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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스터가 살아있다면 희망은 있어

아넨티어 2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햄스터살려
작품등록일 :
2016.12.28 23:10
최근연재일 :
2021.01.19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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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3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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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쪽

아티하 8

2부의 주인공은 1부의 주인공들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DUMMY

우미하의 예상과 달리 아티하의 육체는 마취제를 금방 해독해버렸다. 아티하가 깼을 때는 그가 지저분한 독방 바닥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상태였다. 뻐근한 몸을 일으키며 어딘가 부러진 곳은 없나 점검하던 아티하는 곧 검이 없고 오로지 죄수복만 입고 있다는 사실에 혀를 찼다. 매수된 간수들인지 팔만으로 추정되는 청년을 끌고 가는 그림자가 멀어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감옥에 남아있던 빛도 모두 사라졌다. 질식하지 않을 정도로만 뚫린 감옥 벽 너머로는 밤하늘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에 아티하는 창살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애꾸눈의 건장한 중년 사내였다.


“바꿔치기로 얼마 받았나?”

“이런 일이 많은가 봅니다?”

“작업을 치는 놈들은 전부 여기 구 감옥 독방으로 데려오더군. 자네 자리에 있던 놈들도 벌써 다섯 번째 바뀌는 중일세.”


그렇게나 죄수 빼돌리기가 많을 줄 몰랐던 아티하는 곧 사내의 말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보를 믿을 수도, 정보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계속 떠들었다.


“하여튼 귀족 나으리들은 형편이 좋단 말이지. 항상 이맘쯤에 벌어지는 ‘공개처형’때 오히려 신분세탁을 하는 경우가 많단 말이야. 하여튼 프란텔 황제도 대단한 인물이야. 제국 귀족들에게 이런 식으로 빚을 지워놓으니 말이야.”


그 후로도 한참 떠들던 그는 아티하가 대답이 없자 재미없어졌는지 그만두었고 곧 다른 방향에서처럼 코 고는 소리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


다음날, 우미하의 이야기가 일부 사실이 되었다.


아침으로 준 개밥그릇에 담긴 죽은 생각보다 내용물이 알찼다. 프리하는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먹으려고 했었다. 밥그릇이 회수된 다음에, 간단한 점호가 있었고, 프리하의 감방의 변화를 아침에야 확인한 교대 간수는 그에게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 직후 멀리서부터 느낄 수 있는 백 명 이상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왔군.”


프리하에게 계속 말을 붙이려다 실패한 사내가 중얼거렸다.


곧 좁아터진 감옥의 복도에 상체만은 철갑으로 감싼 병사들이 창을 들고 들어와 각 감방 앞에 도열했다. 군기는 엄정하지만 솔직히 프리하가 보기에 병사들의 얼굴은 대개 애송이고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간수들은 병사들에게 장난치는 죄수들을 무자비하게 때려 눕혔지만, 여기저기서 돌발행동은 끊이지 않았다. 그 사이를 뚫고 마법으로 증폭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누군지 보이지도 않는다.


“자 지금부터 제군들은, 아니 너희 죄수놈들은 ‘공개처형’의 장소로 이동한다. 살면서 한번쯤은 들어봤겠지? 운이 좋다면 네 녀석들이 바깥에서 무슨 죄를 저질렀든 간에 한번은 용서가 될거다. 중간에 탈주를 시도하는 놈은 즉결처형이란 걸 꼭 기억하기 바란다. 그럼 출발!”


그 이상 ‘공개처형’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병사들이 우악스럽게 죄수들을 끌어내어 복도를 거의 달리다시피 빠져나왔다. 프리하 역시 자기보다 키가 작은 병사가 수갑을 내리누르며 끌고 가는 통에 허리를 불편하게 숙여야 했지만 조용히 따라갔다. 어떤 죄수들은 벌써부터 울부짖고, 거칠게 몸부림치며 저항하는 죄수들은 어김없이 간수들의 몽둥이찜질이 쏟아져 아예 바닥에 질질 끌려가기도 했다. 병사들은 우는 것까지 제지하진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비참하게 개처럼 시장바닥을 지나 성문 밖으로 나섰다. 성의 모든 도로에 수도 경비대는 물론 근위대 병력까지 나와서 죄수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중간에 정말로 탈주하려던 한 몸집 작은 사내는 골목으로 접어들기도 전에 살수들의 단검에 난자되어 살해당했다. 그 이후로는 최소한 프리하가 속한 죄수 호송 행렬에서는 누구도 도망치려 들지 않았다.


아티하가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자 뒤에도 앞에도 거리를 두고 다른 죄수 호송 행렬이 길게 늘어선 것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그가 속한 행렬이 상대적으로 병사들의 훈련도, 전투력이 떨어지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는 탈주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러한 정보는 단순히 다른 호송행렬에 기대할만한 실력자 또는 마인이 있을 거란 추측에만 사용되었다.


성에서 빠져나와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한지 두어 시간 지나자 모든 행렬이 서로 도보로 5분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나아가고 있어, 한눈에 둘러볼 수 있었다. 죄수의 숫자보다 군대가 열 배 이상 많았다. 날씨는 더럽게 뜨거웠다. 오랫동안 감옥에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거나 병에 걸린 이들이 쓰러졌다. 그들은 모두 병사들의 창에 무참히 살해당하고 맨 뒤에 따라오던 수레에 아무렇게나 쌓였다. 병사들도 지쳤기 때문에 잠시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죄수들에게는 물 한 모금도 주지 않았고, 병사들 역시 그늘도 없는 뜨거운 관도 위에서 휴식해야 했기에 짜증이 가득해서 죄수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프리하의 담당 병사는 키가 작은 바람에 빨리 걷느라 지쳐서 그에게 신경 쓸 기운도 없어 보였다.


이후로 2시간 행군, 10분 휴식을 몇 번이나 거듭했을까. 낙오되는 자들은 계속해서 늘어났고 마찬가지로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병사들 중 마음이 약해서 죄수들을 도와주려는 자들도 생겼으나, 말을 타고 행렬의 앞뒤를 순찰하는 기사들이 그런 모습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곧장 그런 병사들을 후방의 보급물자를 옮기는 부대로 옮겼다. 아티하의 뒤에서 따라오던 어린 애 한명도 결국 열사병에 걸렸는지 휘청이다가 결국 쓰러졌다. 전일 아티하가 보았던 것과 비슷한 검 몽둥이를 든 잔인하게 생긴 청년 하나가 다가오더니 병사에게 명령한다. 옷이 환경과 어울리지 않게 고급 비단옷이다. 그날 보았던 자들처럼 기세가 잘 갈무리된 느낌은 아니었다.


“치워라. 뒤로 가서 마차 끄는 걸 도와줘라.”

“조... 존명!”


병사는 무척 무서워하며 지금까지 애써 도와주던 아이를 거의 밀치듯 내버려 두고 달려가 버렸다. 아이는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면서도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다.


“나는, 나는 죄가 없어! 나는 그냥 끌려왔을 뿐이야! 으으! 우으으!”

“그딴 건 상관없다. 이 녀석이 피를 원하고 있구나!”


