 이 강아지 전에 우리가 기르던 ‘알프레’하고 닮았지?”

몰리는 틀림없이 엘리라는 여자를 언니라고 했지만 그냥 이름을 주고받는 사이인가보다.

“하긴 ‘알프레’보다는 좀 못 생기기는 했지만.”

몰리는 언니 대답도 듣지 않고 계속 말했고 언니라는 엘리도 별 말이 없다. 시바는 자신이 어떤 개(!)와 비교해서 못생겼다는 말에 뜯고 있던 빵 조각을 입에 물고서 몰리를 쳐다본다. 약간 원망하는 표정이다.

“아유~. 그래도 귀엽네. 이건 무슨 종이니?”

크라뮤에게 묻는다. 시바는 당연히 나올 대답을 알고 있었기에 빵을 재빨리 삼킨다.

“똥개.”

시바가 언제나 행하는 의식은 이번에 실행되지 못했다. 몰리는 시바가 귀여운 듯 손에서 놔주지 않았다.

[깽? 무슨 여자 손 힘이 이렇게 세냐?]

시바는 크라뮤를 한번 물어주어야 하는 신성한 의식을 치러야 하는데 몰리가 작고 귀여운 한 손으로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크라뮤도 시바가 몰리라는 여자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 시바는 똥개(?)지만 힘은 자기 덩치 5배는 되는 큰개라도 물어 던질 정도로 힘이 있는 녀석이다. 그런데 저 몰리라는 여자는 별 힘도 안들이고 시바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시바는 자존심과 성스러운 의식을 위해 발버둥을 친다.

-파파팍-

시바의 네발은 땅을 긁으며 먼지를 피우지만 여전히 몰리의 손에서 벗어 날수가 없었다.

“야! 너 무척 힘세다.”

크라뮤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한다. 마계에서는 힘이 있는 것이 자랑이지만 인간세계에서 여자에게 힘세다고 하면 그게 칭찬일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크라뮤의 사회적응성과 상관없이 이 짧은 연 갈색 빛 머리를 한 몰리는 웃어 보인다.

“호호호. 이 언니는 격투사거든.”

“격투사?”

크라뮤는 놀랐다. 크라뮤가 아는 상식(무척이나 애매한 기준을 가진 상식이지만)에서 볼 때 인간세계 격투사는 상당한 수련과 경험을 거쳐야 한다. 마족이라면 모를까 인간냄새 풀풀 풍기는 어린 여자가 격투사라고 말할 정도라면 굉장한 자질이 있거나 아니면 엉터리일 수 있다. 하지만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시바가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크라뮤는 이 힘 쎈 여자가 좀 수상하게 느껴졌다. 크라뮤가 무언가 의심하는 눈빛에 갈색머리 몰리는 살짝 미소로 답한다.

“지금은 수련을 마치고 여행 중이지만.”

“끄아앙!”

시바는 드디어 비명소리까지 내면서 발버둥을 친다. 어떻게 해서든지 몰리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크라뮤에게 해야할 신성한 의식은 이미 잊어버렸다. 그저 자존심 문제만이 시바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어머? 이 강아지는 내가 싫은가봐? 계속 너한테 갈려고 그러네. 부럽다. 이렇게 강아지한테 사랑 받고.”

“그 똥개는 나 물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똥개라고 부르면 열 받아 하거든. 똥개주제에.”

크라뮤는 이미 시바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자연스럽게 시바를 연속해서 똥개라고 불렀다. 역시 크라뮤가 예상한대로 시바의 신성한 의식은 없었다. 다만 발악하듯 발버둥치고 있는 시바의 난리굿이 있을 뿐이다.

“어머? 호호호호! 웃긴다. 마치 이 강아지가 주인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말하네.”

“그런데 제는 왜 말 안 해?”

크라뮤는 아까부터 조용히 몰리 뒤에 와서 서있는 엘리라는 여자를 지목한다.

“엘리는 원래 말을 잘 안 해.”

“왜?”

“글쎄? 아마도 못난 동생하고는 틀려서 사회에 불만이 없나보지.”

