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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스터가 살아있다면 희망은 있어

아넨티어 2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햄스터살려
작품등록일 :
2016.12.28 23:10
최근연재일 :
2021.01.19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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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4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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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아티하 7

2부의 주인공은 1부의 주인공들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DUMMY

다음날 프리하를 보고 적당한 공원 벤치에 앉은 우미하의 첫 질문은 이거였다.


“흐히힛... 아티하씨는 뭐하는 사람이에요?”


조금 어이없는 듯한 웃음. 나중에 생각해보면 아찔한 일이었지만 당시의 프리하는 아직 어렸고 경험이 일천했다. 물론 그 질문은 시비조라기보다는 정말 궁금해서 나온 질문에 가까웠다고 생각을 하고 있지만. 약속대로 점심 좀 지나서 나온 그녀는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더없이 잘 어울리면서 튀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한 점이었다. 장신구는 손에 든 작은 지갑(?)이 전부였다. 물론 무척 예뻤다 프리하의 눈엔. 그런 프리하는 용병처럼 활동적인 멜빵 달린 전투복 바지에 질긴 천으로 된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게 그가 가진 옷 중 가장 좋은 옷이긴 했지만 일상복처럼 보이진 않았다. 말을 많이 할 필요도 없는 그런 복장이다.


그 질문에 프리하의 대답 역시 이상했다.


“저는 이슈...아니 그냥, 검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오.”

“하하 그게 뭐에요.”


두 사람은 이후로는 다행히도 일상적인 대화로 넘어갔다. 프리하는 곧 그녀가 ‘세이브리드 백작가’의 장녀이고 세이브리드 가문은 제국에서 이렌시아령에 파견한 총독 가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자기보다 한 살 많은 17살이란 것과 ‘라 이벤 롤리아’에서 임시로 총관 대행을 맡은 것은 그 사업을 자신의 고모가 하고 있어서 잠시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씩 노인 같은 말투를 교정받은 프리하가 물었다.


“이렌시아에서는 이런 험한 일에 보통 자기 친척을 일하게 합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아티하님은 제국에서 오셨으니 이곳의 문화는 어색할지도 모르겠어요. 아 물론 저도 제국에서 오랫동안 살다 왔어요.”


그녀에게 자세히 이야기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제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을 삼키고 대화를 이어나가던 두 사람은 자연스레 자리를 옮겨 식사를 함께 했다. 프리하가 사실상 맹탕(?)이였기 때문에 식당은 우미하가 골랐다. 그녀는 처음 빼고는 별다른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지만, 프리하의 어리숙한 모습에도 이 데이트, 아니 이 시간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눈이 계속 반짝였기 때문이다.


“이렌시아에는 어떤 일로 왔어요? 사실 요즘이 좋은 시기는 아니잖아요.”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왔습니다. 칼밥 먹는 사람이 기회를 잡기 좋은 곳이니까요.”


하지만 프리하는 왜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우미하를 속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말했다.


“뭐, 실은 나는 이곳에서 신분이 불명확한 사람입니다. 군대나 기사단에서 공을 세우면 어디든 한자리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우미하는 가끔 수심이 달라지는 듯한 물빛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아티하’님은 귀족이 아니셨던가요?”

“아니오. 아 조금 애매하군.”


그녀 역시 조금 망설이는 듯 보인다. 이 남자를 더 깊이 알아도 될지,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정보를 읽어낼 것인지.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한 눈빛이었지만, 그 역시 프리하의 눈썰미에나 잡힐 정도로 미세한 흔들림이었다.


“아티하의 성을 쓰면서 본인이 귀족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워요.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거에요. 가문과 안 좋은 일이 있으셨던 거에요, 아니면 저에게만 그 이름을 알려주신 건가요?”


둘 다 어느 정도는 맞았기 때문에 프리하는 놀랐지만, 어쨌든 그는 솔직하게 답했다.


“가명을 쓰고 있긴 합니다. 친척들도 내가 여기 있는 줄 모릅니다.”

“그럼 앞으로도 제대로 가명을 쓰는 게 좋을 거에요. 이렌시아에서는 특히 더요. 여기는 제국의 귀족들에게 반감과 동시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거든요. 어제 두 청년 앞에서 본명을 담으신 건 좋은 선택은 아니셨어요.”