아티하는 초고밀도 마력의 회전을 느끼고 자신을 잡아끌고 있는 병사까지 잡아당겨서 얼른 물러났다. 잔인하게 생긴 청년의 검사로서의 급은 겨우 검기를 뿜어낼 정도였는데, 느껴지는 마력의 압축력, 출력은 완전히 본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몽둥이가 빛을 내며 금속 조각으로 흩어지고, 마력의 기류를 따라 맹렬히 회전하는 것을 아티하는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놈은 그것을 아이의 머리통에 내리쳤다. 요란한 소음도 없었다. 작게 푸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피와 살점, 뼈, 척수 할 것 없이 마구 갈려서 사방에 튀었다. 핏줄기 일부는 혈무가 되어 약간의 타는 냄새와 함께 공중으로 치솟았다.


“우웨에에에엑!”


잔인하게 생긴 청년은 토악질을 해대는 프리하의 담당 병사를 우습다는 듯 바라보고 앞으로 가버렸다. 어느새 다시 쇠몽둥이로 돌아온 그것은 방금 있던 일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처럼 살점과 피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그런 잔혹사를 만든 청년 본인의 옷은 하나도 더럽지 않은 것이 소름끼친다. 아티하는 바지와 신발에 뇌수 파편이 튀었고, 병사는 프리하 덕분에 오른쪽 소매에만 살점이 조금 튀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토하다가 자신의 옷깃에 박힌 ‘손톱’을 발견하고 다시 얼굴을 땅에 쳐박았다. 프리하는 코를 막고 애써 그 결과물을 외면해야만 했다.


“하아... 미 미안하오. 추태를 보였군...”

“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리겠군요. 저건 대체 뭡니까?”


프리하는 대화가 트인 김에 질문까지 했다. 병사는 눈치를 보더니 속삭이듯 이야기해주었다.


“저게 바로 우리 프란텔 제국의 자랑인 ‘분검’이오. 아카티에르 대공께서 군에도 그 정수를 알려주신 덕분에 검과 마력에 재능이 조금만 있는 자라면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된 무적의 병기라오.”


프리하는 이런 때조차 우미하가 괜히 자기에게만 노인 같다고 한 건 아닐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귀에 익은 단어 역시 놓치지 않았다.


“‘아카티에르’라면.”

“어휴 말을 조심하시오! 이번 공개처형 역시 그분이 참관하신다니 우리로선 마음이 놓이는 것이지. 당신이야 이제 그 지옥굴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고민이겠지만, 우린 우리대로 거기서 튀어나오는 괴수들에게 살해당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처지라오.”

“하긴 당신들은 마지막까지 우리를 붙잡고 있어야 하니까.”

“어쨌든 분검에 사람이 갈리는 건 익숙해지는 일은 아니지.”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는 끝났다. 그는 수갑에 사슬을 묶어 프리하가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게 배려해주었지만, 그뿐이었다. 늦은 점심때도 식사는 병사들에게만 제공되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행군은 끝이 났고, 병사들은 해당 지역에 이미 주둔하고 있던 병력이 구축한 막사에서 휴식을 취했다. 죄수들은 급조한 구덩이 감옥에 몰아 넣어졌고, 딱딱한 빵과 더러운 대야에 담긴 물이 제공되었다. 아티하는 배가 고팠지만 위치가 좋지 않아서, 어디선가 부스러져 날아온 빵조각 하나밖에 얻지 못했다. 물론 그것마저 받지 못한 죄수들이 수두룩했다. 몸싸움 와중에 여러명이 죽어나갔지만, 간수들은 탈출하는 놈이 없는가만 감시하고 시체도 치우지 않았다. 벌레와 오물 속에 끔찍한 밤이 흘러갔다.


-


다음날 일어나자 어둠 속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경관이 드러난다.


드넓은 평원에 막사와 그들이 갇힌 구덩이가 있었고, 2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주변 경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마치 지하에서부터 갑자기 솟아오른 것처럼 거대한 절벽과 분지가 그 동굴을 감싸고 있었다. 입구에선 아주 약간의 열기와 연기가 쏟아져나오고 있었는데, 아티하가 주목한 것은 그런 외형보다도 해당 지형 전체를 내리누르는 엄청난 마력압과 어떤 ‘마법’의 존재였다.

-



프리하는 누군가 깨워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 줄기 햇살이 동편 동산을 넘어 희미하게 비쳐왔을 뿐이다. 하지만 약간의 빛으로도 지형을 탐지하는 것, 눈이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다.


유황 냄새가 난다. 저 멀리 병사들이 시체 수레를 옮기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프리하의 인기척을 느끼고 깨는 자들이 몇 있다. 그는 간수도 죄수도 의식하지 않고 계속 주변을 관찰한다. 거대한 동굴 주변에는 군단급(최소 1만) 이상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저들 중 대다수는 프리하를 비롯한 죄수들이 잠을 자고 있을 때에 조용히 도착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주둔할만한 거대한 규모의 막사가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렌시아의 군대는 비록 휴식 중이긴 했지만 이미 전투 대형을 갖추고 있었으며, 동굴을 빠짐없이 포위하고 있다. 무장상태와 군대가 일으키는 살기를 보았을 때, 야전에서 구른 실전 경험이 넘치는 정예병이다.


프리하가 앉아서 자기 몸을 관조한 지 얼마 안되어 이쪽의 병사들도 일어나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먼저 밥을 든든히 먹고 똥통이나 다름없는 구덩이에서 뒹굴고 있는 죄수들에게 남은 음식을 마구 던져주었다. 그 양은 최소한 어제처럼 부족하진 않았다.


“모두가 먹어도 충분할 정도의 양식이다! 싸우지 말고 든든히 먹어둬라!”


프리하는 출발할 때 거대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공개처형’을 통보한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키가 작았고, 이렌시아 표준 경갑에 백인대장의 까마귀 깃털 표식을 어깨에 달고 있었는데, 실제로 지휘하는 병력은 비록 애송이들일지언정 오백이 넘어 보였다.


“싸우지 마! 저것들 떼어놔!”

“야 여기도 도와줘!”

“이 새끼들 빨리 죽고 싶은 거냐?”


병사들의 표정이 독해지기 시작했다. 지시에 따르지 않는 죄수들을 다시 죽여버리기 시작한다. 죄수들 일부는 이제 파멸이 다가왔다는 절망감에 오히려 거세게 반항한다. 여기와 비슷한 일이 다른 구덩이에서도 벌어지는지 사방에서 욕설과 고함이 들려온다. 행군할 때만 하더라도 더 소분했던 죄수들을 고작 네 개 정도의 구덩이에 몰아넣었으니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자명하다. 아티하는 그 와중에서도 가장 외따로 떨어져 이상하게 고요한 조그만 구덩이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거기선 별로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하지만 보이는 건 그뿐이다. 아티하는 어떤 의미든 후각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많은 이들에게 마지막 만찬이 될 식사가 끝나고, 그들은 이제 죄수 취급도 받지 못하고 칼과 창에 찔려가며 맹수들에게 몰이 당하는 초식동물처럼 동굴 방향으로 마구 뛰어갔다. 아티하는 이제 완전한 전투태세로 아예 선두 그룹에서 뛰며 밝아진 동굴 주변을 샅샅이 흩는다. 앞서 가져갔던 시체들이 어떤 마법사들에 의해 한 순간 세상에서 사라지며 막대한 마력을 ‘이끌어’온다. 그 마력의 냄새는 동굴에서 흘러나오는 것들만큼이나 역하다. 가까워질수록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던 마력압이 일순간 사라진다. 어떤 ‘경계’와 ‘마법’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모든 기능이 꺼진 상태다.