뭔가 빈정되는 듯한 말투를 들은 크라뮤는 이 두 자매 사이가 나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두 여자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웃음기가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몰리는 그냥 날린 말에 불과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크라뮤다. 크라뮤는 이런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시바를 못 움직이게 하고 있는 몰리를 보면서 혹시 추격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몰리는 아웅거리는 시바가 귀엽다는 듯 쓰다듬고 있고, 말이 없는 엘리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살짝 미소를 보이고 있다. 자신을 추적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지 못한 크라뮤는 발버둥치는 시바를 어루만지고(?) 있는 몰리를 다시 돌아 본다. 여전히 입가엔 웃음이 돌고 있다. 한편 시바는 자신을 못 움직이게 하는 여자가 격투사라는 것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깡패다.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이런 치욕적인 말을 듣게 하다니…]

“우리야 목적이 있어서 여기에 왔지만 이런 변두리에 너희 둘이서 여행을? 집은 어디니?”

“우리 집은……. 없어.”

“어머, 미안, 고아니?”

“응.”

이 말에 발버둥 난리를 포기한 시바가 이제는 자기 머리를 만지고 있는 몰리를 무시하고 눈으로 크라뮤에게 말한다.

[왜 집이 없냐?]

[성이 있지 집은 아니야.]

[방이 있으면 집 아냐?]

[그럼 방이 어디 있냐고 물어봐야지.]

“언제나 이런 음식을 주워…서 먹고 있는 거니?”

몰리 말에 약간 걱정하는 기색이 있자 크라뮤는 남은 빵 조각을 재빨리 입에 넣는다.

“응. 우리 먹을 거 모자라니까 넌 안 줘.”


몰리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지만 크라뮤는 열심히 씹는다. 시바는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을 빼앗기자 분에 차지만 아직도 몰리 손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

“음~. 잠은 어디서 잘거니?”

“아까 오다가 빈 마구간 있는 거 봤어.”

이 말을 들은 몰리가 시바를 해방시켜준다. 시바는 열심히 굴러가서 크라뮤의 옆으로 간다. 몰리 몸에서 나는 이상한 향기는 시바를 힘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기도 했지만 한낱 여자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크게 상했기 때문에 우선은 크라뮤 옆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시바를 풀어준(?) 몰리는 뒤쪽에 가만히 서 있는 엘리에게 고개를 돌려 말한다.

“엘리. 얘들 우리랑 같이 자도 괜찮지?”

엘리는 살짝 고개를 움직인다. 승낙인 듯 하다. 몰리는 살짝 웃더니 크라뮤와 시바에게 다가선다.

“꼬마야 네 이름은 뭐니?”

“난 크라뮤.”

“나하고 엘리는 이 마을에 일이 있어서 잠깐 들른 건데 어떠니? 우리랑 같이 방에 가서 자지 않을래? 그래봤자. 하루정도겠지만. 아침밥도 따끈한 수프와 함께 할 수 있지 않겠니?”

“왜?”

“응…이 언니하고 저 누나도 사실 부모가 없거든. 어렸을 때 오트라인에 있는 수도원에서 크기는 했지만 이제 다 커서 이곳저곳을 여행 중이란다. 그래서 너 같은 애를 보면……그냥 잘 해주고 싶어.”

이 말을 하는 몰리는 아직도 살짝 장난기 어린 얼굴이다. 크라뮤를 경계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어린 크라뮤와 시바를 측은하게 느껴 행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크라뮤는 갑자기 이런 제의를 받자 약간 어리둥절하다.

“음…….”

크라뮤는 약간 생각을 하는 척 하면서 시바를 흘끔 본다. 시바는 마구간보다 좋은 곳에서 잔다는 것이나 아침 식사까지 나오는 특전이 붙는다면 좋다는 눈빛이다. 물론 시바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자존심을 여지없이 무너트린 몰리가 사는 아침이라면 얼마든지 먹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지갑이 텅텅 비어 버릴 때까지…… 괴상한 이유로 요상한 복수를 하려는 시바였다.

“좋아. 가지. 난 돈 없다. 네가 내는 거다.”

“좋았어. 까짓 거 내일 점심도 사지. 엘리 가자고.”

몰리는 크라뮤 등을 툭툭 밀면서 큰길로 나가게 재촉한다. 어두운 골목길을 두 여자와 한 아이와 한 마리가 나온다. 아직도 길 건너편 식당에서는 양이 줄어버린 술안주에 대한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깊어 가는 밤이라 행인은 거의 없고 약간 취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 몇이 흔들거리면서 지나간다.