“그건 생각하지도 못했네요.”

“후우.”


우미하는 잠시 그를 좀 더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렇게 솔직하면 손해를 본다구요. 아티하님은 알기 어려운 분이네요.”

“음, 솔직히 말하면 우미하님도 그렇소.”

“저요?”

“뭐랄까, 물어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나 할까...” “아티하님만큼은 아닐걸요? 좋아요 우리 조금 더 솔직해져봐요. 정말 내게 우연히 접근한 거 맞아요?”


아티하는 이번만큼은 즉답할 수 있었다.


“물론입니다. 그대를 본 순간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지.”


우미하는 약간 얼굴을 붉혔지만 곧 미소짓는다.


“모르긴 몰라도 거짓말은 못하는 성격인 것 같네요. 말하지 않는 건 있지만 굳이 숨긴다는 느낌도 받지 못했어요.”

“본인을 앞에 두고 그렇게 평가해도 되는 건가요...?”

“아티하님이니까요.”


프리하는 자신도 모르게 수긍해버렸다. 우미하는 조금 전보다는 자주 웃었고. 두 사람은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가벼운 이야기를 곁들여 저녁을 같이했다. 그새 ‘아티하님’에서 프리하로 바뀐 관계에서, 우미하는 프리하가 ‘아씨’라고 부르는 걸 무척 재밌어했다.


“괜찮다면 저희 집에 한 번 오시지 않겠어요?”

“우리는 초면에 가까운 사이인데 그래도 됩니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런 데서 하기는 어려운 대화기도 하네요. 그런데 프리하는 왜 새로운 신분이 필요한 건가요?”


우미하는 어디까지나 아티하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전의 것들을 버리고 왔다고만 여기고 있었다.


“이곳 사회에서 주류로 발돋음하려면 당연히 필요한 절차겠지요? 이쪽 사정에는 어두워서 지금도 헤매고 있지만 우미하...가 도와준 덕분에 길을 찾은 것 같네요.”

“아니요, 아티하님의 실력을 본 적은 없지만 ‘그런 좋은 검’을 가진 분이라면 권세와 금력을 얻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궁금한 것은, 대답해주실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왜 하필 여기죠?”


이번에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하필 균열을 타고 떨어진 곳이 이 근처라서? 그는 왜 아티하의 장자로서 모든 징표와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고향’ 발리마르로 돌아가지 않는가.


“전공을 세우고 싶으셨다면 서남 요정왕국과의 광대역 국경 분쟁도 사람은 많이 필요한 반면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고 들었어요. 남동부의 사막귀나 서북 5주의 전쟁은 제국도 손을 떼고 있다고 하니까 지금 가도 원했던 성과는 얻기 어렵겠죠. 하지만 ‘아티하’가 굳이 아넨트리아 전선에 지원하겠다는 건.”


아티하의 마음이 출렁인다. 검으로 두드려진 마음이, 피로 담금질한 혼이 비틀어진다. 망치로 얼어붙은 검신을 두들긴다. 너무 단단하지만 검신이 속에서부터 비틀어진다. 비틀어진다. 비틀어진다.


“물론 저는 세간에서 이야기하듯 이슈타리엔 클레어리(여자 사람의 극 존칭. 현대에 와서는 ‘여신’정도로 번역해도 무방할 정도다.)가 아넨트리아를 배신했다는 거짓말은 믿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까지도 제국의 아티하 가문은 사라진 장자가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아넨트리아를 존중해서 그 전쟁에 손을 담그고 있지 않아요. 검방도 마찬가지로 제국 동부의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요. 그게 어쩌면 지금 이렌시아를 나쁜 방향으로 치닫게 만들었을지도 모르지만요. 프리하의 사정이 어떻든간에 이 전쟁에 참여하면 분명 후회할 일이 생길거라 생각해요.”

“당신이 뭘 아는데!”


흥분했던 아티하는, 눈이 붉게 번들거렸다. 우미하는 흠칫하는 얼굴이지만 엉덩이를 떼진 않았다. 눈이 마찬가지로 수려한 빛으로 물든다. 그 루트리아 공주와 비슷하지만 어딘가 더 멀고 먼 바다의 기억이다. 아티하는 자신이 일어섰는지,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뒤늦게 인식하고 천천히 앉았다. 동공이 마구 흔들린다.


