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잘 만든 차가 맞습니까?
절체절명의 순간,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그 이질적인 느낌을 알고 있을 거다.
불과 몇 초 수준의 찰나의 시간에 주변 상황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이면서,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경험.
극한의 위기 상황에서 뇌는 생존 본능에 따라, 집중력과 정보 처리 속도를 증가시키고 신체의 반응 속도를 향상시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였다.
준성이 전 직장 동료인 박종필 과장을 우연히 마주쳤을 때, 딱 그렇게 시간이 느려졌다.
덕분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전 직장 문제를 크게 고민하지 않았던 건, 생각보다 완성차 5개 사의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인 채널로는 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를 통한 교류가 있었고, 비공식적으로는 경쟁사 모임이 있었다.
전자야 어느 산업군이나 비슷한 ‘협회’를 통한 네트워크였고, 후자는 각 사의 지정된 실무자급 담당자들끼리 정보를 교환하는 채널이었다.
그 외에는 이직한 사람들이 오고 가며 섞여 들어가는 경우가 있었다.
다들 규모가 큰 회사들이다 보니 같은 회사 내에서도 서로 모르는 직원들이 넘쳐났다.
그래서 ‘A사에서 오셨으면, 어느 팀의 누구 아세요?’라는 질문을 해봐도 모른다고 대답하는 일이 꽤 많았다.
준성은 개명까지 하고 현도차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딱히 레노오성 측 사람들을 신경 써본 적은 없었다. 근무지도 떨어져 있었고.
모르는 척해볼까?
그러면 지금 당장 위기 상황은 모면할 수 있겠지만...
박종필 과장이 왜 여기 나타났는지, 회사에 돌아가서 어떤 얘기를 하고 다닐지 끝까지 모른 상태에서 대응해야 한다.
아는 척을 한다면?
대체 뭐라고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하나.
현도차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 모습을...
“아유, 과장님. 안녕하세요?”
“아, 역시 장 대리님이 맞았네요. 긴가민가했습니다.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지셨어요. 신수가 훤하십니다.”
박종필 과장하고는 애매한 친분이 있었다.
사적으로 아주 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나쁜 것도 없었다.
같이 일을 한 적도 있어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고, 업무 외적인 얘기까지도 조금은 공유할 수 있었지만, 퇴근 이후에는 단 한 번도 연락해본 적 없는 사이.
딱 그 정도 거리감이 있었다.
“과장님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
“아, 오후 반차 쓰고 면접 보러 왔습니다. 이번에 여러 부서에서 대리, 과장급 경력직을 많이 뽑더라고요.”
젠장.
이놈의 나비효과는 진짜 엄청난 것 같았다.
전기차 본부에서 여기저기서 사람을 빼 오면서, 결원이 생긴 부서들의 충원을 위해 사람을 뽑다가 일이 여기까지 온 거였다.
경력직 공고가 뜨면 아무래도 동종 업계 인원들이 선 순위로 몰리기 마련인데,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다.
“대리님은 여기 웬일이세요?”
“저는 뭐...”
준성은 사원증을 내밀어서 보여줬다.
“아... 현차 와 계셨던 거예요? 과장으로 승진하셨네요. 근데 이름이...?”
“개명했습니다. 인생이 꼬일 때 개명하면 좀 풀린다고 해서요.”
“개명 덕에 현차 입사하셨으면, 그거 효과 제대로 보신 거 아닙니까?”
주변 사람들이 들으면 좋을 게 없는 얘기여서, 박종필 과장이 의식하지 못하게 사람이 없는 방향으로 유도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대리님, 아니 과장님. 들어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여기서 그냥 보내면 후환이 남는다.
조금 더 대화를 끌면서 생각을 해봐야 한다.
“오랜만에 뵀는데 차 한잔하시죠.”
“자리 오래 비우셔도 됩니까?”
“오늘 팀장님이 연구소 출장 가셔서 방학입니다.”
“하하하. 그런 날은 조금 놀아줘야죠.”
“길 건너가면 조용히 짱박힐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일전에 강형진 팀장이 알려준 카페는 보안을 요구하는 대화를 하기에 제격인 곳이었다.
“과장님 소식이 뚝 끊겨서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긴 했습니다. 쉬고 계신다고만 들었거든요.”
“네네, 여행도 갔다 오고 조금 쉬었는데요, 먹고 살려면 계속 놀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완전 업그레이드하신 거 아닙니까? 현차 대리 연봉이 우리 과장 연봉보다 높을 텐데요. 거기다 과장까지 달고 들어오셨으면...”
현도차는 업계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직장이었는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연봉이었다.
“사옥 이전 날짜는 이제 정해졌나요?”
“지금 인테리어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12월에 이사 갈 것 같습니다.”
준성이 근무했던 곳은 봉래동 사옥, 서울역 위쪽 염천교 근처에 있었다.