아티하와 죄수들은 그렇게 사방에 도열한 병사들이 내준 좁은 틈으로 마구 떠밀려 들어갔다. 뛰어가던 와중 올려다 본 동굴의 위쪽에는 우습게도 고급스러운 좌석들과 무대 그리고 음식과 술이 잔뜩 널려있다. 아직 다 차지 않은 좌석에는 귀족들이 평상복을 입고 앉아있었는데, 아티하는 잔뜩 배알이 꼴려서 지금이라도 저기 뛰어올라 저들을 모두 죽여버리면 어떨까 잠시 생각했다가 뒤에서 자꾸 미는 바람에 그 생각을 놓치고 계속 뛰어갔다.


절벽 위에 도열한 궁수들이 일제히 진형을 갖추고 연사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 보인다. 그들 중 아직 시위를 매기거나 활을 당긴 이는 아무도 없지만, 곡사도 아닌 직사로 아래쪽으로 쏠 준비로 보인다. 반대쪽 절벽에는 마법사들과 기병대가 비탈을 앞두고 도열 중이다. 결국 동굴 아래의 분지까지 떠밀려 온 아티하의 눈에는 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뒤에는 중갑으로 무장한 방패병이 일선으로 모자라는지 3선까지 장창병과 방진을 이루어 잔뜩 서 있다. 죄수들과 안쪽까지 들어온 건 이천 남짓한 병사들인데 병과가 통일되어있지 않았다. 그들 역시 표정이 잔뜩 썩어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 여기 선 것은 중징계거나 제비뽑기로 보였다.


시체들로 어떤 마법을 해제한 마법사들이 동굴 위쪽으로 모습을 보인다. 죄수들이 들어온 좁은 통로가 닫히기 전에 아티하가 수도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감옥 마차들이 여러대 들어왔다. 거기서 내린 죄수들은 온 몸에 구속구와 두건을 쓰고 있었다. 대충 봐도 마인들이거나 흉악한 범죄자가 분명했다. 그들은 구속구도 풀어주지 않고서 제일 선두로 밀어 넣어졌다. 그들은 생각보다 별다른 저항 없이 끌려와서 아티하의 앞쪽에 섰다.


“전 병력! 결계 밖으로 10보 후진!”

“십! 보! 후! 진!”


중갑병 수천이 일사불란하게 방패를 들어 올리고, 창을 세우고 물러나자 그 소리가 어마어마하다. 기세에 눌린 심약한 죄수들 일부는 주저앉거나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런 자들을 걷어차거나 면박을 주는 이들도 겁에 질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티하는 우미하가 많이 보고 싶어졌는데, 우연히 다시 동굴 위를 쳐다본 순간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아티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고, 손에는 틀림없이 아티하제검을 들고 있었다. 옆에는 좀 커보이는 비단옷을 입은 비실비실한 청년이 서 있었는데, 아티하와 바꿔치기 된 남자가 분명해 보였다. 그가 어떻게 벌써 여기 와 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아티하는 우미하와 마음속으로 눈을 맞추고 다시 정면을 바라본다. 유황 냄새와 또 말로 형용하지 못할 지독한 냄새가 점점 독해진다. 그는 발 밑도 보았다. 사람의 뼈가 드문드문 보인다. 조금 전까지는 마력압이 누르고 있던 지옥의 마력이 올라오는 것이 눈에도 보였다. 시각적으로 보일 정도로 유형화한 그것은 붉고, 불길하고, 냄새가 났다. 죄수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더 굳어간다. 아티하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전의를 다지는 강자들도 보인다. 하지만 아티하도 피할 수 없는 건 바로 부정적인 감정이였다.


처음으로 지옥의 일부를 마주한 느낌은 이러했다. 짜증이 치솟는다. 죽여버리고 싶다. 무엇을?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눈앞의 모든 것들이 미워진다. 그리고 그에겐 그런 속삭임이 들리지 않았지만, 심약한 자에겐 ‘마에 복종하라.’는 명령이 그 심령을 내리눌렀다.


허리에 있어야 할 검을 찾지만 검이 없다. 아티하는 인상을 잔뜩 찌뿌리며 더욱 짙어지는 냄새, 두통, 고조되는 부정적 감정을 모두 온전히 느끼고 관조한다.


“우린 다 죽을거야!”

“히이이이익!”


벌써부터 공포에 질린 자들이 주저앉거나 똥오줌을 지린다. 아직 그정도는 아닌데? 하면서도 아티하는 다시 주변을 흩는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물과 식량 그리고 기본적인 병사용 군장이 오른쪽에 있다. 뒤에선 ‘결계’ 경계 안쪽까지 들어온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그들을 사납게 쳐다보고 있다. 좌측엔 아무렇게나 쌓인 조잡한 무기들이 있다. 동굴의 안쪽에서 수많은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옥의 마력과 비슷한, 전반적으로 붉은 형태의 무언가였다. 형체가 불분명한 것도 있고, 지상의 무언가를 따라한 것도 있다. 아티하가 이곳에 와서 만난 괴수나 마족들과도 다르다. 근원을 찾아가면 같은 마족이지만 저들은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 또 지상에서 만날 수 있는 지성을 가진 마족들이 갖추지 못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아티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알 수 없었다.


놈들은 군대처럼 천천히 행진해서 다가왔는데, 당연히 군기와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어떤 명령에 의해 내리누르던 압력이 사라진 것을 알고 바깥으로 뛰쳐나왔을 뿐이다. 정말 온갖 형태가 있지만 대다수는 이족 보행의 기괴하게 생긴 마물들이다.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앞으로 가!”

“앞으로 가란 말이야!”


안쪽으로 들어온 병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마구 창을 찔러댄다. 앞에서는 사족보행하는 수백 이상의 마물들이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죄수들이 화나서 병사들을 보고 돌아선다. 병사들 역시 겁에 질리지만, 그들 역시 동료들의 창과 활에 조준되어 있다.


아티하는 마침 언덕 위에서 우미하가 비실비실한 청년에게 자기의 검을 건네주는 것을 보았고, 그 청년이 검을 집어던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원찮은 팔 힘 때문에 검은 동굴 입구 위쪽의 바위 턱 어딘가에 걸려서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아티하는 이 어이없는 상황을 자조하며 얼른 좌측에 있던 무기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가 행동하는 것과 비슷하게 숫자로는 삼천이 좀 못 되는 죄수들도 이 ‘공개처형’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이미 무기를 들고 병사들과 대치하는 죄수들도 있었고, 아는 놈들끼리 혹은 강자에 붙어서 무리를 짓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알고 있다. 이 프란텔 황제의 정예병을 뚫고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 최악의 순간에 동굴 위에서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일어서서 선언했다. 그의 목소리는 마법적인 처리를 거치지 않았음에도 그 시끌벅적한 분지의 온갖 반향을 뚫고 선명하게 내리꽂혔다.