크라뮤와 시바는 몰리와 엘리 사이에 끼어서 길을 간다. 크라뮤가 둘을 다시 보니 몰리는 상당히 키가 컸다. 3팬더는 훨씬 더 되어 보인다. 크고 긴 망토를 걸치고 있었고 그 망토가 걸린 양어깨에는 작은 가죽 주머니가 있다. 발은 가죽과 털실로 짜인 부츠를 신었는데 여자가 신고 다니기에는 좀 안 어울리는 것이지만 그래도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는 몰리에게 어울린다. 엘리를 크라뮤가 밝은 불빛아래에서 보니 머리색을 제외하고 몰리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희고 작은 얼굴은 마치 겁먹은 양털과 같은 색이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둥글고 아담한 편이고 눈매가 시원스럽고 크다. 몰리보다 더 어려 보인다. 누가 보면 씩씩한 몰리가 언니로 보일 것이다.

“저 누나는 뭐하는 사람이야?”

크라뮤는 몰리에 비해 창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조용한 엘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아무리 보아도 격투사인 몰리와 같이 외향적인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응. 엘리는 노래 부르고 이것저것 정령 같은 것을 불러 춤추게 하는 일을 해.”

“음유시인에 소환사?”

“어마. 크라뮤는 어린데도 별거를 다 아네?”

몰리 말에 크라뮤는 어깨를 으쓱해진다.

“내가 좀 아는 게 많아서 그래.”

몰리는 이런 크라뮤를 보고 귀엽다는 듯 풋-! 하는 짧은 웃음을 터트린다.

“너하고 시바는 어디로 여행을 가는 거니?”

“…… 신전에 갈 거야.”

“신전? 아는 친척이라도 있니?”

“응. 거기 주인이 아빠랑 친구래. 원래는 바보 보그가 우리를 데려다 주기로 했는데 중간에 서로 헤어졌어.”

“음. 그 신전은 어느 쪽이니?”

“몰라. 전부 보그가 알고 있어.”

“음 그 보그라는 사람을 빨리 다시 만나야 되겠네? 그 사람하고 어떻게 해서 해어졌는데?”

“졸다가 큰 산에 머리 박더니 정신 못 차리고 그냥 가 버렸어.”

“????”

몰리는 엉뚱한 답변에 좀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 아이가 나름대로 말 못할 사정이 있겠거니 하는 생각에 더 이상 물어보지는 않았다. 몰리의 질문에 답하고 보니 크라뮤 자신은 그녀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몰리는 아직 잘 곳을 정한 것은 아닌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왜 몰리하고 엘리는 여행을 해? 누구 만나러 가?”

“응? 아, 우린 그냥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요것조것 팔고 사고하면서 생활을 하고 있단다.”

“그럼 장사꾼이야?”

“음…. 그거는 아니고 동쪽에서 필요 없는 물건을 서쪽에다 팔고 서쪽에서 필요 없는 물건을 동쪽에다 팔고 하는 그런 일이야.”

좀 얼버무리는 듯 한 몰리의 대답에 크라뮤는 의심이 간다. 하지만 아직은 상대를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상대는 크라뮤가 애라고 생각해서 대충 대답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요 없는 물건이 있어?”

“그냥 골동품 같은 거야.”

역시 짧게 대답을 하는 몰리를도 보면서 크라뮤는 이 별로 닮지 않은 자매들이 오트라인에서 왔다는 것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아까부터 몰리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 때문에 시바가 코끝을 찡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이 들어서기 전에 신성국가로 이름을 날렸던 오트라인이 ‘오트라인 지방’으로 이름을 바꾸었어도 그곳에는 수많은 사원들이 있다.

까놓고 신전이라고 칭송하지는 않지만 제국 묵인 하에 그냥 사원이나 수도원 형식을 빌려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들이다. 그곳 출신들은 당연히 몸에 쓰는 향도 독특하기로 유명한 오트라인 것을 애용하고 있는데 대부분 신들의 축복을 받은 것들이 많았다. 그런 향이 저렇게 자연스럽게 몸에서 풍긴다는 것은 오랜 세월을 그곳에서 보낸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이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코가 예민한 시바라면 찡그리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크라뮤는 그렇게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사악하고 요염한 분위기였던 향이 충만했던 샤인워터 성 안 생활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신선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트라인에서 왔으면 무지 멀리서 온 거네?”

