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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콩 님의 서재입니다.

검은머리 러시아군 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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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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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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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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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DUMMY

숙친왕 선기는 이 시대 사람치고는 기인이라 생각될 정도로 개방적인 편이었지만, 이번에 만날 경친왕까지 그러리라 생각할 수는 없다.


아무리 청이 호구라해도 일개 사병이 가볍게 만나볼 수 있는 인물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열강의 장군인 바실레프스키가 부하를 시켜 선물까지 보냈다는데 경친왕이 직접 나와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그래.


내용물만큼이나 중요한건 선물을 들고 왔다는 이 행위 그 자체.


게다가 내가 이런 선물을 들고 가는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경친왕 혁광의 선조는 바로 건륭제의 열일곱번째 아들 애신각라 영린.


즉, 경친왕은 내가 가져간 선물의 원 주인인 건륭제의 직계후손인 것이다.


당연하지만 나도 그렇고 박춘명도 그렇고 경친왕 같은 인간의 족보까지 외우고 다닐리는 없다.


하지만 숙친왕부의 총관은 알았다.


왕부 간에 교류가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주인집 서열놀이는 아랫사람들이 더 민감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처치곤란인 건륭제의 시라도 후손에게는 후손에게는 제법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조상의 시가 적힌 비단을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굳이 사람을 써서 이런 선물까지 바칠 필요는 없었거늘. 공연한 걸음을 하였구나.”


하지만 경친왕은 무슨 수고 들여서 허섭스레기 같은걸 주냐는 표정이 되었다. 조상 시라서 괜한 말은 못 덧붙이겠다는 얼굴이었다.


역시 여진 오랑캐는 효도를 모르는군.


나는 심드렁한 경친왕에게 재빨리 본론을 꺼냈다.


“저희 장군께서 마음 속으로 줄곧 대청의 친왕을 흠모하고 계셨으나, 어찌 그만한 일로 귀찮게 해드리겠습니까.

다만 흉포한 오랑캐들이 북경을 약탈하는 와중에 건륭 황제의 훌륭한 시를 훔쳤는데, 우리 아라사군이 이를 되찾았지만 도저히 주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곤란하던 차에 대청의 중신이자 건륭 황제의 자손이신 왕야께라도 돌려드려야겠다 싶어 염치불구하고 이리 찾아뵈라 하신 것입니다.”


이게 개소리인건 나도 알고 경친왕도 안다.


나도 그냥 짬처리하려고 들고 온거야. 이런거 사실 쓰레기니까 약탈해오지 말라고 할수도 없고.


하지만 중요한건 여기에 담긴 함의였다.


경친왕은 나를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 주인을 찾을 수가 없어 내게 들고 왔다······ 그럼 너희가 훔친 다른 물건들도 응당 그리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정의로운 아라사군은 결단코 약탈 따위에 가담치 않았으나, 도적들을 의로써 준엄히 꾸짖어 되찾아온 보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라사군은 이를 숙친왕부에 두어 감히 남이 손상하지 못하도록 준엄히 보관 중입니다.

허나 영구히 그리둘 수는 없으니, 당연히 마땅한 주인을 찾아 다시 넘겨야겠지요. 저희 장군께서는 왕야께서 이를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


저번에도 말했지만, 사실 연합군이 약탈한 물건 대부분은 중국 현지에서 소화를 시켜야한다.


금은붙이나 척 봐도 귀해보이는 것들은 당연히 연합군 손에 들려 공출되거나 이미 경매에서 죄다 처분한지 오래지만, 중국 내에서만 가치가 있는 것들도 많았으니 말이다.


특히 내가 전문가들을 시켜 체계적으로 분류해놓은 예술품과 부피가 커서 나라 바깥으로 운송하자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각종 집기들이 있다.


예를 들면 북경 근처 사찰의 청동 불상, 거대 옥병풍, 강소성 태호에서 가져왔다는 황실 정원석, 대형 향로 등등.


지금도 숙친왕부 한켠을 가득 메우고 있는 보물들인지라 놓고 가기엔 무척이나 아깝지만 그렇다고 가져갈 수도 없는 계륵 같은 물건들이다.


러시아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눈에 보이니 일단 털긴 했지만.