“자 ‘공개처형’을 나 사이런의 이름으로 개최함을 선언한다! 볼만한 것을 보여주는 자들! 끝까지 살아남아 지옥문을 닫는 자들에게는 내가 황제의 이름으로 사면을 약속한다. 자 더럽고 추악한 죄인들아 가서 마족을 죽이고 뜯어먹어라! 으하하하하하하하!!!!”

“충! 충! 충!”


병사들이 발을 구르며 충을 연호한다. 아티하는 그런 건 모두 상관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우미하를 바라보며 그는 어떤 두려움도 없이 전방에 나섰다. 남의 뒤로 숨으려는 자들이 대부분이지만, 아티하처럼 이 상황에 맞서는 이들도 꽤 있었다. 어떤 사연으로 죄인이 되어, 이곳에 이렇게 모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막무가내 행군을 뚫고 여기 서 있는 것만 하더라도 보통의 병사들보다는 강건한 자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죄수 중에는 군인 출신이 분명한 자들도 보였는데,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한 장년 사내는 창과 방패로 무장한 몇을 데리고 아티하의 옆에 섰다. 최소한 그는 이 자리에서 저 밀려오는 마귀들을 모두 죽이지 않고서는 다른 꼼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네놈들 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온 놈들인지는 몰라도, 지금 협력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내 지시에 따르면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는 것만 알려주지.”

“어이 영감! 당신만 군 생활 한 것 같아? 내쪽으로 붙으면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더 쉬울 거라고?”


그렇게 신경전을 벌이는 무리들까지 벌써 생겨났다. 병사들과 대치하던 무리들 역시 오른쪽에 있던 물과 식량 그리고 군장을 챙겨서 가장 안전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쓴다. 아까부터 계속 사람들의 폭력성을 가속시키고, 두통을 일으키는 지옥의 마력이 이미 성공적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사람들은 사람들의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짓밟으면서 그렇게 끝까지 자리싸움을 했다. 개 또는 하이에나처럼 보이는, 그러나 머리통은 부정형으로 일그러져 눈이 몇인지, 어디 달려있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마물들 1선이 밀려왔다.


“충돌 대비!”

“앞에서 흘리면 전부 썰어버려!”

“네놈들 뒤처지지 말아라!”

“뭉쳐! 흩어지지 말고 뭉쳐!”

“똑바로 들어! 죽고 싶어 환장했어?”


명령이 제각각이지만 모두 생존만을 생각한다. 전투의 고양감이 몸을 감싸면서, 아티하의 두통이 약해지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을 갈고 갈고 또 갈았다. 날카롭게 검형을 세운다.


제 1진 충돌.


“시바아아아아알!”


아티하는 아무도 모르는 한국어 욕부터 쏟아냈다. 베어낸 순간 그 틈을 다른 놈이 메우고 그저 부딪혀온다. 놈들은 기형적인 이빨이 달린 주둥이를 아무렇게나 내밀며 사방을 씹어댔다. 검으로 찢고 베고 마구 휘둘러 놈들을 마구 해체하지만, 놈들은 그저 빈 자리를 메꾸고 마구 물어뜯고 밀어낸다. 아티하는 왼손으로 한 놈의 머리통을 잡아채 땅에 패대기쳐서 척추를 비롯한 전신을 으깨버렸다. 다시 한 놈의 목덜미를 잡아채서 크게 횡으로 휘둘러보지만, 놈들은 거기에 맞아 날아가면서도 끈덕지게 몸을 낮추고 곧 아티하의 가슴팍으로 돌진해왔다. 더욱 정신없이 검을 내지른다, 찍는다. 검술은 의미가 없고 그저 빠르게 휘둘러 사방을 찢어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소용없이 놈들이 금세 간격을 0으로 만들고 진형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나마 아예 원형 진을 이루거나, 제대로 1자로 진을 이룬 무리들은 좀 나았다. 어떻게든 후방이나 중간에서 숨으려던 자들도 이미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사방에서 날뛰는 이 개자식들과 하나가 되어 싸우고 있었다.


“이... 개새끼들!!”


아티하만 욕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한국어욕은 너무나 찰지고 이질적이어서 이런 혼전 속에서도 쳐다보는 자들이 있다. 아티하의 팔과 다리는 이미 수많은 찰과상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결국 마력을 신체 보호에도 사용한다. 구속구를 풀어준 적도 없는데, 어느새 두건까지 벗어 던진 마인들이 맨 손으로 마물들을 찢고 분쇄한다. 놈들의 마안은 아티하의 적색보다 더 어둡고 불길한 또는 광기가 스며들어 색이 섞이거나 동공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얼룩빛을 내뿜고 있었다. 웃기게도 아티하가 싸우는 모습이나 그들이 싸우는 모습은 육체의 모든 기능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했다. 중범죄자 중에는 마인이 아닌 이들도 있다. 살수들은 어딘가 장애를 가진 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럼에도 일반인들보다 월등하게 빠른 속도와 몸놀림으로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분투했다. 아티하는 누구보다 저들이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완성된 살수들이 살수 교육을 받아봤자 뭘 하지?


아티하에게 계속 말을 걸던 중년 사내는 거대한 양손검을 들고 호쾌하게 놈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아티하가 아무리 검을 크게 휘둘러도 한 번에 베이는 숫자는 최대 넷에 불과했는데, 저렇게 혼자 서서 자리를 점하고 쓸어버리자 그 풍압과 기세 때문에 두려움을 모르는 마물들이라 하더라도 그의 간격을 뚫고 물어뜯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이 살육한 마물들의 시체는 곧 지독한 악취와 함께 불타듯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것도 아니었다면 그들은 이미 시체의 산에 쌓여서 방벽을 만들었거나, 그 시체의 산에 파묻혔으리라. 아티하는 그 연기에 가능한 노출되지 않으려 애쓰며 군인들과 협력하는 형태로 밀려오는 마물들을 계속 찢어발겼다. 예상보다 마력 소모량이 많다. 그는 마안을 조정해서 마력 수급을 최대한으로 유지했지만, 이 빌어먹을 공간 자체가 마력이 희박하다. 지옥의 마력은 끈적거리며 순수한 공기중의 마력을 오염시키고 붙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티하의 조상의 동료 중에는 이러한 지옥의 마력을 사용하는 용사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와서는 전설로만 남은 이야기일 뿐이다. 오히려 그 마력을 들어마쉬고 취하거나 중독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을 뿐이다. 자신의 고간을 물어뜯으려 하는 놈을 밟로 마구 짓밟은 아티하는 쎄한 느낌이 들어 뒤쪽을 슬쩍 둘러보았다.


“?!”


안쪽에 밀어 넣어진 병사들이 고통이 가득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거품을 물고 있다. 마물들은 죄수들의 전선을 넘어 그들도 물어뜯고 있는 중이었는데, 병사들은 산채로 뜯기면서도 눈을 까뒤집고 일제히 경련하거나 간헐적으로 몸을 뒤틀고 있었다. 그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궁대, 일제 발사! 폭풍처럼 쏟아부어라!”