대륙 중심에 있는 라임시티의 마왕성에서 보더라도 한참 동남쪽에 위치한 그곳 오르라인에서 대륙 서쪽 끝 지방에 있는 이런 시골마을까지 왔다는 것은 정말 먼 거리를 여행 온 것이다.

“음…벌써 떠나온 지 3년이 다 되기는 하네.”

“나이가 얼마야?”

“얼마정도로 보이는데?”

“18?”

이 말에 몰리 안색이 환해진다.

“와~. 크라뮤는 눈썰미도 좋네?”

“맞아?”

“틀려.”

“? 그런데 좋다는 게 무슨 소리야? 나 못 맞춘 거잖아.”

“아이참! 이 누나가 예쁘면 그냥 예쁘다고 솔직하게 말하라니깐!”

몰리는 전혀 부끄럽다는 표정이 아니었지만 왼손을 자신의 볼에 대고 부끄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크라뮤의 뒷머리를 탁! 하고 친다.

“꾸아악!”

“깽!”

크라뮤는 눈이 빠지는 줄 알았다. 엄청난 충격과 함께 몸이 그대로 공중을 돌면서 앞에 걷고 있던 시바의 등을 누른 것이다. 몰리의 손질은 …무지막지한 파워였다.

“어머! 미안하다. 그만 내가 실수를……괜찮니?”

몰리는 이번엔 진짜로 창피한 듯 볼 언저리가 약간 발개지면서 크라뮤를 일으켜 세운다.

“모…몰리. 너 무지 힘 쎄네?”

“오트라인 수도원에서만 살다보니 좀 힘 조절을 잘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러니까 이해를 해주렴. 어머? 고대룬어?”

몰리는 크라뮤를 일으키다 땅에 떨어진 작은 책 한 권을 줍는다. 크라뮤가 공중회전을 하는 바람에 로브 안에 있던 책이 한 권 땅에 떨어진 것이다.

“내 꺼야.”

“어머, 크라뮤는 마법을 공부하니?”

“아냐. 난 이미 마법을 쓴다고.”

이 말에 크라뮤는 자신의 위대함을 보이려 했지만 몰리는 눈을 흘긴다. 아무리 보아도 11. 2살로 밖에 보이지 않는 크라뮤가 하는 이 말은 오트라인 사원에서 자라온 그녀에게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보통 인간 마법수련사는 처음 마술사라는 초급단계에 들어서면서 마법을 쓰게 되는데 그 평균 나이는 20살에서 24살 정도이다. 물론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이는 17. 18세 때 사용하기도 하지만 크라뮤 나이에 마법을 쓴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인 것이다.

“흠. 나같이 예쁜 누나한테는 거짓말해도 안 통한단다.”

"예쁜 건 리아누나가 더 예뻐.”

크라뮤도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는 몰리의 눈빛에 반격을 하고 본다.

“리아? 그건 누군데 감히 이 몰리님보다 예쁠까?”

몰리의 한쪽 눈꼬리가 팍-하고 올라간다. 원래 약간 옆으로 가늘고 예쁘게 빠진 눈이지만 눈 꼬리가 약간 올라가 있어 매섭게 보이는 편인데 쏘아보니 완전히 호랑이 눈이다. 크라뮤는 그 눈빛에 약간 쫄아서 말꼬리가 흐트러진다. 아까 실수로 맞은 몰리의 한방에 대한 아픔이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으……. 정령처럼 예쁘다고. 리아누나는….”

“정령족이야? 그러면 인간이 아니니까 비교대상이 아니고, 크라뮤는 정령을 아니?”

“정령? 가까이서 본 적은 없어. 멀리서 본적은 있지만.”

“흠 웬만해서는 정령족이 인간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

“난, 사람이 아니니까.”

이 말에 자신을 실어 다시 크라뮤는 자신감을 보인다. 물론 이 말에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몰리는 다시 크라뮤를 살펴본다. 확실히 생김새나 살색이 보통 사람들과는 많이 틀리다. 남해족이 많이 모여 사는 하비아드 지역에 가면 바닷바람에 그을린 가무잡잡한 피부와 꼬들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많지만 이렇게 똥그랗고 큰 눈에 검은색의 더북한 머리는 아니다.

