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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 님의 서재입니다.

불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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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piedbleu
작품등록일 :
2015.04.06 21:49
최근연재일 :
2015.05.23 23:00
연재수 :
9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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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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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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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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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17. 청춘의 불꽃

DUMMY


10월 말, 계절은 완연히 가을이었다. 밀렌다 북부에는 슬슬 싸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절단이 이동을 멈춘 틈을 타서 라스카는 틈틈이 그려 왔던 그림을 완성했다. 물감칠을 할 여건은 안 되었지만 아쉬운 대로 색연필을 사용할 수는 있었다.

북부지방의 풍경화였다. 살풍경한 들판에 드문드문 서 있는 검은 나무들, 믿을 수 없을 만큼 푸르른 하늘이 담겨 있었다. 라스카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면밀히 관찰했다. 언제나 그렇듯 대상과 닮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그림이 실제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린이의 실력 문제가 아니라 성격 문제였다.

라스카는 색연필 끝을 입에 물고 생각에 잠겼다. 좀 더 아름답고 행복하고 누구도 다치지 않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스스로도 허황된 꿈이라고 여겼다.

카세가 크렐라인의 지하감옥에 갇힌 후 상황은 예측한 대로 돌아갔다. 게르티스 2세는 마리엔으로 가는 사절단을 급조하여 제론드에게 떠안겼다. 최소한의 구색만 맞춘 사절단이라고는 하나 라스카의 관점에서는 화려한 행렬이었다. 20여 명의 선별된 기사들과 학자, 역사가, 예술가, 통역사들, 시종들이 동행하여 약 50여 명 규모였다. 이 사람들 전부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 제론드는 그야말로 진절머리를 냈다.


“내가 이 짓이 싫어서 작위도 내버렸는데!”


그는 사정없이 여동생을 부려먹었다. 고집을 부려서 따라왔으면 일이라도 하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로엔 라피트 백작 영애의 자격으로 부단장 역할을 떠맡아 매우 바빠졌다. 그래서 라스카는 요즈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제론드는 시르첸에게는 선택권을 주었다. 당장 동생 찾는 일을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였다. 시르첸은 그를 더 돕고 싶으며, 그가 연구하게 될 마법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다고 대답했다. 제론드는 고마움의 뜻을 표시했고, 역시 그를 열심히 부려먹었다. 지금 이 사절단의 구석구석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라스카는 사절단에서 자신이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탑에 남게 될 거라 생각했다. 또한 세 마법사들을 다시 보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마리엔의 수도 제타까지는 단순 계산만으로도 석 달 가까이 걸리는 길이었다. 사절단은 내년 말에나 귀환할 예정이었다. 1년은 긴 시간이고 그때까지 후원자 없이 크렐라인에 남겨진 자신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레나와 제론드, 심지어 시르첸마저도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선생이 가는데 안 따라간다고?”


이것이 마법사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라스카는 제론드의 제자 자격으로 사절단의 최연소 구성원이 되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출세였다. 하지만 기쁘지는 않았다. 자랑스레 여겨 줄 가족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으로 가 보고 싶어했던 마리엔이었지만 실감도 잘 나지 않았다.

카세는 잘 있을까.

어디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을까.

설마......

아냐,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라스카는 다시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그림을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다가 언젠가는 타오르는 불길을 그리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도저히 그릴 수가 없었다.

제론드는 시간이 날 때마다 라스카를 불러 교사의 의무를 이행했다. 마법의 역사와 유명한 마법사들의 일대기를 들려주었고, 마법의 기본적인 개념들과 이론들도 가르쳤다. 또한 많은 마법사들이 공유하는 쉽고 기본적인 마법들도 가르쳐 주었다. 라스카는 본래 머리가 좋은데다 열의도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빨리 배웠다. 제론드는 자기에게 가르치는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농담하곤 했다.


“요즘 이게 진짜 유일한 낙이다.”


그의 넋두리와 함께 사절단은 북부의 국경도시로 들어섰다. 여정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이었다.