“...괜찮아요?”

“...”


잠시 끙끙거리던 아티하는 곧 피로와 원망이 가득한 검은 눈으로 돌아와 우미하를 보았다.


“우미하님은 왜 그렇게까지 내 일에 신경을 쓰는 것입니까?”


아티하는 다음에 이어진 말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남자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웃지 않는 얼굴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막 쏘아붙이듯 말이 쏟아져나온다.


“그럼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세이브리드 가 영애가 진심을 담아 상담을 해주고 있는 줄 알았어요? 사람들이 다 프리하처럼 단순하진 않다구요. 그리고 나도 당신의 순수함 덕분에 순수하게 당신을 대할 수 있었는데, 그런 나를 그렇게 대하면 안된다구요. 대체 누가 처음 데이트에 금방이라도 싸울 듯한 복장을 하고 와요!? 그냥 처음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해도 충분한데 무거운 이야기만 먼저 꺼낸 건 프리하였잖아요. 설마 내가 그렇게 유도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나름 신경써서 이야기해준 국제 정세인데 왜 화를 내요? 당신도 궁금해한 정보 맞잖아요! 그리고 당신 말이야, 내가 창관에서 일하고 있다고 계속 그렇게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거 무척 기분 나쁜거 알아요? 그날 왔던 변태 새끼들이랑 다를 게 정말 하나도 없어! 아 정말 남자들이란!”


당황, 당황한 아티하는 얼른 돈을 내고 그녀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녀의 마안은 겉으로 눈에 띄진 않았지만 감정이 격해졌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직 안끝났다.


“물론, 물론 그런 이야기가 재미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 나한테 관심 있다면서 정작 나에 대해서는 왜 묻지 않아요? 이럴 거면 괜히 시간을 낸 것 같아요. 나는 실수를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이번만큼은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니 잠깐 세이브리드 양...”

“그 노인네같은 말투좀 이제 쫌! 그만 두라구요. 알았어요?!”

“어... 네 네. 그럴게요.”

“그리고 그런식으로 여자에게 화내지도 말구요. 꼭 그래야만 했어요?!”

“네에, 제가 잘못했습니다...”


프리하는 당면한 감정에 의해 방금전까지 잊었던 일을 모두 잊어버릴 뻔 했다. 감정을 추스른 우미하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더니 – 두 손도 작았지만 거의 한손으로 가려지는 얼굴도 엄청 작았다 – 한숨을 푹 쉬고 한순간에 전의 우미하로 돌아왔다.


“진짜 믿기지 않네요. 내가 이렇게 감정적인 인간이라니.”

“...”

“오늘은 이만 헤어져요. 프리하만 괜찮다면 모레 저희 집에 찾아오지 않겠어요? 점심을 대접할테니까요.”


이 설레임도, 잠깐의 반짝임도, 첫 여자친구도 모두 글렀구나 자책하고 있던 프리하는 눈에 생기가 들어오면서도 의아한 듯 묻는다.


“우미하... 화난 거 아니었어요?”

“아니요. 나도,”


그녀는 딴 곳을 바라보며


“당신이 내게 다가온 순간, 싫지 않았으니까. 이런 끌림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역시 나의 ‘피’니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굳어있다. 프리하는 우미하 역시 자신처럼 비틀려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알겠어요. 반드시 갈게요. 가서 내가 오늘 왜 이랬는지 설명하고 싶어요.”

“그래요 나도 듣고 싶네요. 그럼 안녕.”

“아아...”


그녀는 미소인지 슬픔인지 모를 표정으로 그를 일별하고 가버렸다.


-


프리하는 복잡한 심정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우미하의 말은 한 군데도 틀린 데가 없다.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계속 꺼냈기 때문에 그녀는 그저 그 요망에 어울려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서 해 준 이야기였다. 그녀가 비록 그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미루어 짐작할 뿐인 부분도 있었지만, 그 때문에 자신의 비틀린 마음에 직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티하가 바로 그 부분을 사과하고 해명했더라면, 우미하의 감정은 물론 그 자신도 달라질 수 있었을 텐데. 그는 하필 지금 혼자였다.