“흠. 혼혈처럼 보이더니…. 정령족하고 인간의 혼혈?”

"난 혼혈아냐.”

크라뮤는 부정을 하면서 정확히 혼혈아라는 게 무슨 뜻인지 나중에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광전사 보리스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이번으로 두 번째 듣는 소리였다.

“그래? 이런 특이한 생김새는 본적이 없어서…그래도 미인을 알아보는 눈이 있으니 상관은 없어.”

“몰리가 사는 동네는 이렇게 힘세면 예쁘다고 해?”



BGM : PAUL MAURIAT의 Love Is Blue



조금 천진난만한 눈으로 물어보는 크라뮤에게 몰리는 가볍게 헛기침을 해 보이고는 진지하게 답을 한다.

“흐응. 어린애라도 이 누나의 미모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순수하게 인정하지 못하는군. 하긴 남자들은 다 똑같은 족속들이니까. 크라뮤 넌 커서 그런 멍청한 남자들하고 달리 미인을 보면 솔직해지는 어른이 되렴. 다른 남자들 같았으면 내 황금 다리로 찍 소리 못하게 해줄 테지만”

몰리는 갑자기 걸음걸이 폭이 커지면서 자랑하듯 망토사이로 다리를 쭉 펴 보이면서 걷는다. 제법 긴 다리로 일반인들에 비해 확실히 길고 예쁘게 뻗어있었다. 그러나 크라뮤는 사람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다리가 황금으로 되어 있어?”

“윽”

크라뮤의 말에 몰리는 힘이 빠진 표정이 되더니 다시 보통 보폭으로 돌아온다.

“음……황금은 비싸지?”

"응.”

“그 황금만큼 비싼 가치가 있는 다리라는 뜻이야. 황금의 다리라는 건.”

“왜?”

“자아. 보렴.”

엘리는 왼쪽 주머니에서 작은 사과를 꺼내 입에 물더니 입을 벌려 땅으로 떨어트린다. 그 사과는 땅에 닫기 전에 몰리의 왼 발등에서 멈춘다. 사과는 스르르 발 등을 따라 구르더니 몰리가 조금 힘을 주어 흔들자 다시 공중으로 뜬다. 그것을 오른 무릎이 툭 건드리니 사과는 앞으로 뻗는다. 그러자 어느새 몰리의 왼발 끝이 사과를 건드리고 멈춘다. 몰리의 왼발이 거의 땅에서 수직으로 가깝게 올라간다. 사과는 굴러서 허벅지를 타고, 허리를 건너, 가슴부근에서 좀 퉁기더니 다시 몰리의 입안으로 들어간다. 몰리는 다시 얌전히 걷고 있다.

“우와! 그거 발 맞아?”

“호호 이 정도는 우습지. 지금 까지 내 발아래에 무릎을 꿇은 남자가 어디 한둘이어야지.”

“몰리가 예뻐서 무릎 꿇었어?”

“어머나? 어디서 그런 멋있는 말을 배웠니?”

“힘세면 예쁜 거라며?”

“……. 크라뮤군.”

“응?”

갑자기 몰리가 두 손으로 크라뮤의 양 볼을 잡는다.

“솔직해지지 않으면 나중에 여자들한테 인기 못 끈다.”

“으으 으어이앙 아엉여웅아이이(으으 아프다. 놓고 말해라. )”

잠시 고문이 있었다. 몰리는 그 와중에 무엇을 봤는지 손을 놓고 탁 탁 털면서 한 마디한다.

“흐응. 그러고 보니 크라뮤와 시바는 아직 어려서 표현이 서툴겠구나 호호 호호.”

“으으…. 내 볼 살이 이렇게 늘어 날 수 있는 거 오늘 처음 알았다.”

크라뮤가 양 볼을 만지면서 얼얼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동안 몰리는 엘리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대로 끝에 있는 한 가게로 향한다.

“아. 저기가 내가 일을 볼 곳이거든.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줄래? 이 말없는 언니하고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면 볼일을 보고 나올게.”