그걸 아티하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신경을 분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설사 그 작은 소리가 들렸다 하더라도 누구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촉에 무려 궁기가 담기거나, 마법 처리가 된 강살, 장살이 직사로 아래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은 일선에서 마물들을 썰어내는 죄수들이 아닌, 뒤쪽의 병사들과 전투를 끝까지 회피하고 있는 자들을 정조준하고 있다. 위쪽에서 귀족들과 관람객들이 환호하며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미하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 위치다.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한지 5초 정도가 지나서야 살아남은 죄수들이 울부짖으며 앞으로 달려왔다. 한눈을 팔던 아티하는 갑자기 목덜미가 서늘한 느낌에 뒤로 몸을 튕기며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왼쪽 팔뚝이 뜨끔한 것과 동시에 검 끝에 무언가가 걸린다. 낫처럼 생긴 두 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4m 높이의 괴수가 어느새 아티하의 팔뚝을 베어내다가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물러나고 있었다.


“뭐야 이 X새끼는?”


아티하는 팔의 상처를 돌볼 틈도 없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놈은 아티하의 ‘검술’을 능수능란하게 받아내더니 길다란 다리로 튀어 올라 뒤쪽으로 물러났다. 메뚜기같은 도약력이고, 그 밑에 깔린 마물들은 즉사한 것 같다.


“어딜 도망가?”


그는 여전히 달려드는 ‘개새끼’들을 마구 쳐내며 놈을 쫒아가려고 했지만, 어느새 이족보행하는 고블린과 비슷한 놈들이 조잡한 병장기를 들고 몰려와 있었다. 이 2선의 구성은 훨씬 다양해서, 인간의 키와 비슷하지만 중량은 조금 부족해 보이는 기괴한 마물들도 섞여 있었다. 아티하는 급한 마음에 2선이 밀려오기 전에 검을 수직으로 세우고 마검격을 떠올린다.


어깨를 뒤로 하고 앞으로 쏘아내는


“이브티카엘 – 라티넨!”


즉발기, 마력을 모으고 형태를 다듬고 할 새도 없이 뇌전으로 이루어진 작은 구체가 펑 하며 튀어나간다.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부딪히는 모든 것을 관통하고 찢어버리며 번개로 지져버린 그것은 금세 소멸되어 칼날발 메뚜기(?)에게 닿지 못했다. 아티하는 놈이 멀리서 자신을 보고 칼날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빡쳐서 발을 동동 굴렀지만, 급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놈은 금세 아티하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2진, 1선 충돌.



이미 주변에는 온갖 기술이 난무하고 있다. 마검 없이 배우거나 입문하기 어렵다는 그것도 전격계 마검격을 쏘아낸 것 역시 그렇게까지 시선을 끌 일은 아니지만, 몇 사람의 주의를 끈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보다, 별로 익숙하지 않은 것을 갑자기 써버린 덕분에 치밀어오른 구토감과 왼팔의 상처가 문제였다. 그는 ‘개새끼’들이 여전히 공간을 가득 채운 흐름과 더불어 무기를 던지고 휘둘러오는 이족 보행형 마물들을 마구 썰어내면서도, 옆의 죄수들과 보조를 맞추어 전선을 유지해 나갔다. 왼팔은 깊게 베인 것은 아니었지만, 벌써 피부가 썩어가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아까보다 두통이 심해진 듯한 느낌이 든다.


“지옥에서 온 마귀들 중에는 인세에 없는 독을 가진 놈들도 있네! 팔을 잘라내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한 군인(?)이 조언이랍시고 말을 던져주지만 아티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마물들을 크게 쳐냈다. 방금의 마검격이 이 조잡한 검에는 무리였는지, 내구도가 한계였다. 구토감은 금세 사라졌다. 체내의 마력은 아직 충분했다. 마물들이 움직임을 멈춘 아티하에게 다시 달라붙었다. 마력을 거세게 뿜어내어 놈들을 털어내고 찢어버린 아티하는 얼른 뒤에서 군장 하나와 무기 몇 개를 더 집어왔다. 다시 전선에 돌입하기 전 검에서 모든 것을 밝히는 이슈타리엔의 별빛을 담은 불꽃을 약하게 내뿜어 팔에 가져다댄다. 다행히 불꽃은 약간의 통증만 남기고 괴사하던 피부를 정확하게 도려내어 정화시켰다. 그는 다른 방법이 생각이 나지 않아서 이슈타리엔의 별빛을 끌어다 썼지만, 지구에서보다 훨씬 강력한 출력에 흑화가 어딘가 저편에 있다는 것이 생각나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뒤편에서는 궁대가 주기적으로 활을 일제사격해서 점점 죄수들을 앞쪽으로 밀어내기를 반복했다. 위인지 뒤에서는 아까 ‘결계’를 해제할 때 느껴졌던 흐름과 반대의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지만 확인할 길은 요원했다. 마력회복과 효율에 치중한 마안의 조정 기능은 설사 탐색과 전투, 마법 분석 특화로 조정했다 하더라도 아직은 이와 같은 복잡한 마법을 이해할 정도의 수준은 되지 못했다. 빽빽이 바닥에 꽂힌 화살 때문에 이제 뒤로 걸어나가기도 어려워졌다.


2진, 2선 충돌.


아티하가 돌아왔을 때, 저 멀리 거대한 형체가 보인다. 그것은 마치 지독하게 비만인 오크를 30배정도 확대한 끔찍한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조잡한 갑옷까지 갖춘 그것은 붉은 색 피부에서 독기를, 머리의 뿔에서는 흑염을, 콧김에서는 지옥의 불꽃을 뿜어내고 있었다.


“발록!”


누군가 외쳤다. 아티하는 저것이 결코 발록같은 이름 있는(?) 마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별 다른 딴지는 걸지 않았다. 지금까지 벌써 일만에 육박하는 소형 마물들을 썰어낸 죄수들은 다시금 절망에 빠져들었다. 놈이 나타나면서 두통과 구역질, 감정의 기복이 더 심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그 옆으로 아티하의 팔을 베어낸 것과 비슷한 높이의 마물들도 모습을 드러냈는데, 형태는 모두 달랐지만 무기를 들고 있는 개체보다는, 몸이 무기이고 기동력이 엄청나다는 공통점이 있어보였다.


“정신 차려! 정신만 차리면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다! 어차피 저것도 우리가 죽일 수 있는 놈이야!”


근거는 없지만 그런 걸 외치는 무리의 장도 있다. 선택지는 없었지만. 개중에는 이제 전투를 피해서 아예 마굴의 수많은 통로 중 하나로 뛰어드는 무리들도 상당수 있었다. 저것도 전략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 마물 군단이 가장 큰 통로로 쏟아져나오긴 했지만, 결국 그 통로 옆에는 또 다른 마굴의 통로들이 가득 있었고, 개중에는 마물들이 이용하지 않는 것도 분명 있었다. 마굴은 결국 가장 최심부에 있는 ‘지옥문’을 유지시키는 마법 또는 마력의 원천을 부수면 붕괴되므로, 자칫 무모해보이는 저 돌입이 오히려 마물들로부터 몸을 숨기는 기회의 장이 될 가능성도 충분했다. 실제로 지옥도 아니고 현계도 아닌 마굴에서는 마물들의 감지능력이 훨씬 떨어진다는 사실도 그러했다. 아티하는 몰랐지만, 이것은 실제로 그동안 펼쳐진 공개처형에서 자주 성공했던 전략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티하를 비롯한 몇몇은 어차피 저 주력 마물들을 다 쓰러뜨리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는 뒤에 대기한 군단의 토벌을 받아 죽는 확정된 미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방금도 광오하게 외쳤던 사이런 황제(아티하는 아넨에게 이야기만 들었던 그를 처음 보았다)가 이런 정예군을 가지고서도 마굴을 토벌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죄수들이 살아남지 못해도 아쉬울 것은 당연히 없는 상황이다.