“그래, 나는, 이슈타리엔님이 나를 버렸기 때문에, 소윤형이 나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오해를 정당화한다. 자신의 비틀림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오류를 합리화한다.


종래에는, 자신을 부정하고 남탓을 한다.


“크흐흐흐 그래 두 사람의 잘못이야. 아넨트리아 따위 알게 뭐야. 두 사람이 거기 있어도 상관 없어. 본인들 일이나 하라 그러지? 이제 나와는 상관 없어. 아넨 공주는...”


그는 잠깐이지만, 자신에게 진심으로 대했던 그녀를 생각했지만.


“볼 일도 없겠지. 그따위로 자신을 혹사하다간 금세 요절할텐데.”


그럼으로 오로지 반항심과 비틀린 증오와 자기부정으로 이루어진 결과는


“전장에서 보자구요. 두 사람 모두 날 버리고 간 일을 후회하게 해 줄테니.”


어리석음 뿐이다.


“우미하도 너무했어. 그렇게 화낼 필요까진 없었잖아. 그 녀석들하고 도매급취급한 건 좀 심했어.”


반성도 없었다.


-


다음날 밤, 프리하는 ‘라 이벤 롤리아’를 다시 찾아갈 수 밖에 없었다. 우미하가 자기 집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행동이었는데, 왜냐면 우미하는 분명히 ‘세이브리드 가문’이라고 자신의 집을 찾을 방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정작 우미하는 근무시간이 아니기도 했다.


“세이브리드 아가씨는 어제 당직이라 오늘은 비번입니다.”


오히려 마중 나온 총관이 프리하를 극진하게 대접하는 바람에 차까지 얻어 마시고 왔다. 그는 도대체 아티하의 어디가 그렇게 귀인처럼 보이는지 탐색하는 모양이었지만, 당연히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약속한 날과 시간이 되어 좀 멀쩡하게 입고 간 프리하. 문을 두드리자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그를 안내했다. 세이브리드 백작가의 이렌시아 총독 관저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왕궁 그러니까 지금 황궁의 일면과 얼굴을 맞대고 있어 시야가 탁 트인 정원을 자랑했다. 우미하는 그곳에서 물고기 노니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아티하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오오.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말 해도 생기는 건 없어요?”


그녀는 지체없이 자리를 권했고, 차와 다과를 준비한 하인들이 돌아가자 복잡한 표정으로 프리하를 보았다.


“역시 이런 건 이상해요. 당신이 미워보여야 정상일텐데, 이상하게 그럴 수가 없단 말야.”

“아하하...”


그녀는 색조가 없는 편한 복장이다. 처음 볼 때부터 느꼈지만 우미하는 누구보다 귀족적이지만 동시에 필요하다면 모든 격의를 벗어던질 줄 안다. 그런 것보다는, 프리하 눈에 그녀는 오늘도 눈부시게 예뻤다.


“일단 먼저 그 날의 무례는 사과하겠습니다. 소리 질러 미안합니다.”

“사과는 받아들이겠어요. 나도 프리하님에게 민감한 이야기를 함부로 꺼낸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반성하고 있었어요.”

“아닙니다.”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멈추었다. 프리하는 무안해서 차를 들이키다가 입 천장을 살짝 데었다. 우미하는 그의 눈을 바라보더니 물어보았다.


“혹시 ‘매혹의 마안’같은 거 가지고 있어요?”

“내 마안은 전투 특화입니다. 초장거리를 탐색한다던가 보이지 않는 걸 본다던가 하는 기능은 살려낼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법 같은 힘은 없습니다.”

“믿겠어요. 오늘 프리하님을 초청한 것은.”


그녀는 화려한 인장이 두 개나 찍힌 어떤 공문의 복사본(당연히 a4용지는 아녔고, 마법처리가 된 한지 비슷한 종이였다.)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이렌시아의 귀족들이나 쓰는 옛 제국어였기 때문에 아티하가 읽기는 쉬웠다.


“읽어보세요. 내용은, 프리하님이 관심있을 것 같아서 준비했어요.”