“응”

몰리는 그렇게 환하지 않은 가게 앞에 가더니 안의 점원에게 뭐라고 한다. 작은 소리로 말해서 크라뮤에게는 들리진 않는다. 얼마 안 있으니 안 쪽에서 각자 다른 차림을 한 사내들이 나오고 몰리는 안으로 들어간다. 크라뮤는 옆에서 무표정하게 서있는 엘리와 별로 할 일이 없겠다고 생각하고 옆을 맴돌다가 시바를 슬쩍 옆으로 끌어내 그녀가 듣지 못할 만한 거리까지 끌고 와서 말을 건다.

“음…이 정도면 말해도 괜찮을 거다.”

이 말에 참기 힘들었는지 힘 빠진 목소리로 시바가 입을 연다.

“야…주인아. 우리 진짜 저애들이랑 같이 자는 거야?”

“왜?”

“한쪽은 깡패고 하나는 가수에…인질…노예상인이잖아.”

“공짜로 재워준다잖아. 게다가 내일 아침이랑 점심도 준다는데 뭐가 문제냐?”

“그래도 무조건 힘으로 밀어붙이는 걸 보니까 좀 불안하다. 내 경험상.”

“흥, 웃기네. 너보다는 내가 더 오래 살았고 넌 태어난 날부터 나하고 지냈으니까 네가 가지고 있는 경험이라는 거 다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고. 거역할 생각마라.”

이때 몰리가 들어간 가게 앞에 있던 사내 셋이 안에서 뭉그적거리는 폼으로 크라뮤, 시바, 엘리가 있는 쪽으로 온다. 이것을 본 시바가 입을 다물고 크라뮤는 엘리 옆으로 간다.

“어이 엘리, 저 사람들이 오는데.”

엘리도 알고 있었는지 역시 변함없는 안색으로 조용히 다가오는 세 사내를 본다. 곧 그들은 이상한 웃음을 피우면서 입을 연다.

“설마 소문으로만 듣던 에푼 자매가 이렇게 젊고 예쁠 줄은 몰랐어.”

별로 듣기 좋은 목소리도 아니고 품위도 없는 말투였다.

“히히. 이번에 우리랑 같이 일을 할지도 모른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휘유-죽여주는군.”

다른 쪽에 비스듬히 서있던 마른 청년이 엘리의 새하얀 피부를 보면서 휘파람을 분다.

“우리 형님이 모두 다 데리고 오라고 하더군, 이 꼬마와 개는 뭐냐?”

처음 말을 꺼낸 남자가 크라뮤와 시바가 엘리의 옆에 있는 것을 보고 묻지만 역시 엘리는 말이 없다. 할 수없이 크라뮤가 대신 대답을 한다.

“몰리가 우리, 방에서 재워 준데.”

이 말에 그 사내는 이상한 눈빛으로 엘리를 보더니 이번엔 시바를 본다.

“음…설마 저 개까지?”

“응, 시바는 내 부하니까.”

“켓켓, 웃기는 에푼 일가로군. 언제부터 일행이 늘었지? 언제나 두 자매가 깨끗이 일을 처리한다고 해서 불렀는데 이런 애까지 딸려 있을 줄은 몰랐군.”

이 말도 역시 마른 사내의 말이다. 훨씬 품위가 없는 말투였다. 크라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려 엘리를 쳐다본다.

“엘리, 우리가 같이 있으면 일 못해?”

엘리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 흔든다.

이것을 본 가운데의 사내가 고개를 까딱하더니 몸을 돌리면서 한마디 한다.

“칫, 이쪽 일을 우습게보지 말라고. 헤븐 돌로바의 공물은 만만한 일이 아니라고. 따라와”

이 말에 약간 엘리 발걸음이 멈칫 했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짧은 반응이었고 주번에서 별다른 낌새를 보이지 않자 지체하지 않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크라뮤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진열대에는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있을 뿐이었다. 별로 팔릴만한 물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 아니면 좋은 것들은 다 팔려버렸나? - 하는 생각을 하면서 들어가는데 진열대가 있는 안쪽에 조그마한 문이 나온다. 세 남자들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옆으로 비킨다. 엘리는 뒤를 돌아서 크라뮤를 쳐다 보고 따라 들어오라는 눈치를 보낸다. 크라뮤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 들어간다. 안에는 희미한 빛을 내는 기름 등과 제법 길어 보이는 계단이 있다. 두 사람과 한 마리는 소리 없이 내려간다. 제법 깊다. 이 정도면 웬만한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다. 크라뮤와 엘리의 눈앞에 빛이 보인다. 작은 문이다. 안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하나는 몰리 말소리다. 크라뮤와 시바, 그리고 말이 없는 엘리는 조금 수상해 보이는 방안으로 들어선다.