3진, 접전.


중대형 마물들이 날뛰고 이제는 거의 다 소모된 소형 마물들이 여전히 공간 확보를 방해한다. 사상자가 늘어나고 싸우던 이들도 체력의 저하를 느낀다. 아티하 역시 남은 마력이 반도 안되는 것을 느끼며 새삼 자신이 가진 전투 지속력에 회의감을 가진다. 아티하가 그 정도니 어중이떠중이들은 더하다.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러 어떻게든 살아남은 자들 대부분은 탈진하기 직전이고, 마물들에게 물어뜯기기 전에 이미 정신이 붕괴되어 옆의 죄수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는 자들도 생겨났다. 그 모든 것이 아티하에겐 무의미하다. 다만 뒤가 완전히 비어버린다는 것은 전술적으로 불리하다. 뒤로 흘린 마물 극소수가 화살에 꿰뚫리거나 병사들의 방진 근처까지 가서 죽어 재가 되었다지만, 그들이 계속해서 도와줄 가능성은 낮았다.


초고도 비만 오크가 동굴의 저편에서 해가 비치는 곳까지 접근했을 때,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은 이제 백 이하로 줄어있었다. 그 때 갑자기 아티하의 뒤통수를 간질이던 마력의 흐름이 가속했다.


“모두 대비해!”


뭘 대비하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까부터 지옥불보다 뜨거운 불로 마귀들을 태워버리던 정신나간 마법사가 외쳤다. 아티하가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엄청난 중력과 마력압이 그들을 덮친다. 그것에 견디지 못한 이들은 곧장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동굴 전체가 울리며 상대적으로 약한 입구 쪽에서 바위와 모래 무더기가 쏟아진다. 마법사와 살수들은 이 중력장 속에서도 비교적 멀쩡한 것처럼 보였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힘들어하고 있다. 마물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특히 초고도 비만 오크(??)는 한쪽 무릎을 꿇고 거친 숨결을 내뱉고 있다. 뒤쪽에서 난 쨍강 소리에 아티하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는데, 곧 웃지도 못하고 화내지도 못하는 표정이 되어버렸다. 아까 세이브리드의 청년이 잘못 던진 자신의 아티하제검이 검집은 어디 팔아먹고 혼자 바위에 꽂혀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얼른 뛰어가 (다행히 화살 세례가 쏟아지진 않았다) 검을 집어 들고서야 몸 전체에 현재 추가된 중력만큼의 부양력을 부여한다. 뒤를 향한 그의 시선에 그동안 쌓인 인간들의 시체, 병사들의 시체가 또 다시 사라지면서 마법을 위한 촉매와 재료로 소비되어가는 것이 보인다.


저것은, 이 마귀들이 죽어서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는 것과 얼마나 비슷한가.


또 이럴 땐, 자신이 완성되었다는 자만이 얼마나 멍청한 어리석음인지 잠깐씩 깨닫는다.


생각, 사고, 개념을 현실에 반영하고 현실을 변혁하는 마법을 마력만으로 전개하는 것은 최소한 그 현상을 이해하고 어떤 마력의 흐름과 배열이 필요한지 설계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마법사들은 비교적 간단하고 본능적으로 하는 것이지만, 그 외 마력을 사용하는 자들은 잡기라 생각해서 폭넓게 배우지 않는다. 아티하는 지구의 지식까지 더하여 물리현상의 원리에 대해서 이세계 사람들보다 이해도가 훨씬 높고 마력의 가변성까지 뛰어났지만, 마검술의 일환으로 녹여내어 현실에 투영하는 능력은 아직 부족했다. 그것은 그의 상상력 부족이기도 했고, 함부로 닫아버린 기억과 무리한 영안전개로 아직까지 손상된 영혼의 영향이기도 했다.


지금 중력에 거스르는 힘은 어디까지나 가장 간단한 ‘정반대 벡터를 향한 마력의 물리력 생성’이다. 효율이 그렇게까지 좋진 않다. 아티하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다면 더욱 간단하고도 고차원적인 개념으로 ‘외부 물리력 배제’ 또는 ‘중력 고정’까지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럼 마력의 효율과 전체 멀티태스킹에 들어가는 뇌의 연산, 마력의 운용 여력도 충분했을 것이고. 지금은 검이 상당부분의 연산 – 엄밀히 말하면 아티하제검이 하는 것은 ‘신비화’에 불과했고, 또 말도 안되는 대단한 것이기도 했지만 –을 분담하는 상태였다.


중력마법이 가져온 유리함도 있었다. 아까 엄청난 기동성을 보여주던 칼날메뚜기들은 더 이상 뛰어올라 덤벼오지 않았고, 초비오크(...)의 주변에 몰려들어 남은 죄수들을 포위했다. 놈들은 바깥의 인간 대군이 어떻게 반응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공포도 느끼지 않고 승산도 점치지 않고 전투에 임한다는 것은 너무나 무시무시한 일이다. 놈들의 숫자도 이제 2천 정도에 불과했다. 남은 자들에게는 여전히 너무 많았지만.


“이제 다들 슬슬 꺼내보는 게 어때?”

“동감. 저 거대마수를 처리하는 것에 있어서는 필요.”

“후우, 정말 한심한 것이에요.”


마법사는 두건을 쓰고 있어서(마지막에 마차로 호송된 자가 아니었음에도) 아까 고함을 질렀을때도 성별을 알기 어려웠는데 이번엔 명확하게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모습을 감춘 살수 외에는 유일한 여자가 분명했다. 물론 이 지옥 같은 곳에선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지진 못했다. 각자 감추어두거나 아껴둔 비기, 절기, 어쨌든 그것을 무엇으로 부르든간에 최강의 한 수를 꺼내자는 제안에 대부분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아티하 역시 저 초비오크를 처리함에 있어선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적극 동감하는 바였다.


“큰놈을 처리할 조를 따로 나누는 것이 좋겠군. 이후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말이지.”

“약점을 아는 사람 있습니까?”


아티하가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흑염’이 이글거리는 기형적인 뿔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 시선은 결코 곱진 않다.


“하아... 그럼 정석적으로 머리통을 노려보죠.”

“자네 아까같은 마검격 가능한가? 그 무엇이냐, 키티 아티하같은 거 말일세.”


참 질긴 사람이다. 아직까지도 잘 버티고 있는 중년 사내가 피칠갑이 된 모습으로 아티하에게 묻는다. 아티하는 이번만큼은 대답해주기로 했다.