“스필레인을 통과해야만 해.”


레나가 지도를 펼쳐 놓고 말했다. 라스카도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스필레인을 거치지 않고 마리엔에 가는 길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탐사되지 않은 험지였다. 그 경로를 제외하면 스필레인의 영토를 가장 적게 지나치는 길을 찾는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이곳에 도착했던 것이다.

이곳은 밀렌다와 스필레인이 숲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맞댄 지역이었다. 여기를 지나 스필레인의 도시 두어 개를 통과하면 밀렌다의 영토도 스필레인의 영토도 아닌, 여러 부족들이 띄엄띄엄 흩어져 살고 있는 해안 지대가 나온다. 이 지역을 따라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리엔 최남단의 도시 라파에 도착한다. 라파에서 제타까지 또 3주를 더 가야 했다.

이와 같이 밀렌다와 스필레인이 첨예하게 맞붙어 있는 이 도시는 국경도시이자 군사도시였고, 국방의 요충지였다. 이름은 마스란이었다. 시르첸의 고향이기도 했다.

라스카가 힐끗 훔쳐보니 시르첸은 고향에 별 감흥이 없는 듯 무표정했다. 즉 평소와 똑같았다.

사절단은 마스란의 공관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제론드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입국 수속하고 오겠다.”

“스필레인 측하고 미리 합의하지 않았어?”

“하긴 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고 어서 옵쇼 하며 국경을 열어주진 않을 거야. 가뜩이나 우리가 마리엔하고 연결되는 걸 싫어하지 않냐? 외교인지 전쟁인지 뭔지 줄타기 좀 하고 오겠다.”

“어려운 일이네.”

“전하는 내가 여기서 실패하길 바라셨는지도 모르지.”

“같이 갈까?”


레나가 물었으나 제론드는 고개를 저었다.


“너까지 자리를 비울 순 없지. 여길 지키고 있어. 시간은 좀 걸릴 거야.”


그는 다시 진저리를 치더니 예복을 갖춰 입고 나가 버렸다.


나머지 사람들에겐 얼마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마스란 공관에서는 사절단을 환영하기 위한 파티가 벌어졌다. 레나와 라스카는 함께 앉아 공연과 요리를 즐겼다.


“너랑 마주앉아서 얘기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야.”

“정말요. 바쁘셨죠?”

“사람 혹사시키는 데 일가견이 있는 누구 덕분이지 뭐. 오빠인지 웬수인지 참.”


레나가 툴툴거렸다. 라스카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슬쩍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사이좋으시잖아요. 항상 같이 행동하시고. 척하면 척이고. 서로 든든할 것 같아요. 부러워요.”


이번에 레나는 웃었다.


“사이가 좋다라...... 사실 나이 차이가 꽤 나서 말야. 일곱 살이나 나니까. 내가 간신히 철들었을 때 오빤 이미 어른이었거든. 그땐 참 대단해 보였어. 크렐라인에 위명을 휘날리던 시절이고. 마법사로서는, 지금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천재였지. 그래서 나도 마법 공부를 하겠다고 집안을 발칵 뒤집었는데. 흠. 낚인 거 같애. 인간적으로는 별거 없는데 말야. 실제로 같이 살아보면 맨날 떽떽거리지 동생 놀려먹을 궁리만 하지 그냥 세상에 널리고 널린 오빠 나부랭이라고. 사이가 좋고 말고 할 것도 없지.”


라스카도 웃었다.


“선생님 정도면 좋은 오빠 같은데......”


레나는 장난스럽게 라스카의 등을 찰싹 때렸다.


“너한테는 아빠뻘이잖아. 전혀 오빠가 아니라고. 얼굴에 속지 마.”

“그건 그래요.”


살갗이 흰 북부의 무희들이 흥겨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사절단에 포함된 악사들이 각자 악기를 꺼내어 한 수를 보여주고자 했다.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모두 박수를 치고 즐거워하며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춤과 악기 공연이 끝나자 참석자들의 시간이 왔다. 악단은 댄스곡을 연주했다. 달콤하고 로맨틱한 곡이었다. 마스란의 영주인 알바스 남작이 남작 부인과 함께 홀을 돌며 춤을 시작했다. 귀족 출신 참석자들이 우아하게 그 뒤를 따랐다.