BGM : 今井美樹의 TOKYO 8月 サングラス


방 안에는 몰리가 서있었고 대머리 사내가 마주한 곳에서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좁은 문이 주는 인상과 달리 안은 제법 넓어 어른 10명이 춤을 추고 있어도 충분할 것 같다. 대머리는 엘리를 알고 있는 듯 흘깃 쳐다보고 말았지만 크라뮤와 시바를 보고는 시전을 고정시킨다. 몰리는 그들이 들어서자 살짝 웃어 보이면서 말한다.

“미안, 엘리, 크라뮤, 시바. 친구가 모두를 보고 싶다고 하잖아.”

일행을 확인한 대머리가 듬직해 보이는 몸을 뒤로 젖히고 나무의자에 꼬나 앉는다. 옆에는 작은 원형탁자가 있다. 그 위에는 작은 술잔이 있고 비어 있는 술병이 있다.

“설마 ‘황금벌레’ 몰리에게 이런 동정심 같은 게 있는 줄은 몰랐어. 정말로 너저분한 애로군.”

이 말에 몰리가 곱게 눈을 흘기면서 대머리를 본다.

“애들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마라.”

“그래 알았어. 우리 쪽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고. 어때 이번 일에는?”

대머리가 곧 화제를 바꾼다. 엘리는 일행이고 크라뮤는 꼬마라서 별 상관을 않는 듯 하다. 몰리는 크라뮤 쪽을 잠깐 보다가 입을 연다.

“음… 좀 크기는 걸리긴 하지만…. 경계가 심한 편이라고?”

“잘되면 각자 2천씩은 떨어지는 일이지.”

“그럼 우리는 6천이고…너희가 만육천이네.”

크라뮤가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지금 둘이 나누고 있는 소리는 무엇인지 알 듯하다. 돈 얘기다.

“어이, 저 애는 너희일행이 아니잖아.”

이 말에 몰리가 몸을 숙여 그 대머리 귀에 속삭인다.

“사실은 언니 엘리가 낳아서 몰래 기르고 있는 애야. 소문내지마.”

조용한 방이었고 크라뮤에게도 들린 말이었기에 엘리에게도 들렸으리라. 하지만 엘리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대머리는 무슨 얘긴가 하고 듣다가 실실 쪼갠다.

“……농담 말고. 너희가 4,000, 우리가 18,000이다.”

“결국 이번 일 대부분은 우리가 하잖아?”

몰리가 흥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조금 감이 좋아보이지 않는다고 느낌 크라뮤다. 주변에서 실실거리고 있는 품위없어보이는 사람들을 보아도 이곳이 마음에 드는 곳이 아니라고 인식한 크라뮤는 조금 몰리와 엘리에 대한 인상이 나빠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것저것 준비한 게 많고 팔아 넘길 루트도 확보해 놓은 상태야.”

“쳇. 너희들끼리 잘해봐.”

몰리는 곧장 몸을 돌려 크라뮤와 엘리에게 눈짓을 한다. 엘리가 같이 몸을 돌린다. 앉아 있던 대머리가 듬직하지만 서서보면 땅딸하게 보이는 몸을 일으키고 손을 든다.

“5,000.”

몰리는 대머리를 보고 웃는 소리를 한다.

“우선 생각해보고 내일 아침에 결정하지.”

“잘 곳은?”

“지금부터 찾아봐야지.”

“로드리게스의 [화이트 하우스]가 괜찮아.”

“고마워. 참고 해두지.”

크라뮤 일행이 방을 나서려고 하는데 대머리는 같이 움직이는 시바를 그제야 발견한 듯 외친다.

“잠깐! 그 개는?”

“응? 이 개? 귀엽지? 오늘 새로 맞아들인 내 양자야.”

몰리의 농담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대머리는 앞으로 다가와 시바를 유심히 쳐다본다.