“그거 마검격 아닙니다. 창으로 쓰는 거에요. 그리고 너무 느려서 목 따는 데는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저런 거체를 통째로 베어내는 건 창방 장로나 가능할거구요.”

“하 그런가. 아까 그 ‘이브티카엘’ 오졌는데.”


아티하는 자기보다 더 저속한 말투에 뭐라 더 대답할 생각도 없었다. 살수 중 한명이 아티하쪽을 바라보며 말을 꺼낸다. 중력마법이 가져온 잠깐의 소강상태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소년이 가진 검술의 순간 파괴력은 우리 중 가장 나을 겁니다. 목 전체가 견적이 안 나오면 뒷목이라도 갈라보죠.”

“기회라도 만들어 줄 것처럼 이야기하네요.”

“나 혼자서는 어렵겠지만.”


살수는 거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물러섰다. 사태를 관망하며 잠시 쉬던 마인들도 불길한 마안을 빛내며 그들의 옆에 섰다. 협력하겠다는 무언의 의사표현이다. 죽더라도 그들과 얽히긴 싫었던 사람들도 거절은 하지 않았다. 마인들은 세계의 공적이다. 그들 상당수는 지금 죄수들이 싸우고 있는 이 지옥의 마력을 통해 강함과 광기를 동시에 가진 자들이다. 마인들이 얽힌 범죄는 너무나 끔찍해서 범죄사실을 글로 서술한 것을 보면 그것만으로도 욕지기가 치솟을 정도다. 만약 여기 있는 자들이 그런 자들이라면 애초부터 협력의 가능성은 닫혀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마귀들의 하수인이고, 지옥의 마력 속에서 한없이 강해지면서 금세 마귀로 변해버리니까. 여기 남은 자들은 지옥이 아닌 오롯이 인간의 지식으로부터 파생한 마공을 익히거나, 기존의 섭리에서 무언가를 비틀어 사도로 강함을 쌓아온 자들이다. 그것만으로도 풀리지 않는 비틀린 마안을 평생 떠안고 살아가게 된 괴물들이란 점은 마찬가지다.


“크아아아아아! 쿠뤠뤠레레레엑! 꾸이익!”


초비오크(...)는 굽힌 무릎을 훌쩍 펴며 일어나더니 팔을 드높게 들어올리며 괴성을 질렀다. 놈이 허리춤에서 뭘로 만든지도 알기 어려운 조잡한 거대 박도가 빠져나왔다. 지금까지 천천히 걸어온 것이 이 순간을 위해서기라도 했는지 엄청난 속도로 쇄도한다. 놈의 돌진에 죄수들의 진형도, 무리의 결속도 한 순간에 파훼되었다. 조잡하고 단순한 횡베기 한 번에 엄청난 풍압과 함께 인간 십수명이 그대로 갈려나갔다. 칼날 괴물들이 그동안 ‘눈여겨 본’ 고수들에게 달라붙는다. 아티하 역시 분명 아까 자신의 팔을 베었던 놈을 포함해 세 마물에 포위된다. 놈들은 기계적으로 팔과 다리를 휘둘렀고, 아티하는 물러서지 않고 베어오는 칼날을 후려쳐 튕겨낸다.


은신과 고속 이동으로 공간을 잘 활용한 살수들은 협력해서 남은 마물들을 하나씩 무력화시키고 해체했다. 사실상 그들만이 초비오크(!)의 시선을 잡아 끌며 견제중이었다. 초비오크의 움직임이 엄청나게 빠른 건 아니었지만, 거체에서 나오는 막대한 공간 점유와 열기 때문에 접근전 자체가 성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티하를 비롯한 상당수는 그동안 베어온 마물들의 마기가 놈에게 일부 축적되었다는 사실도 파악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놈의 시선을 받거나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머리 한쪽을 잠식하고, 두통이 심해진다.


“으랴아! 으랴 으랴!!!”


아티하는 혼자 신나서(?) 칼날을 더욱 빠른 속도로 받아쳐서 검막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마물들은 그의 검이 이상할 정도로 자신들의 강고한 칼날을 쉽게 깎아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놈들의 사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놈들을 움직이는 ‘의지’는 단순히 인간들의 힘을 소모시키는 것에 만족했고, 더 세부적인 제어나 자율 행동을 명령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아티하는 이상하게도 그걸 더러운 기분과 함께 알 수 있었다.


“여유 있으면 얼른 우리도 도와달라고! 다 죽게 생겼어!”


중년 사내 역시 별로 어렵지 않게 마물 넷을 한꺼번에 상대하면서 아티하에게 외친다. 그는 아까처럼 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대검술에 의지하지 않고 빠르게 지면을 달리고 미끄러지며 내리칠 때 내리치고, 적의 동선을 꼬이게 하며 날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에휴 아저씨나 잘하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음 순간 마력을 아끼지 않고 순환 속도를 끌어올린다. 적색 마안, 검의 기능을 최대로 끌어올린다. 지금까지 아껴두고 있던 검기가 역시 시뻘건 빛으로 검신을 물들인다. 검사가 검기 끝에 중첩되어 절삭력을 극대화하고 언제든 쏘아져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한다. 폭발적으로 가속한 아티하가 포위를 벗어나 처음 자신에게 한 칼 먹인 놈의 뒤통수(라고 할만한 것이 있었지만 실제로 사고를 관장하는 중추인지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로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몸을 돌리며 비스듬히 내리치는 호쾌한 회전 베기. 풀려나온 검사가 검신이 가르는 방향으로 방사형으로 나풀거리며 앞에 있는 것을 지면째로 난자해서 양단한다. 아티하가 있던 곳에 헛칼질을 날린 나머지 셋도 곧 이어진 쾌검에 난자되어 한 줌 재로 스러졌다.


초비오크는 그 사이에도 이미 겁에 질린 죄수들을 짓밟고, 내리쳐 으깬 육편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특수 무장으로 전투력을 극대화시키는 살수들이라 그런지 그들은 말 그대로 시선을 분산시키는 수준의 견제밖에는 못 하고 있다. 그들이 가진 무기조차 날카로움이 부족해서 한 칼 먹이는 것도 수월하지 않아 보였다. 그들이 딱 봐도 좋아 보이는 검을 가진 아티하에게 기대하는 것도 당연하다. 아티하 외에 자신에게 맞는 무기를 조달한 건 중년 사내와 마법사 그리고 군인 넷 정도가 전부였는데, 이곳을 이탈해 마굴로 잠입하는 길을 택한 자들 중에 지원을 받은 자들이 많았던 것을 아티하는 기억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실력이 있음에도 초비오크(흠)를 피해 도망친 자들이다.


기세를 몰아 초비오크에게 달려든다. 놈은 달려드는 아티하를 정확히 인식하고 대검을 다시 낮게 쓸어왔다. 아티하는 피하지 않고 진각을 깊게 밟으며 검을 내리쳐 받아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대로 튕겨져 날아갔다.


“이봐!”


달라붙던 칼날 마물들을 떨어내고 합류한 중년 사내가 아티하 대신 초비오크와 자웅을 겨루기 시작했다. 그의 마안도 흑갈색으로 열리고, 대검과 대검이 충돌하며 충격파를 뿌려댄다.


