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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스터가 살아있다면 희망은 있어

아넨티어 2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햄스터살려
작품등록일 :
2016.12.28 23:10
최근연재일 :
2021.01.19 02:0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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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1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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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아티하 6

2부의 주인공은 1부의 주인공들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DUMMY

그렇게 금세 한 달여가 흘렀다. 이리저리 흘러다니는 동안 아티하 역시 조금은 더 이렌시아와 이세계의 문물에 익숙해졌다. 말이 통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운도 나쁘지 않아 수도로 가는 상단들과 동행하며 만난 사건 사고도 없었다. 무엇보다 젊다는 것이 사람들의 호의를 얻기 쉽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아직은 낮이 더운 가을의 초입이 되었다.


일단 목적하던 이렌시아 수도에 들어왔지만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생각 이상으로 개방적인 성문의 분위기 덕분에 상단에 섞여서 들어오는 것은 간단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신분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탈주 노예 – 반쯤은 맞았지만 – 취급받거나 불법 체류자가 되어 이 사회의 주류에는 눈길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렌시아가 공격적인 영토 확장 정책을 펼치고 있어서 비교적 무장으로서 사회의 주류에 편입하기가 쉽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일단 어떤 신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신분이 불명확한 인간이 실력이 좋다는 이유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건 요원한 일이다. ‘허세’로 가진 신분은 국가의 감시 아래서는 쓸모가 없다. 더구나 프리하는 아예 아무런 연고도 없다.


일단 대로변에 있는 적당한 규모의 여관에 방을 잡은 그는 가능한 오랜 시간을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들을 돌아다니며 무작정 탐문을 시작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일주일, 그는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았고, 제대로 된 공용어를 사용하는 이는 드물었다. 다만 곧 수도 근방에 주둔하던 1군단의 절반 정도가 동부 아넨트리아 전선으로 이동한다는 이야기, 그 덕분에 시장의 물가가 올라간다는 소문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수도 주민들은 대개 이 화제에 집중하고 있는 듯 보였다.


프리하는 솔직히 지구에서 미군에 입대해서 영주권을 획득하거나 외인부대에서 용병생활을 마치고 프랑스 시민권자가 되는 그런 형태의 전개를 바랬는데, 오히려 이렌시아 수도에선 모병 활동이 끝난지 오래였다. 무엇보다 수도에는 사병 계급의 군인은 아예 없었다. 이미 이렌시아는 전시체제로 돌아가고 있던지 한창이라 수도에 남은 젊은 남자는 고위 귀족의 자제거나 행정 공무원, 상급 장교 뿐이다. 프리하는 병참으로 따라가는 상단이라도 있는지 찾아봤지만, 이 역시 연줄과 확실한 신분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었다.


취업난에 좌절한 나머지 결국 여관에서 과음한 프리하는 불콰해진 얼굴로 거리로 나섰다. 저녁은 지났지만 자기에는 애매한 시간. 거리는 향락을 갈구하는 자들과 그 향락을 채워주고 돈을 얻고자 하는 자들로 넘쳐났다. 아주 가끔 늦은 시간에 퇴근하는 관원들과 일상적인 순찰에 임하는 경비대 외에는 전부 그런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지구가 홍등가라는 이름으로 붉은 빛을 선호한다면, 이렌시아는 청등가일까, 요사스럽지 않고 한편으로는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푸른 등과 휘장이 여기저기 내걸려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줄곧 걷던 프리하는 어느덧 성의 중심부에 가까워지고 있다. 여기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공관이나 귀족들의 저택은 담벼락의 높이나 대문의 크기부터가 일반적인 성의 건축물과는 궤를 달리해서 구획이 나눠진 느낌이였다. 고급 기루, 창관들은 그 나름대로 구역을 이루어 높이를 경쟁하듯 중앙의 높은 전각이나 탑을 중심으로 한 작은 장원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낮에는 그저 조금 화려한 건물이나 저택 정도로 보이지만, 밤에는 어떤 마법적인 효과일까, 저 문을 넘어서면 다른 세계라도 펼쳐질 것 같은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진다. 다만 특이한 점은 그 감각이 위압감이라던가 사람을 가리는 형태는 아니고 또 들어가는 고객들의 옷 역시 다양한 계층을 망라하고 있다.