그러나 북경에 살고 있는 청나라의 부호들이 피난하거나 알거지가 되어버린 지금, 남은 재고들을 인수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까, 북경이 불타오를 당시 어가를 따라 몸을 피했다가 다시 돌아온 경친왕 정도를 제외하면 말이다.


경친왕은 중고 쿨거래하자는 내 말을 찰떡 같이 알아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여기저기 수소문해본 결과 경친왕 혁광은 매관매직과 뇌물수수를 사랑하는 간신.


‘너도 돈 좋아하는 놈이구나?’


역시 망국의 신하는 응당 이래야지.


경친왕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아라사야말로 저 오랑캐들 중에서 인의를 힘껏 지키는 나라로다.

너희 장군이 품은 뜻이 아주 훌륭하니 나 역시 대청의 신하로서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비록 내가 나라의 대사를 맡은 몸이나 이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니 힘써 돕겠다.”


이건 절대 장물거래가 아니다.


경친왕이 소중한 중국의 문화재를 보호하고 있던 러시아군에게 사재를 털어 소정의 답례금을 지급하는 것 뿐.


러시아군이든 청의 친왕이든 나무랄 것 없는 모범적인 행동이었다.


경친왕은 건륭제의 시를 받아들었던 아까 전과 달리 훨씬 풀어진 얼굴이었다.


‘대충 이정도면 이번에 본 손해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겠다는 표정인데.’


모르긴 몰라도 경친왕부도 약탈의 참화를 피하진 못했을 터.


어차피 다 버리고 가야할 물건들을 내가 경친왕에게 떨이로 넘겨버리면, 경친왕은 다시 시간을 들여 중국에 재판매하면서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급 능력 따윈 걱정하지 않는다. 명색이 청나라의 친왕인데 재산을 북경 왕부에만 몰빵쳐놨을까봐.


우리 둘은 그런 뜻을 담아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숙친왕 선기를 만났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신분이나 민족을 초월한 우정 비스무리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었다.


경친왕 혁광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했는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너희 장군의 호의 역시 내 잊지 않겠다. 비록 우리나라 역시 형편이 좋지 않으나 무슨 일이 있거든 힘껏 돕겠다 전하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왕야!”


역시.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인 법인 모양이었다.



* * *



경친왕을 찾은 것은 그와 딜을 치고 허락을 구하기 위해서였을 뿐, 실무적인 부분까지 미주알고주알 논하지는 않았다.


경친왕은 러시아군이 주둔한 숙친왕부로 총관을 보내서 꼼꼼히 목록까지 작성해가며 물건들을 인수해갔고,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추가적으로 거래를 하고 싶다는 의사도 전해왔다.


또 한번 북경이 불타는 일을 상정하다니. 역시 망국의 거물도 아무나 해먹는건 아니군.


게다가 내가 바실레프스키의 이름을 빌려 은근히 흘려본 연해주에의 투자까지 생각해보겠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래도 이번 거래로 경친왕의 신뢰가 톡톡히 쌓인 모양이었다.


내 입장에선 재고떨이에다 청나라 커넥션까지 만들었으니 이보다 좋을 순 없었고.


이걸로 남은 물건까지 몽땅 털어냈으니 이제 마음 편히 북경을 뜰 수 있겠다.


저거 안 팔아치웠으면 집에 가서 분명히 아까워 잠을 못잤을게 뻔하지.


내 주선 아래 약탈품 좀 날라주는 것만으로도 두둑한 수수료를 챙긴 한국인 노동자들도 싱글벙글이었다.


심지어 본업까지 잊어버리고 원래 최재형의 군수품을 운송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조차 까먹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바실레프스키는.


“우크톰스키 공작(Ухтомский, Эспер Эсперович)께서 심기가 많이 불편하긴 하셨지만, 그래도 크게 경을 치진 않으셨지. 다 네 덕분이다, 루슬란.”


“다행이군요. 미리 이런저런 밑밥을 깔아놨으니 공작께서도 뭐라하긴 그러셨겠죠.”


니콜라이 2세의 측근이자 동양 애호가라는 그 아저씨는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파괴된 자금성을 보고 기함을 했다.


듣기로는 “이거 절대 복구 못한다!”고 한탄했다고 하던가.


