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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콩 님의 서재입니다.

검은머리 러시아군 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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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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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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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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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

DUMMY

최재형의 집에서 빈둥빈둥거리며 6개월쯤 더 보낸 나는, 드디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기 위해 짐을 쌌다.


나야 ‘각성’ 전에는 동네 아싸인 엄마 옆에 붙어 살았고, 그 후엔 군부대 앞만 쏘다녔으니 마을 사람들이랑 추억이랄 것도 별로 없었지만.


막상 떠나려고 보니, 제법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나를 배웅하기 위해 나와있었다.


러시아인 대위의 양자가 되어 저 먼 페테르부르크까지 공부하러간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우리 동네 읍장인 최재형 아저씨를 함께 배웅하러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군.


별로 같이 논 적도 없는 애들이 손을 흔들면서 내 이름을 외쳤다.


“하준아!”


“하준이가 아니라 예르슬란이라니까.”


예르슬란, 혹은 루슬란 니콜라예비치 킴(Ерусла́н Николаевич Ким).


그것이 내 새 이름이었다.


이름 중간에 들어가는 부칭(父稱)은 내 대부인 니콜라이 비류코프의 이름에서 따온 것.


내 친애비 되는 사람에게 러시아 이름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알았더라도 굳이 그 이름을 쓰진 않았을 것 같다.


사실 곧 조선으로 떠날 예정인 비류코프가 내 아빠를 찾아주겠다는 의사를 타진해온 적도 있었다.


딱히 그럴 필요는 없었기에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이미 내가 페테르부르크의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놨으니 문제 없을거다. 나는 여전히 네가 조선에 따라가는 편이 좋지 않겠나 싶다만······.”


“페테르부르크에서 열심히 공부해야죠.”


비류코프는 기왕 나를 대자로 받아들인 김에 아버지 노릇을 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인지, 내가 입학할 때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자기 본가에 머물 수 있도록 했다.


그 전에 입학하기 전 한 몇 년 정도 조선에 같이 있자는 제안을 받긴 했지만, 뭐하러?


성인이 될 때까지 내 주무대는 페테르부르크가 될게 뻔하니, 지금부터라도 가서 적응을 해놓는게 훨씬 낫지.


비류코프의 부모님 입장에서야, 독신주의자인 아들놈이 대자랍시고 타타르 어린애를 데려오면 좀 찜찜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방 한칸만 내줘도 감지덕지지. 제법 유복한 귀족 집안이라 들었으니 설마 남아도는 방 하나가 없겠냐?


나는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최재형이 빌려온 마차에 올라탔다.


옆동네 카자크 놈들은 지금쯤 어떻게 지내려나.

내가 페테르부르크에 생도군단 시험 치러 간다는 사실을 알면 이를 아득바득 갈겠지?


그렇게 1896년 1월.

나와 최재형, 그리고 비류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고.


몇 년 동안 그의 본가에서 공부에 매진, 아니 사실 페테르부르크 구경이나 열심히 다닌 끝에.


“합격, 합격이다!”


“······뭐, 당연한 일이죠.”


1899년 9월.

나는 제1생도군단에 입학할 수 있었다.


쉽군.



* * *



제1생도군단이 유서 깊은 학교라고는 하지만, 당연하게도 입학하는 애들의 수준은 성인 입장에서는 거기서 거기였다.


대부분의 입학연령은 9세 반에서 11세 반.


열 살짜리 애들이 똑똑하고 잘나봤자 얼마나 잘나겠냐.


생도군단의 입학시험은 성경, 러시아어, 산수 지식을 테스트하는데, 당연하게도 나는 거의 만점에 가까운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듣자 지금쯤 조선에서 열심히 러시아어 가르치고 있을 대부 비류코프와 최재형은 매우 기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어쩌면 저 두 사람은 내가 떨어져서 연해주로 비척비척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었나 보다.


내 입장에서야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만, 그랬으면 굉장히 쪽 팔긴 했겠군.


당초 나는 비류코프의 아버지인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비류코프 소장과 함께 입학식에 오려고 했다.


그러나 곧 나는 그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전직 포병 소장이 웬 노랭이 하나의 손을 잡고 입학식에 온다?


남들은 다 학부모가 참석하는데?


누가 봐도 비류코프 소장이 말년에 만든 사생아라고 생각할 것 아닌가.


괜히 이상한 오해를 받기 싫었던 나는 혼자서 입학식에 참석하는 편을 선택했다.


아니다. 소장 아들이면 오히려 잘 대해주려나?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도 3성 장군 아들은 빠따질 예외되고 그러던데.’


내가 이렇게까지 인맥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제1생도군단에 입학하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백대 맞을거 오십대만 맞아보자는 공산도 있었다.