벌써 이렌시아에서 수십 번 느끼는 것이지만, 여기는 어떤 의미로 남녀가 꽤나 평등한 곳이다. 이미 지나온, 다운타운이라 할 만한 곳에서도 대놓고 남창이 호객행위를 하고 여자 손님과 함께 문을 들어가는 모습은 결코 희귀한 장면이 아니었다. 여기는 ‘문 바깥’으로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들어가는 연령층, 성별, 계층은 역시 다양했다.


프리하 역시 성에 대한 호기심은 왕성했다. 다만 지금까지 그럴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이슈타리엔을 모시는 검은 그러한 욕망이나 감정은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또한 또래의 여자아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이성’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 대 이슈타리엔을 잘 섬길 수 있도록 뛰어난 후대를 (극단적이지만) 잉태할 훌륭한 태 – 로서의 여인일 뿐이었다. 그런 생각까지 나아가지도 않았지만 아티하의 장자에게 아내란 그런 개념이다. 사랑이나 정치나 재물은 하등 무가치했다. 건강하고 검의 재능이 넘치고 제정신일 것.


흑화에게 실망하고 떠난 이후로는 감정적으로 너무 복잡했다. 이세계로 넘어온 뒤로는 숨돌릴 틈도 없이 생존과 분노를 위해 싸우고 달려왔다. 몸뚱이는 멀쩡했지만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고 몰두하고 있었다. 긴장을 놓을 새가 없었다.


지금은 처음으로 긴장이 풀렸다.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나 할까. 아무렇게나 되라는 심정이기도 했다. 또 흑화에 대한 미움이 여성관을 마구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요는 여자는, 이슈타리엔을 제외한 여자는 그저 가치가 책정되지 않은 대상에 가까웠다. 그래서 지금 존재하는 감정은 호기심과 탐구심. 제대로 성교육도, 이성과의 교제도 배워나갈 수 없었던 뒤틀린 자아가 그보다 더 해괴망측한 여성관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이야기의 흐름에서 너무나 불행한 일이였다. 너무나 불행한 일이고 말고...


그가 장원들의 입구 중에서도 가장 고아하고 고고하게 선 탑(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바로 여기가 프란텔 정보부의 제일 중요한 안가이자 프란텔 살수 무력단체 실렌 시흐의 영업장인 라 이벤 롤리아 – 덧없는 꽃잎의 독백 – 였다) 입구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각자 다른 대로에서 달려온 화려한 마차 둘이 거의 동시에 그 옆의 대문 앞에 멈춰섰다. 각자 말이 8마리, 6마리가 끌 정도로 크고 장식으로는 고급 목재와 금, 은이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마구와 마차에 장식된 가문의 문장과 깃발이 무척 깔끔하고 거대했다. 마치 기다린 것처럼 대문이 사람 한명이 나올 정도로 열리고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빠르게 빠져나왔다. 술 취한 중에도 프리하는 떡대가 상당한 남자 둘 보다는 여자의 걸음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옷은 의외로 평범한 치마와 저고리다.


‘검사는 아니고, 살수? 아니 그보다는 무게감이 있어. 팔이 엄청 가느다랗네. 활잡이는 아닐 거고 무용수일까?’


여자는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정확히 프리하쪽을 바라보며 웃어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음에도 서로의 눈동자를 보았다. 얼굴의 윤곽이 드러날 정도의 밝음도 아니었지만 프리하는 분명히 그녀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었다. 마차에서 마부가 바삐 움직여 간이 계단을 깔자 여자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물빛, 본질은 투명함, 춤사위.