레노오성은 구로 쪽에 지하 3층, 지상 13층 규모의 신사옥을 지어서 이사할 예정이었다.
“요즘 SN5 잘 팔려서 회사 분위기 좋죠?”
“뭐, 많이 좋아지긴 했는데 이게 언제 꺾일지 몰라서 불안불안합니다.”
모든 세그먼트의 풀라인업을 갖추지 못한 회사는, 운용하는 모델 수가 적기 때문에 신차 한 대의 성공이 회사의 운명을 좌우하는 일이 많았다.
FMC(Full Model Change) 버전의 완전 신차를 한 대 개발하고 런칭하는 데까지는 수년의 기간과 수천억에 달하는 개발비가 들어간다.
최근에야 하나의 공용 플랫폼을 중심으로 여러 차종을 만드는 방식이 유행하면서 개발비를 많이 절약할 수 있게 됐다지만. 개발 기간만큼은 최소 3~4년 이상, 길게 잡아야만 했다.
그렇게 공들여 준비한 신차가 실패한다면?
몇 년간 전사 임직원들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출시 초기에 성공한다 해도 뒷일이 문제였다.
경쟁사에서도 가격 할인이나 상품성을 개선한 MY(Model Year), 즉 연식 변경 모델, 그리고 디자인 변경과 성능 개선을 포함한 F/L(Face Lift) 모델 등으로 대응하기 때문에 방심을 할 수 없었다.
똑같이 연식 변경이나 페이스리프트를 준비하며 끝없이 경쟁해야 했고, 거기서 밀리면 출시 초기에 성공했던 차도 매출이 훅 빠질 수 있었다.
준성은 박종필 과장과 최근 인기 차종과 판매량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다.
그러면서 오랜만에 만난 어색함이 완전히 사라졌다.
“참, 현철이는 어떻게 지냅니까?”
김현철의 소식이 궁금하긴 했는데, 괜히 레노오성 쪽 사람들에게 연락했다가는 이쪽 근황이 노출될 수도 있어서 꾹 참고 있었다.
“아, 김현철 차장이요? 흐흐. 과장님이 나가실 때 제대로 밟아주셨잖아요? 그 이후에 진짜 우스운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말요?”
“네.”
김현철은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나서 권위가 땅에 떨어져 버렸다.
그 이후부터 김현철이 밑에 애들을 갈굴 때마다 다들 저항을 시작했다는 얘기였다.
“요즘엔 김 차장이 말도 안 되는 지시를 하면 사원들도 막 따지고 들고 그래요.”
“예전처럼 개지랄을 떨고 다니진 못하겠군요.”
“그렇죠. 과장님이 나가시면서 정말 큰 일을 해주신 겁니다.”
그렇게 무섭고 악독하고,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상대도, 권위와 이미지가 한 번 무너지니까 만만한 상대가 되어버렸다.
이래서 무슨 일이든 선구자가 중요한 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들이 받아볼걸...
왜 그 밑에서 구를 때는 그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생계에 묶인 몸과 틀 안에 갇혀 버린 사고는 그만큼 무서운 거였다.
“저도 이제 들어가 봐야겠네요.”
“네네, 그러셔야죠. 오랜만에 봬서 반가웠습니다.”
전 직장 동료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과장님. 오늘 저를 본 건 회사에 비밀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비밀요?”
“네, 연말에 동기 모임 나가서 깜짝 발표를 하려고 했거든요.”
“아, 그런 계획이 있으셨군요.”
“네, 김빠지지 않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예예, 그럼요. 알겠습니다.”
완벽하게 입을 막을 방법은 아니지만, 우선 임시방편으로라도 액션을 취해봐야 했다.
“대신 저도 이쪽 내부 소식을 알려드릴게요. 오늘 1차 면접 보신 거죠?”
“네.”
“만약에 1차 합격 통보 받으시면 바로 연락주십쇼. 그쪽 팀 내부 분위기랑 2차 면접관이 누군지,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정보를 모아보겠습니다.”
“진짜로요? 그렇게 해주실 수 있으세요?”
“네. 옛 동료 좋은 게 뭡니까? 서로 돕고 살아야죠.”
“아... 정말 감사합니다.”
침묵 요청에 당근까지 얹어줬다.
완벽하게 입을 봉인할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면 대응책을 마련할 최소한의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동안에, 완벽하게 지울 수 없는 과거사를 어떻게 커버해야할지 고민해봐야겠다.
* * *
“준성아, 연구소는 처음 가보는 거지?”
“네, 처음입니다.”
준성은 장재성과 함께 스프린터를 타고 화성시에 있는 남양연구소에 내려가게 됐다.
용인에 있는 레노오성자동차의 중앙연구소는 종종 가보긴 했었는데...
현도차의 남양연구소는 그 규모와 수준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거대한 곳이었다.