“잠깐 이쪽에서 좀 보자.”

이러니 일행은 다시 탁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시바는 엉거주춤한 폼으로 따라 들어오고 크라뮤는 걱정이 돼서 몰리에게 묻는다.

“시바를?”

몰리가 시바 엉덩이를 툭-쳐서 대머리 앞쪽으로 잘 보이게 한다.

“음, 저 대머리는 저래 보여도 동물에 조예가 있거든.”

“시바는 ……… 그냥 개야.”

“음……… 나도 좀 처음 보는 생김새라서 무슨 종인가 하고 궁금했거든.”

둘이 잠깐 말을 하는 사이에 시바를 보고 있던 그 땅딸보가 큰 외침을 내질렀다.

“우와앗!?! 이 개는!!”

“응? 알아? 이 … 강아지를?”

크라뮤는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시바가 마수라는 것이 밝혀지면 이곳에서 머물 수가 없다. 냅다 튀어야 하는 것이다. 몰리의 질문에 대머리상인은 입에서 침을 튀면서 말했다.

“전설의 삽살개! 그래 틀림없어! 비록 더럽지만 이 녀석은 이미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환상의 명견품종! 삽살개야!”

“환상의 명견? 비싼 거야?‘

대뜸 몰리의 눈빛도 반짝인다. 대머리는 손을 떨면서 시바를 잡으려 한다.

“후후‥. 수집가에게 이 개의 박제라고 가져다주면 3만셀은 여유 있게 쏟아질걸.”

순간 빠악-!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나며 그 남자는 앞으로 꼬꾸라진다. 아직 웃고 있는 입가의 웃음이 체 지워지지도 않고 있는데 그냥 앞으로 무너진다.

-꽈당-

뒤에서 나무의자로 그의 머리통을 날린 몰리가 씨익 웃는다.

“히히. 그럼 내 몸값하고도 남네. 넌 빠져 줘야 갰어.”

배신이라는 흙으로 빚어진 그것은 여인인가보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그 사내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가 있다. 몰리가 손에 들고 있는 나무의자의 한쪽다리가 부러졌는지 덜렁거린다. 몰리는 눈꼬리가 높이 올라있다. 돈에 관련된 일이라면 저런 표정이 나오나보다 하고 생각한 크라뮤는 불타는 욕망의 눈으로 시바를 쳐다보는 몰리를 나름대로 다시 평가해야겠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몸값이라는 말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노예도 아닌 이상 몸값이라니?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는 그녀는 자신의 가치도 돈으로 환산해서 다니나?

“자. 나가자 꼬마야.”

몰리는 크라뮤의 작은 손을 잡고 끈다. 몰리의 시선에 약간 쫄았던 시바도 따라온다.

“왜 발을 안 쓰고 의자를 든 거야?”

“호호. 내 황금의 발로 문지르기에는 저 아저씨의 대머리가 너무 미끄러워 보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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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ZARD - 5부 외전 - 크라뮤의 매듭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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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HZ5外] 4장 매듭의 연결 (7) 13.02.10 426 2 50쪽
12 [HZ5外] 4장 매듭의 연결 (6) 13.02.10 419 1 50쪽
11 [HZ5外] 4장 매듭의 연결 (5) 13.02.10 395 2 64쪽
10 [HZ5外] 4장 매듭의 연결 (4) 13.02.10 403 1 37쪽
9 [HZ5外] 4장 매듭의 연결 (3) 13.02.10 440 1 63쪽
» [HZ5外] 4장 매듭의 연결 (2) 13.02.10 387 1 55쪽
7 [HZ5外] 4장 매듭의 연결 (1) 13.02.10 404 2 54쪽
6 [HZ5外] 3장 매듭의 시작 (4) 13.02.10 436 2 35쪽
5 [HZ5外] 3장 매듭의 시작 (3) 13.02.10 424 1 53쪽
4 [HZ5外] 3장 매듭의 시작 (2) 13.02.10 362 1 46쪽
3 [HZ5外] 3장 매듭의 시작 (1) 13.02.10 341 1 35쪽
2 [HZ5外] 2장 원수 13.02.10 448 2 49쪽
1 [HZ5外] 1장 봄이 왔다 13.02.10 602 2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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