프리하는 취기가 확 가시는 느낌이었다. 여자의 얼굴을 더 보고 싶었다. 몇 걸음 다가가는데, 마차에서 사람이 여럿 내린다. 대부분이 수행원이고 각 마차의 주인공은 역시 한 명 뿐이다. 둘다 프리하 또래의 젊은 남자였는데 머리에 쓴 작은 관과 머리장식 그리고 손에 낀 반지를 통해서 부자이자 권력있는 귀족의 자제들이란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권력자들과 얽히면 귀찮아진다는 것을 여기 오자마자 실컷 경험한 그다. 일단 멈춰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시시콜콜한 대화였다.


“어이 가즈! 넌 매일 여기 출석도장 찍냐? 그러다 헐겠다 헐겠어!”


푸른 비단옷에 와이번이 날개를 펼치고 입을 벌리고 있는 섬세한 금사 자수를 단 청년은 꽤 비대한 몸집을 가졌는데 허리에는 화려한 검집을 가진 곡도를 차고 있다. 손에 박힌 굳은살은 그가 비록 살쪘을지라도 무술의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낄낄 흐긴 너야말로 웬일이냐? 제국으로 가버린 이아사라도 찾는거냐?”

“그 여잔 이제 잊었어. 편지가 닿으니 외려 마음이 식더군.”

“그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건 당연하지. 여기도 미인은 많으니 그만 잊어버리라구.”


첫눈에 봐도 호색해 보이는 마른 남자 역시 허리에 짧은 곡도를 매달고 있었다. 자주색 의상에 머리를 감싸는 천뭉치(?)를 쓰고 있는 걸 보니 지방 호족으로 보인다. 이렌시아는 제국 동부의 다양한 민족들이 어울려 사는 나라였으므로 그 복색과 문화도 다양했다. 프란텔 가문이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시점에서 민족주의는 폐기되고 전체주의 사회로 강제로 진입해서 저렇게 전통 복식을 입는 것은 무척 드물고 힘 있는 가문에서나 가능하다는 사실까지는 프리하가 알 수 없었다.


기루에서 나온 두 떡대는 이미 마차를 수습해서 바깥의 마구간으로 끌고 가고 있었고, 홀로 남은 여자는 두 사람의 대화가 중단되는 그 미묘한 순간을 치고 들어와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한다.


“두 공자님의 재방문을 환영합니다. 오늘도 8층 누각으로 모실까요?”


둘 중 흐긴의 시선이 여자의 몸을 흩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너 처음 보는 얼굴이구나? 오늘 우리의 술 시중을 들지 않겠느냐?”


여자는 어떻게 그렇게 한 것인지는 프리하조차 인식하기 어려웠지만, 어느새 몸을 빼내고 다시 절하며 거절했다.


“소녀는 이곳의 기녀가 아닌지라 송구하지만 공자님의 요망에 답하여 드릴 수가 없네요.”

“기루에 있는 여자면 다 기녀지 무슨 소리야! 어디서 왔는데?”

“...”

“이봐 그러지 말고 우리와 함께 가지? 이분이 누구신 줄 아느냐? 발삼 가문의 2공자시다. 잘 모시면 너에게도 결코 나쁜 일이 아닐 것이다. 오늘 책임 총관이 누군가? 내가 이야기해보겠다.”


여자는 곤란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아티하는 살면서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그것을 인식한 시점에서 갑자기 세상은 다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흠칫하는 그를 보고 가즈가 따지듯 묻는다.


“너는 뭐야? 가서 총관을 불러오라니까?”


흐긴은 아무래도 마중나온 여자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아무 말 없이 여자의 전신을 계속 흩어 내리고 있다. 프리하는 어디까지나 여유 가득하게 서서 ‘내려다보는’ 가즈에게 아무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이 여자는 오늘 나와 함께 갈거요.”

“갑자기 나타나서 헛소리야? 방금까지 우릴 안내하려던 여자가 선약이 있을 리가 없잖아? 상도 몰라? 꺼지라고.”

“...”


