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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 님의 서재입니다.

불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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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piedbleu
작품등록일 :
2015.04.06 21:49
최근연재일 :
2015.05.2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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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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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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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90,880

작성
15.05.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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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6. 최후의 칼날

DUMMY


라스카는 정처없이 걸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숲속이었다. 중부지대의 교목림이었다. 높고도 곧은 나무들이 검은 밤하늘 아래 소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배도 고프고, 피로했다. 라스카는 거친 나무줄기에 손을 얹으며 멈추어 섰다. 어디선가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지.

가만히 서서 라스카는 앞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실제로 뭘 보고 있지는 않았다.

멸망하는 세계에서 앞으로 혼자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돌봐줄 사람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다. 바라지도 않는다. 내 힘으로 뭔가 해야지. 하지만 마법사인 걸 들키면 안 되니까. 그러면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데 어떡하지.

라스카는 피로로 무거워진 머리를 좀더 괴롭혀 보았다. 성회당, 아까 아나와 레이브 씨가 성회당을 이야기했지. 나는 수녀님 밑에서 자랐으니까 교리에 대해서는 잘 알아. 이제 믿지는 않지만. 가까운 성회당에 가서 복사로라도 일해 볼까. 마법사인 것만 숨길 수 있다면, 그래도 성회당이니까 의탁할 곳을 찾아온 신자를 내치지는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라스카는 자기 생각을 믿지 않았다. 그 생각대로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달리 살아갈 방법이 없잖아.


꼭 살아야 하나?


나무에 얹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거친 나무껍질이 소녀의 손끝을 상하게 했다.

미르센은 말했다. 날 찾아오겠다고. 내가 이 세상의 마지막 마법사가 되면. 그리고 얼마 남지 않았다고. 다른 마법사들에게 시도했던 것처럼, 나의 육신과 영혼을 탈취하여 세계의 숙주로 삼으려 하겠지.

그러려면 내가 전세계의 상을 감당할 수 있는 마법사여야 할 텐데, 턱없는 소리지. 난 아마 죽을 거야.

그런 식으로 죽기는 싫었다. 그녀는 다시 미르센의 말을 되새겼다. 선생님은 그의 의도대로 되는 게 싫으셨겠지. 그래서 영혼을 빼앗기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걸 거야.

라스카는 멍하니 생각했다.

나도 그래야 할까? 미르센이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죽여야 할까?

3월 밤의 차가운 바람이 몸을 휩쌌다. 라스카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어차피 이제 내겐 아무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더 살아 봤자 좋은 일은 안 생길 것이다. 오래 더 살지도 못할 테고.

아무도 없다니. 라스카는 손으로 눈자위를 비볐다. 친구 하나는 남았다. 하지만 카세도 나를 계속 친구라고 생각할까. 그 애에겐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한 eladie가 있잖아. 존재의 위기를 넘어서 돌아온 미르첼리스가, 그 예쁘고 순수한 아이가 있잖아. 카세에게 다른 건 아무 의미도 없고, 필요도 없잖아.

그래, 그만 살자.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사실 라스카는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열다섯 살이었다.

열다섯 살이라니.

소녀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충분히 보지 못했다. 아름다운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나이를 먹으면서 그것들에 실망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수많은 상실과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소녀의 마음은 아직 부드럽다. 소녀는 명민하여 차가운 현실을 잘 알지만, 부드러운 영혼은 아름다운 꿈을 갈망한다.


라스카는 축축한 흙 위에 주저앉았다. 자연스럽게 나무 줄기에 등을 기댔다.


“그만...... 그만 생각하고 싶다.”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희미한 달빛이 이마 위에 떨어졌다.


“쉬고 싶어.”


스스로 죽지 않더라도 곧 죽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 만큼 피로했다. 라스카는 눈을 감았다.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즐거운 나의 집. 숲 가까이 지어진 우리 집.


수녀님이 계시고, 수녀님이 진짜 우리 엄마인 거야. 지티는 정말 내 자매인 거야. 내가 언니였음 좋겠다. 한 살 정도 차이로. 잘 살 필요는 없어. 예전에도 가난했지만 재미있게 살았잖아. 언니 한 명 더 있어도 좋겠다. 레나 언니 같은 친언니. 아, 아빠도 있으면 좋겠다. 선생님 같은 아빠가 있으면 난 맨날 들들 볶이겠지.

쌍둥이 오빠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고......

자꾸 형제만 늘어 가는 것 같아서 라스카는 공상을 멈추었다.


“조금 잘까.”


어쩐지 잠이 왔다. 따뜻한 잠자리에서도 잘 수 없던 잠이 찬바람 부는 숲속에서 찾아오는 게 신기했다. 라스카는 오는 잠을 물리칠 생각이 없었다. 잘 수 있을 때 자 둬야 한다.

조금 춥기는 했다. 작은 불꽃을 일으켜 보았지만 마법에 집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 불꽃은 곧 사그라졌다.


불꽃.

거짓말처럼 누가 와 주었으면 좋겠다.

네가 와 주었으면 좋겠어. 예전처럼 나를 위로하러.

카세,

너는 나의 형제가 아니라,


“라스카.”


천천히 몰려오던 잠이 일순간에 달아났다. 라스카는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쳤다. 진짜 불꽃, 어둠이 아닌 밤 그 자체를 사르려는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불꽃. 시뻘겋게 빛나는 두 눈이 보였다. 거짓말처럼.


“카세!”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밑에서 마른 풀들이 부스러졌다. 소년과 소녀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마주 보았다.


“멀리 도망 못 쳤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해서.”

“여기저기 뒤지느라 고생했어.”

“어...... 미안.”

“네가 미안할 일은 아니지.”