입에 고인 피를 퉤 뱉으며 다시 달려드는 아티하지만 내상을 입은 건 아니었다. 그냥 볼을 잘못 씹었을 뿐이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초비오크를 상대하는 모양이 갖추어지고, 나머지는 멀찍이서 달려드는 마물들을 최대한 쳐내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아티하는 몇 번이고 초비오크의 몸 위를 점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대검과 뭉툭한 팔이 휘둘러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대로면 마력만 소모합니다. 틈 좀 만들어봐요!”

“나도 힘 싸움은 이게 한계라네!”

“집중해!”


지옥에서 불어오는 먼지, 계속되는 충격과 풍압에 일어나는 흙먼지. 호흡마다 목이 깔깔하게 오염된 흙가루가 씹힌다. 아티하는 초비오크를 처리하기 전에 남은 인간들이 전부 물량에 밀려 죽을 것 같아서 승부수를 보기로 했다.


“하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최대한 맞춰줘요. 갑니다!”


체내의 마력 순환속도 최대, 마력압 최대, 영안 전개 직전까지 몸을 몰아붙인다. 마안에 암기가 담긴다. 검신에도 검붉은 검기가 일렁인다. 존재하는 상태만으로 앞의 공기는 물론이고 흐름과 마력도 끊어버리는 이질감이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처럼 그러나 소름끼치게 이빨을 드러냈다. 이번에야말로 내상이 도지며 피(대체 이 피는 어디서 올라오는 것일까 새삼 역함을 내리누르며 생각하는 프리하였다)를 억지로 삼킨다.


“너무... 빨라!?”


은隱의 묘리를 담은 것에 비해 광폭한 기세로 가속해서 놈의 머리 위로 몸을 타고 뛰어오른다. 발이 뜨겁다. 가까워지는 뿔의 흑염은 솔직히 아티하도 무섭다. ‘이화물질’상태의 이상현상은 지금의 아티하로선 닿았을 때 영 좋지 않은 휴우증이 남을 정도로 강력하고 기괴한 힘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모두 생각하진 않는다. 현재에 집중한다. 집중한다.


‘참수.’


검신이 부드럽게, 정직한 궤도로 전신을 사용한 당겨베기의 선으로 수렴한다. 불꽃처럼 뜨거운, 실제로 옷에 구멍을 내놓을 정도로 뜨겁게 타고 있는 피가 튀어오른다. 아티하는 다리와 팔에 피가 튐에도 눈도 깜박하지 않고 공격에 때려 넣은 마력을 유지한다. 척추처럼 보이는 것을 베어 목이 순간적으로 덜렁거리는 것을 똑똑이 보았지만, 동시에 놈이 완전에 가까울 정도로 멀쩡하다는 것을 느낀다. 고개를 휘저어 뿔로 아티하를 받으려는 순간, 마법사가 내리친 지팡이의 궤적과 함께 천장에서 바위가 떨어져 아티하의 바로 앞을 내리친다. 올라탄 아티하마저 휘청이는 때에 살수들이 나타나 놈의 손발을 창과 검으로 바닥에 꽂아버렸다.


“크롸라라라!”


초비오크의 울부짖음에 살수 둘이 몸이 굳어있다가 칼날 마물에게 참혹하게 찢겨나갔다. 고개를 들려는 초비오크의 머리통을 중년 사내가 내리쳐 다시 순간을 벌어준다. 아티하의 마안이 불타오른다. 그는 양 다리를 아예 갈라진 목 단면에 집어넣어 몸을 고정시키고 검을 양손으로 역수로 쥔다. 칼날 괴물들이 그런 아티하를 잡으러 거체 위로 뛰어오르지만 마법사가 늦지 않게 그들을 폭발로 다시 추락시킨다.


“좆같은 새끼가, 씨이발, 좆같이 구네 진짜!”


검신에는 검염이 얽혀 마구 일렁거린다. 그걸 흑염이 일렁이는 뿔 바로 밑에 쑤셔넣은 아티하는 한손은 주먹을 쥐어 검병을 마구 내리쳤다.


“죽어!”


놈이 손을 뽑아내어 아티하를 잡으려고 마구 목 뒤를 더듬었지만, 자신의 뿔에 막혀 오히려 고통스러워하며 움츠러든다.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모습이다. 그 와중에도 아티하는 몸을 바싹 붙여 잡히는 걸 피하면서 머리통이 놈의 손가락에 스쳐 띵한 걸 견디면서도 검신으로 마구 안쪽을 휘저었다.


“뒈져!!!”


주먹 망치 한 번에 몸이 계속 휘청인다. 놈은 결국 다리에 꽂힌 검과 창도 쳐내고 마구 뛰다가 결국 땅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크롸라라라!”

“뒈지라고 씨발!!!”


독기 가득한 눈으로 아티하가 손에 마구 물집이 잡히고 털이 타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발과 손의 위치를 바꾸어 발로 검을 걷어찼다. 쾅 쾅. 광분해서 몸을 비틀던 놈이 다시 정자세로 일어난 한 순간 아티하는 다시 몸을 돌려 검신을 두 손으로 쥔다.


“발 카리엘 아티하!!!!”


그의 상태로 아티하급 마검격이 없습니다만, 있었습니다 라고 해야할까. 아티하의 의지를 정확히 읽어낸 검과 그의 육체가 ‘진동’과 ‘분열’의 이념을 마력을 마구 뽑아내어 세계에 구현했다. 검신이 마구 떨리더니 다음 순간 초비오크의 머리통 위쪽이 샴페인 터지듯 흑염과 시뻘건 용암과도 같은 뇌수를 뿜어내며 터져나갔다. 아티하는 그 와중에도 피를 막 뱉으며 거의 굴러떨어지듯이 바닥에 착지하는데 성공했다. 놀랍게도 마력은 아직 반의 반 정도 남아있었고, 내상도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거체가 동굴을 울리며 쓰러지자 바깥에서 보던 군인들조차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오 해냈군!”


중년사내가 감탄하는 그 순간 남아있던 마인 다섯이 갑자기 남은 죄수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무방비하게 머리가 뽑혀서 먼저 절명했고, 살수들도 몸의 천형을 공략당해 살해당했다. 중년 사내는 여력이 있던 터라 마인의 주먹을 잘 막아냈지만 역시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역시 예상은 했던 모양이다. 놈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마물들을 상대하던 군인 무리와 범단 무리를 공격해 몇을 죽이더니 마굴쪽으로 금세 사라져버렸다.


“저 개새끼들은 내가 꼭 죽인다.”


아티하가 씹어뱉듯 말하며 다가온 마물들을 아무렇게나 썰어댔다.


작가의말

욕을 너무 막 해서 죄송합니다.


근데 주인공 입장에서는 진짜 악에 받힌 상태입니다.


초반부터 계속 주인공의 상태는 약간 ‘모호’한데 그것은 제가 정립을 못한 탓도 있지만, 실제로 그것이 ‘아티하가 스스로를 아는 정도’이자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개연성을 잡아먹는 불확실성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깽판물이 안되려고 하지만 깽판물로 이행할 수 있다는 불안감? 이군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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