사실 프리하도 할 말이 궁하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앞의 귀족의 말은 비교적 표준어라서 이해하긴 편했지만, 이런 식으로 귀족과 사건을 만드는 건 ‘불법체류자’인 그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물러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 그러니까 꼭 여자에게 어떤 흑심을 품거나 지켜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뭔가 좀 더 순수한 호의였다. 다만 인간으로서는 비틀려 있었다.


보석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마음, 관조, 관음, 통찰, 투시에의 열망.


“이 자식 끌어내! 하, 라 이벤 롤리아도 수질 버렸네. 이딴 놈이 기웃대는 걸 보니.”


결국 가즈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수행원들이 다가오자 아티하는 자동적으로 검병에 손을 대었다. 자세를 낮추자 흘러나온 살기에 귀족 청년 둘은 불편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수행원들 역시 무기를 꺼내기 직전. 프리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보았다.


“아씨, 이름이 뭐요?”


등 뒤에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놀란 표정이었으리라. 여자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답해주었다.


“우미하, 우미하 세이브리드에요.”


프리하는 우습게도 눈 앞의 두 젋은이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썩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수행원들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멈추더니 주인의 표정을 살핀다. 가즈가 고민하는 표정은 그대로인채 고개를 휙 젓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버리자 수행원들과 흐긴 역시 우미하-라는 여자를 힐끗 훔쳐보며 안으로 따라 들어가버렸다. 아티하는 살짝 뽑았던 검신을 다시 내리며 여자를 마주 보았다. 여자는 물빛 눈동자에 긴 흑발을 가졌고 피부는 투명했다. 화려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눈길이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프리하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자 그녀가 다시 한 번 미소지었다.


“뭐 묻었나요?”


프리하는 곧 실례라는 걸 깨닫고 한 걸음 물러났지만, 자신의 볼이 빨개진 것까진 몰랐다. 우미하, 우미하 세이브리드는 처음의 좀 차갑고 단정한 표정으로 돌아가 작게 절했다.


“공자의 도움에 감사드려요. 안으로 모실까요?”

“아니 나는 그.”


프리하보다는 키가 조금 작다. 그는 문득 여자가 자기 또래고, 아직 키가 더 클 수 있는 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이 이렇게 선명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새로운 견식을 쌓는 일이였다. 망설임보다는 무엇이 우선일까 생각하던 프리하는 말을 잇는다.


“우미하...님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단지 그것뿐이었소.”


그녀의 반응은 프리하가 예상한 그 무엇과도 달랐는데, 조금 기쁜 것 같았다(훗날 그녀가 ‘세이브리드’가문의 이름을 듣고도 개의치 않아한다는 것으로 생각해 기뻐했다는 사실을 직접 듣게 되지만, 당시에는 조금 당황했다).


“아하.”

“나는, 나의 이름은 프리하 아일리흐 아티하요.”

“아티하님이시군요. 제국 서부에서 오셨나봐요?”


프리하가 얼떨결에 자기소개를 했는데, 우미하는 자연스럽게 받아주었다. 덕분에 그도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쪽 출신은 아니지만, 친척들이 살고 있긴 하오. 그, 우미하...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소?”

“편하게 불러주세요. 기루에 오신 것이 아니라면,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


갑자기 사무적인 대화로 넘어간다.


“무슨 일이 있던 것은 아니었소. 다만 우미하...님이 보여서.”

“저랑은 초면 아니셨던가요?”

“물론이오. 그저 우미하...님이 보였을 뿐이오.”

“우미하로 괜찮아요. 아티하님도 오늘 저를 처음 본 것이군요?”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웃지 않고 프리하의 눈과 검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저는 오늘 총관 대행으로서 입구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어요. 아티하님이 저를 여자로 원하셔도, 관심이 있으셔도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죄송합니다.”


프리하는 자기도 모르던 속내를 들켰지만 당황하기보단 할 말들이 마구 떠올랐고, 검사의 감으로 그 중 하나를 남겼다.


“근무시간 외에 사적으로는 어떻소? 언제까지 일합니까?”


처음으로 눈이 동그래진 우미하는 곧 입을 가리고 작게 웃더니 잠시 고민하는 척 하며 프리하의 이모저모를 뜯어보았다. 미남은 아니지만 단정하고 특색있는 얼굴이다.


