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억류
어두웠다. 너무나도.
그리고 추웠다. 지하의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라스카는 두 팔로 어깨를 감싸며 몸을 떨었다. 더운 지방에서 자란 소녀에겐 익숙지 않은 추위였다.
하지만 몸보다 마음이 더 추웠다. 등줄기를 곤두서게 하는 창칼의 기운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녀를 따라왔다. 라스카는 뒤를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눈앞의 등만을 좇아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회색 벽돌을 쌓아 만든 통로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졌다. 철컥거리는 갑주 소리뿐 사방이 조용했다. 라스카는 두개골 속으로 울리는 자기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왕궁의 지하감옥에 오게 되다니.
몇 달 전의 라스카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때의 라스카가 훨씬 행복했다.
어둠 그 자체 같은 검은 철문과 두터운 돌벽이 나타났다. 두 명의 경비병이 철문의 양쪽에 시립하여 지키고 있었다. 중죄인에 대한 처우였다.
맨 앞에서 길을 안내하던 감옥 관리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들어올린 등불에 사람들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다 왔습니다. 각하.”
“문을 열어주게.”
제론드가 부탁했으나 감옥 관리인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문은 열 수 없습니다. 본래 국법상 1급 죄수는 면회하실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 알고 있지만......”
그의 얼굴에 괴로움이 떠올랐다.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창살 너머로 만나겠네.”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라스카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제론드가 국왕에게 면회를 허락해 달라고 부탁한 것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간절히 라스카는 제론드에게 부탁했다. 애원했다. 같이 가게 해 달라고.
검고 차가운 창살 너머에 어둠이 가득 고여 있었다. 얼마나 넓은지, 어떻게 생긴 감옥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관리인에게서 등불을 넘겨받은 제론드가 라스카의 뒤로 다가와 안쪽을 비추었다. 라스카는 급격한 조명에 눈을 찌푸리며 창살에 닿을 듯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희미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풀어헤친 긴 머리칼, 호리호리한 몸매, 머리를 깊이 숙이고, 두 손목과 발목을 금속 고리로 결박당한 채 소년은 맞은편 벽에 매달려 있었다.
비참한 모습이었다. 라스카는 그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흐느끼듯 떨려 나왔다.
“카세.”
의식은 있었는지 카세가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이 등불보다도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비인간적인 불꽃의 눈동자였다.
“좀 어떠냐.”
제론드의 질문이었다. 피식. 대답 대신 비웃음 비슷한 것이 돌아왔다.
“자리를 비켜주면...... 아니, 안 되겠지.”
감옥 관리인과 경비병들은 송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라스카에겐 이미 주변의 소리들이 들리지 않았다. 소녀는 자신에게 남은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두 달 전 화재의 범인 및 탈옥범으로 기소되어 저기 매달려 있는 저 소년은 공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해 주는 존재였다.
그가 라스카의 이름을 불렀다.
“라스카.”
“카세, 카세. 다친 데는 없어?”
카세는 힘없이 웃었다.
“엉망이야.”
제론드는 라스카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와 카세의 눈이 마주쳤다. 카세의 눈이 약간 커졌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스카는 울먹이며 말했다.
“넌 아무 죄 없잖아. 나올 수 있는 거지? 아니면...... 지난번처럼......”
“라스카.”
제론드가 라스카의 말을 막았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탈옥하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라스카는 선생님의 말에 따라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본래 감정 표현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감정이 메말라서가 아니라, 늘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자기 검열을 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였다. 그녀는 침착해지고 싶었고 어른스러워지고 싶었다. 어떤 고통 앞에서도 의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사람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닦아내고 싶지도 않았다.
이 어두운 공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재투성이 검은 땅, 폐허가 된 나스푸젠.
“여기 두고 갈 순 없어. 네? 선생님......”
제론드는 대답이 없었다. 라스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을 뿐이었다. 라스카는 울음을 삼키며 카세를 바라보았다. 비인간적이었던 소년의 눈동자에 조금씩 인간의 감정이 돌아왔다. 그는 다시 한 번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라스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임이 판명되었다. 카세가 왼쪽 손목의 족쇄를 끊어버린 것이었다. 과연 인간을 넘어선 힘이었다. 오른쪽 손목, 양 발목의 족쇄도 끊어졌다. 옥졸들이 놀라 부산을 떨었다.
“죄수가 탈출하려고 한다!”
제론드가 침착한 목소리로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렇지 않네.” 하지만 관리인은 누군가에게 보고를 하러 도망치듯 뛰어가 버렸고, 경비병들은 불안함과 경계심이 뒤범벅된 눈초리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철컥, 철컥, 끊겨진 족쇄를 끌며 카세가 창살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늘 변함없던 얼굴이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감옥에서의 고초 때문이라기보다는 마음고생 때문인 것 같았다.
“나가는 거야?”
라스카가 멍청한 질문을 하자 카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나가.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여기 있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어떻게든 될 거야. 알잖아. 난 쉽게 죽을 수도 없다고.”
“그래도......”
카세는 창살 밖으로 손을 뻗었다. 창살이 빽빽하여 손가락 끝만 내밀 수 있었지만. 라스카는 그 손가락을 붙잡았다.
“날 정말로 걱정해 주는 건 너밖에 없어.”
“카세.”
“이 세계에는 너밖에 없어.”
돌바닥에 갑주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병사들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제론드는 라스카의 팔을 붙잡았다.
“라스카, 더 이상 소동을 벌였다간 오히려 카세에게 좋지 않을 거야. 이제 돌아가자.”
라스카는 그 말을 이해했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카세는 뻗었던 손을 거두며 말했다.
“너는 내가 이 세계에서 만난 가장 소중한 친구야.”
다정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그 말은 무슨 공성추처럼 라스카의 가슴을 후려쳤다.
“가.”
카세가 말했다. 그래도 라스카가 머뭇거리자 카세는 두 손으로 창살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빨리 가!”
지하 공간이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소리였다. 본래 카세는 감정 표현을 자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에르타의 보호 하에 미치와 어울려 자랄 때는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그에게 이 세계는 너무나 어려웠다. 마음 가는 대로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은 말을 다할 수도 없었다. 불합리했다.
손가락 사이에서 창살이 엿가락처럼 구부러졌다. 끓는 구리처럼 붉게 빛나는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라스카는 마지못해 물러섰다. 제론드의 재촉에 끝내 돌아서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라스카와 제론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병사들이 들이닥치는 모습을 보며 카세는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이별은 싫었다.
Eladie, 그 한 마디를 어째서 그냥 넘기지 못했을까.
제론드의 마법에 처음 당했을 때처럼 어마어마한 상실감이 그를 덮쳤다. 하지만 그때처럼 정신을 잃을 수가 없었다. 의식이 놓아지지를 않았다. 카세는 돌바닥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통곡했다. 창검은 두렵지 않았다. 정말로 두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결코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 작가의말
#16. 억류 편 끝났습니다.
중간에 잘리는 일 없이 깔끔하게 내일부터 다음 편을 시작하기 위하여 오늘은 4연참.
#17. 청춘의 불꽃 편으로 이어집니다.
글쓴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편입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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