한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곧 젊은 기사 하나가 얼굴이 온통 빨갛게 되어 이쪽으로 다가왔다. 라스카는 그의 성씨를 기억해 냈다. 라르센이라는 남자로 모 남작의 사촌 동생이라고 했다.

라르센 경은 필생의 용기를 짜내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라피트 백작 영애, 제게 하, 한 곡의 영예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젊은 기사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휘파람 소리가 높이 치솟았다. ‘잘해봐!’ 운운하는 응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레나는 젊은이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라스카는 어쩔 수 없이 저쪽 테이블을 훔쳐보았다. 시르첸은 이쪽을 보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잘 통제된 무관심.

레나가 대답했다.


“아아, 물론이죠, 라르센 경. 제가 더 영광입니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우렁찬 휘파람 소리. 레나는 라르센 경과 우아하게 춤을 추었다. 두 곡이나 추었다. 솔직히 잘 어울렸다.

라르센 경은 신이 나서 아예 이쪽으로 자리를 옮겨 왔다. 두 남녀는 처음 호감을 가진 이성 간에 나눌 법한 대화들을 나누었다. 라르센 경은 열정적이었고 레나는 그에게 맞춰 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화가 진행될수록 레나가 흥미를 잃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내 레나는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라스카, 나랑 같이 가자. 라르센 경, 금방 돌아올게요.”


라르센 경은 그게 완곡한 거절임을 몰랐는지, 혹은 모르고 싶었는지 그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카는 종종걸음으로 레나를 따라 파티장 밖으로 나왔다. 저녁 바람이 제법 싸늘했다.

레나는 두 팔로 몸을 감싸며 덜덜 떨었다.


“으으. 춥다, 추워. 별 떨거지가 다 붙네.”

“떨거지라기엔 괜찮아 보였는데요. 기사고, 귀족이고, 얼굴도 그 정도면.”

“라스카, 라스카, 눈 좀 높여. 아무 남자나 다 괜찮으면 어떡해.”

“아무 남자나 다 괜찮은 건 아니지만......”


하마터면 ‘언니는 눈이 높아서 그런......’ 하고 말할 뻔했다. 레나는 소녀의 귀를 살짝 잡아당겼다.


“요녀석! 무슨 말 하려고 했는지 다 알았어!”

“꺅, 언니!”

“어른을 놀리면 못써. 라스카 바보!”


여인과 소녀는 잠시 마스란 공관 주변을 산책했다. 라르센 경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라스카는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어?”

“저요?”

“그래. 너무 먼 이야긴가?”

“전 그냥...... 음, 저 좋다는 사람?”

“에. 안 돼. 그 중에선 어떻게 고르려고.”

“언니야 좋다는 사람 많겠지만, 전 아닐 거 같은데요.”

“아냐. 너도 곧 인기 많아질 거야. 지금은 어려서.”


레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이었다.


“나 좋다는 사람이 많으면 뭘 하나......”


둘은 정처없이 걸었다. 국경지대라 군인들이 많이 돌아다녔다. 호젓한 마스란 외곽 길을 걸으며 둘은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라스카는 레나와의 시간이 소중했다. 그녀는 귀족의 거드름 따위는 없는 꾸밈없는 사람이었고 변함없이 라스카에게 잘해주었다. 라스카가 제론드의 제자가 된 후에는 심리적인 거리가 더 가까워져서 정말 친척 언니가 생긴 것 같아 좋았다.


“라스카, 난 말이지. 어렸을 땐 내가 오빠 같은 사람 만날 줄 알았어. 뭐랄까 나이 차이도 좀 나고, 날 챙겨주고,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러니까 의지하는 게 맞는 거죠?”