공문의 내용 자체는 간단했다. 이렌시아 제일의, 살수부대 ‘실렌 시흐’에서 이렌시아 전역의 죄수들, 흉악범들을 잡아 마굴에 몰아넣고 ‘공개처형’을 통해 살아남은 세 명만 특채로 뽑아 모든 범죄기록을 말소하고 새로운 신분으로 교육생으로 모집한다는 내용이다. 범죄자의 경우 이렌시아 바깥에서 죄를 짓고 온 국제적인 범죄자도 있기 때문에 제국 황제의 승인까지 필요했던 모양이다. 시흐 졸업생은 이후 제국의 ‘살문’ 교육 위탁생으로 내정되어 원한다면 제국민이 될 수 있는 기회까지 주겠다는 추가 조항이 달려 있었다. ‘공개처형’중에는 물론 이후 살수 교육생이 되어서도 특정 가문의 후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마지막 추가조항이 달려있다.


“이것은?!”

“아직 젊은 나이 - 저도 그렇지만요 – 인 프리하님이 이런 복마전에 발을 들여놓기는 꺼려질 거라는 생각도 했고, 살수가 되는 것에는 자존심까지 상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원래는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래도 ‘연고를 알 수 없는’ 프리하님에게는 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보는 거에요.”

“이런 공문은 대체 어디서 받아보는 겁니까?”

“지금은 허울뿐인 자리긴 하지만 아버지가 이렌시아령 총독이라니까요? 내 얘기 들은 거 맞아요?”

“물론 알고 있지만 그거와 이거는 이야기가 다른.”


우미하는 말을 끊으며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말하자면 우리 가문은 제국에서 이렌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심어놓은 보이는 정보원예요. 사이런 황제도 저희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유념하고 있죠.” “어쨌든.”


프리하는 고개를 깊이 숙인다.


“고맙습니다. 내가 이 ‘공개처형’에 참가하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조건은 두가지에요. 기존에 ‘공개처형’에 참가하기로 되어있던 내 사람 대신 감옥에 들어가줘요. 그리고 최소한 ‘공개처형’기간 동안에는 우리 가문의 후원을 받아 싸워주세요.”

“물론 그렇게 하지. 우미하 아씨의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전에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마굴이 뭔지는 알죠?”


마굴, 지저의 마귀들이 지상으로 쏟아져나오는 또 한 종류의 ‘균열’이다. 지구와의 시공 균열이 아직도 해명되지 않은 세계의 오류에서 발생한다면, 이 마굴을 생성하는 ‘지옥문’은 악마들의 유일한 목적 – 모든 세계의 거주민들의 말살 – 에 의해, 그들의 지옥 마법에 기인한다. 대개의 것은 제국이 압도적인 무력을 동원하며 가장 주요한 제국의 적으로 규정하여 토벌하지만, 제국 바깥의 것들은 일부러 각국의 군비를 견제하는 목적에서 손대지 않는다. 실제로 마굴이 발생해서 수많은 민간인 피해를 입은 지역조차 제국의 손을 빌리기 싫어서 – 제국의 군대를 자국 영토에 들여놓기 싫어서 – 최소한의 방어선만 갖추고 방치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그곳은 그야말로 복마전, 사람이 제대로 숨쉬기도 어렵고, 끝없이 마귀들이 쏟아져나오는 죽음과 저주의 공간이다.


“물론 압니다. 가본 적은 없지만.”

“내가 프리하님을 아직도 미워하고 있었다면 이런 제안같은 것도 하지 않았을 거에요. 비록 나와 당신 사이에 있었던 사귐은 짧았지만, 나는 당신의 마안도 보았고 마음 깊숙이 숨어있는 상처와 비틀림도 보았어요. 그래요, 나는 당신을-”


프리하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제지했다. 머리가 아팠다.


“나는... 내가 제일 잘 압니다.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죠.”

“...”


우미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래서 내가 구해야 할 사람은?”

“그는 우리 가문의 향사(견습 기사 내지는 기사 후보생)에요. 핏줄로 따지면 내 사촌 오빠기도 하네요. 이름은 팔만 에스크로 세이브리드에요.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되었는데 이번에 아버지가 손을 써서 ‘공개처형’까지 끌고 왔어요. 대신 들어갈 사람을 찾고 있었죠.”


프리하가 묻지 않았지만 우미하는 그가 묻지 않은 것까지 이야기해준다.


