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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 님의 서재입니다.

불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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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piedbleu
작품등록일 :
2015.04.06 21:49
최근연재일 :
2015.05.23 23:00
연재수 :
97 회
조회수 :
40,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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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
글자수 :
490,880

작성
15.05.16 22:00
조회
341
추천
8
글자
9쪽

#18. 눈보라 왕국

DUMMY



바깥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라스카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열대의 나스푸젠에서 15년을 살아온 소녀에게 눈보라라는 것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자연 재해였다.

전 세계가 울부짖는 듯한 바람소리가 높은 창문을 쾅쾅 두들겨 댔다. 라스카뿐 아니라 밀렌다에서 온 사람들 모두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움찔움찔 놀랐다. 반면 마리엔 사람들은 이 정도면 온화한 날씨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였다.


“Es Tremio.”


높은 단 위, 붉은 주단이 깔린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났다. 분명하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라스카는 그 목소리가 생각보다 어리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밀렌다 어로 반복해서 말했다.


“환영합니다.”


또각또각 징 소리와 함께 그가 계단을 밟으며 내려왔다. 완만하고 위엄 있는 걸음걸이였다. 표정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엄숙했다.

50여 명에서 6명으로 규모가 축소된 밀렌다 사절단은 모두 고개를 깊이 숙여 절했다. 그가 작은 손을 내밀었다.


“Rai mare. 고개를 드시오.”


제론드는 고개를 들고 자기보다 훨씬 작은 왕자를 내려다보았다. 들은 대로 15세 가량의 어린 왕자였다. 국가적 자존심이나 왕가의 명예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는 아이언이 이미 아는 대로 모두 떠들었다.

왕과 왕비는 황음에 빠져 국사에 손을 놓은 지 오래고, 하나밖에 없는 왕자가 사리를 분별할 줄 알게 되자마자 나라를 떠맡았다고 했다. 이름은 제스카르. 제스카르 디안 마리엔.

제타는 역사와 전통이 오랜 도시로서 궁정과 정부가 위치하여 수도로서의 정통성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너무 춥다는 것이 문제였다. 농경지와 항구가 필요했던 마리엔은 오랜 시간을 두고 남쪽의 황무지를 개척했다. 대부분의 인구가 그쪽에 거주했고, 그나마 여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도시 라파가 마리엔의 경제 중심지였다. 가장 부유한 도시이기도 했다.

왕과 왕비는 라파에 파묻힌 지 이미 3년째였다. 그러나 제스카르 왕자는 수도를 떠난 적이 없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스카르 왕자.”


그 역시 그 말을 마리엔 어로 반복했다. 왕자의 희고 무표정한 얼굴에 이채가 스쳤다.


“마리엔 어에 능통하군. 로엔 라피트 경.”


경이라는 호칭에는 의문이 있었으나 제론드는 그냥 넘어갔다. 마리엔 어에 마땅한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사절단을 소개해 주시겠소?”


부단장 레나와 세 명의 수행 기사들이 차례차례 소개되었다. 마지막으로 제론드는 빙긋 웃으며 라스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저는 마법사이기도 합니다. 이 소녀는 제가 얼마 전에 거둔 제자입니다. 라스카라고 하지요.”


제스카르 왕자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마리엔의 혈통임도 금방 알아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대신 라스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했다. 심지어 밀렌다 어였다.


“경이 마법사라는 사실은 들어 알고 있소. 그것도 매우 훌륭한 마법사라고 하더군. 그대의 제자라면 밀렌다 탑의 인재임이 틀림없을 것이오. 환영합니다, 레이디.”


이런 황공한 대우는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라스카는 흰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제스카르 옆에 서 있던 아이언이 웃으며 팔짱을 꼈다.


“아직은 초보입니다. 갈 길이 멀죠.”


왕자의 새카만 눈이 아이언에게로 향했다.


“수고했소, 메타.”

“별말씀을요.”

“그런데 할 일이 많지 않소?”

“봐주십시오. 한 달 동안 제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휴가를 좀 쓰고 싶은데요.”

“여섯 시간 이상은 줄 수 없소.”

“아아! 잔인한 왕자님이군요.”


아이언은 과장된 비탄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스카르 왕자는 문득 표정을 풀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농담이오. 포털을 모두 수복한 공을 사서 사흘의 휴가를 주지. 그 동안 밀렌다 사절단을 안내해 주도록 하시오.”

“그게 휴가입니까? 가외 업무 아닙니까?”


주종 간 허물없는 모습도 그렇지만, 밀렌다 사람들에겐 아이언의 높은 지위가 더욱 놀라웠다. 궁정마법사 아이언 메타는 왕자 앞에서 무릎을 꿇지도 별다른 예를 취하지도 않았으며 국무대신 급의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제스카르 왕자는 그를 신하라기보다는 조언자처럼 대했다. 물론 두 배 이상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왕자는 머리가 허연 다른 대신들에겐 빠짐없이 위엄을 갖추었고, 때로는 추상같기까지 했다.