“그거 아세요? 아티하님은 제국 사람 같지도, 검방의 사람 같지도 않아요. 방금 보여주신 그 각신도검은 분명히 아티하의 직계만 지닌다는 흑검이네요. 그리고 사용하는 말은 마치 노인 같아요. 그렇다고 중앙귀족 같진 않아요. 저는 다음주까진 밤에 일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진 자유시간이에요.”


프리하는 지금 자신이 밑천 털린 것은 모르고 단지 이 말이 간접적인 수락의 의미라는 것만을 알아들었다.


-


이튿날 아침, 여관에 돌아와 모처럼 푹 잔 프리하의 눈은 맑았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순수한 기대감으로 가득 찬 눈이었다.


하지만 만나기로 한 날은 오늘이 아니다. 내일 근무 시작 전에 만나서 저녁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할지 정말로 만남이 이루어질 것인지 확신은 없었지만 무작정 기다려지는 그런 마음. 아티하에게 그런 설레임은 이슈타리엔을 만날 때 이후로 처음 찾아온 낯선 감정과 느낌이다.


바깥에 탐문을 나가기도 귀찮아진 그는 오랜만에 전에는 매일같이 하던 검 손질을 시작했다. 문득 우미하 세이브리드와의 대화가 생각난다.


‘그 각신도검은 아티하의 직계만 지닌다는 흑검이네요.’


...그것은 사실이다. 흡광금 아브티드를 일정 비율로 섞어 강도는 물론 은밀성까지 갖춘 흑검은 살수들 역시 좋아하는 검이다. 나아가서 제국의 검방의 전통에도 방주와 ‘검귀’라 불리는 흑검장로 1인, 검법 교사 중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위치에 있어 방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검법 수석교두 1인 총 세명이 지닐 수 있게 되어있다. 하지만 그 전통이 검방의 그 3직 모두를 아티하 가문이 독점하다시피 했던 시절이 길어지며 생긴 것은 아는 사람이 드물다. 더불어 직계의 재능은 방계나 다른 검가와 격을 달리하는 수준이었으므로 언제나 무력장로, 중요 간부는 아티하의 사람이 차지했다. 그게 당연한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에나 지금이나 아브티드 합금은 아티하의 직계만이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오늘날은 누구도 모르고, 아티하 자신들조차 지키지 않는 규칙이다.


그렇게 프리하는 잠시 우미하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고민에 빠져들었지만 주어진 단서가 없었다. 그녀의 외모에서 추론할 수 있는 정보 역시 없다. 그리고 그렇게 알 수 없는 여자라는 사실이 오히려 좋게 다가왔다. 알아갈 시간과 방법이 기대가 된다.


일주일 동안 돌아다닌 곳은 많았기에 프리하는 이렌시아 수도의 대략적인 지리는 파악한 상태였다. 얼추 검의 손질을 마무리한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목적으로 밖에 나섰다.


‘데이트? 하하 데이트인가?’


여자도 모르고 여심도 모르고 여자를 대하는 방법도 몰랐지만 설레임까지 모르진 않는다. 그는 처음 우미하를 만났던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차 마시기 좋은 다점이나 식당, 경치 좋은 곳을 나름대로 찾아보았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쳐서 그만두고 돌아왔지만.


숙소로 쓰고 있는 여관에 가까워졌을 때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로 대로가 통제되어 있었다. 멀리 보이는 성문에서부터 중무장한 기사들과 병사들이 도로 사방에 흩어져있다. 불규칙한 움직임 속에 십수대의 마차를 호위하는 병력의 군기는 엄정하고 날카로웠다.


“옆으로 물러서시오! 죄인들의 호송이니 모두 물러서시오!”