“물론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에요. 우리 가문에는 남자가 귀해서 아버지는 어떻게든 조카를 구해내고 싶어하셨기에 저도 고모의 일을 돕는 겸 라 이벤 롤리아에서도 실력 있는 무인을 물색하고 있었죠. 내가 프리하님을 이 일에 끌어들이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프리하님이 화를 내면서 마안을 노출해버렸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된 거였군요... 하긴 이 나이에 마안을 지니고 검기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긴 하죠.”

“‘드문 일’이라 표현하셨지만 천재라고 생각해도 된다고 봐요. 프리하가 가진 검도 그러한 생각에 일조를 했지요.”


우미하는 그리고 프리하를 다시 그 정직한 눈으로 바라본다.


“정말 괜찮겠어요? 프리하만 원한다면 이 제안은 없던 걸로 할게요. 그럼 우린 그저, 한번 만나서 식사했을 뿐인 사이로 돌아가는 거에요.”


프리하는 그때서야 잠시 고민했지만 곧 그녀의 눈을 마주 바라보며 답했다.


“당신을 계속 보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일을 하겠습니다.”


그게 너무 날것의 진심이라서 우미하는 처음으로 시선을 피하며 처음으로 부끄러움을 드러냈다. 수습은 언제나 금방이지만.


“당신에게 끌렸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였어요. 하지만 중간부터는 분명 당신을 이용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는데, 내게 환멸을 느끼지 않나요?”

“나는 처음부터 진심이었고, 아씨를, 아씨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된 것으로 충분합니다. 앞으로 더 알아갈 수 있다면 더욱 좋다고 생각해서 말한 것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 당신을 속이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있소.”

“또 어르신 말투로 돌아가진 말구요.”

“아... 쉽지는 않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어쨌든 우미하...는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을 선물해준 겁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하아. 왜 이렇게 답답한 느낌이 들죠? 뭔가 못된 짓을 하는 느낌이란 말이에요. 아버지도 분명 당신 실력은 검증해봤냐고 물어보실 텐데, 나 역시도 확신이 들지 않는 일을 먼저 결정하고 추진하는 이런 경험은 처음이에요.”

“믿어달라는 이야기밖에 못하겠군요. 그리고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내가 죽어도 아씨나 아씨의 가문에 손해는 없지 않습니까?”

“범죄기록의 말소 혜택을 적용하기 위해선 끝까지 살아남아 주는 것이 좋죠.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나는 당신이 죽는 걸 원치 않아요.”


우미하가 시선을 돌리고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조금 귀여웠다.


“아 맞아요. 보상으로 바라는 것이 있나요?”


프리하는 음흉한 생각을 떠올렸지만 우미하가 바로 알아차리고 째려보자 어쩔 줄 모르다가 눈치를 보고 이야기했다.


“내가 살아서 돌아오면 그때부턴 정식으로 교제해주지 않겠습니까?”

“하아...”


우미하는 한숨을 크게 쉬긴 했지만 기분 나쁘진 않다는 미소로 수긍해주었다.


“요즘 누가 그렇게 고백을 해요? 여자 경험이 없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프리하님은 너무 대놓고 밝히는 느낌이 든단 말예요.”


-


준비를 위해서 프리하는 자신이 묵던 숙소에 가서 짐을 정리해서 다시 세이브리드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때서야 얼마 전 보았던 죄수호송부대가 생각났다. 그 죄수들은 모두 ‘공개처형’을 위해 사방에서 이송한 죄수들일 것이다.


여행가방 하나 분량도 안되는 짐을 가지고 돌아온 프리하를 보고 우미하는 대뜸 이상한 걸 물어보았다.


“그러고보니, 프리하님의 이름은 어떤 뜻이에요? 너무 고어라서 저는 독해하기가 어렵네요.”

“프리...는 우미하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국에서 잘 알려진 언어가 아니니까요. 우미하의 ‘-하’도 ‘에위미르’(요정어-만월, 우미하의 이름은 사실 의미나 어감을 생각할 때 ‘보름이’ 정도가 된다)의 제국어 변형 명사화 접미사 아닙니까?”

“네 맞아요. 흔한 이름이죠.”