그리고 눈이 달린 사람이면, 아니 머리가 달린 사람이면 거기에 러시아군도 한몫 꼈을거란 사실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을 터.


그러나 그 추궁은 다른 러시아군 부대에 집중되었을 뿐, 숙친왕의 딸을 보호한 바실레프스키의 부대에는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사실상 한국인 노동자들을 대동한 그의 부대가 가장 많은 약탈 실적을 올렸음에도.


러시아군의 범죄행위를 인정하는건 양측 어느쪽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청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친왕 혁광은 러시아 공사 기르스를 만난 자리에서 ‘인명(현산)과 재산(장물)을 보호한’ 러시아군의 신사적인 행동에 찬사를 보냈다.


반면 숙친왕은 자국 약탈한 군대에 사탕발림을 할 정도로 낯짝이 두껍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딸을 구해준 이들을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러시아 제국은 사실상 이 사건의 원흉인 서태후의 퇴진을 요구하지 않는 유일한 열강.


서로가 서로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전혀 없었다.


두 나라의 암묵적 합의가 이뤄졌으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굳이 자국군을 견책할 이유는 없었고, 러시아군도 곧 방 빼게 되면서 모든 일은 명쾌하게 정리되었다.


그렇게 북경 주둔 한달째.


드디어 러시아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연합군 가운데 가장 빠른 철수였다.


협상이 처음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딱히 미련은 없었다.


8개국 연합군과 한국인 인부들이 이잡듯이 뒤진 통에 북경에 남은 재물들은 없다시피했고, 나 역시 경친왕에게 재고까지 땡처리해서 돈을 두둑이 챙겼던 터.


‘이제 북경에 올 일은 딱히 없겠지?’


여행이면 모를까, 박춘명의 기억 속에 러시아군이 다시 북경에 발을 들이미는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박춘명한테 물어보고 싶었지만 홀애비라고 놀렸더니 삐져서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북경을 떠났다.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뭐, 기분 탓이겠지.



* * *



그렇게 러시아군을 따라 연해주에 돌아온 나는 최재형에게 내가 번 돈의 절반을 맡겼다.


어차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별로 쓸 일도 없는 돈이다.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겨놓고 굴리는게 낫겠지.


“이, 이게 다 뭐냐?”


“제가 북경에서 번 약간의 통역료인데요. 아저씨한테 투자하는거니까 제대로 불려놔주세요.”


“약간······? 약간이라고?”


최재형 역시 이번 전쟁의 수혜자 중 한 명.


그처럼 군납으로 돈 좀 만진 한인들이 제법 생겨났지만, 미리 내 언질을 듣고 준비한 최재형을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놀랄만큼의 거액을 맡긴 나는 그대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기차에 탑승했다.


최재형은 좀 쉬다 가라고 했지만 나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러시아군을 따라다니느라 이미 9월도 한참 지난 상황.


‘이거 생도군단에서 까이는거 아닌가?’


까짓거 유급을 하더라도 한몫 단단히 챙길 속셈에 북경까지 온 나였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는 다른 법.


자원병으로 참전한건 그나마 참작될만한 정상이지만, 그래도 얄짤없이 꿇리겠다고 하면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기 놈들이 나보다 먼저 진급한다고?’


그런 꼴을 두고 볼수는 없다.


베틀리츠네 형은 어떻게 그런 상황을 버틴거지.


그러나 내가 막상 제1생도군단으로 돌아왔을 때.


“루슬란! 믿고 있었다고!”


“우리는 네가 자랑스럽다!”


나는 나를 환영하기 위해 모인 생도들의 인파와, 무수한 악수의 요청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다냐.'


그 이유를 알게 되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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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호의 +22 24.09.04 5,685 301 14쪽
9 경매 +25 24.09.03 5,710 314 13쪽
8 수확 +27 24.09.02 5,765 318 12쪽
7 시작 +13 24.09.01 5,861 296 11쪽
6 참전 +10 24.08.31 6,343 301 14쪽
5 귀신 +21 24.08.30 6,485 300 12쪽
4 입학 +30 24.08.29 6,707 341 12쪽
3 연줄 +20 24.08.28 6,939 344 11쪽
2 스타팅이 왜 이래 +24 24.08.27 7,860 381 12쪽
1 프롤로그 +41 24.08.26 8,936 37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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