이 야만의 시대에 <사관학교 갔다가 맞아 죽었다> 같은 사고가 뜨는건 결코 드물지 않을 것 같으니까.


‘일단 버텨보고, 정 안될 것 같으면 비류코프 소장의 이름을 팔자.’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입학생들 대부분 군인 자녀들이다보니 퇴역 소장 정도 직함이 먹힐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카드 하나를 쥐고 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다.


박춘명의 기억 속에 21세기 러시아군의 가혹행위가 워낙 선명히 새겨져있다보니.


심지어 야만의 19세기라면 또 어떻겠는가?


30년 넘는 군생활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 있으니 폐급으로 찍힐 것 같진 않지만, 구타라는게 원래 합리적인 이유로 맞는건 아니니까.


입학 시즌에는 신입생들 기강 잡는답시고 특히 빠따질의 회수와 강도가 올라가는 법.


나는 그렇게 초장부터 몇 대 얻어맞을 각오를 다진 채 신입생 대열에 끼어 섰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교장 선생님!”


“나는 베르홉스키(Василий Парфеньевич Верховски) 장군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교장의 목소리는 온화하기 그지 없었지만, 나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이건 술책이다.


저 나이 먹은 교장이 직접 나서서 빠따질을 할리는 없으니 당연히 허허 웃는 노인네가 될 수밖에.


굿캅 배드캅에서 굿캅 역할을 맡은 것 뿐이겠지.


방심하지 마라. 여긴 러시아 사관학교다!


그러나.


이어진 집합에서도, 교육에서도, 식사에서도.


“네가 할 일을 다 해냈으면 쉬어도 괜찮아.”


“생도군단이라고 꼭 고통스럽거나 힘들어야하는건 아니야.”


“천천히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렴! 앞으로 서로에게 좋은 동료가 되어야 한다!”


빠따질은 없었다.


······이게 내가 아는 러시아가 맞나?


왜 애들을 안 때리지?


교사들이 왜 친절하지?


나는 접시에 코를 박고 음식을 먹어치우는 동기를 바라보면서 깊은 의문을 품었다.


‘내가 혹시 이세계 러시아에 온건가?’


러시아인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애들을 때리는 민족이 아니었던가.


물론 친부모가 없는 나는 알고 있는 표본이 좀 적으니 편견이 좀 섞여있긴 하겠지만.


내가 문화충격에 휩쓸려 있을 때, 별안간 옆에 있던 동기의 얼굴이 벌개졌다.


“쿨룩쿨룩!”


과도하게 입에 음식을 밀어넣는다 싶더니, 역시나 사레가 들린 모양이었다.


“야 인마! 기침해 기침!”


나는 혀를 쯧쯧차면서 등을 두들겼다.

이 자식, 식탐이 왜 이렇게 심해?


“구웨엑!”


- 철푸덕!


과연 내 말을 듣고 기침하던 녀석의 안색이 환해짐과 동시에, 목에 걸렸던 음식을 쏟아냈다.


그러자 때마침 달려오던 교관이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저 멀리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과연.’


어떡할거냐, 교관?


신입생이 우악스럽게 음식을 구겨넣다가 거하게 실수를 해버렸다.


이제 생도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서라도 진짜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되지 않았나?


“내가 치울게.”


그러나 그는 토사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생도군단에서 생활하려면 앞으론 당연히 자기가 치워야겠지만, 지금은 영 안색이 좋지 않으니. 옆에 친구가 잘 돌보고 있으렴.”


“······.”


나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지성과 합리의 요람인 생도군단을 찬양하기로 마음먹었다.


구세주······!


생도군단은 재수 없이 맞아죽을 걱정을 없애준 구세주······!


역시 러시아는 푸시킨의 왼손과 톨스토이의 오른손을 가진 문명국이었다!



* * *



기침을 거세게 내뱉은 아이의 이름은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베틀리츠(Серг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Ветлиц).


나이는 나와 동갑.


그는 내가 내민 물을 한컵 받아마신 후, 자신을 도와준 것에 대해 연신 감사를 표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베틀리츠다. 반가워. 아까는 덕분에 살았어.”


“예르슬란 니콜라예비치 킴. 루슬란이라고 불러라. 연해주에서 왔지.”


얘기를 들어보니 베틀리츠의 집안은 트베르라는 동네의 오래된 귀족 집안.


근데 나 같은 고아보다 더 걸신들린 듯이 먹어치우는 이유가 뭐였는지 묻자, 베틀리츠가 머쓱하다는 듯이 뺨을 긁으면서 말했다.


“귀족이래봤자 다 돈많은 귀족만 있는건 아니야. 여기도 대부분 귀족이나 군인 자식이겠지만 형편은 그렇게 좋지 않을걸?”


