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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 님의 서재입니다.

불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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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piedbleu
작품등록일 :
2015.04.06 21:49
최근연재일 :
2015.05.23 23:00
연재수 :
97 회
조회수 :
40,773
추천수 :
1,024
글자수 :
490,880

작성
15.05.19 18:00
조회
487
추천
9
글자
7쪽

#22. Farewell

DUMMY


카세는 풀려 버린 머리칼을 매만지며 멍한 눈빛으로 에르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야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벽이 무너지고 지붕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왜...... 왜 다시 왔어요?”


카세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 목소리였다. 반가워하는 것도 원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왜 도와준 거예요?”


강골의 마법사 아이언 메타가 끙끙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라스카는 의식이 없는 제론드에게로 힘겹게 기어가 그를 흔들어 깨웠지만 소용이 없었다.


“왜 도와줬냐니? 내가 언제 너를 안 도와준 적이 있었냐?”

“당신은...... 더 이상 에르타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마음에 박힌 가시를 의식하며 소년이 말했다. 그는, 에르타는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니지. 하지만 반쯤은 남아 있다고도 했잖아. 절반이면 충분하지.”

“뭐가요?”

“너를 돕는 데 말이야.”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에르타의 눈, 무기질의 검은 눈동자가 한 순간 인간적인 빛을 띠었다. 상대적으로 따뜻하게. 깊고 어두운 우물 같은 빛이었다.


“너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카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질문을 오래 참지 못했다.


“그럼 언제까지? 언제까지 살아야 되는 거죠? 왜 제게 이런 이름을 지어줬어요? Kasellion이라니, 이상한 이름이잖아요. 좋은 이름도 아니고.”

“오래 살라고.”

“......”


에르타는 급조된 폐허를 한가로이 거닐었다. 한 발자국씩 내딛을 때마다 그의 몸은 조금씩 지워지며 희미해졌다. 카세가 잠겨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또 금방 떠나나요? 이번엔 정말 마지막인 거죠?”


에르타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카세, 정말 많이 컸구나. 착실히 성장하고 있군. 맞다. 여기서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사실 어디든 마찬가지지. 마지막으로 널 봐서 기쁘구나.”

“거짓말 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의 도구일 뿐이잖아요. 나한테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잖아요.”

“그렇지 않아.”

“그럼 난 뭐죠? 왜 날 만들었죠?”


소년은 자아 정체성에 관련한 질문을 했다. 그건 어쩐지 평범한 인간 자녀가 열다섯 살쯤에 부모에게 던지는 질문과 비슷하게 들렸다. 난 당신한테 뭐야? 왜 날 낳았어?

바람이 불어왔다. 제타의 12월 바람은 lamennes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차갑고 매서웠다. 새카만 머리칼을 그 바람에 맡겨 흩날리며 에르타는 대답했다.


“너는 나의 피조물이고, 따라서 나의 작품이자 자녀이며, 내가 마지막으로 애정을 기울인 존재들 중 하나이고, 인간의 의식을 지닌 불꽃,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연금술적인 영혼, 존재하는 자체로서 내게 영감을 준 나의 뮤즈이다.”

“......”


카세는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에르타의 대답은 완벽했다. 그럼에도 그는 결핍감을 느꼈다. 에르타는 말을 계속했다.


“넌 이곳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구나. 훌륭해. 더 잘해 봐라. 어디까지 성장할지 궁금하구나. 비록 내가 볼 수는 없겠지만. 예전에도 네가 미치보다는 주변머리가 더 있었지.”


소년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미치는 어디 있는 거죠? 살아 있죠?”

에르타는 킥킥대며 웃었다. 매우 즐거워 보였다. 카세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 질문이 우스워요? 뭐가 그렇게 즐거워요?”

“아아. 즐겁지 않으면? 나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 더 이상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다. 생명이란 게 문간에 걸어 놓은 털옷 같지 않으냐. 이제 내겐 그 옷이 필요 없다. 바람도 추위도 없을 테니까. 좋다. 후련하구나.”

“에르타.”


가지 말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에르타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말을 잊었다. 에르타는 카세에게 다가왔다. 카세는 예전에도 그와 이렇게 가까이 서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언제나 거울과 피사체 사이만큼의 거리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육신과 영혼을 카세 쪽으로 기울이며 그는 소년의 턱을 살짝 잡았다. 얼굴과 얼굴이 맞닿았다.