“요 녀석. 또 어른을 놀려. 그야 오빠는 오빠니까. 다시 말하면 오빠는 오빠일 뿐인 거야. 좋아하는 남자랑은 전혀 다른 거야.”

“음.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언니는......”


레나는 약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좋은 사람 만나야지. 이제 그만할 거야. 이런 비참한 짝사랑은.”


그녀는 다짐하듯 말했다.


“잘생기고 돈 많고 자상하고 나만 바라보는 남자 만날 거라고.”


그녀의 원대한 야망에 부응하듯 숲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칼이 세차게 날렸다. 북부 국경지대의 숲은 남쪽 지방의 숲과는 전혀 달랐다. 검고 곧고 딱딱했다. 위엄과 위용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라스카, 숲이 좀 이상하지 않니?”

“숲이요?”


그러고 보니 숲이 아까보다 좀 가까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레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숲 쪽을 바라보았다. 일상적인 순찰을 하던 군인들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멈추어 섰다. 저녁밥을 먹으러 집으러 돌아가던 민간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라스카 역시 무언가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그 기운을 민감하게 읽을 수 있었다. 초보지만 마법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보다 훨씬 능숙한 마법사인 레나는 매우 심각해졌다.


“라스카, 여길 피해야겠어.”

“낌새가 너무 이상해요.”

“응. 피해야...... 아냐, 나는 피해선 안 돼.”


그녀의 눈에 굳은 결의가 떠올랐다. 라스카는 더욱 불안해졌다. 레나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가장 계급이 높아 보이는 군인에게 다가갔다. 그의 제복에는 대위의 계급장이 반짝였다.


“대위님. 이곳은 지금 위험하니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레나는 조바심을 내며 대답했다.


“나는 레미나스 로엔 세일라 라피트, 라피트 백작가의 여식이며 마리엔 사절단의 부단장입니다. 지금 사태가 위급해 보이니 어서......”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사태가 명확해지고 있었다. 검은 나무들이, 아니, 나무를 닮은 무언가들이 이쪽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결코 느린 속도가 아니었다. 말이라면 속보에 해당하는 속도로 그것들은 시시각각 가까워졌다.

나뭇가지를 닮은 팔다리와 검고 윤기 나는 표피. 크기도 중부대륙의 침엽수들에 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입력한 움직임을 수행하는 것처럼 동작이 조금씩 부자연스러웠지만 그 모습이 더욱 괴기했다. 머리에 해당하는 부위엔 옹이구멍이며 거친 나뭇결들로 악귀 같은 표정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레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마법입니다! 모두 피하세요! 어서!”


대위가 몸을 떨면서도 레나에게 물었다.


“스필레인의 짓인 겁니까?”


레나가 기가 차다는 듯이 응수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하지만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군인들은 훈련받은 대로 대형을 이루어 사람들 앞을 가로막았다. 석양 아래에서 창검이 번쩍 빛을 발했다. 화살들이 날았다. 그러나 가장 단단한 나무보다 단단한 괴물들의 표피를 뚫지 못했다. 민간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뛰어 도망쳤다.


“라스카, 너도 어서 피하렴!”


레나는 소리를 지르며 두 팔을 들어올렸다.


파괴하는 신이시여!

죄 많은 생명을 거두실 수확의 날을 아시고!


그녀의 손끝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줄기들이 군인들의 머리를 넘어 괴물들에게로 뻗어나갔다. 뜨거운 열기에 군인들은 머리를 숙였고, 일부 괴물들의 몸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공기를 울리는 괴성이 들려왔다. 고통의 표현일지도 몰랐다.

대위가 레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물리칠 수 있는 겁니까?”

“해봐야죠.”


레나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날붙이 무기로는 안돼요. 말이 있으니 도움을 청하러 가주세요.”

“어디로 말입니까?”

“국경으로...... 회담이 진행되는 중일 거예요. 로엔 라피트 백작을 불러줘요.”


사실 지금은 백작이 아니지만 구구한 설명을 붙일 시간이 없었다. 레나는 두 손바닥 위에 다시 거대한 불꽃을 피워 올리며 외쳤다.