흠, 내 편견이 깨지는 것 같군.


“게다가 우리 집은 5형제인데, 내가 막내라서 이렇게 안먹으면 금방 음식을 다 뺏겼으니까. 습관이 돼버렸어.”


역시 형제 있는 집안은 생존투쟁 그 자체구만.


하기야 표트르 형은 타지에 나가있고, 나 혼자 최재형 집에 얹혀있어서 누구 눈치볼 필요없이 밥을 먹긴 했지.


골똘히 생각하던 나는 이윽고 한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잠깐, 형제가 다섯 명이라고 했지? 혹시 너희 형들 중에도 우리 학교 다니는 분 계시냐?”


“그래. 형들 네 명이 다 이 학교 출신이야.”


나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는 적폐 가문 베틀리츠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친하게 지내자!”


이 자식만 잘 알고 있으면 족보든 정보든 다 빼먹을 수 있겠는데?


장포대의 수십년 지식이 있는 내가 생도군단 수준의 공부에 굳이 목매달 이유도 없으니, 나는 앞으로 7년간 이 학교에서는 공부보단 다른걸 우선시할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친하게 지내자. 족보셔틀, 아니 친구야.



* * *



인종차별.


처음 생도군단에 들어왔을 때 이것을 걱정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맞다가 인생 종칠수도 있는 구타와는 달리, 악으로 깡으로 버텨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생도들 사이에서 피부로 느껴지는 인종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얘네가 착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생도들 인종과 민족 구성 자체가 상당한 잡탕이었다.


조지아인, 타타르인, 오세티아인, 코카서스인, 아르메니아인, 거기에 카자크와 에티오피아에서 온 흑인들까지.


그래도 부모가 작위 하나씩 달고 있는 놈들 사이에서 연해주의 고아 출신인 나는 특히 이질적이긴 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는 뜻.


그러니까······.


“야, 다 비켜 이 새끼들아!”


“루슬란, 루슬란 온다!”


“저 새끼한테 걸리면 한시간은 못빠져나와!”


쿠차말라(Куча-мала).


친구를 넘어뜨리고 모든 일행이 그 위에 올라타는 놀이. 누워있는 사람들을 발견한 생도들은 달려와서 위에서 뛰어내린다.


그러니까 현대 한국에서 가장 비슷한 놀이를 찾으라면······ 햄버거.


재밌네.


이거 그냥 남자중학교잖아.






---

러시아에서는 1864년 알렉산드르 2세의 승인으로 학교에서의 체벌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당연히 모든 학교가 그 즉시 명령에 따른 것은 아니고, 많은 시골 학교와 교구 학교에서는 그냥 무시하고 팼습니다만, 제1생도군단은 아무래도 수도에 위치해있었던만큼 점진적인 영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작중과 비슷한 시기에 주로 사용되었던 벌은 위원회에서 부과하는 행동 점수 감점이나 휴가 단축 혹은 박탈, 짧은 시간 동안의 벌서기와 놀이 박탈 등이었다고 하며, 이 시기 군단을 나온 생도들도 훗날 공통적으로 교관들의 온화함과 인내심(...)을 칭찬했습니다.


예를 들어 본문에 나온 세르게이 베틀리츠의 형인 알렉산드르 베틀리츠는 작중 시점에서 6년전인 1893년 입학했는데, '오래된 엄격한 관습이 사라지고 새로운 인도주의적 관습으로 대체되는' 과도기에 학교를 다닌 그는 생도군단 교관들의 '부드럽고 거의 가족 같은 대우'에 익숙해져 있다 군사학교에 진학한 뒤 상부의 냉담함에 충격을 받았다는 회고를 남겼습니다.


그 외에는 시베리아 생도군단에서도 린덴 소장(1863-1874) 시절에 이르러 체벌이 완전히 근절되고 교관들이 고학년 생도들에게 "너"라고 부르는 문화가 사라지는 등 발전이 있었다고 하네요.


카할라니.A님 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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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내기 +18 24.09.08 4,946 27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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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제안 +26 24.09.05 5,610 316 10쪽
10 호의 +22 24.09.04 5,687 301 14쪽
9 경매 +25 24.09.03 5,714 314 13쪽
8 수확 +27 24.09.02 5,766 318 12쪽
7 시작 +13 24.09.01 5,864 296 11쪽
6 참전 +10 24.08.31 6,347 302 14쪽
5 귀신 +21 24.08.30 6,490 301 12쪽
» 입학 +30 24.08.29 6,711 342 12쪽
3 연줄 +20 24.08.28 6,941 344 11쪽
2 스타팅이 왜 이래 +24 24.08.27 7,861 381 12쪽
1 프롤로그 +41 24.08.26 8,938 37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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