라스카는 가슴 속에 따스한 안도감이 번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죽어야겠다느니 하는 생각은 사라졌다. 라스카는 카세에게로 다가가려 했다. 붙들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다. 오늘은 정말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날이었다.

카세의 표정은 심각해 보였다. 왜 저렇게 심각해 보일까. 그러고 보니 왜 미치와 함께 오지 않았지? 막사에 두고 왔나?

그렇다면 설마 돌아갈 생각인가?

라스카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쓸데없이 촉이 좋았다.


카세는 아무 움직임 없이 서 있었다. 환히 타오르는 불꽃의 눈 아래 턱과 입술만이 움직였다.


“난 너만큼 똑똑하진 않지만, 머리가 터지도록 생각해 봤어.”


무엇을?


“Proschen이 원하는 게 뭔지. 어떤 마법사여야 하는지. Lamennes에 능통한 대마법사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라스카는 자기 것 같지 않은 입을 열어 말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꼭 대마법사일 필요는 없겠더라고.”

“그게...... 무슨......?”

“나는 에르타가 마법을 쓰는 걸 여러 번 봤어. 에르타의 거울을.”

“거울?”

“Lamennes를 쓸 때마다 에르타는 거울을 사용했어. 안 그래도 되긴 했지만 습관적으로. 커다랗고, 시커멓고...... 낡은 거울이었어. 에르타가 스물다섯 살 때부터 쓴 거울이야. 마법의 매개체지.”

“......그게 왜......?”

“나는 나 아닌 것이 되지는 않겠어. 무의미해. 나인 채로 죽는 게 나아.”

“무슨 소리인지......”


카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의 모습은 주변의 나무들과 구분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곧고, 딱딱하고, 정숙했다.


라스카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스릉 소리. 마치 칼이 칼집에서 빠져나오는 듯한 소리. 이게 무슨 소리지.

별빛 몇 가닥이 칼날 위로 떨어졌다. 라스카는 이해를 거부하는 눈빛으로 그 칼날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칼날이 천천히 위쪽으로 올라왔다.


“......하지 않겠어.”


예전에 시르첸이 레나에게 했던 말과 비슷했다. 그때 레나가 뭐라고 대답했었더라. 안된다, 미안하다고 말하라고 했었지.

라스카는 보호의 마법을 불러일으켜 보려고 했다. 하지만 마력이 순환하지 않았다. 라스카는 자기 영혼을 들여다보았다. 더 살기를 거부하는 걸까. 설마. 저 불꽃의 칼날에게 나를 그대로 내주라는 것일까. 내가 그걸 원하고 있는 걸까.

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라스카는 표정이 사라진 얼굴을 들어 카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중얼거렸다.


“빠르게. 고통 없이.”


그것 참 고마운 소리네.

나지막이 머릿속에 맴도는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것은 소녀의 세 번째 비명이었다.


너는 Kasellion, 최후의 칼날이라는 이름이었지.


최후의 칼날은 그의 말처럼 빠르게,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소녀의 심장을 향해. 라스카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을 시간은 있었다. 눈꺼풀 안에서 불꽃이 춤을 추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 같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춤이었다.


날카로운 칼끝이 가슴에 박혔다. 정말로 고통은 없었다.



작가의말

#26. 최후의 칼날 편 끝났습니다.

다음편이 완결편입니다.

#27. 선택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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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최후의 칼날 +2 15.05.23 508 8 9쪽
90 #26. 최후의 칼날 +2 15.05.23 526 8 9쪽
89 #25. 전쟁터의 소녀 +2 15.05.23 422 8 6쪽
88 #25. 전쟁터의 소녀 +2 15.05.22 304 7 9쪽
87 #25. 전쟁터의 소녀 +2 15.05.22 564 9 7쪽
86 #24. 마법사 제이드 +2 15.05.22 542 8 11쪽
85 #24. 마법사 제이드 +2 15.05.22 540 9 12쪽
84 #24. 마법사 제이드 +2 15.05.21 560 9 11쪽
83 #24. 마법사 제이드 +2 15.05.21 527 8 9쪽
82 #24. 마법사 제이드 +2 15.05.21 552 11 13쪽
81 #23. 순회 +2 15.05.21 609 8 13쪽
80 #23. 순회 +2 15.05.20 480 7 16쪽
79 #23. 순회 +2 15.05.20 529 9 15쪽
78 #23. 순회 +2 15.05.20 561 9 8쪽
77 #22. Farewell +4 15.05.20 458 9 10쪽
76 #22. Farewell +2 15.05.19 441 9 11쪽
75 #22. Farewell +2 15.05.19 487 9 7쪽
74 #21. 재반격 +2 15.05.19 510 9 10쪽
73 #21. 반격 +2 15.05.19 592 8 6쪽
72 #21. 공격 +2 15.05.18 503 7 8쪽
71 #20. 마법사가 먼저인가 인간이 먼저인가 +2 15.05.18 546 9 8쪽
70 #20. 마법사가 먼저인가 인간이 먼저인가 +2 15.05.18 504 9 6쪽
69 #20. 마법사가 먼저인가 인간이 먼저인가 +2 15.05.18 651 9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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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18. 눈보라 왕국 +2 15.05.17 474 8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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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17. 청춘의 불꽃 +2 15.05.13 528 8 18쪽
56 #16. 억류 +4 15.05.12 446 9 8쪽
55 #16. 억류 +4 15.05.12 541 7 12쪽
54 #16. 억류 +4 15.05.12 523 8 13쪽
53 #15. Innocent +4 15.05.12 554 10 7쪽
52 #15. Innocent +4 15.05.11 624 9 11쪽
51 #15. Innocent +2 15.05.11 569 9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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