“빨리!”


괴물들은 백여 기가 넘었다. 마스란 시내가 좀 떨어져 있다고는 하나, 여기서 막지 못한다면 그것들이 다다르는 데는 15분이면 족할 것이었다. 라스카는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라스카, 너도 어서......”

“......안돼요.”


나도 무언가를 해야만 해. 라스카는 두 손을 뻗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의지가 투명한 벽이 되어 앞쪽에 펼쳐졌다.


“즈리엘의 마법일 거야. 그렇게 쉽게 막을 수 없어.”


레나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라스카, 도망쳐.”

라스카는 말했다. 자기 안의 전혀 다른 존재가 말하는 것 같았다.


“싫어요. 언니 혼자 두고 도망칠 순 없잖아요.”


더 이상 실랑이할 시간이 없었다. 거대한 몸집들로 시야를 메우며 몰려오는 나무 괴물들을 향해 세찬 불줄기가 다시 뻗어나갔다. 불꽃을 정통으로 맞은 일부 괴물들은 검게 바스러져 내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하지만 일부는 불타오르면서도 계속해서 다가왔다. 기본적으로 너무 숫자가 많았다.


“즈리엘 타마센! 밀렌다와 전쟁을 하자는 거야?”


레나는 악을 쓰며 계속해서 불꽃을 일으켰다. 마법교육원을 수석으로 졸업하여 촉망받는 인재인 그녀의 마법은 과연 훌륭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마력을 아낌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것들이 라스카가 쳐 놓은 장벽까지 다다랐다. 굵고 거친 나뭇가지 팔들이 장벽을 긁어내렸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챙그랑! 여기저기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장벽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라스카도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장벽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마력을 효율적으로 다룰 줄 몰랐다. 아까보다 약해진 장벽은 더욱 빠르게 돌파되었다.

레나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괴물들의 숫자는 많이 줄어들기는 했다. 하지만 여전히 너무 많았다. 수십 기가 남아 변함없는 속도로 마스란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언덕 하나 너머 마스란 시내가 손에 닿을 듯이 가깝게 보였다.


“언니, 언니, 괜찮아요?”


라스카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레나도 마력이 바닥난 것이 분명했다. 마법사의 마력은 영혼을 지탱하고 순환시키는 힘이다. 결코 과다하게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레나는 다시 한 번 불꽃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타오르는 붉은 불길이 아니었다.

라스카가 언젠가 보았던 새하얀 불꽃이었다.


“언니......”


레나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어째서 제론드는 오지 않는 것일까? 레나뿐 아니라 수많은 마스란 사람들이 위험에 처해 있었다.



작가의말

곧바로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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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방영
    작성일
    15.07.09 08:49
    No. 1

    쿨럭...ㅠㅠ 앙대요 레나 언니ㅠㅜ 목숨을 좀 아껴요 어엉
    라스카가 언니. 아빠. 오빠??같은 존재를 얻어서 다행이긴한데
    얻는 것은 또한 잃을 수도 있다는거...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i******
    작성일
    15.07.09 10:25
    No. 2

    회자정리 거자필반 그거슨 인생의 진리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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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17. 청춘의 불꽃 +4 15.05.14 453 9 8쪽
59 #17. 청춘의 불꽃 +2 15.05.14 419 8 9쪽
58 #17. 청춘의 불꽃 +2 15.05.13 539 9 10쪽
» #17. 청춘의 불꽃 +2 15.05.13 529 8 18쪽
56 #16. 억류 +4 15.05.12 446 9 8쪽
55 #16. 억류 +4 15.05.12 542 7 12쪽
54 #16. 억류 +4 15.05.12 523 8 13쪽
53 #15. Innocent +4 15.05.12 554 10 7쪽
52 #15. Innocent +4 15.05.11 624 9 11쪽
51 #15. Innocent +2 15.05.11 569 9 10쪽
50 #14. 마법사들의 밤 +6 15.05.10 452 10 7쪽
49 #14. 마법사들의 밤 +4 15.05.10 456 8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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