특히 100만 평이 넘는 부지중 60만 평 정도를 차지하는 프루빙 그라운드(Proving Ground), 즉 테스트 트랙이 이 연구소의 자랑이었다.
총 34개의 테스트 트랙, 71개의 국제 표준 노면과 4.5km 길이의 고속주행로를 보유한 연구소라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나중에 미국 출장 갈 일있으면 캘리포니아 PG도 가보자. 거기는 남양 PG보다 10배 크게 만들어놨다.”
“규모가 상상이 안 되네요.”
현도차는 2005년엔 LA 북쪽 모하비 사막에 약 530만 평 규모의 프루빙 그라운드를 만들었다.
“진짜 한 번 가볼 만해.”
LA에 있는 많은 테마파크들보다 더 재미있는 곳일 것 같았다.
“오늘은 연구개발본부장님하고 인사하고, 전동화센터장님이랑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상의 좀 하고 가자.”
“넵.”
본사에 전기자동차 본부가 생기면서 연구소에는 전동화 센터라는 카운터파트가 같이 만들어졌다.
전기차 개발을 전담할 연구소의 내부 조직이었다.
“다 왔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윤 부장이 도착을 알렸다.
남양연구소는 연구소답게 정문 게이트부터 보안을 위한 출입 절차가 까다로웠다.
외부인은 신분증, 내부 직원은 사원증을 제출하고 연구소 출입증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휴대폰 카메라에는 꼼꼼하게 보안 스티커를 붙였다.
제아무리 장재성이라고 해도 예외가 없었다.
다시 연구동 건물로 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연구동 건물 입구에서도 다시 한번 소지품 검사를 했다.
특히 각종 전자장비에 관한 확인이 까다로웠다.
레노오성 연구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역시 지켜야 할 기술이 더 많은 곳이라 그런지 차이가 크게 느껴졌다.
삼엄한 출입 절차를 거쳐 드디어 연구동으로 들어가 연구개발본부장실로 안내를 받았다.
“본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연구개발본부장 김문석 사장은 지적인 외모의 미남이었다.
뭔가 연구원 출신이라기보다는 언론인, 그것도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같은 느낌의 깔끔하고 세련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본부장님, 이쪽은 장준성 과장이라고 제가 데리고 일을 하는 친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장준성입니다.”
“반갑습니다. 과장님. 우리 장 본부장님 옆에서 많이 도와주십쇼.”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문석 본부장은 두 손으로 준성의 손을 맞잡고 토닥여주며 친절하게 맞이해줬다.
준성에 대해 어디까지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알람을 맞춘다는 걸 깜빡해서 늦었습니다.”
보통 체구에 뭔가 피곤에 찌든 얼굴과 복장에 헝클어진 머리.
안경을 쓰진 않았지만, 연구소에 파묻혀서 일만 할 것 같이 생긴 남자가 연구개발본부장실로 뛰어 들어왔다.
“왜 이렇게 만날 지각하세요?”
“쏘리, 쏘리. 미안합니다. 전기차 본부 파이팅!”
전동화센터장 허원준 전무는 장재성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혼자만 늦은 민망함을 날려버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장재성하고도 친분이 상당히 두터운 것 같았다.
준성도 옆에서 인사를 했더니,
“우리는 초면이니까 두 손으로.”
“엇. 옙.”
얼떨결에 양손으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딱 봐도 평소에 직원들과 스킨십을 자주 하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반가운 인사 이후엔 서로 가벼운 근황을 묻고 답하며 워밍업을 했다.
그러고 나서야 김문석 본부장이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사실 제가 진작에 이런 전기차 전문 개발 조직을 만들고 싶었는데, 그게 쉽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우리 장재성 본부장님이 나서주니까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버려서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김문석 본부장은 연구소 내에서도 전기자동차 조기 개발을 주장하는 인원이었다.
“그래도 본부장님이 노력하셔서 블루영 같은 모델을 만들 수 있지 않았습니까?”
허원준 센터장은 본인도 깊게 관여한 가장 최근의 전기차 프로젝트 이야기를 꺼냈다.
블루영은 민간 판매용은 아니었지만, 연구용 차가 아닌 최초의 양산 모델로서 관공서에 전량 납품했던 모델이었다.
“센터장님, 블루영을 만들 때 다들 정말 고생한 건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봤을 때, 그 차가 잘 만든 차라고 생각하십니까?”
“어......”
“2010년에 출시한 우리 블루영과 2008년에 출시한 테실라의 로드스터랑 비교해서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친분은 친분이고 질문은 질문이었다.
연구개발본부장과 전동화센터장 두 사람 모두 백만 볼트 전기에 감전된 듯한 표정이었다.
장재성은 연구소의 한복판에서, 그들이 만들어 낸 자식 같은 자동차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꿀꺽.
준성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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