“그래서 ‘자유’라는 뜻입니다. 아일리흐는 알고 있나요?”

“흐름? 그 정도로만 알고 있어요.”

“네. 흐르는 강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발리마르에 실제로 있는 강의 이름이기도 하죠. 아버지가 언젠가는 고향에.”


아티하는 잠시 눈을 찌뿌리고 입을 다물었지만 곧 우미하에게는 펴진 표정을 보여주었다.


“가게 될 일이 있으면 중간 이름은 다시 지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군요. 대답해주셔서 고마워요.”

“별 것도 아닌걸요.”


이윽고 두 사람은 작전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한다.


“이제 프리하는 죄수 신분이니까 무기는 가지고 갈 수 없어요. 하지만 ‘공개처형’이 시작되면 우리 쪽에서 무기를 전달할 방법이 있을 거에요. 어떤 무기를 준비해주길 원하나요? 마검이라도 원한다면 준비해줄게요.”


아티하는 자신의 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미련 없이 허리춤에서 풀어서 내놓았다.


“이거면 됩니다.” “물론 우리가 맡아주겠지만, 이 한자루로 괜찮겠어요?”

“그 검은 절대 부러지지 않습니다. 아니 절대라는 건 상대적인 것이지만, 그게 내가 쥘 수 있는 최강의 검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좋아요. 내가 잘 맡아둘게요.”


그 이후로도 두 사람은 여러 가지를 의논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야 할 내용에 이르렀다.


“...사용할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라지만요. 혹시 프리하가 죽는다면 남길 유언이 있나요?”

“유언...”


그 순간만큼은 아티하도 마음이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지금 어떤 곳에 가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는 자신이 정말 감정에 휘둘려 성급한 결정을 한 것은 아닌지 마지막으로 숙소를 떠나기 전에 두통을 감수하며 ‘기억’까지 끌어다 썼던 것이다. 사실 완성형 아티하 장자들이 마귀를 마구 썰어내는 모습밖에 없어서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나 역시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만 부탁하지요.”


그랬다. 그 순간만큼은 그의 비틀림 아래 바닥에 남은 선함과 그리움이 살아났다.


“아넨트리아의 ‘우르’에게 이 검과 함께, 죄송했었다고 전해주시길 부탁합니다.”

“‘우르’? 그걸로 제가 전달 할 수 있는 분일까요?”

“만약 아씨가 아넨트리아 왕실에 끈이 닿는다면 그쪽으로 전해주셔도 무방합니다.”

“뭐 그렇다면야 알겠어요.”


우미하도 더 묻지 않았다. 이윽고 밤이 되었다.


“오늘은 근무하러 나가지 않나요?”

“제 원래 목적이 이루어졌으니 이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나가려구요. 그리고 당신을 배웅하지 않을 순 없잖아요.”

“하하...”

“이 약을 마시면 기절할거에요. 팔만 오라버니가 수감된 감옥은 다행히 보안 등급이 무척 낮은 편에 속해요. 죄수들을 전부 수도로 끌어 모으다보니까 수용시설도 포화상태인 모양이더라구요. 공개처형은 지금부터 3일 후, 프리하님이 정신이 들고 나서 하루만 감옥에서 견디면 되어요. 간수는 우리가 매수했으니까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아요.”

“알겠습니다.”

“보러 가겠지만, 부디 밖에서 다시 보아요. 무운을!”


프리하에겐 놀랍게도 우미하는 걱정하는 표정으로 그의 이마에 입맞추어 주었다. 자기가 그러고도 조금 무안한 표정이지만. 프리하는 그녀가 더 부끄러워하기 전에 잔을 들이켰다. 기절하는 기분도 느끼지 못하고 프리하 아일리흐 아티하는 의자에 앉은 채 잠들었다.


작가의말

우미하 세이브리드를 뒷세계의 인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후 이 두 사람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세이브리드 자신은 불행해집니다. 그것이 인과관계가 있든 없든간에 말입니다.


오래전에 이름을 지은 인물들인데 어감이 왜색이 좀 섞인 것 같지만 별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세이브리드는 ‘트로이 신화’에 트로이의 여신관으로 나오는 브리세이드의 변주에 불과합니다만, 그 속성은 빌려오려 노력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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