“잘 있어, 카셀리온.”


에르타의 눈에 마지막 장난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소년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어버이가 어린 자녀에게 하듯이, 손위 형제가 어린 동생에게 하듯이, 혹은 조심스러운 연인처럼, 수줍은 숙녀가 기사에게 하듯이, 어린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에게 하듯이.

눈물이 천천히 카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안녕.”


에르타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멀어질수록 그의 형상은 점점 희미해졌다. 이내 그는 흐릿한 빛을 흩뿌리며 완전히 사라졌다.

눈물은 멎었다. 카세는 에르타가 사라져 간 방향을 바라보며 한동안 서 있었다. 푸르른 하늘 위에 태양만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Kasellion이 무슨 뜻이에요......?”


라스카는 겨우 정신을 차린 제론드를 부축하며 물었다. 그가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좋은 이름은 아니지. Kasell-lion, 최후의 칼날이라는 뜻이다.”


무너진 성벽 위로 햇빛이 떨어졌다. 너무나 찬란해 눈이 부셨다. 아플 정도로 눈 속에 달려드는 빛이었다. 겨울의 태양이라는 게 보통 이렇게 강렬하고 가슴을 설레게 하는 존재였던가. 아냐. 이건 마치 남국의 여름 오후 같아. 에르타는 북부 출신답게 더위를 싫어했지만, 가끔 기분 좋은 날이면 이러한 햇살 아래 끝없는 모래사장을 펼쳐 놓곤 했지. 그러면 우리는 맨발로 그 위를 달리며, 마음껏 우리의 영혼을 태우고.

가슴속을 지지는 햇빛을 받으며 망연히 태양을 바라보다가, 카세는 퍼뜩 무언가를 깨달았다.

소년은 성벽 아래로 뛰어내려 달리기 시작했다.

태양을 향해, 라고 해 봤자 하늘까지 닿을 방법은 없다. 목적지는 태양이 아니라 가장 빛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장소였다.

카세는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강하게 뛰었다. 인간을 흉내내 몸속을 흐르는 피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제발. 예감이 맞기를.

햇빛은 점점 강해졌고 아지랑이마저 아물거리기 시작했다. 카세는 아지랑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에르타가 사라질 때처럼 희미한 빛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카세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그 빛의 움직임을 응시했다. 천천히 형체와 색깔을 갖출 때까지, 모든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하얀 빛 속에서 천천히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이 나타났을 때, 그의 눈에는 기어코 눈물이 고였다. 아까와는 성질이 다른 눈물이었다.


“Mirchellis.”


미르첼리스, 나의 장미.

소녀의 눈은 아직 감겨 있었다. 카세는 두 팔을 뻗어 그녀를 안으며 속삭였다.


“Kino eladie.”


키노 엘라디,


나의 사랑.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방영
    작성일
    15.07.10 19:54
    No. 1

    으헝?? 미치년이 나타났어 라스카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i******
    작성일
    15.07.10 21:00
    No. 2

    아직 아무것도 안했는데 왜 호칭이 년인가 ㅋㅋ
    할렘이 박살나기 시작했져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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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24. 마법사 제이드 +2 15.05.22 540 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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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24. 마법사 제이드 +2 15.05.21 527 8 9쪽
82 #24. 마법사 제이드 +2 15.05.21 552 1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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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23. 순회 +2 15.05.20 480 7 16쪽
79 #23. 순회 +2 15.05.20 529 9 15쪽
78 #23. 순회 +2 15.05.20 561 9 8쪽
77 #22. Farewell +4 15.05.20 458 9 10쪽
76 #22. Farewell +2 15.05.19 441 9 11쪽
» #22. Farewell +2 15.05.19 488 9 7쪽
74 #21. 재반격 +2 15.05.19 510 9 10쪽
73 #21. 반격 +2 15.05.19 592 8 6쪽
72 #21. 공격 +2 15.05.18 503 7 8쪽
71 #20. 마법사가 먼저인가 인간이 먼저인가 +2 15.05.18 546 9 8쪽
70 #20. 마법사가 먼저인가 인간이 먼저인가 +2 15.05.18 504 9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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