흩어진 군인들의 장비는 전부 야전군의 전투복이다. 경갑에서 그나마 있던 장갑을 떼어버리거나, 제식 중갑에 무식하게 더 장갑을 부착하거나 둘 중 하나다. 갑옷에 ‘규정’을 피해 그려놓은 낙서나 그림은 다양해서 위협적인 뱀 아가리가 있는가 하면 성적인 의미의 문구나 상징 부호도 있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도 어딘가 거칠고, 성 내에 진입하며 민간인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기 위해 가려놓은 무기의 모습도 어딘가 어색하다.


그런 모습은 바로 옆에서 도로 통제를 돕고 있는 수도 경비대의 잘 정비된 갑옷과 비교가 되어 더욱 눈에 띄었다. 군인에 대한 호감도가 높은 이렌시아의 국민들조차 거리에 나와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건물로 들어가거나 조금은 두려운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마차들은 대개 굵은 철창으로 만든 케이지에 비와 직사광선만 막아줄 허접한 지붕만 씌워서 출입구도 없이 용접으로 때워버린 죄수호송 차량이다. 노예가 될 뻔한 시설에서 탈출하면서 감옥이 달린 마차는 실컷 보았던 프리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건 처음이다. 마차가 더 가까워지면서 선두에 서서 ‘걸어오는’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그 옆에 있는 판금갑옷을 장착한 중기병의 거대한 랜스에 눈이 팔린 모양이다. 하지만 아티하는 어딘가 으슬으슬 추운 느낌이 들었다. 거의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방어구를 갖추지 않은 두 남자는 각자 중년과 청년 연배였는데, 막역한 듯 무언가 농담을 하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엄정한 분위기 속에서 두드러지지만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아티하는 시선을 돌렸지만 조금 늦은 것 같았다. 아티하에게 유쾌하게 경례(?)를 날린 젊은 남자는 곧 시선을 돌렸고, 중년 남자 역시 마찬가지로 아티하에게 잠깐 시선을 주고 곧 자기들의 대화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모두 검 손잡이에 쇠몽둥이가 달린 것처럼 생긴 무언가를 등에 메고 있었다.


인식 장애? 투명 마법? 왜곡? 존재값 변환?


이 때의 아티하로서는 어떤 기술로 그들이 일반 시민들의 시선에서 벗어났는지 바로 통찰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기에 아티하는 어딘가 섬찟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호송되는 죄수의 면면을 구경했다.


중죄인이라 그런지 어떤 마차에는 통째로 강성마법 처리가 되어있거나(마법이 걸려있다고 써 붙인 표지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아예 바깥도 볼 수 없게 더러운 방수포를 씌워놨다. 이미 두건을 씌운 사형수도 있다. 대개는 죄수복이지만 바로 잡혀서 끌려온 건지 무장을 하거나 피투성이가 된 옷을 입은 자들도 있다. 전부 여러 겹의 구속구를 걸치고 있고, 반대로 재갈은 물려있지 않았으나 누구도 떠들지 않았다. 바깥을 쳐다보는 자들 역시 많았으나 바로 옆에 몽둥이를 들고 따라가는 병사들도 딱히 그것까지 제지하진 않았다. 평범한 군용 수송마차에도 꽤 많은 사람이 타고 있다는 걸 딱히 마안을 열지 않아도, 일반인들도 인기척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야전군 패거리는 어느새 다시 뭉쳐 성 안쪽으로 먼저 가버렸다. 죄수 호송대 역시 수도 인근의 병력은 아닌지 갑옷에 먼지가 잔뜩 쌓여있다. 그리고 병사에 비해 장교의 숫자가 무척 많았다. 그들의 소속 부대 출신 역시 다양한지, 각자가 지닌 부대 표식도 전부 다르다. 저 정도 단위의 죄수들이 이동하는데 어떤 사건 사고에 대한 풍문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이렌시아의 정보통제에 대해서 아버지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프리하는 그것을 대충 넘겼다. 오히려 아까의 두 남자가 머리에 남는 것이다.


그렇게 최소 세 종류 이상의 군부대가 관여한 죄수 호송작전을 목격했지만 곧 잊어버린 프리하는 내일을 기대하며 탐문 아닌 오늘의 탐문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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