“사절단이 머물 건물은 준비되었겠지?”


외무대신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푸른 별관으로 준비했습니다.”


제스카르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푸른 별관이 화려하기는 하나, 서향이라 남쪽에서 오신 분들께는 추울 것이다. 남향의 건물을 비우도록 하라. 붉은 장미관이 좋겠다.”


조금 차가운 목소리였다. 외무대신은 아무 말 못하고 재차 고개를 수그렸다.

왕자는 다시 사절단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아이언의 안내를 받으시기 바라오. 이미 친분이 있으시다 들었으니 편히 대하시면 될 것이오.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머무시는 동안 원하시는 만큼 마리엔의 문물을 보고 들으시되 자주 내게 들러 나의 견문을 넓혀주시기 바랍니다.”

“왕자님의 말씀 과분하십니다. 제가 어찌 왕자님의 견문을 넓혀 드리겠습니까? 다만 양국 간 즐거운 대화의 장이 자주 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론드는 이 왕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왕자의 인사말에 활달한 미소로 응했다. 이내 환영식 행사가 이어졌다. 만찬, 불빛, 춤과 노래.

잔잔한 음악소리가 감도는 연회장에서도, 귀를 기울이면 여전히 눈보라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라스카는 자신이 이 북쪽의 왕국에 와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타 궁정의 분위기는 대체로 정숙했다.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새하얀 천으로 온몸을 감싼 무희들이 조용한 음악에 맞추어 느린 춤을 추었다. 무슨 동물인지 모를 고기들이 식탁에 올라왔다. 술은 불처럼 뜨거웠다.


“안녕.”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카세였다. 소년은 조용히 라스카의 옆자리에 앉았다. 마리엔 양식의 내리닫이 긴 옷을 입고 있었다. 라스카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리 와 있었다더니.”

“응. 나 보직 받았다.”

“뭔데?”

“통역.”


라스카가 쿡 웃자 카세도 따라 웃었다.


“웃기지? 그런데 그래야 행동을 같이하니까. 나 이상해 보이지 않아? 여기 사람에 비해 너무 가무잡잡한 것 같아.”

“응. 튀긴 해.”


라스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를 보나 흰 피부의 사람들이었다. 머리칼은 대개 검었다. 그녀와 같은 인종이었다. 갑자기 등골이 싸늘해졌다.

왜 이 사람들이 외국인처럼 느껴질까?

실제로 외국인들이었다. 라스카는 밀렌다 국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라스카는 어릴 적부터 막연히 꿈꾸기를, 북쪽 사람들을 만나면 바로 피가 당기고 마음이 통할 줄로만 알았다. 가무잡잡한 사람들 사이에서 경원시 당하며 살아온 동족을 반겨 맞아 줄 거라 생각했다.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라스카는 나스푸젠에서는 눈에 띄게 하얀 소녀였지만 마리엔에서는 오히려 볕에 그을려 검은 편이었다. 이목구비의 동질성 덕에 간신히 같은 인종임을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다. 몇몇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긴 했지만 직접 호기심을 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중하고 내향적인 마리엔 사람들. 라스카는 마음속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에 가지고 놀던 때묻은 구슬 같은 것, 스스로도 믿지 않는 해묵은 희망 같은 것이었다.


“그냥 우기는 거지 뭐. 아이언 씨가 보증하니까 다들 별 말 안 하더라고.”

“생각보다 높은 사람이더라.”

“그러게. 고마웠어. 날 잘 챙겨줬거든.”

“응.”


라스카는 속마음을 잘 숨긴 채 음식을 먹고 춤도 구경했다. 모든 풍경 사이사이에 눈보라 소리가 끼어들었다.

오른쪽 옆자리에 앉은 카세와 이야기를 나누는 한편 왼쪽에 앉은 레나에게도 신경이 쓰였다. 제론드는 레나에게 무리할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사양했다. 그야말로 직분을 다하고 있었다. 마리엔 고위 인사들은 사절단의 유일한 성인 여성인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제론드만큼 마리엔 어에 능하지는 못했지만 레나는 성심성의껏 대화에 응했고 때로는 화사한 미소로 짧은 말을 대신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귀족가의 아가씨였다.


“괜찮은 걸까.”

“그럴 리가.”


카세의 물음에 라스카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그렇겠지.”


카세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연회는 시끄러워지거나 방탕해지는 일 없이 끝까지 정숙했다. 제스카르 왕자는 시간이 너무 늦기 전에 행사를 끝냈다. 취한 사람은 없었다. 사절단은 마리엔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아이언의 안내를 받아 붉은 장미관으로 향했다.

다시 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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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방영
    작성일
    15.07.10 09:31
    No. 1

    이 인물들에게 막막한 재난이 닥친 와중에 카세랑 라스카가 꽁냥 거리는 씬만이 맘이 제일 편하게 보이네용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i******
    작성일
    15.07.10 16:50
    No. 2

    너가 그 부분을 언급할수록 강해지는 사죄의 마음....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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